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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식후 30분'의 삶>의 줄거리:
의사나 약사 선생님들이 환자들의 약복용을 위해 관행처럼 권하는 '식후 30분'의 이유를 아십니까? 그 이유를 알아서 '식후 30분'을 일상에 적용하여 삶의 절대법칙으로 삼기만 한다면, 확신을 가지고 예언(?)하는데,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열립니다.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행복 가득한' 새로운 인생 말이지요. 그런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지금까지 해오던 노력과 수고가 전혀 필요 없는 것이 바로 '식후 30분'의 삶입니다.
하나님 ‘식후 30분’의 삶
(호세아 2:2~23)
5.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식후 30분’의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식후 30분’의 삶
제가 60년간 살아오면서 100번에 99번은 식후 30분 후에 약을 먹으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식후 30분에는 음식물이 위장의 점막을 보호하고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약을 복용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시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간단한 음식물이라도 섭취한 후에 복용하기를 권합니다. 물론 식전에 먹어야 하는 약들도 존재합니다만 대부분 약들이 식후 30분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런데 2017년 9월에 서울대학병원이 약사회와 함께 논의한 끝에 새로운 약 복용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약의 종류에 따라서 식후 식전 취침 전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식후 30분 대신에 식사 직후 곧바로 복용을 기준으로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식사가 위 점막을 보호한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30분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없음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식후 30분이란 그간 의학적으로 충분한 증명이 없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권고였던 셈입니다.
또 식약처에서도 특별히 식후 30분을 권고해본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기존에 식후 30분이 가장 높다고 여겨졌던 것도 실제로는 기다리는 환자들의 심리적 부담이 크고 오히려 약을 먹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했다고 합니다. 외국의 경우에는 어떤 나라에서도 이러한 권고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30분을 기다릴 필요 없이 식후면 된다는 기준이 제시된 것입니다.
이를 본문과 연결시켜보자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식후복용의 법칙과 닮았습니다.
식후에 약을 복용해야 하듯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먼저 먹고 나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더라도 이제부터라도 식후복용의 법칙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일을 해야 하지만 반드시 식후에 해야만 합니다.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먹고 나서 세상의 일들을 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먹지 않았다면 세상일들은 차라리 손대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방치한 채로 세상을 마주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빈속에 약을 먹는 것처럼 치명적인 부담을 가져왔습니다. 꼭 약이 아니더라도 비타민C도 빈속에 먹으면 속이 쓰립니다. 특히 저는 아스피린을 먹을 때가 있는데 이 또한 빈속에 먹으면 쓰리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먹지 않은 채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삶에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이 괴로움은 위장이 상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삶을 파괴하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기까지 합니다.
살면서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증상은 단순히 삶이 괴롭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 먼저 세상을 마음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이 간단한 사실을 모른 채 사는 동안 평강은 깨지고 겪지 않아도 될 고민과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따라서 이러한 원리를 배우는 오늘부터는 세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을 먹고 난 후에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준이 삶의 전 영역에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직장인들이 아침을 먹고 출근하기 위해서는 조금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으로 먹고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조금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침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식사도 하고 간식도 먹듯이 하나님을 먹는 것도 마음이 비지 않도록 계속해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친구를 만날 때에도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먹고 만납니다. 직장에 나가서 일할 때에도 하나님을 먼저 먹고 시작합니다. 이렇게 식사 후 법칙이 삶에 적용되면 마음이 아프거나 고민 할 일이 없어집니다.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행복이 가득한 삶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신다면 하나님을 먹고 난 후에 사업을 하셔야 합니다. 주부가 가사를 할 때에도 식후 가사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 생활도 식후, 건강에 대한 판단도 식후, 돈 문제를 마주하는 것도 식후, 부부나 가족과 관계하는 것도 식후입니다. 심지어 연애중인 연인들도 먼저 마음에 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애인이 사랑스럽다고 해서 빈속에 담으면 독한 약을 먹은 것처럼 마음은 괴로워집니다. 목사님들의 목회 또한 식후 목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먹지 않은 식전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목회는 마음을 상하게 하는 독한 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식후의 방법이 바로 선민이 복지를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4절 이후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4절을 보면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앞장에서 호세아 선지자가 창기 고멜과 결혼하게 된 사건을 통하여 북 왕국 이스라엘이 영적인 음란함에 빠진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먹고 마시는 떡과 물과 기름과 삼과 양털과 술과 금과 은을 바알이 준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태의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타이르시겠다고 하십니다.
또 이어지는 15절을 보면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은 곧 선민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하던 시기를 말합니다. 출애굽 시절이 언급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때의 모습을 그리워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시절의 선민들은 하나님 외에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는 금과 은은 물론이고 생존에 필요한 떡과 물과 삼과 기름과 양털과 술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선민들에게 주어진 대상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뿐이셨습니다.
물론 이 때에도 선민들은 불평불만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반역을 하였지만, 적어도 가나안 복지에 살면서 영적으로 음란해진 상황과 비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집중도는 높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때를 그리워하시며 선민들을 다시 광야로 데리고 나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부담스러운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금과 은으로 상징되는 풍요로움이 빈 마음에 그대로 담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마음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기에 어떠한 부귀영화로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지혜가 있었다면 부귀영화로도 마음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에게는 그러한 지혜조차도 없었습니다. 부귀영화를 담다 못해 그것을 준다고 믿어지는 이방 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우상이 바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민들의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들의 마음에 더 이상 재물을 담을 수 없는 환경인 광야로 끌고 나가시고, 하나님을 먹는 시간을 제공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삶에서도 발견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해보면 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분들에게 받아들여집니다. 세상의 가치를 덜 가졌음이 하나님을 식사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삶이 거친 들과 같기에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물론 삶에 여유가 있어도 하나님께 집중하는 은혜를 받은 분들 또한 분명히 계십니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보면 삶이 거친 들과 같을 때에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편 본문 15절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은 바로 아골 골짜기에 대한 언급입니다.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괴로움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식후의 법칙이 적용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아골 골짜기가 될 수도 있고 소망의 문이 열리는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이란 내가 가진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삶에 대해 가지고 계신 바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식후의 법칙을 적용하여 먼저 하나님을 먹고 삶을 시작하게 된다면, 삶에서는 하나님이 나에게 가지고 계신 소망들이 성취되어 나갈 것입니다. 이를 소망의 문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삶에 대해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사는 것은 빈속에 독한 약을 먹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괴로움의 골짜기와 같은 삶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을 먹은 식후에만 마주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럴 때에만 하나님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골 골짜기의 교훈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출애굽 한 선민들이 사십 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넜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가나안 복지에 470년 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는 이방신들을 섬기는 원주민들이 이미 살고 있었고, 이들과 섞여 살 수 없었던 선민들은 이들을 몰아내는 전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첫 번째 전쟁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사건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선민들은 싸우는 대신 침묵하며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를 돌고 마지막 바퀴를 돌면서 외쳤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성이 무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여호수아서 6장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에 해야 할 일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간이 보물들을 몰래 가져다가 자신의 장막에 숨겼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몰랐던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기세를 몰아 조그마한 아이 성을 공략하다가 참패를 당합니다. 그 원인을 몰랐던 여호수아와 백성들의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기도를 드리게 되고 여호수아서 7장 11절에서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는 응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자를 찾아내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더니 아간이 적발되었고 그가 훔친 것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21절을 보면 아간의 진술이 나타나는데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말미암아 아간과 일가족은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그 모든 재물들 소들과 양들과 나귀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돌로 치고 불사르고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이때부터 그곳을 아골 즉 괴로움의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부터 복지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선민들의 삶의 태도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간은 당장 눈에 보이는 보물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마음으로 세상의 가치를 먹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광야생활의 특징은 하나님을 먹는 생활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조차도 고민할 여지가 없는 완전히 하나님께 의존한 생활이 사십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보는 것은 성막이고 번제단의 제사였으며 듣는 것은 율법이고 가르침이었으며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지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먹는 것이 나태해지자 마음은 순식간에 타락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아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대한 탐심을 담은 결과가 곧 아골 골짜기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평강이 깨지고 괴로워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일이 안 풀려서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민 걱정 괴로움 고통은 곧 마음의 아픔입니다. 속이 빈 상태에서 세상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설령 세상에서의 일이 잘 풀려도 아픔은 멈추지 않습니다.
사장님이 사업이 잘 돼서 기뻐하며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며칠 가지 않습니다. 현재의 사업 규모로는 마음의 허기짐이 전혀 해결되지 않으니 사업을 더 크게 키워야만 합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민과 괴로움과 수고와 노력이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복지의 삶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여리고 성에서 일어난 아간의 범죄를 드러내시고 오늘 본문에서 다시 아골 골짜기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선민의 삶이란 복지에 들어가서도 광야에서처럼 먼저 하나님을 먹은 식후의 상태로만 세상을 마주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을 대하든, 사업을 하든, 여행을 가든 어떤 일을 하든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마음으로 먹고 배불렀던 선민들처럼 하나님을 먹는 식사가 먼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 이후에 삶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 삶은 소망의 문이 열리는 복지가 아니라 아골 골짜기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기대는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먼저 먹는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준비하셨던 모든 재료들이 오히려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최전성기를 구가하면서도 당장 가진 재물로는 마음을 채울 수 없었고 더 많은 풍요와 다산을 가지기 위해 우상을 섬기기에 매진했습니다. 이 풍요와 다산을 하나님께 구하자니 하나님은 말없이 소원을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렵게 입사하여 초봉 250만원을 받게 된 회사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250만원이 충분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일하다보니 더 많은 돈을 받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삶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해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승진을 열망하게 되었고 끝없이 고민과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굶주림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사실 떡도 물도 양털도 삼도 기름도 술도 금도 은도 250만원의 초봉도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마음이 도저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워지지 않으니 부족하게 여기고 더 많이 채워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아보고자 하는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의견을 강하게 표현하십니다. 결코 세상의 가치를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소원을 묵묵히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자 내 소원을 묵묵히 들어주는 다른 신을 찾기 시작합니다. 선민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이방인들이 섬기던 바알 신을 섬기게 됩니다. 바알은 별의별 소원을 이야기해도 마다하지 않고 다 들어줍니다. 또 그대로 이뤄졌다는 사람들의 소문도 들려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바알을 섬기는 것이 타당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 중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바알처럼 부르는 자들도 생겨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복지로 이끌어 가실 수가 없습니다. 식후의 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빈속에 담은 세상의 가치들로 인해 고통이 생기게 됩니다. 속 쓰림을 없애기 위해 더 많이 먹으려고 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더 쓰리게 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한 선민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떡도 물도 다 바알이 준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뻔뻔한 의식은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선민이 바알을 섬긴 것은 우리식으로 바꾸면 부자 되길 좋아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알이라는 이름 자체는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에서 부자 되고 부흥하고 형통하기를 좋아한 것이 바로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은 바알이 떡을 주고 물을 주었다고 주장하듯이 우리는 돈이 떡을 주고 물을 준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시거나 자신이 없으시다면 선민과 동일한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로 배운 교리에 따르자면 떡과 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생사화복의 주권자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에서는 어쨌든 돈이 있어야만 그것들을 살 수 있다고 체감합니다. 떡과 물은 물론이고 좋은 옷과 좋은 아파트와 좋은 차를 갖게 하는 것은 돈입니다.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은 교리적으로만 알고 있고, 일이 잘 되어서 감사가 절로 나올 때에나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러한 감사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도 아닙니다. 원하는 일이 잘 되어서 좋다는 자기도취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하는 감사는 술주정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내 삶을 도맡아서 진행해 나가실 때에 모든 일에 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돈을 담고 스스로 애를 써서 돈을 벌게 되었을 때의 감사는 술주정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놓고 보면 여러분께서는 돈을 믿고 있는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생각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돈이 떡을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돈 많이 벌기를 바라는 마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식후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에 대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곧 돈을 마음에 담았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돈을 어떻게 쓸까 궁리하는 것도 마음에 담는 것이고, 돈이 없어서 어떻게 돈을 마련할까 고민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담은 것입니다. 결국 빈속에 담았으니 돈이 있든 없든 평강은 깨지고 괴로움은 생겨납니다. 돈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식후에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든든히 먹고 돈 문제를 관계하는 것입니다.
자녀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든든히 먹어서 마음이 배부른 상태가 된 후에 자녀문제와 관계할 때에 탈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먹지 않은 빈속에 자녀문제를 담으면 반드시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자녀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자녀처럼 마음에 독하게 작용하는 약도 없습니다. 빈속에 담긴 자녀는 부모로 하여금 걱정 근심 괴로움이 끝날 날이 없게 하는 약입니다.
건강, 사업, 장사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대상들이 빈속에 담길 때에 나를 아프게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먹은 식후에 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괴로움과 근심 걱정의 아골 골짜기는 소망의 문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하나님을 어떻게 먹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먹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을 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먹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을 때에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먹고 난 후에 돈 문제와 관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먹습니다. 돈 걱정이 생길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세상에 대한 죽음임을 생각하며 나도 예수님과 함께 돈 걱정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곧 본문에 나타난 거친 들과 같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향하는 장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자들은 또한 부활과 승천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또한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깨끗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겠다는 열정이 불타오를 때에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선민들을 거친 들로 이끄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선민들이 하나님만을 보고 싶어 하고 갖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지고 나면 세상에 대한 추구함은 중단됩니다. 건강이 안 좋아도 하나님께로 빨리 가는 길로 여겨져 반갑습니다. 건강을 회복시키셔서 살려두신다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으셔서 남겨두신 것이니 이 또한 좋습니다. 세상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상을 마음에 담지 않게 된 사람을 통해 일해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전에는 복을 주셔도 그것을 마음에 담아 더욱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기에 주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망의 문을 여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식후의 법칙을 지켜나가며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소망의 문이 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먹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동선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가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먹는 것입니다. 삶 전체를 식후의 법칙으로 미루어 두는 것입니다.
식후의 법칙을 삶에 적용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돈 벌기 위해 애쓴 노력의 백분의 일도 안 됩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아골 골짜기가 되느냐 소망의 문이 열리느냐가 결정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복지를 살 수 있는 길을 손에 쥐어주셨는데도 실천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이 세상의 어떤 일이나 생각 앞에서도 하나님을 먼저 먹는 식후의 법칙을 철저히 준행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