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압구정동에서 소 몰며 밭 갈던 그 시절의 강남
[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한때 세상을 달궜던 노래 <강남 스타일> 덕분에 강남은 서울은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뿐 아니라 여러 화보나 유튜브를 통해서도 서울 강남은 현대적 건물과 최신 유행을
볼 수 있는 매우 핫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강남은 예전에는 서울이 아니었다. 서울 강남은 오래도록 경기도 광주 땅에 속했었지만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광주군 일부가 서울의 성동구로 편입되었다.
경부고속도로가 뚫리고, 제3한강교(한남대교)와 서울 도심이 연결되고, 강남이 개발되면서 성동구의 한강 남쪽 구역이
1975년에 강남구로 분리되었다. 1979년에는 강남구에서 탄천 동쪽이 떨어져 나가 강동구가 되었고,
1988년에는 송파구가 강동구에서 떨어져 나왔다.
경기도 과천과 시흥 땅이었던 서초구는 1963년에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에 관악구로 분리되었다.
강남의 개발 지역과 가까웠던 이곳은 1975년부터는 강남구에 속했다가 1988년에야 서초구로 독립했다.
한편 방배동은 1979년까지는 관악구였다.
1978년에 촬영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근방.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압구정동 인근에는 농사짓는 곳이 남아 있었다. (출처:서울시 역사 아카이브)
기자는 1970년대의 강남, 지금의 강남구와 서초구를 기억한다. 서울 강북의 주택에 살다가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할 때
단골 구멍가게 주인아저씨가 “그 시골로 왜 가누.” 하고 내뱉던 말도 기억난다.
진짜 그랬다. 그때 강남은 시골이었다. 적어도 서울 도심 주택가에서 살던 어린아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1970년대 중반 강남에서 아파트가 세워진 데가 아닌 곳에는 농촌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많았다.
지금의 도곡동과 개포동은 물론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근처에서도 농사짓는 모습을 일상처럼 볼 수 있었다.
물론 1980년대 들어 강남은 싹 변했다. 빈 땅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아파트를 세우지 못하는 곳에는 단독주택과 다가구
주택을 지었다. 논과 밭도 갈아엎어 택지나 상업용지가 되어갔다. 그렇게 강남은 옛 모습을 지우며 새 모습으로 거듭났다.
‘영동’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옛 흔적
강남은 예전에는 ‘영동(永東)’으로 불렸다. 영등포(永登浦)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보듯이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남은 자신의 정체성을 갖지 못했고, 부도심인 영등포의 변방이라는 의미를 지녔었다.
제3한강교가 생기기 전에는 한남동이나 뚝섬에서 배 타고 건너야 했던 강남은 1967년에 정부가 발표한
‘영동지구 신시가지 계획' 덕분에 시골을 벗어나게 되었다.
현재 강남대로 인근 논현동의 모습으로 1975년에 촬영했다.
오른쪽 상단에 보이는 아파트는 1971년 준공된 논현동 공무원 아파트다. (출처:서울시 역사 아카이브)
이후 영동 1지구로 신사, 논현, 역삼동 일대가, 영동 2지구로 대치, 삼성, 청담, 압구정동 일대가 지정되었다.
영동 개발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는 1973년에 성동구청 관할의 ‘영동출장소’를 새로 열었고, 가속화된 영동 개발은
1975년의 '강남구' 탄생으로 이어졌다. 물론 지금은 공식적인 지명에서 ‘영동’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영동’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러 곳에 이 지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논현역과 신논현 사이의 영동시장 입구.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영동시장은 먹자골목으로 유명하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영동시장은 1973년에 문을 연 재래시장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대표적인 곳이 7호선 논현역과 9호선 신논현역 사이에 있는 ‘영동시장’이다.
먹자골목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먹자골목과 교차하는 골목에는 재래시장이 있다.
1973년에 문을 연 이곳은 아직도 가게 수십 곳이 장사하고 있다.
강남 개발 초기 이 지역에 공무원 아파트가 들어서고 큰길이 뚫리고 번화해지자 근처의 농민들이 노점을 차린 게
그 시초라고 전한다. 영동시장 북쪽 모서리에는 영동농협 강남지점 건물이 있다. 농협은 중앙회가 있고 농민들이
조합원이 되어 설립한 지역 단위 농협이 있다.
영동농협은 강남 지역의 농민들이 출자한 농업협동조합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서울 강남의 영동농협은 1972년 강남 지역의 농민들이 조합원이 되어 설립한 농업협동조합이다.
지금도 조합원과 준조합원의 출자로 운영하고 있다. 조합원의 자격은 조합 구역 내에 거주하거나 사업장이 있는
농업인에 한한다. 즉 지금의 영동농협 조합원들도 강남의 농업인이라는 뜻이다.
말죽거리에 남은 농촌의 흔적
기자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말죽거리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다. 당시 말죽거리 남쪽, 그러니까 지금의 양재역
네거리부터 성남 방향과 청계산 근처는 거의 농촌이었다. 지금은 개발 제한구역 빼고는 거의 주택가나 아파트가 되었지만.
양재역 강남구 도곡동 쪽 출구의 말죽거리 안내.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서초구 양재동 쪽 말죽거리 입구.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오래전 남쪽 지방과 한성을 오가던 말들이 쉬던 말죽거리는 지금도 교통의 요지로 북적거린다.
그런 말죽거리를 놓고 강남구와 서초구가 서로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이다.
강남구는 큼지막한 돌 팻말로 서초구는 커다란 출입구로 말죽거리를 자기 땅이라 내세운다.
구 말죽거리, 현 양재역 네거리 근방에 상업시설과 다가구 주택이 들어선 모습에서 한때 논과 밭이었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길을 걷다 보면 옛 흔적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나지막이 오르내리고, 조금은 휘어진 이면도로 모습에서 논과 밭 혹은 둔덕과 같은 자연 지형을 활용해 건물이 들어선 것을
알 수 있다. 그 모습에서 한때 농촌이었던 이 지역의 옛 정경을 상상할 수 있게도 한다.
양재역 먹자 골목 한켠에 자리 잡은 종묘 가게. 이 자리에서 50년 넘게 장사 중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그리고, ‘강남종묘농약’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먹자골목과 주택이 뒤섞인 그곳에 씨앗과 비료, 그리고 농약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가게에는 80대 노부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장사한 지 50년 넘었어요. 그때는 이 근처가 모두 논과 밭이었잖아요. 그래서 이런 가게가 여럿 있었지요.
소산물 팔던 가게도 많았고요. 지금은 우리 가게만 남았지만.”
예전처럼 장사가 되지 않고 그나마 텃밭 일구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다지만 노부부는 소일 삼아 매일 가게 문을 연다고 했다. 그리고 노부부의 말처럼 옛 농촌 시절의 장터 흔적이 낡은 시장 건물로 남아 있었다.
기자가 가게 간판 사진을 찍자 지나던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이 동네에 이런 가게가 다 있었네.” 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주인의 말처럼 5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래서일까 관심 가지는 사람의 눈에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건물의 쇠락한 가게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흔적을 떠올리게 하는 방아쇠가 될 수도 있다는.
한강 남쪽 유역은 드넓지만 유독 이곳만 '강남'으로 불리는데
강남은 결국 부동산 개발의 막강한 힘을 빌려 드넓은 한강 남쪽의 다른 지역을 제치고 ‘강남’이라는 독보적 존재감을 가진
지역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살기 원하는 부동산 1번지 강남은 반면 오래도록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과 밀접했던 농사를
짓는 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초고층 건물과 최고급 아파트가 지어진 땅 밑에는 그냥 묻혀버린 옛 흔적이 얼마나 많을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이가 낡고 오래되어 쓸모없는 것이라 여긴 것을 다른 이는 귀하게 여길지도 모를 텐데.
1970년대 중반의 강남을 기억하는 기자는, 기록은커녕 존재했었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많은 것들이 아쉬울 때가 많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처럼 그 흔적들을 그리워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발품을 더 많이, 더 자주 팔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