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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 훈독경
제2권 타락과 구원섭리 - 제1일
나의 뜻과 신념
날짜 : 1969. 2. 2(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1. 먼저 부모형제에게 말씀을 전하지 못한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까지 격동하는 세계적인 사조권 내에서 많은 핍박을 받고 사탄과 혈투전을 하면서 하늘의 기반을 닦아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통일교회는 선생님이 죽더라도 핍박의 길을 넘어서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세계를 통일시킬 수 있는 기반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선생님이 먼저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선포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아직까지 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족에 대한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부모와 8명의 형제자매가 있었고, 사돈의 팔촌까지 합하면 상당히 큰 문중이었습니다. 더욱이나 우리 형님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계와 통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될 것도 알았고 다년간 고생한 병도 약 한번 안 쓰고 영적으로 치료받은 분입니다.
그 형님은 나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나에 대해서 깊이는 알지 못했지만 세계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우리 동생이 제일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내 말을 듣고 안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알았던 것입니다. 또, 내가 말하지 않는 한 물어 봐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형님은 선생님의 가슴에 품고 있는 깊은 무엇을 자기에게 얘기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 형님과 우리 부모님은 선생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문중에서 논쟁의 대상이 됐습니다. 장래에 면이면 면, 도면 도에서 잘되면 무엇이 되고 못되면 무엇이 된다는 등 말이 많았습니다.
그와 같은 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님은 나를 위하여 말할 수 없이 많은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어머니께 손수건 한 장도 사 드리지 못했습니다. 우리 8남매 중에는 누이가 여섯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여섯 딸들을 시집보내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하셨습니다.
내가 어디 갔다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베를 짜고 계실 때가 많았는데, 그때 어머니와 함께 얘기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보통 마흔 자 한 필을 짜는 데 5일 정도밖에 안 걸렸습니다. 그러니 하루에 여덟 자 내지 아홉 자 정도를 짰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 베의 표면은 참 고왔습니다. 하루종일 베를 짜고 나면 얼마나 눈이 시리고 힘이 드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그런 일을 우리 어머니는 수십 년씩이나 하셨습니다. 옛날에 농촌에서는 아들딸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려면 그들이 입고 갈 옷은 직접 목화를 재배하여 옷감을 만들어 지어 입혀서 보내야 했기 때문에 손이 너무 많이 갔습니다. (22-117)
2. 나를 위해 고생하고 희생당한 가족들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온갖 희생을 했습니다. 특히, 나를 위해서 그 누구보다도 정성을 많이 들였습니다. 그런 어머니에 대해서 내가 자식 노릇을 제대로 못 했다는 것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어느 때인가 내가 이북에 가게 되더라도 만나뵙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해서 기도 한번 안 해봤습니다.
내가 요구하면 집이라도 팔아서 돈을 보내 줄 수 있었던 그러한 형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형님에 대해서 내가 통일교회 누구라는 이야기나 무슨 사상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에게도 얘기를 못 해줬습니다. 단 한 가지, 그분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도 자존심이 강했다는 것과 불의에 대해서는 참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자라면서 동네에서 누군가가 자기가 잘산다고 해서 못사는 사람들을 천대하는 것을 보면 그가 누구였든 간에 못 참았습니다. 그러니 동네의 사람들도 나를 무서워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언제나 먹을 것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엿을 사다 놓든지 떡을 하시든지 하셨기 때문에 언제나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고 있어서 나는 그것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갖다 주곤 했었습니다. 그렇게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신 부모님께도, 형에게도 선생님은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또, 우리 동생들 중에는 나 때문에 희생된 동생도 있습니다. 내가 이 길을 왔기 때문에 죽은 동생도 있습니다. 그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왜정 때 감옥에 들어가 고문을 받고 있을 때 누이동생이 죽었습니다. 그건 순전히 탕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늘의 역사는 반드시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가정에는 한 7년 동안 풍파가 많았습니다. 열 세 식구들 중에서 다섯 식구가 죽고 여덟 식구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개가 죽고, 소가 죽고, 형님이 미치고, 누나가 미쳤습니다. 사탄의 활동 때문에 그런 역사적인 탕감을 치렀습니다. 선생님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배후의 사연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선생님이 어떠한 마음을 품고 다녔는지 몰랐습니다. 형님에게도 얘기 안 하고, 부모에게도 안 했습니다.
그렇게 해방될 때까지 참고 나왔습니다. 해방되고 나서 선생님은 한국에서 ‘한다’ 하던 신령한 사람들은 다 찾아가서 만나 봤습니다. 그들을 만나서 영계의 사정을 물어보면 아무래도 그 사람들의 대답이 미흡하더라는 것입니다. 미흡한 사람은 완전한 시대에 남아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앞으로 나가다가 전부 중도에서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을 어떻게 타파해 나가고 새로운 기준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을 놓고 학생 때부터 생각해 나왔습니다. (22-119)
3. 많은 경험과 눈물을 흘린 학창시절
일본 유학시절에 선생님은 빈민굴에서부터 사창굴에 이르기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창굴에 있는 아가씨들의 과거를 캐보니 보통 사람의 과거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회 환경에 몰리고 그 흐름에 따라가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불쌍한 처지가 되기도 했고, 혹은 부모와 형제를 위하여 자기 일신을 제물로 삼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비록, 자기 몸이 버린 바 되어 거리에 밟히는 여인이 될지라도, 쓸쓸히 사라지는 불쌍한 아낙네가 되더라도 자기 부모와 형제를 살리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하고 나섰다고 했을 때 그들의 손을 붙들고 통곡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도 순수하고 솔직한 인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은 그런 비참한 인류의 해방을 위해서 싸워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별의별 인간들이 다 거쳐나가는 그런 류의 생활적인 이면을 알지 못하고서는 큰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빈민굴의 생활로부터 밥을 얻어먹는 일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길이길이 세우고 싶으셨던 사연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해방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선생님은 해방의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1941년도에 일본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 부산을 향해 서울역을 떠날 때 서울의 장안을 바라보면서 불쌍했던 그 당시의 한민족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지금도 한강변에 가면 불쌍했던 이 민족이 해방될 한 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붙들고 기도하던 바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지만 이 민족은 아직도 불쌍한 민족으로 남아져 있습니다.
지하실에서 남모르는 가운데 눈물로써 하나님께 호소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천지 앞에 하늘의 사연을 피를 토하면서라도 호소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흑석동의 고갯길은 선생님이 많이 걸어 다닌 길입니다. 선생님이 학교 다닐 때는 전차를 안 타고 다녔습니다. 전차를 타고도 꽤 먼 곳이었지만 걸어갔다가 걸어왔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흑석동 고개를 넘어갈 때 보면 길가에서 적선을 바라며 행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는데 전차를 타지 않고 남겨 두었던 돈을 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그들을 붙들고 한없이 울어도 봤습니다. 부모가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없다고 하고 형제가 있느냐고 물어봐도 없다고 하던 그를 선생님이 부모형제를 대신해서 위로해 주지 못 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교회에 나올 때 어떤 사람은 중앙청이나 종로 혹은 동대문 쪽에서부터 남대문을 거쳐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선생님이 소년 시절에 오뉴월 삼복지경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걸어 다녔던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또, 전차나 버스 혹은 택시를 타고 편히 오더라도 지난날 선생님이 걸어 다녔던 기준을 생각하고, 선생님이 이 나라와 이 민족의 한을 풀어주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이 하나님께 안길 수 있는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던 것과 같은 마음을 품고 나와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누구한테도 얘기 안 했습니다. 말을 안 해도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선생님이 학생 시절에 기도를 할 때는 목이 메인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왜 그렇게 기도를 했는지 그 이유는 몰랐습니다. 20세를 전후한 청년이 목이 메어서 기도하던 것을 본 사람들은 “저 청년은 왜 저렇게 기도할까?” 하고 이상하게 여겼겠지만, 거기에는 남모르는 내적인 심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22-120)
4. 잊어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
선생님이 어느 곳에 가든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그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 여러분이 선생님을 대하듯이 가는 곳곳마다 그렇게 대해 주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명절날 같은 때 밤을 새워 가면서 준비한 그 상, 혹은 남편을 위해서 준비한 그 상을 선생님의 방에 갖다 주지 않고서는 안방에 들어가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냥 안방에 들어가게 되면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도 왜 그런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낙네들의 정성들인 그 음식까지도 선생님을 먹이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천 번 만 번 이 몸이 으스러지고 뼈가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잊을 수 없습니다. 지나온 역사과정에서 하나님은 선생님이 어떠한 자리에 가 있든지 함께해 주셨고, 선생님을 위해서 그렇게도 수고를 하셨다는 것은 선생님 자신에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이랬다저랬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에 갈 때는 보통 부산에서 배를 타고 갔는데,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기차로 8시간 걸렸습니다. 나는 그때 기차를 타면서부터 오버를 뒤집어쓰고 통곡을 했습니다. 눈물이 끊이지 않아서 눈이 붓고 코와 입술이 붓도록 울었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눈물, 하늘을 사랑하고 싶어 했던 그 사연, 이 민족에게 심어 주고 싶었던 젊은 시절의 그 하소연이 이 민족 앞에 기필코 남아질 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걸어 나온 길에는 곡절이 많았습니다. 눈물의 쌍곡선을 그으며 이 길을 개척해 나와야 했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던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무턱대고 평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배후에 선생님이 흘린 한의 눈물이 얼마나 엄청났는가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선생님만이 압니다. 하나님만이 압니다. 하나님과 선생님만이 알 수 있는 그 사연이 한국 삼천리 반도 위에 엮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모를지라도 선생님은 역사시대에 길이길이 남아질 사연, 그 무엇보다도 귀한 이 사연을 죽어가면서도 품고 가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연을 펼쳐서 만민 앞에 통고하고 승리의 깃발을 꽂고 나서 그 승리의 보좌에 아버님을 모셔 놓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지 못할까 봐 염려하면서 한을 품고 사는 사나이가 문 아무개인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기 바랍니다.
이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으로 말한다면 선생님은 그 어느 애국자보다 더 많이 흘렸습니다. 선생님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던 1941년 4월 1일 새벽 2시에 부산 부두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비록 떠나지만 너를 더욱더 사랑하고, 너를 위하여 더 많은 눈물을 흘려주마!”고 약속했던 것입니다. (22-122)
5. 하나님만이 아시는 눈물의 사연
일본에 가서도 굶주리던 친구를 만나게 되면 선생님은 굶더라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굶주리던 고학생을 만나면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해 학생복을 벗어 던지고 부두에서 노동을 했고 석탄을 지고 운반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젊은 동지들을 사랑하기 위해 싸워 나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나를 친한 친구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선생님이 어떤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생님을 친구 중의 친구라면서 자기의 비밀을 자백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실을 너한테만은 이야기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고 직고하던 동지들을 남겼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또한, 선생님이 일본의 궁성을 지나게 될 때 나라를 잃어버리고 민족을 잃어버린 한을 품은 외로운 사나이로서 그 궁성을 응시하면서, 20년 후에는 하늘이 한민족을 중심 삼고 승리의 깃발을 꽂으실 그 날이 오리라는 것을 선생님은 이미 알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금은 네가 우리 민족을 핍박하지만 앞으로는 반대로 내가 명령만 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이 너를 향하여, 이 궁성을 향하여 화살을 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하고 다짐했던 것이 25년 만인 1965년도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여자들만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남자들도 선생님이 그리워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반 사회 사람들은 나를 이단의 괴수라고 하는 등 별의별 말을 다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면 가짜입니다. 그런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사랑하던 친구들은 전부 다 영계에서 데려갔습니다. 선생님과 가까운 사이의 사람들을 전부 다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을 영계에서 데려갔는가 하는 것을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그들과 사정(私情)을 나눌까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책임지고 나가던 선생님이 그들과 사정을 나눌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사랑했던 누이동생도 데려갔습니다. 하나님은 선생님이 세상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모두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선생님이 잘 알았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가려야 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못나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겠어요?
지금 통일교회 교인들이나 청년들 중에는 대학을 나왔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꺼떡거리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뭐 어떻고 저떻고 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통일교회 문 선생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을 했어도 그들보다 몇 백배 몇 천배 더 했고, 인류를 그리워하며 인류를 위해서 일주일 이상 눈물을 흘렸고, 너무 많이 울어서 입고 있던 솜바지까지 모두 적셔 버린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통일교회는 껄렁껄렁한 곳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는 이념과 전통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선생님을 모셔 왔지만 선생님을 모릅니다. 연구를 해도 모릅니다. 어떨 땐 어린애 같지만 어떨 땐 권위가 있고 무섭기가 한량없습니다. 선생님이 한번 호령하면 여러분의 가슴은 몽땅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열지 않고는 여러분은 해방될 수 없고 수습할 수 없습니다. 그런 권위가 선생님에게 있습니다. (22-123)
6. 심정적으로 일체가 되어야 하늘의 초석이 놓여진다
여러분은 겉으로 나타난 통일교회를 보고 믿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통일교회가 외부로만 발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우리가 본보기가 되어 서로서로 심정이 통하고 사정이 통하여 동감 동정할 수 있는 일체가 되어야 그것을 중심 삼고 하늘의 초석이 놓여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늘의 초석이 세워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렇게 몰아치던 핍박을 받으면서도 1960년까지 노력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생님은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을 잊어버리고 온갖 정성을 들였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천신만고 끝에 찾아 놓은 영계의 모든 비밀과 모든 내용은 보화 중의 보화요,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함께 나눌 수 없었으니까 얼마나 한스러웠겠습니까!
어머니를 뒤에 두고 나설 때 눈물을 머금고 마음속으로 “어머님, 이제 이 집을 떠나면 다시 만나 뵐 수 없는 길로 가게 됨을 용서하십시오!” 하면서 인사를 드리고 어머님과 헤어졌는데,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찾아오셔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어머니께 위로의 말도 한마디 해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눈물을 흘리고 계시던 어머니께 “졸장부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되지 말고 대장부를 낳은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청천벽력 같은 호령을 하여 눈물을 그치게 했습니다. 그런 역사를 선생님은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계의 수많은 선한 영인들이 선생님을 중심 삼고 그 어머니의 가치를 천배 만배 더하여 바라보고 있는데 일대의 혈육의 인연을 중심 삼고 눈물지음으로 인하여 그 권위와 가치가 상실될 것을 염려하여 선생님은 무자비하게 어머니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처자식을 대해서도 심중에 품은 말을 하지 못한 불쌍한 사나이가 바로 통일교회 문선명 선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선생님은 하나님의 엄청난 뜻을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를 붙들고, 형님 누나를 붙들고, 처자를 붙들고 사정을 나누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뜻을 위해서 륙색(rucksackː배낭)을 메고 처자를 떠나 눈물을 흘리며 이북으로 향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때 나는 친척들이 나를 원망할 것이요, 친지들이 원망할 것이요, 처자가 나를 원망하면서 눈물 흘릴 것을 알고 돌아서서 눈물 흘리며 대한민국을 이별했습니다. 그때 나는 “오냐, 6천년 섭리역사가 이렇듯 슬픔의 역사로 남아져 온 것을 알았으니까 그 해원을 위해 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다 싫다던 이북 땅을 향하여 떠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해방을 그리워하면서 통곡하며 절규하던 그 사나이가 해방된 땅 위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녘 땅을 향하여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부디 남아져 달라!”고 나라를 위해 기도했고, 삼팔선을 넘어설 때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했던 사실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하나도 죽지 말고, 하나도 망하지 말고, 하나도 배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토록 동지들과 신도들에게 부탁을 했지만 선생님이 가고 난 후에는 모두 선생님을 원망하고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남한에 다시 돌아왔을 때 선생님을 원망하고 배반했던 그 무리들에게 아직도 하늘의 슬픈 역사의 사연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사연을 나누고자 찾아갔습니다. 그때는 명주바지가 누더기가 되어서 선생님이 보기에도 형편없는 거지 중에 상거지의 모습이었습니다. (22-125)
7. 배반당하고 몰림을 받은 지난날
어떤 집을 찾아 들어가니 세 모녀가 선생님의 면전에서, 그 길을 가지 말라고 말려도 가더니 결국은 거지 모양이 되어서 찾아왔다고 서로 눈짓을 하면서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그 집을 찾아간 것은 밥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천적인 인연을 중심 삼고 같이 눈물을 흘렸고 같이 사연을 나누었던 하늘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인연을 거룩하게 심었으니 심은 것을 거룩하게 거두어들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생님을 맞이했더라면 선생님이 이북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얘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생님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그들과 상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그 집안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22-126)
선생님이 그 누구보다도 잊을 수 없었던 동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해서 회사를 설립했는데 장안에서 이름이 났습니다. 선생님은 일주일 동안 얼굴도 씻지 않고 이도 닦지 않은 상거지의 모습을 해 가지고 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선생님을 어떻게 대하나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선생님을 배신했습니다. 선생님은 대개 어떤 사람을 찾아갈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갑니다. 그때도 틀림없이 “넌 이렇게 대할 것이다.” 하고 예상하고서 찾아갔던 것입니다. 가보니까 없어요. 찾아갈 때는 아예 하룻밤을 지내고 오기 위하여 오후 늦게 상거지의 모습으로 찾아가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저녁 7시가 되어도 오지를 않았습니다. 해가 진 다음에 저녁밥을 먹고 기다렸는데 늦게서야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에게 언짢은 표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나이는 동지 앞에서 몰리고 쫓겨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부모 앞에도 몰렸고 민족 앞에도 몰렸습니다. 나는 내 뒤에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그러나 나를 몰다가는 걸려 넘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만난 그 자리에서는 “그 동안 염려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그저 도의적인 입장에서 얘기했을 뿐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저런 별의별 곡절의 노정을 거치며 동지들을 찾아 다녔던 것입니다. 남들 같았으면 다시 남한 땅을 찾아왔으면 처자를 먼저 찾아가는 것이 인지상정이었겠지만 선생님은 동지부터 찾아갔던 것입니다. 가까운 동지로부터 찾기 시작해서 먼 동지까지, 또 이북에서 선생님을 따르던 식구들을 비롯해서 선생님과 인연된 동지들을 찾는 데 2년이 걸렸습니다. 여기 승도 할머니는 그것을 압니다.
내 처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지만 동지들을 모두 찾기 전에는 편지조차 할 수 없는 천적인 사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그들을 다 찾고 찾아서 다 만난 후에야 집으로 연락을 했습니다. 하늘은 그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목석 같은 사나이가 아닙니다. 정적인 사람이요, 눈물 많은 사람이요, 동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에 약한 친구를 괴롭히던 짓궂은 친구와 싸우다가도 그 친구의 옷이 찢어지면 선생님의 옷을 벗어 입히고서야 돌아섰던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악은 악대로 처리하면서도 그 처량한 신세는 동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천정(天情)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역사적인 사연을 품고 나오면서도 그러한 심각한 내용을 선생님과 제일 가까운 부모한테도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형님, 누나, 동생에게도 얘기를 못 했습니다. 처자한테도, 친척들한테도 얘기를 못 했습니다. 우리 동지들에게도 때가 되기 전에는 그것을 얘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22-127)
8. 수난 가운데서도 보호해 주신 하나님
그러면 말씀을 누구에게 먼저 전했느냐? 해방이 되고 난 다음 원수들이 우글대던 이북 땅에서부터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의 전파가 출발함과 동시에 원수의 총끝이 선생님을 겨누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감옥 길로부터 출발했던 것입니다. 원수 앞에서 또 몰림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몰려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산치하에서 3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죽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평양감옥에 들어갈 때도 어떠어떠한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것까지 알았습니다. 선생님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 때는 영계에서 무지몽매한 강도, 절도, 살인범 등의 수많은 죄수들에게 “아무 감방에 번호가 몇 호인 사람이 있으니 그분에게 어떤 것을 갖다 드려라!” 하고 시키기도 하고, 겨울이 되어 날씨는 추워지는데 선생님이 입을 옷이 없을 때는 그들을 시켜서 옷을 갖다 주기도 했으며, 또 내가 먹지 못하여 배가 고플 때는 난데없는 사람을 통해 선생님의 이름과 번호를 가르쳐 주면서 먹을 것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평양감옥에 들어가면 누구누구를 만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희망 가운데서 4월 20일까지 지냈습니다. 그때 감방의 창가를 스치던 버들잎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던 것이 엊그제같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거기서 하늘의 뜻을 따르기로 약속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만남으로 말미암아 원수의 땅, 제일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하늘의 밀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늘의 병사를 모집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몰리고 쫓겼으니 감옥에서부터 시작했던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통일교회가 출발을 해서 이남 땅으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이북에서 유엔군이 제일 먼저 상륙한 곳이 흥남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쁘게 구해야 할 한 아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공산당들은 그 전전날 한 감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밥을 준다고 꼬여서 전부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 사람들은 죽이려고 그러는 줄은 모르고 밥을 준다고 하니까 그것을 얻어먹겠다고 서로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벌써 그것을 알았습니다. “너희들은 마지막 길을 가는구나! 그렇지만 난 죽지 않을 것이다.” 했습니다. “너희들은 다 죽더라도 난 죽지 않는다. 어떠한 참사의 비운이 거쳐가는 자리, 총살을 당해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난 결코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한 것입니다.
그 해 10월 12일 형기가 7년 이상인 죄수들 한 70명 정도를 30리쯤 산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형기는 5년이었기 때문에 그 다음 다음날에 끌려갈 차례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바쁘셨을 것입니다. 13일 밤거리를 내다보니 벌써 사태가 달라졌습니다. 유엔군이 흥남에 상륙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산군들은 보따리를 싸기가 바빴습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10월 14일 공산군이 물러가자 우리는 감옥에서 빠져나와서 이남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지내와서 하나님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선 사나이가, 지금까지 이단의 괴수라는 팻말이 붙어서 원수들로부터 몰리고 쫓기고 비난받으며 나왔습니다. 여러분!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그 한을 풀 수 있는 작전,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지금까지 여러분을 지도해 온 지도방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화여대 사건 때 김활란과 박마리아가 주동이 되어 경무대에 가서 거짓으로 증거해 가지고 4개 부처 장관들을 움직여서 통일교회를 없애 버리고 나를 완전히 매장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안 죽었습니다. 안 죽었어요! 세상의 어떠한 일이 부닥쳐 오더라도 안 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1955년도에 있었던 7. 4사건을 알지요? 내가 원숭이띠라서 감옥살이를 많이 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서대문형무소 소장이 기성교인이었는데 대뜸 “임자가 문 아무갠가? 한 달은 구류 받아, 이 자식아!” 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돼먹지 못한 사람에게 농담 삼아 한 마디를 했습니다. “이 자식이 뭐야? 당신은 이런 것을 해먹었군!” 하니까 가슴이 찔렸는지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식아, 가만히 있어!” 했습니다. 그런 돼먹지 못한 사람이 선생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나서 그렇게 못되게 굴던 형무관들을 선생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듣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물을 갖다 달라고 하면 떠 올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때려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이곳에 아무나 와서 앉아 있지만 옛날에는 절대 아무나 못 들어왔습니다. 선생님은 무서울 때도 있었습니다. 경찰이 들어오려고 문 앞에 와서 문을 두드릴 때 “무엇 하러 왔느냐?”고 호통을 치며 쫓아낸 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종의 자식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다룬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딸에게는 정도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선생님은 자기 부모나 처자에게는 차마 말을 못 했느냐?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혈육만을 중심 삼고 자기의 가정만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섭리인 것입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자기 처자를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천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자기를 사랑하는 무리들만 사랑하셨다면 오늘날처럼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발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4천년 만에 비로소 이 지상에 둘도 없는 사랑의 실체로서 보내진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하나님은 악당의 무리와 원수의 자식들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 제사를 드렸습니다. (22-129)
9. 전통적인 심정 사상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랑하시던 사람들을 제물로 삼아 나오셨고, 사랑하시던 민족을 희생시켜 가지고 세계를 구하기 위한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그것이 전통적인 심정 사상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본받은 예수님도 그러해야 했고, 기독교도 그러해야 하고, 또 그런 사상을 결실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할 통일교회 문 선생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가짜인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지금까지 누구를 사랑했느냐? 처자와 부모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세계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세계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려면 민족과 종족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 민족은 대한민국 국민들이요, 그 종족은 통일교회 식구들입니다. 하늘이 사랑하고 싶었던 나라를 이 땅에서 사랑해야 되겠고, 하늘이 사랑하고 싶었던 종족을 이 땅에서 사랑해야 되겠고, 하늘이 사랑하고 싶었던 가정을 이 땅에서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는 하나의 대표자가 이 땅 위에 나오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은 세계 만민을 위해서 사랑의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공인할 것입니다. 이 나라를 위해서도 사랑의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영계에 가 있는 애국자들도 선생님한테 머리를 숙이고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나중에 한번 보세요! 여러분이 흘린 눈물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흘린 것이지만 천정을 가지고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민족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종족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통일교단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교단입니다. 통일교단이 나온 것은 사랑의 다리를 놓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통일교단 가운데 통일가족이 있으니 그 가족을 사랑해야 하고, 그 가족 가운데는 개인이 있으니 그 개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그러한 사명을 띠고 나왔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사랑의 역사, 심정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통일교인이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한다는 입장이니 기도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세계적인 하나님이기에 세계를 제일 사랑하시니 하나님의 아들 된 저도 세계를 사랑해야 되겠지요?”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엄마, 아빠, 누나, 형님, 사돈의 팔촌, 그 다음엔 우리나라만을 사랑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곤란하시겠어요!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소련 사람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일본과 한국 등 모든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입장이 얼마나 곤란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몇 백 분은 계셔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세계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하나의 사랑권 내에 품으시려는 분이기 때문에 설령 대한민국을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하시더라도 선생님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우선, 대한민국의 사람으로서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대한민국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버리고 세계를 취하느냐, 세계를 버리고 대한민국을 취하느냐 할 때 어떤 것을 취하겠습니까? 세계를 위하여, 세계를 사랑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사람은 자기 나라가 망하더라도 그 나라를 다시 부활시켜 가지고 세계를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백성들은 그런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아시아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역사와 문화, 전통적인 내용과 현실적인 기반이 없다고 해서 낙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21세기 혹은 수백 세기 후에도 필요할 수 있는 사상만 가지고 있다면 그 사상은 세계의 사상으로 등장할 것이요, 그 사상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때가 오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통일교회 문 선생이 수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앞으로는 대한민국과 세계의 인류에게 있어서 절대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2-137)
10.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미치고 미치자
그러면 통일교회 문 선생으로서 세계를 위해서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여, 저는 저 깊은 시궁창에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그 대신 아버지의 참아들이 되겠습니다. 사탄도 공인할 수 있고 지금까지의 어떤 악당의 무리들도 공인할 수 있는 참된 아들이 되겠습니다.”라고 기도해 온 것입니다. 또한, 이제까지 인류가 아버지를 잘 모시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세계의 모든 민족이 모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을 나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초창기의 통일교회 식구들은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들은 좀 나은데 젊은 아주머니들이 말씀을 들어 보겠다며 가까이 와서 갑자기 옷을 만지려고 하고 발을 만지려고 했으니 선생님이 얼마나 입장이 곤란했겠어요! 그 일 때문에 내가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선생님이 바라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바라는 것은 선생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머니면 어머니에게, 자식이면 자식에게 교훈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선생님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남자로서 자기를 중심 삼은 사탄적인 그런 사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선생님이 천리 만리 순례의 길을 떠나도 섭섭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럴 수 있는 남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통일의 길을 간 수많은 여성들 중에는 어떤 남자가 본이 되기 위해 그 길을 가겠다고 말했을 때 그를 환영한 여자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그럴 수 있는 남성과 그럴 수 있는 여성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다음엔 세계의 인류를 사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기 전에는 선생님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사랑해 달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하늘의 길을 가야 할 사람이기에 여러분에게 사랑의 전통과 역사를 세워 주고 하늘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데는 선생님이 실천하지 않고 말로만 가르친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는 자리에서는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이 손가락질합니다. 3대를 못 가서 절단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의 자리는 무서운 자리입니다. 어린아이에게 화약을 맡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한 가지를 말할 때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기반이 없어 가지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양심은 못 속입니다. 세계의 어디를 가든지 공의의 법도 앞에서 감당할 수 있는 권위와 그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약속을 못 하는 것이 천륜의 이치요, 인륜 도덕의 이치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계의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서, 여러분을 사랑하기 위해서 밥 먹는 것, 옷 입는 것, 잠자는 것도 다 잊어버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랬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스승보다 더 미쳐야 합니다. “우리 엄마는 통일교회에 가더니 귀가 먹었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가 낳은 아들딸들이 “엄마!” 하고 불러도 대답을 못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기에 귀가 먹었고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망한다고 해도 그 충성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을 위하고 이 세계를 위하고 이 나라와 이 민족과 통일교회를 위하여 나왔기 때문에 여러분이 선생님을 대하려면 눈물 없이 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의 심정을 바로 건드리기만 한다면 십 년 이상 통곡할 수 있는 사연을 가진 사나이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라, 미칠듯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신이 지치고 생명의 위협을 받아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없는 죽음의 자리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천 번 만 번 죽겠다고 해야 부활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그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22-147)
11. 참된 이념의 길을 누구나 가야 하고 죽어도 가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세계를 사랑하지 못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되어 눈물지을 때 하나님도 눈물지으며 “오냐, 오냐! 그럴 수 있는 날을 이루어 주마! 네 소원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날이 올 것이다.” 하고 위로해 주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종족을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고 맨 나중에 자기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있어서 인간이 가져야 할 중심사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세계를 사랑했고 인류를 사랑했습니다. 해방 직후에 나를 죄수로 몰아 총살시키려고 했던 원수들까지도 사랑했습니다. 그의 자식이 굶고 있을 때 선생님은 양복에서부터 속옷까지 다 팔아 그에게 주고 아무것도 없이 2주일 동안 살아 본 적도 있습니다. 나중에는 입을 것이 없어서 이불을 쓰고 방에서 나가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수단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참된 이념의 길은 누구나 가야 합니다. 망해야 하는 죄인도 가야 합니다. 때문에,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도 해방시켜 이 길을 가게 해야 합니다. 이 길을 개척해야 할 사명이 통일의 무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개척하는 사명을 진 책임자로서 이를 망각하지 않고 책임을 다해야 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그런 일을 했던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하고 신임했다면 그것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여러분을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습니다. 밤에 자다가도 눈을 뜨면 선생님의 아들딸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아들딸을 위해서 눈물어린 기도를 해본 일이 없습니다. 눈물을 흘려도 여러분을 위해서 흘렸습니다. 만약에 선생님이 여러분을 위해 눈물 흘리며 살아 온 기반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선생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싸움의 경계선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통일교회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이 부풀어올라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랑의 눈물을 자아내게 할 수 있는 심정과 공적의 터전을 닦으며 나간다 할진대, 통일교회는 전도하지 않아도 발전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활동을 안 해도 영계에서 통일교회를 증거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계에 널려 있는 영통인들이 통일교회 문 선생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활동하다 죽었으면 자식이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책임을 여러분이 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여러분도 그것을 본받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누구보다도, 내 아버지 어머니보다도, 내 누나 형님보다도, 내 동생보다도 더 사랑하고 여러분에게 더 귀한 것을 주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몽땅 주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나를 위하려 하고 나를 따라오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던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랬으면 그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느 최악의 죽음 길을 가더라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망하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언제나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천상세계까지 가야 할 복귀 노정이 남아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안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길은 죽어서도 가야 합니다. (22-149)
첫댓글 고맙습니다*^^*
아주
참부모님 감사합니다
아주
하늘부모님 천지인 참부모님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