간드레 시 02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간드레)
116쪽 120*205mm ISBN: 9791197155925
책 소개
묘사시의 계보를 이어가는 이윤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간드레) 개정판 출간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묘사시의 계보를 이어온 이윤학 시인의 세 번째 시집『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의 개정판이 간드레(간드레 시 02)에서 출간되었다. 1997년 대산문화재단 창작기금을 받아 출간된 초판본에서 74편이던 시를 54편으로 선별해 다듬어 엮은 이번 개정판 시집은 한결 완성도 높은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첫 시집 『먼지의 집』(문학과지성사,1992)부터 열 번째 시집『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간드레,2021)에 이르기까지 묘사로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그는 일찍이 망원경과 현미경의 장점을 살린 렌즈를 만들어 시적인 순간을 포착해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선명한 화소의 각기 다른 이미지를 배치해 절묘하게 조합해 내는 작업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의 시는 대상과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세밀화해 독자의 선택에 맡기는 보여주기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독자들에게 다르게 전달될 수 있고 같은 독자라도 읽을 그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그의 시는 말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은 많은 말을 숨기고 독자에게 스스로 원하는 말을 찾아 위로를 삼기를 고대하고 있다.
시인의 말
살아가는 일은 바닥이 없는 갈증이다, 그래서
수시로 가까운 우물을 찾게 된다.
그 우물은 일찍이 누군가가
내 몸속에 파놓은 것이다.
어떤 때는 몸 전체가 우물로
변하기도 한다.
내 관심은 여전히 버려지고 잊히는 것에
닿아있다. 나는, 언제나, 그 우물을 바라보고
퍼먹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그 우물을 메우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개정판 시인의 말
쌍둥이를 낳아
하나를 남에게 준 부모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
면목은 없다만,
이제라도 데려와 살붙이고
정붙였음 원이 없겠다 싶었다.
[책 속으로]
잠긴 방문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있네
그는 방금 방문을 잠그고 나온 사람이네
열쇠를 안에 두고 방문을 잠근 사람이네
아무도 없는 방문 안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방문 안의 세계를 향하여, 그는 걸어가야 하네
어딘지 모르는 열쇠가게를 향하여 걸어가야 하네
―「잠긴 방문」전문. P11.
무당벌레 한 마리 바닥에 뒤집혀있다
무당벌레는 지금, 견딜 수 없다
등 뒤에 화려한 무늬를 지고 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은
줄곧 날개가 되어주었다
이제 짐을 부려놓은 무당벌레의
느리고 조그만 발들
짐 속에 갇혀 발버둥치고 있다
―「화려한 유적」전문. P14.
얼음이 풀리고 강가에 나갔네
십 년 동안, 아니 그보다 더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못했네
목화씨를 닮은 버들강아지들
다닥다닥 피어있는 강가에서
이제 막 얼음이 풀려나간 강가에서
버들강아지 가지 하나가
강물 속에 펜끝을 대고,
글씨를 쓰고 있네
그 많은 목화씨들이,
그 가지 끝을 따라 흔들리고 있네
얼음이 풀린 환한 대낮에
얼음 속에서 꼼짝 못한
버들강아지 가지 하나가
얼음 속이던 그곳에서
긴 편지를 써가고 있네
―「버들강아지 가지 하나가」전문. P32~33.
유리컵 속으로 가라앉는 양파
유리컵에 물을 붓고
싹이 나기 시작한 양파를
올려놓았다. 양파의 하얀 뿌리들,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파란 양파의 머리카락들
꿈을 꾸고 있는 머리를 보는 듯했다.
꿈은 갈수록 흐릿해지는 것이었다.
파란 양파의 머리카락들
TV 화면을 가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곧 잘려나갔다.
양파의 발들은 바닥에서 엉켜
둥그런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꿈을
다 꾸어버린 머리통인 양파 속은
텅 비어있었다. 유리컵은
뿌옇게 변해있었다.
가벼워진 양파,
자신의 둥지 속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유리컵 속으로 가라앉는 양파」전문. P34~35.
주방의 벽에 걸어둔 감자가 담긴
검은 비닐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네온을 두른 전기 십자가,
달을 지지고 있었다. 달은
전기인두를 떨어뜨리고
떠오르고 있었다.
싹이 나기 시작한 감자들
난간에 펴놓았다, 이걸
어디다 묻어야 하나!
달의 싹인 푸른 하늘이 보였다.
묻히는 고통 없이,
파내는 고통 없이,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달이 묻힌 자리마다
달의 열매인 별이
다닥다닥 열렸다.
―「둥근달」전문. P50~51.
내가 만지작거리던
가는 손가락들의 마디가
시누대나무 숲에는 얼마나 많은가
잘못 들어선 이 길 끝에는
헐린 절간이 있다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5월의 금빛 보리들이,
고개를 처박고
몸을 비비고 있다
내가 원했던 건 지루한 고독뿐이다
수많은 빈방을 가지고,
지키며 살아가는 그것
그때,
내 가는 손가락들의 마디는
부러지는 소리를 내곤 했다
나는 시누대나무에 감겨있는
넝쿨들의 조임을 마음속으로 느끼곤 했다
―「향연사(香蓮寺)」전문. P56~57.
모든 그림자가 길어진다
저녁에 벤치에 앉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세월을 모두 앞에 옮겨놓고
있는 것
구길 수도 없고,
다시 펼 수도 없는 것
지나간 것
나에게는 아프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당신의 얼굴에 물결들이 지나가고 있어요
그 물결들 밑에서 별들이 태어나고 있어요
세상의 모든 그림자가
노을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물결들이 사라지고 있다
―「겨울에 지일에 갔다 10」전문. P88~89.
차례
시인의 말
개정판 시인의 말
1부
잠긴 방문 11
사다리 12
목이 떨어진 석불들 13
화려한 유적 14
금장 가는 길 15
고목 속의 풍경 16
저녁의 공원 18
오락실 20
수영약국 22
옥상의 의자 24
난로 위의 주전자 26
암흑 속을, 불빛을 깜박거리며 28
진흙탕 속의 말뚝을 위하여 30
버들강아지 가지 하나가 32
유리컵 속으로 가라앉는 양파 34
처절한 연못 36
과수원길 3 38
2부
집 43
집 없는 길 44
봄밤 46
깊은 곳 48
둥근달 50
거꾸로 도는 환풍기 날개 52
밤나무 53
고사목 54
사진 속에 갇혀있는 연기 55
향연사(香蓮寺) 56
저수지 2 58
버려진 길 60
해청을 지나는 버스 62
한낮의 공원을 위하여 64
기울어진 전봇대 66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68
콘크리트에 찍힌 발자국 69
목련나무 아래 소파 70
금강휴게소 72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74
잠만 자는 방 76
3부
겨울에 지일에 갔다 1 79
겨울에 지일에 갔다 2 80
겨울에 지일에 갔다 6 82
겨울에 지일에 갔다 7 84
겨울에 지일에 갔다 9 86
겨울에 지일에 갔다 10 88
겨울에 지일에 갔다 8 90
구절리에서 91
벽 속의 관 92
깨어진 화분 94
화살 96
연못에 박힌 전봇대 98
벚꽃나무들의 거리 100
긴 점포의 한낮 102
녹슨 창살 사이로 104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비 106
에필로그 | 그곳으로부터 109
추천사
산속에 빛나는 것이 있어 가만히 올려다보니 호수가 있었다.
나는 느릿느릿, 그러나 속으로는 얼른 보고 싶어서 산중으로
들어갔다. 근데 거기 그가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그는 산중의
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물에 자신의 상처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추억을 비춰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그런 느
낌으로 다가왔다. 점점 더 운명의 바닥, 그 깊은 곳으로 눈길을
던지고 있는 그를 지켜보며 아주 가끔씩은 추억을 나누는 대신
술을 마셨다. 그는 언제나 나보다 많이 마셨고, 나보다 ‘멀리’
버텨냈다. 그의 시가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너무 오래
물을 바라보아 눈이 멀어버린 것 같은, 그의 시의 행간에서
하얗게 빛나는 침묵 때문이다. 그 침묵을 이겨내면 그와 오래
술을 마실 수 있고, 버드나무처럼 가늘게 흔들리며 울고 있는
그의 ‘사랑’과 만날 수 있으리라.
―박형준(시인, 동국대 교수)
이윤학 시인 프로필
196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여 시집 『먼지의 집』(문학과지성사,1992)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문학과지성사,1995)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문학과지성사,2000)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문학과지성사,2003) 『그림자를 마신다』(문학과지성사,2005)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문학과지성사,2008 )『나를 울렸다』(문학과지성사,2011) 『짙은 백야』(문학과지성사,2016)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간드레,2021), 장편동화 『왕따』(문학과지성사,2006) 『샘 괴롭히기 프로젝트』(문학과지성사,2009) 『나는 말더듬이예요』(주니어RHK,2010) 『나 엄마 딸 맞아?』(새움,2012)를 펴냈으며, 김수영문학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첫댓글 그 물결들 밑에서 별들이 태어나고 있어요 ㅠㅠ
애정하는 시집이 다시 개정판으로 나와 행복합니다.
더 예쁘게 태어났네요. 시집 잘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