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후기>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번 주일 설교 제목이 이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설교 후에 이 제목의 설교가 적지 않음을 발견했다. 유튜브로 몇 개의 설교를 들어보았다. 나의 설교와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어떤 점이 다를까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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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삭개오 같은 사람들이 맛본 구원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 그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공동체 안에서의 경험임을 강조했다.
이번 설교에서 나의 강조점은, 우리가 공동체 가운데서 그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종류의 공동체라고 정해보았다. 우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가 첫째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심으로 세우신 가정이 둘째이며, 하나님이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인 우리의 기업 곧 일터가 그 세번째라고 제시했다.
나는 에베소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교회에게 제안하는 행동지침이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지키게 하는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를 힘써 지키기 위해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 가운데 용납함이다. 또한 우리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세우려고 자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때 함께 성숙하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에 이르기까지 자라날 것이다.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좁은 문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문이기도 하다. 그 좁은 문에 들어가기 위해서 버려야 할 무거운 짐을 나는 ‘쓸데없는 자존심과 욕심’이라고 제시했다. 어린 아이들처럼 가면을 벗어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힘쓴다면 우리가 사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아닐까! 이것이 이번 주 설교의 핵심이었다.
설교안 전문:
https://cafe.daum.net/Wellspring/W88K/1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2cXF3xD6P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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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설교를 들어본 후에 나는 위 본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음을 발견했다:
1.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우선, 심령천국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 ‘안에’라는 전치사 엔토스(entos)는 ‘가운데’(among)가 아니라 ‘안에’(in)의 의미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은 영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말이다. 찬송가에 있듯이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이런 해석을 잘 드러낸다.
2.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심령 천국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공동체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 안에 임하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을 의미한다.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둘 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엔토스’는 in(within)과 among 모두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영어 성경에서 그 두가지 표현을 모두 읽을 수 있다.
3. 여기서 너희라는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바리새인들이므로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그들 안에 이미 와 있는 셈이 된다. 예수께서 맨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이유도 자신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계신 바로 그곳이 하나님 나라다. 바리새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4.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물은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가 다분히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이자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5.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1949년) 이후로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로 구별하여 표현한다.
6. 어떤 사람들에게 천국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세천국이며 다른 하나는 내세천국이다. 현세천국을 내면의 문제로 국한하여 설명하는 사람도 있고 내면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회복을 포함한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내세 천국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다.
7. 내세 천국에 대하여 죽으면 바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죽으면 하늘에 올라가 안식하며 부활의 날을 기다리다가 세상이 새롭게 되는 날 몸으로 다시 살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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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유대인들의 사후세계관은 좀 특이하다.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은 서로 단절되어 있지만 서로의 상태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정도로 하나의 세계로 묘사된다. 오늘날 사후세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사후의 세계와 사후에 인간이 어떤 상태로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는 누가복음 16장에 대해 설명하기를, 예수께서 당시 유대인의 사후세계관을 사용하여 구제와 섬김의 삶이 중요함을 가르치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누가복음 16장의 이야기가 사후세계에 대한 완벽한 그림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예수님은 무슨 의도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신 것일까? 공자나 소크라테스 같은 현인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삶의 지혜를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 이것은 청중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청중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던가? 그들이 기다린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 나라들을 심판하시며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리라고 확신했다. 그 약속은 이스라엘에게는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열국 가운데서 택하시고 구원하신 백성이 세상에서 머리가 되기보다는 꼬리가 되고 열방을 선도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기보다는 현재 열방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짓밟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를 이루실 것을 그들은 간절히 기대했다. 그들은 특별히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희망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세상 나라들을 다스릴 기회를 주실 것을 믿었다. 어쩌면 그들은 여전히 포로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제2의 출애굽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 구원의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이며,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며, 세상 끝이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때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을 때, 그들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군중들은 몰려들었고, 심지어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람들도 몰래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서 떠보았다.
문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주신 예언이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는 점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이해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예수님이 결코 메시아 일 수가 없다고 판단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능욕하고 죽였다. 그 둘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오해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승천 직전까지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지금이냐고 질문했다. 어쩌면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절에 자비를 실천하기보다는 제사를 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의도를 알려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드리기보다는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안주했던 사람들과 같은 잘못이 계속되고 있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다르지 않았다. 예수님도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인용하여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예언자 전통에 서 계신 분이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새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새 언약은 이미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한 것이다.
훗날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자신을 드리셨다.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누군가? 그는 제사장이다. 예수님은 첫 언약의 목적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제 만인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제사장으로 살게 되는 시대가 왔다고 예수께서는 확신하셨다. 이는 그 백성을 포로에서 건져내셔서 자유민이 되게 하심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의 의미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말이다.
예언자들은 만인이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며 순종하는 시대가 오리라고 말했다. 또한 상생과 공존을 위한 만인의 협력과 하나됨이 실현될 것이라고 예언자들은 말했다. 그것은 사막이 생명의 평원으로 바뀌며, 약육강식의 잔인한 정글이 평화와 생명으로 충만한 세상으로 바뀔 것이라는 환상이자 판타지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의 때에 그런 일들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셨다. 물론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신앙을 회복하라는 촉구로도 해석될 수 있겠다. 예수님의 의도는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너희가 구하고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세상과는 다르다. 너희는 중심을 돌아보고 자신을 반성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바로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이 말했다: ‘너 자신을 밖에서 찾지 말라(Ne te quaesiveris extra).’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너희 안에서 찾으라고 하셨다. 그들이 자신들을 돌아볼 때 하나님 나라를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말은 부자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 제자로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과 유사한 메시지가 아닐까? 부자 청년도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았던가? 부자 청년이나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돌아볼 때 깨닫게 되는 것은 아마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지나가기에는 자신이 붙들고 있는 짐이 너무 많고 크다는 것 아닐까?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나는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