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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느낌감옥 이스케이프 플랜>의 줄거리:
입시지옥, 실업지옥, 헬 조선, 적자의 늪, 부진의 늪 등등. 이스케이프 플랜, 즉 탈출 계획이 필요한 일이 한둘이 아니지요. 그런데 이런 모든 종류의 지옥들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있습니다. 탈출해야만 하는 이러한 지옥들의 어머니격인 원조 지옥을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지옥 일체가 없는 삶을 살 수가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시는지요? 믿으셔야 합니다. 바로 느낌지옥입니다. 느낌지옥만 탈출할 수 있다면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한 별도의 노력이 불필요합니다.
느낌감옥 이스케이프 플랜
(예레미야 애가 2:1~22)
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느낌감옥 이스케이프 플랜>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느낌감옥 이스케이프 플랜’
이스케이프 플랜(Escape Plan)은 영화의 제목입니다. 액션 영화의 거장인 실베스터 스탤론과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주인공 레이(실베스터 스탤론 역)는 검사로서 피의자를 기소하여 재판에 넘겨 감옥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죄수가 감옥에서 무려 3년간 연구를 하여 탈옥을 해서 자기를 감옥에 보낸 레이의 가족을 모두 살해합니다. 이후 레이는 정신적 충격에 시달리다 검사직에서 사직하게 되고, 이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감옥 탈출 전문가가 됩니다. 나라의 청탁을 받아서 감옥에 들어가서 수감자의 입장이 됩니다. 그리고 감옥을 면밀히 살펴서 탈옥이 가능한 경로를 찾아냅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경로를 보완함으로써 감옥의 보안 상태를 강화시키는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에게 CIA에서 제안이 옵니다. 툼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감옥은 국가기관이 아니었습니다. 돈만 주면 누구든지 잡아다가 수감시키는 사설 감옥이었습니다. 한편 레이가 CIA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사고로 주변사람들이나 감옥의 간수들조차 레이를 단순한 수감자로 취급하게 됩니다. 애초에 돈만 주면 사람을 가두는 사설 감옥이었기에 레이의 신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레이는 탈출이 절대 불가능하게 설계되었다는 툼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탈출해서 감옥문을 나와 보니 감옥이 망망대해에 떠있는 거대한 배였습니다. 결국 탈출을 포기하는데 이때에 에밀(아놀드 슈워제네거 역)이라는 수감자를 만나게 되어 불가능에 도전하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입니다.
신앙적으로도 주인공 레이처럼 탈출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고 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가장 무서운 일은 탈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레이가 툼 감옥에 갇혔지만 주변사람들이나 감옥의 간수들조차 레이를 수감자 취급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신앙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적어도 레이는 자신이 탈출해야만 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영화보다 더 무서운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탈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자각조차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모든 영역을 지옥처럼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요새 유행하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찍이 우리나라에 대해 입시지옥 실업지옥이라고 부르는 말들은 있었지만 모든 방면에서 지옥이 되어버리니 대한민국 전체를 헬조선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한반도는 조선시대로부터 정치인들이 국민을 잘 살기 위해 정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당리당략을 위해 정쟁을 일삼는 것이 거의 전통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사실 단 하나의 지옥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에 불과합니다. 거대한 배 안에서 진행되는 수감생활 중에 나타나는 답답함과 장애와 같다는 것입니다. 큰 지옥이 낳은 새끼지옥들과 같습니다. 레이가 툼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는 한 답답함과 장애가 해소될 길이 없는 것처럼, 우리 삶 또한 근본적인 지옥에서 탈출하지 않는 한 참 자유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근본적인 지옥의 이름이 바로 느낌지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느낌지옥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탈출이 사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을 잃고 실업지옥에 빠져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실업지옥은 느낌지옥이라는 근본적인 지옥이 낳은 새끼지옥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이 새끼감옥을 빠져나와도 거대한 배로 이루어진 툼 감옥에서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이 새끼지옥을 빠져나가도 느낌지옥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느낌지옥이 무엇이고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황폐케 한 주체가 바벨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선민의 멸망이 당시 중근동지역의 패권다툼에 의해 일어난 결과가 아니며, 유다의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기 때문에 선민에게 멸망이 주어졌음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4~5절을 보면 “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들에 대해서 원수의 입장을 취하시고 이들을 진멸하실 때에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 바벨론이라는 장갑이고 몽둥이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는 당시의 선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에게도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유보되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회로 삼아 올바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토록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14~15절을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가 드러납니다.
14절에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드러내야 할 선지자들이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15절을 보면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이방사람들이 유다를 향해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고 말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다를 향해 가지고 계셨던 포부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선민들이 하나님의 포부를 꺾었고 그로인해 하나님은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관된 분이시기 때문에 같은 죄를 저지르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진노를 가지실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받아야 할 비참하고 참담한 진노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받으셨던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가시진 포부는 곧 온전한 영광과 기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온전한 영광과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실 때에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온전한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 역할을 맡은 자들이 선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직장에 다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직장에 대해 뜻을 가지실 때에 그 속에 있는 선민으로써 나를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사장님도 아니고 부장님도 아니고 나를 보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기준이 되는 것이 영광입니다. 사장님이 회사를 운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중심으로 해서 회사를 이끌어나가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중심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할까요?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다면 결코 선민으로써의 역할을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나를 중심으로 통치해 나가실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말씀을 바꿔 쓴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인한 느낌을 가지면 특별한 감정이 생깁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느낌이 기쁨입니다. 그 밖에도 만족과 평안 등의 느낌을 받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 대표로써 기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서 기쁨을 가지게 된 나를 통해 주변을 통치해나가십니다. 몸을 통해 만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직장에서 부장님을 대할 때에 마음에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쁘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치 풍선을 불듯이 부장님과 나와의 관계에 하나님의 기운을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선민들에게서는 하나님이 가지신 온전한 영광과 기쁨의 포부가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14절에서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선지자들마저 백성들의 죄악을 드러내기는커녕 묵인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15절을 염두에 두자면 이 죄악은 바로 영광과 기쁨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접촉하지 못하여 기쁨을 얻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있었던 것이 바로 죄악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세상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통해 마음을 채우려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세상을 느끼며 사는 것이 느낌감옥의 정체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붙잡히고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선민들은 이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생각도 갖지 못했고 이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체로 접하는 대상들을 통해 마음에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내를 만나면 아내로부터 느낌을 받고, 자녀를 대할 때에는 또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재정문제가 있어도 육체를 통해서 느낀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고, 회사에 나가서 생기는 일들에 대한 느낌도 육체를 통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육체를 통해서 들어온 느낌 속에 마음이 갇히게 됩니다. 문제는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조차 이러한 느낌감옥에서 빠져나와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가지신 포부는 단지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출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느낌이 밀물처럼 들어와서 선민들의 마음을 포위하면 그로부터 탈출해서 온전한 영광과 기쁨을 가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선지자들이 이렇게 갇혀있는 선민들을 그대로 묵인하였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느낀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부추기고 강화시켰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정상태가 좋지 않다면 육체를 통해서 들어온 느낌이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불안을 느끼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고 그로부터 돈을 벌기 위한 생각과 의지가 생겨납니다. 이것을 더 강화시키고 지지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증오로 펄펄 끓는 원수 같은 입장이 되셔서 선민을 대하십니다. 세상으로부터 육체로 전달되는 느낌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탈출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진노는 이윽고 주님의 십자가에 퍼부어지게 되었고 주님께서는 비참하게 죽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민들은 육체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마음이 이미 포로 상태였습니다. 마음이 포로 된 상태에서 탈출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 진멸당하고 육체도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마음이 갇히고 포로된 것이 문제였음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세상에 사로잡히는 죄악을 이토록 싫어하십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하나님의 진노가 특별히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파괴에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장에서 “정확한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때에 슬픔의 정확도가 좁혀져가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바벨론의 파괴가 유다 나라로부터 예루살렘 성으로 좁혀지고 다시 성전으로 좁혀진 후에 성소가 짓밟혀진 것으로 압축되는 것을 통해서 정확한 슬픔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 애가 전체에서 예루살렘 성과 성전파괴에 탄식과 슬픔이 집중되는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모든 성들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세워진 성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느낌을 차단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민은 아무리 먼 곳에 있을지라도 언제나 예루살렘 성을 생각하고 사는 자들이어야 했습니다. 이미 에스라나 느헤미야를 살펴볼 때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세상이 주는 느낌이 차단되어야 합니다. 배우자를 만나서 대화를 할 때에 예루살렘 성을 생각하고 차단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육체로 만나는 대상들에게서 받는 느낌은 차단되어야 합니다.
또 성전의 의미는 곧 상번제의 의미와 일치합니다. 성전의 지성소에 있던 법궤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으로부터 느낌을 받던 상태가 반드시 어린 양과 함께 죽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에만 법궤가 상징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고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설령 배우자를 대하며 느껴지는 기쁨이든 불만이든 그것을 마음에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주는 느낌감옥에 갇히는 것이 됩니다. 자녀를 대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으로 차단되어야 하고 혹시 받아들였다면 성전의 상번제를 통해 죽음이 인정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십자가 생활화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만을 느낌의 출처로 삼는 것이 온전한 영광이고 그 결과 기쁨이 생겨납니다.
이 기쁨은 지난 주일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믿음을 통해 누릴 수 있습니다. 육체를 통해 세상에 대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찬물에 손을 담그면 차가움이 전해지는 것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이 바로 그러한 예시입니다. 베드로가 하늘에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신 주님을 보았을 때에 산 아래에서 계획하고 꿈꾸던 모든 일들을 망각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에 이 세상에 좋은 모든 가치들을 등지고 하늘을 향하셨던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느낄 때에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으면 명품을 사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지면 세상을 다 잊어버릴 정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똑같이 믿음이 작용하는 문제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의미하는 대로 세상을 차단하고, 상번제가 이루어지는 성전이 의미하는 대로 세상의 느낌을 받은 나 자신의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레이가 툼 감옥에서 탈출하듯이, 우리는 세상의 느낌감옥으로부터 탈출해야합니다. 우리의 탈출 방법은 예루살렘 성이 의미하는 차단이고 성전이 의미하는 죽음입니다. 이것을 위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곧 세상에 대한 차단이고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마음에서 바라봄과 동시에 세상이 차단됩니다. 또 그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믿고 인정할 때에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온전한 영광과 기쁨을 갖게 된 사람들을 통해 통치를 펼쳐나가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대상들은 하나님을 통해 받은 느낌을 쏘는 과녁들입니다. 절대로 세상으로부터 느낌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주는 느낌을 받아들일 때에 그 느낌은 철통같은 감옥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들어와서 나를 가두려는 모든 느낌으로부터 ‘이스케이프 플랜’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과제는 세상에서 성공과 성취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성공과 성취는 세상에서 탈출한 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탈출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느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세상이 주는 느낌지옥으로부터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배우자나 자녀로부터 시작해서 뉴스에서 나오는 정치인들과 사건사고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이 의미하듯 마음을 차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전의 상번제가 의미하듯이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고, 또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따라 세상이 주는 느낌으로부터 탈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온전한 영광이 되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느낌으로부터 탈출하여 하나님으로 생겨난 기쁨을 쏘면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세상의 느낌을 차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십자가의 주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세상 느낌에 침투 된 내가 죽은 자가 됨을 통하여 느낌감옥으로부터 탈출하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 느낌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하나님 느낌으로 세상을 향해 기쁨을 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