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실(南實) - 보문각제학공파 5세
▲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을번(南乙番)의 3남 – 남실(南實)
남실(南實, 1356년~?)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보문각 제학공(寶文閣提學公)파 파조이다. 자는 숭실(崇實) 호는 독락정(獨樂亭)이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부친은 고려 밀직부사를 지냈으며 조선개국으로 익대보조찬화공신으로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특진되었다.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경렬(敬烈)의 시호를 받으신 남을번(南乙番)이다. 모친은 계림최씨 최강(崔茳)의 딸이시다. 부인은 풍양조씨(豐壤趙氏) 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 조숭(趙崇)의 딸이다. 형제는 4남 3녀중 3남으로 조선개국공신 충경공 남재(南在), 강무공 남은(南誾)이 있으며 동생 우상절제사 남지(南贄)가 있다.
남실(南實)은 1356년생(공민왕 5년)이며 몰연도는 1440년 전후로 추측된다.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을 지냈으며 1395년(태조 4년) 2월 13일 부친인 검교 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께서 타계하셨다. 1396년(태조 5년)에는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를 지내면서 서북면 성주(成州)의 수령을 겸하였다. 1398년(태조 7년) 8월 무인정사(1차 왕자의 난)에 휘말린 그의 형제인 남은(南誾), 남지(南贄)가 이방원의 일파에게 살해 당하였다. 큰 형인 남재(南在)와 그는 화를 피하였다. 1413년(태종 13년) 7월 1일 취각령을 어긴 죄로 외방에 유배되었으나 그해 8월 19일 사면 되었다. 1419년(세종 1년) 12월 14일 그의 형인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가 졸(卒)하였다. 1431년(세종 13년) 그의 나이 76세로 공이 많은 연로한 신하로서 하사품인 궤장(안석과 지팡이)을 하사 받았다.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마석리 산5번지 ... 대성고개? (서울에서 이장 1968년도) 라 족보의 기록입니다.
추후 정확한 묘소 위치는 확인 후 다시 올리겠습니다.
◆ 남실(南實)의 가계도
군보(君甫) 의령군(의령남씨 관조) | 1세 |
익지(益胝) 부사공 | 2세 |
천노(天老) 시중공 | 3세 |
을경 (乙敬) | 을진 (乙診) | 을번(乙番) 경렬공,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 4세 |
좌찬성공 | 사천백공 | 지(贄) | 실(實) | 은(誾) 의성군 | 재(在) 의령군 | 5세 |
우상절제사공 | 보문각제학공 | 강무공 | 충경공 | 파 |
◼ 부친 : 남을번(南乙番)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시호 경렬(敬烈)
◼ 모친 : 부인최씨 계림최씨 최강(崔茳)의 딸
3남 : 남실(南實, 1356년~?) 보문각제학공
부인 : 풍양조씨(豐壤趙氏) 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 조숭(趙崇)의 딸
- 장자 : 남계언(南季彦)
- 손자 : 남세웅(南世雄)
장남 : 남재(南在, 1351년~1419년) 충경공, 봉호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차남 : 남은(南誾, 1354년~1398년) 강무공, 봉호 의성부원군(宜城府院君)
4남 : 남지(南贄 ?~1398년) 우상절제사
▲ 태조, 태종, 세종실록의 기록 - 남실(南實)
■ 1395년(태조 4년) 2월 13일 검교 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이 졸(卒)하였다. 을번의 본관(本貫)은 진주(晉州) 의령(宜寧)이요, 영광 군사(靈光郡事) 남천로(南天老)의 아들이다. 천성이 순후하고 근신하며, 고려조에 벼슬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아들 넷이 있으니 남재(南在)·남은(南誾)·남실(南實)·남지(南贄)이다. 개국 당초에 재와 은이 개국 공신이 되었으므로 검교 시중을 받았다. 향년이 76세이며, 시호(諡號)를 경렬(敬烈)이라 하고 관(官)에서 장사를 치렀다.
■ 1396년(태조 5년) 중추원(中樞院)의 8인으로 하여금 서북면의 수령을 겸하게 하였는데, 김로(金輅)는 이성(泥城)에, 임경(林敬)은 강계(江界)에, 조숭(趙崇)은 의주(義州)에, 박포(朴苞)는 황주(黃州)에, 장담(張湛)은 정주(定州)에, 황거정(黃居正)은 숙주(肅州)에, 남실(南實)은 성주(成州, 현재-성천) 에, 오몽을(吳蒙乙)은 연산부(延山府) 에 보냈다.
■ 1398년(태조 7년) 9월 21일 십인의 직첩을 회수하고 전민(田民)을 관청에 소속시키다.
강계권(康繼權)·한규(韓珪)·정신의(鄭臣義) (중략) 등의 사첩(謝貼)을 수취(收取)하고 전민(田民)은 관청에 소속시켰으며, 이지(李枝)·남실(南實) (중략) 등 43인은 외방(外方)에 부처(付處)시켰으며, 또 이득분(李得芬)은 길주(吉州)로 귀양보내고, 윤상(尹祥)은 전민을 관청에 소속시키고 외방(外方)에 부처(付處)시켰다.
■ 1413년(태종 13년) 7월 1일 취각령을 어긴 전 상의중추원사 남실 등 21인을 헌부에서 논죄하다. 헌부(憲府)에서 상소(上疏)하여 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남실(南實) 등 21인의 죄를 청하였으니, 취각(吹角, 비상시 군사를 집합시키는 일) 하는 날 추령(趨令, 명에 급히 달녀나오는 일) 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명하여 남실 등을 외방에 유배하고, 검교(檢校) 판한성부사 조인규(趙仁珪) 등은 나이가 70이 넘었고, 라 하여 모두 논하지 말며... (중략) 그해 8월 19일 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남실(南實) 등을 용서하였다.
■ 1417년(태종 17년) 강무장 문제로 임금이 진노하다
(중략) 금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이 모두 강무하는 일을 하고자 하지 않는데, 나 혼자만 옛 법을 말하니 특히 하나의 버릇이 되고 말았다. 또 근자에 구언(求言) 했을 때, 재신(宰臣) 남실(南實)이 강무의 폐단을 극언(極言)하였는데, 그 말이 임금을 업신여겼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여겼기에 내가 그 이유를 묻고자 하다가, 구언(求言)하고서 도리어 그 말이 적중하지 못함을 책망할 수 없는 까닭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중략)
■ 1419년(세종 1년) 12월 14일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가 졸하였다. 조회와 저자[市]를 3일 동안 정지하고, 부의(賻儀)로서 쌀과 콩 각 70섬, 종이 2백 권을 주고 관에서 장사를 비호(庇護)하고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하였는데, 자신을 위태하게 하면서 윗사람을 받든 것이 충이고, 의(義)에서 행하면서 일을 이루는 것이 경이다. (중략)
또 그 아우 남실(南實)과 살림을 다투어서 종신토록 화목하지 못하였으며 남실은 아침 밥을 겨우 먹는데도 구휼하지 않았다.
■ 1430년(세종 12년) 호조에서 공법에 대한 여러 의논을 갖추어 아뢰다. (중략) 전 판목사(判牧事) 김사청(金士淸)·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남실(南實)·전 동지총제 최견(崔蠲)과, 3품 이하 현재 재직 중에 있는 2백 59명과, 전함(前銜) 4백 43명 등은 가하다고 하고 (중략)...
■ 1431년(세종 13년) 8월 11일 황자후·우승범·박안신·이겸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황자후(黃子厚)를 한성부 윤으로, 우승범(禹承範)을 좌군 동지총체로, 박안신(朴安臣)을 병조 참의로, 이겸지(李謙之)를 우정언(右正言)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안숭선에게 이르기를, "전일에 권진이 남실(南實)·황자후 등을 쓰자고 청하였으나, 내가 두 사람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 하니, 숭선이 대답하기를, "실(實)의 나이는 지금 76세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이가 많으니 어떻게 할까."
하니, 숭선이 대답하기를, "벼슬은 일을 맡기는 것이오니 나이가 늙은 신하에게 무슨 벼슬을 주시려 하시나이까. 예전에는 70에 치사하였사온데, 우리 나라에서는 대신이 나이 70이 넘어도 오히려 일을 맡기옵는데 그에게는 명하여 궤장을 하사하였습니다. 지금 남실에게 벼슬을 주신다면 당장에 궤장을 하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경의 말이 옳다." 하고, 이에 자후를 한성부 윤으로 삼으니, 자후의 나이는 69세이었다.
의령남씨 남실, 남실, 보문각 제학공 남실, 남은, 남재, 남지, 남을번, 집현전 학사 남실, 서북면 수령 남실
<참고문헌>
의령남씨 족보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