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홍중인)』 서술 전략 고찰* **
김기림***
<차 례> 1. 들어가는 말 2. 홍중인 생애 및 교유 3. 『대백록』 구성과 내용 4. 『대백록』에 나타난 서술 전략들 5. 나가는 말
<국문초록> 이 글은 『대백록』이 소통적 텍스트라는 관점에서 『대백록』에서 활용된 소통을 위한 전략과 의미를 고찰하려 했다. 홍중인은 시배-노론-이 만든 ‘공안’이 왜곡되 었다고 인식하고 이에 대응, 소통하기 위해 『대백록』을 썼다. 홍중인(1677-1752) 의 호는 화은(花隱),자는 양경(亮卿)이다. 이익, 신광수, 권상일, 신정모 등 주로 천안 부근의 남인들과 교유했다. 『대백록』은 1750년 전후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보 인다. 정릉변고 사건, 기축옥사 및 그와 관련한 인물들-정철, 성혼, 최영경, 정개청 -과 이이, 김장생, 송시열, 윤선거, 윤증 등 서인의 논의를 거론하면서 그에 대해 논박했다. 논박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서술 전략을 보면, 논거 자료를 병치하여 객 관성을 확보하기, 서인들의 논의를 역이용하여 편당성 배제하기, 자신의 당파-남 인-를 비판하여 공정성 높이기 등이다. 이 전략들은 남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술 한 『동소만록』, 서인 논의가 옳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질문과 답변 방식을 썼 던 『아아록』과는 대비된다. 그리하여 공적 소통의 장에서 인정을 끌어내 공안(公 案)이 될 가능성을 높이려했다. 이런 점에서 홍중인의 『대백록』은 서인과 남인, 노
* 이 논문은 2021년 한국고전연구학회 동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하였다. 논문을 완성하기까지 토론과 심사를 통해 도움을 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 이 논문은 2020년 조선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2020-206942-02). *** 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부교수 한국고전연구 53집/한국고전연구학회/2021/63∼92쪽. http://dx.doi.org/10.20516/classic.2021.53.63 64 한국고전연구 53집
론과 남인이 대립하며 자기편 당의 논의에 갇혀 있는 데서 벗어나 상호 소통함으 로써 세간의 편파적 인식에 균열을 내고 균형감 있는 인식을 재구축하려는 시도를 담아냈다.
주제어 『대백록』, 당론서, 홍중인, 기축옥사, 기축록, 정철, 유성룡
1. 들어가는 말 소통을 소박하게 정의한다면 서로 통한다는 말이다. 의견이나 생각 등이 사람들 사이에 서로 통함을 의미한다. 소통 행위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수 용하며 사고를 확대할 수 있다. 소통에는 주고받는 것이 있다. 구어 또는 문자 텍스트일 수도 있다. 조선후기를 표현하는 어휘 중 ‘탕평’이 있다. ‘탕평’의 계기는 ‘붕당’이었 다. 17세기 이후 서인‧ 남인‧ 노론‧ 소론 등의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각 당 파 논의가 서로 우위를 놓고 경쟁하면서 자기편 당의 논의나 견해를 담은 텍스트들이 제작, 유통, 후대로 전해졌다. 이것들은 야사 또는 당론서 기능 을 했고,1) 당파에 속한 이들은 이 텍스트를 정치적, 정책적 논의를 만드는 데에 참조했다. 즉 독서물이자 당의 논리 구성 지침서로서 기능했다. 그런데 이 텍스트들은 즉시 쓰여지지 않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쓰여진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된다. 담론이 특정한
1) 이 글에서 논의할 『대백록』을 비롯하여 이런 류의 글에 대해 안대회는 야사류(野史 類)로, 김용흠과 원재린 등은 당론서로 규정한다. (안대회, 「『패림』과 조선후기 야사 총서의 발달」, 『남명학연구』 20, 남명학연구소, 2005,; 원재린, 「조선후기 남인 당론 서 편찬의 제 특징-『동소만록』과 『조야신필』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53, 한 국사상사학회, 2016.; 김용흠, 「조선후기 노론 당론서와 당론의 특징-『형감』을 중심 으로-」, 『한국사상사학』 53, 한국사상사학회, 2016.) 이런 류의 글들을 각 개인에 따 라 야사 또는 당론서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대백록』 경우 ‘시배들의 공안에 대응 하는 글’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점에서 당론서 성격이 더 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65
학문적, 정치적 입장 안에서 행해지는 진술의 집합이라고 할 때,2) 이 텍스 트들은 당파의 입장에서 재구성되고 서술된다는 점에서 담론적 성격을 갖 는다. 이런 텍스트를 쓰는 것은 과거 사실을 ‘현재 소통의 장’으로 가져 와 소통할 내용을 공유함으로써 정보를 제공하거나 다각적 사유를 위해서이 다. 조선후기 상황에서 본다면, 각 당파의 논의들이 정치적, 정책적 토대로 기능하기 위해서 과거 사실들을 재서술 하여 ‘현재 소통의 장’으로 끌여들 일 필요가 있었다. 소통의 상대는 당파 내부 구성원, 상대 당파, 그리고 세 상 사람들이다. 홍중인은 이 책이 ‘곤월을 잡은 자의 취사에 도움이 될 것’ 이라고 기대했다.3) 즉 『대백록』을 저술함으로써 그것을 당파 내부 구성원 들과 공유하여 결속력을 강화하는 소통물로서 기능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상대 당파에게 그 사안을 제기하여 ‘공안’ 내용을 조정하고자 하며 세상을 향해 공적 영역에 내놓는 소통용 텍스트로서 기능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대백록』은 당파 내·외적 소통을 위한 텍스트라는 성격을 지닌다. 『대백록』에는4) 기축옥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와 관련한 인물들, 기 해년 예송과 관련 인물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의 일들이 실려 있다. 홍중 인은 숙종 및 영조대 사람이다. 기축옥사는 1589년, 병자호란은 1636년, 기 해예송은 1659년 일이다. 『대백록』은 1740,50년대에 편찬되어 거의 100여 년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중인은 이것들을 집중적으로 분석, 해석했다. 이 사안들은 당론과 연계되어 홍중인이 살던 시대까지 논란거리 로 언급되었다.5) 이에 홍중인은 과거 사실을 다시 자신이 살던 시대 소통의
2) 황수영, 「소통의 이론과 그 철학적 기반-리쾨르의 해석학을 중심으로-」, 『개념과 소통』 3, 한림대 한림과학원, 2009. 73쪽. 3) 『대백록』, “此錄不能無助於秉袞鉞者之取捨焉.” 4) 『대백록』은 규장각 소장본이 있고, 『조선당쟁관계자료집』제2집에도 실려 있다, 2019 년에 김용흠‧ 원재린‧ 김정신 등이 『대백록』을 역주했다. 『대백록』에 관한 연구는 없 고 『대백록』 역주에서 쓴 「대백록 해제」가 있다. 5) 기축옥사의 경우 1598년 말에 일어난 후 몇 년 사이에 마무리 되었으나 실제로 수십 66 한국고전연구 53집
장으로 끌여들였다. 기축옥사를 계기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다. 이후 서인의 집권이 지속되면서 기축옥사나 그 외 여러 사건들에 관한 논의 중 서인들의 논의만이 공인되어 하나의 ‘공안(公案)’처럼 여겨졌다. 동인이나 남인들의 논의는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었다. 홍중인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 에서 생겨났다. 그리하여 ‘공안’이 된 것들과 관련 있는 과거 사실들을 재소 환하여 소통의 장에 놓음으로써 세간의 인식을 전환하고자 시도했던 것이 다. 이에 이 글에서는 홍중인이 『대백록』을 통해 소통하기 위해 썼던 서술 전략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
2. 홍중인 생애 및 교유 홍중인(1677-1752)의 호는 화은(花隱),자는 양경(亮卿)이다. 모당 홍이 상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홍만조(洪萬朝), 어머니 안동 권씨는 권진(權瑱) 의 딸이다. 1713년(숙종30)에 성균관 진사가 된 후 선릉참봉(1721, 경종1), 도감의 낭관(1724, 영조 즉위년), 통례원인의(1728, 영조4), 공조와 금부의 낭관, 형조와 선혜청 낭관 등의 내직을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진안현감, 원 성현감, 6)1741년에는 한산군수 등을 역임했다. 이 때 한산과 서천 백성들이
년 동안 쉽게 끝나지 않았던 장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정호훈, 「조선후기 당쟁과 기록의 정치성-기축옥사 희생자의 가해자 공방과 관련하여」, 『한국사학사학보』 33, 한국사학사학회, 2016, 156쪽 참조) 성혼의 경우 이이와 함께 문묘종사 대상으로 거론되었지만 기축옥사를 확산시켜 원 옥(冤獄)으로 만든 소인이라는 혐의로 문묘종사 명분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이에 대 해 서인들조차 단일한 의론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기축옥사 때 간여한 일이 후대 문묘종사 명분 만들기를 쉽지 않게 했던 것이다.(김정 신, 「기축옥사와 조선후기 서인 당론의 구성, 전개, 분열-노(老) ‧ 소(小) 분기 과정에 서 성혼에 대한 논란과 평가를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53, 한국사상사학회, 2016, 121∼168쪽 참조) 6) 이 때가 1738년 전후인 듯하다. 「묘지명」에서 ‘원성 현감(原城縣監)에 제수되었다.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67
물길을 놓고 다투었는데 홍중인이 직접 나가 물길을 살핀 후 도랑을 터서 한산군 쪽으로 물길을 되돌려 놓았다. 당시 권세를 잡았던 조관이 서천군의 뒤를 봐주었으므로 이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 이후 천안 화령에 살면서 독 서와 저술 생활을 했다. 그의 호가 화은인 것을 보면 이곳의 지명을 따서 붙인 듯하다. 첫 부인은 이봉구(李奉龜) 딸이며 두 번째 부인은 유훤익(柳 煊翼) 딸이다. 그의 교유 관계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현재 유집(遺集)이 없고 이익이 쓴 묘지명만이 그의 생애를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이 외에 다른 문인들의 문집에 산발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들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그가 교유한 사람들을 꼽는다면 성호 이익, 석북 신광수, 하정 이덕주(芐亭 李德 胄, 1696∼1751),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 1697∼1759) 이치재 신정모(二 恥齋 申正模, 1691∼1742), 노봉 김정(蘆峯 金佂, 1670∼1737) 등이 있다. 이익과는 가장 절친했던 듯한다.7) 『성호사설』에 그와 주고 받은 편지가 3편 있고, 그가 죽은 후 동생 홍중징이 행장을 써서 부탁하자 묘지명을 써 주었고 〈사칠변증〉에도 발문을 써 주었다. 석북 신광수는 홍중인이 군수를 그만두고 천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시를 지어 서운한 마음을 토로했고, 〈敬送洪明府歸田序〉와 〈洪明府花嶺幽居序〉를 지어 홍중인이 전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을 존중했다. 일찍이 홍중인은 아버지 묘 옆에 재실을 지어 추원당이라 불렀는데 그 기문을 하정 이덕주에게 부탁하였다. 신정모 와 김정의 경우에는 그들이 죽었을 때 만사를 짓기도 했다. 홍중인은 만년에 천안에 살았는데 이 부근 지역에는 근기 남인들이 많았
원성은 현으로 강호(降號)되었으니 기실은 주(州)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공을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승진시켰다.’고 했는데, 원주는 1729년(영조5)에 원주목에서 원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년이 차서 다시 회복하는 예에 따라 1738년(영조14) 1월 11일에 다시 원주목으로 승격되었다.(『영조실록』, 영조14년 1월 11일조 참조) 7) 김흥락, 『西山先生文集』 권 19, 〈通訓大夫襄陽府使洪公墓碣銘〉, “判敦寧贈領議 政諱萬朝號晩退堂, 有淸德重望, 是生諱重寅蔭都正, 與李星湖先生爲道義交.” 68 한국고전연구 53집
다. 안산에는 유명천‧ 유경종이 있어 안정복, 신광주, 채제공, 이맹휴 등이 시단으로써 교유했고8) 이익도 안산에 살면서 많은 이들과 교유했다. 『동소 만록』을 쓴 남하정은 평택 근처 진위에서 저술활동을 했다. 홍중인은 근기 남인으로서 이익과 가장 절친했고 이익과 이덕주 등을 통해 서울 쪽 남인들 과도 교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익이 묘지명에서 ‘만년에 서사를 좋아하여 싫증을 내지 않고 공부하였 고, 찬집한 글이 매우 많다.’고 한 것을 보면 천안에 은거한 후 저술활동에 전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 성리학 연구를 하며9) 〈이기설〉 〈사칠변 증설〉등을 저술하였다. 〈사칠변증설〉에 대해 발문을 쓴 이익은 평소 홍중 인이 성명(性命)에 대해 공부했다는 사실을 그 동안 잘 알지 못했다면서 이 글이‘논쟁의 시말을 갖추어 고찰하고 차이점을 잘 궁구하여 학계의 행 운’이라고 평가했다.10) 그는 역대 기록물이나 문학 작품을 두루 읽었기도 했다. 관료 시절 한가한 틈을 타 『동방시화』(7권)를 엮었는데11) 후에 『시 화휘성』 등의 저본 역할을 했으며, 심노숭은 『대동패림』 속에 『시화휘편』 이라는 이름으로 넣기도 했다.12) 역대 정치적 사건이나 학문적 주제에 대 해 폭 넓게 수집하여 엮은 『아주잡록』(47책 107권)이 있다. 이 책은 정약용
8) 심경호, 「정치와 교유-조선후기 당벌과 문학」, 『동방한문학』 69, 동방한문학회, 2016, 11∼13쪽. 9) 김흥락, 『서산선생문집』 권20, 〈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敎洪公墓碣銘〉, “曾祖諱 重寅敦寧都正。尙禮敎究性理。爲士林重.” 10) 이익, 『성호전집』 권54, 〈四七辨證跋〉, “今洪君瞻漢奉其王父都正公所著辨證一 卷, 以遺命來托, 蓋該考始末, 究極同異, 必擧古訓, 斷之以己意, 若拔疔括瞙, 一 歸於順正, 卽吾學之一幸也.” 11) 이익은 홍중인이 역대 시 작품을 모아 『동방시화』를 엮었다고 했다. 동생인 홍중징이 1734년 발문을 써 정리하였다고 한다. (권난희, 「홍중인의 『동국시화휘성』고찰-『시 화휘성』 ‧ 『시화휘편』과의 편찬체재 및 조목 선입양상 비교를 중심으로-」, 『남명학연 구』 59, 남명학연구소, 2018, 183∼184쪽. 참조) 12) 권난희, 「홍중인의 『동국시화휘성』고찰-『시화휘성』 ‧ 『시화휘편』과의 편찬체재 및 조 목 선입양상 비교를 중심으로-」, 『남명학연구』 59, 남명학연구소, 2018, 188∼194쪽.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69
이 아들에게 안목을 넓히는 독서물로 추천할 정도로13) 후대에 널리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3. 『대백록』 구성과 내용 『대백록』은 서인‧ 노론쪽 당론들이 성행하는 세태를 목격하고 엮은 책 이다. 『대백록』 맨 앞에서 편찬 동기를 서술했다. 한번 색목이 분열된 이후 세상에 공론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다. 근래 시배 (時輩)들의 문집와 패사, 야승 등을 보면 사람의 사악함과 바름, 일의 시비 등에 대한 논의들이 모두 서로 달라 억측하여 결정하고 단정하고 있으며 어떤 것은 간혹 거짓으로 지어낸 것들도 있다. 그 마음 속으로 영원히 속일 수 있고 귀신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나 이는 그럴 이치가 없는 것이다. 이에 사실을 살피고 그에 근거하여 거짓말들을 분변해보니 시배들의 문집에서 나와 공안(公 案)이 된 것들이 많았다.14) 시배는 당쟁이 격심하던 때 상대편 당의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 서인, 노론, 소론, 남인들 모두 같았다. 여기에서 시배 문집이란 서인들의 기록물이다. 그 기록물들이 논의한 사람의 사정(邪正), 일의 옳고 그름의 내용이 공정하지 않다고 하였다. 평가도 서로 다르고 ‘아무것도 없는데 거
13)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21, 서, 〈寄二兒〉, “士大夫子弟, 不識國朝故事, 不見先輩 議論, 雖其學貫穿今古, 自是鹵莽, 但詩集不須急看, 而疏箚墓文書牘之屬, 須廣 其眼目, 又如鵝洲雜錄, 盤池漫錄, 靑野謾輯等書, 不可不廣搜博觀也.” 14) 『대백록』, “一自色目分裂之後, 世無公論久矣. 近觀所謂時輩文集及稗史野乘 則 人之邪正, 事之是非, 皆以論議同異, 臆決而斷置之, 亦或有白地做出者. 其心以 爲百世可誣, 鬼神可欺, 而此必無之理也. 玆敢考據事實, 以辨其讏說, 而多出於 時輩文集, 無非公案也.”(김용흠·원재린·김정신(역주) 『대백록』을 참조하였고 필요 에 따라 번역 내용을 약간 수정하였다.) 70 한국고전연구 53집
짓으로 지어내 쓴 내용’도 있다고 했다. 기록자들은 ‘오래도록 세상과 귀신 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럴 리는 없다고 단안했다. 홍중인은 비판만 하지 않았다. 직접 과거의 다양한 기록물들을 읽으며 시배들의 논의 들을 검토했다. 그 결과 시배들의 논의가 ‘공안(公案)-공적으로 인정된 사 실’로 통용되고 있지만 ‘왜곡과 거짓’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바로잡는 일’이 필요하므로 『대백록』을 편찬했다고 하였다. 그는 왜곡과 거짓의 대표적인 사례로 이항복의 『백사집』 안에 있는 『기축록』을 거론했다. ‘진본을 고쳐 거짓 기록으로 보충했고 그 중 기자헌, 유성룡의 일이 가장 왜곡되었기 때 문에 책 맨 앞에 둔다.’고15) 했다. 거짓 공안을 바로 잡기 위해 글을 써서 ‘앞으로 백 년 지나면 공론이 혹 정해질 수도 있을 때 취사하는 데에 도움’ 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16) 이런 점에서 『대백록』은 당시 시배들의 ‘왜곡.거 짓’인 공안에 대응하는 텍스트인 셈이다. 『대백록』 구성을 보면, 맨 앞에 저술 의도를 밝혔고 『백사집』 속 『기축 록』 내용이 위조되었다는 것, 기축옥사 당시 이발의 어머니와 아들이 죽은 일과 관련하여 정철‧ 유성룡의 책임 여부에 관련한 내용이 있다. 그 다음에 는 ‘정릉사(靖陵事)’, ‘봉심후정대신의(奉審後呈大臣議)’, ‘여이참의별지(與 李參議別紙)’ 등의 제목이 있는 글이 실려 있다. 그 다음에는 ‘기축록’이란 큰 제목이 있고 그 아래에 ‘정언신’ ‘최영경’ ‘정개청’ ‘우계 성혼’ ‘율곡 이이’ ‘김장생’ ‘조익’ ‘윤선거‧ 윤증’ ‘예송’ ‘송시열’ ‘김집’ 등의 제목을 달고 각 인물 행적을 소개하면서 비평을 했다. 그리고 특별한 제목을 내세우지 않은 채 정시한, 김시양, 남구만, 윤지완, 황정욱 등 여러 인물들의 일화를 차례로 소개했다. 마지막에는 정개청이 지은 〈동한절의진송청담(東漢節義晋宋淸
15) 『대백록』, “如白沙集己丑錄之改其眞本而補以僞錄事, 及奇相國柳西厓事, 故先 記于卷首.” 16) 『대백록』, “自今前去百年, 則或庶幾公論大定, 而此錄不能無助於秉袞鉞者之取 捨焉. 故名之以待百.”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71
談)〉 전문(全文)을 실었다.
『대백록』은 정여립을 제외하고 기축옥사와 관련된 사람들 중심으로 구 성되었다. 가장 왜곡된 것부터 앞에 놓았다는 말을 상기할 때 왜곡이나 거 짓화된 정도에 따라 순서를 정했던 듯하다. 『백사집』의 『기축록』에 대해서 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을 토대로 왜곡의 진실을 평가했다. 『백사집』은 처음 에 강릉에서 간행되었는데 거기 실린 『기축록』에는 정철이 기축옥사를 처 리한 행적들이 소상히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정철에게 불 리한 것이 많아 반포되기도 전에 정홍명 등이 와서 모두 가져갔고, 이후 진주에서 다시 간행할 때 내용 일부를 바꿨다는 것이다. 홍중인은 자신이 강릉판본을 직접 보았는데 별집 제 4편 6장 6행부터 8장 20행까지 파낸 흔적이 있었다고 했다. 일찍이 허목이 이 사실을 언급했었는데 그제서야 허목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역사 기록이란 있었던 사 실을 그대로 기록해야지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변조 또는 위작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항복이 쓴 『기축록』은 실제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진실 되게 기록했는데 정철의 자식들이 과거 진실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완전히 왜곡했다는 사실에 대해 ‘가짜 기축록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기축록』 부분에서는 정언신, 최영경, 정개청, 우계 성혼, 율곡 이이 순서 로 배열했다. 정언신은 기축옥사 당시 대신인데도 역신 정여립과 결탁했다 는 죄목으로 귀양갔다. 그가 정여립 모반 사실을 고변한 사람들을 죽여야한 다고 주장했고, 정여립이 그에게 병기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호남 유생인 양형, 양천경 등이 상소한 데서 촉발되었고 정철은 정언신 처벌을 극력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양천경 등이 정철의 사주를 받아 무고한 것이 라고 자백했다. 홍중인은 이 사건이 명백히 무고임을 강조했다. 정철이 정언 신 처벌을 강력히 주장했고 양천경 등을 사주했는데도 세상에서는 오히려 정철이 정언신을 구하고자 노력했다는 내용이 떠돌았다. 정철 행장에도 오 직 정철만이 대신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말로 두 번이나 구제해줄 것을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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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사형을 감면하고 귀양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했다.17) 홍중인 이 볼 때 사실이 심하게 왜곡되어 대신이 죽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최영경은 정여립 모반 사건의 연루자라고 하여 죽임 당했다. 정여립 모 반 사건의 주모자로서 ‘길삼봉’이란 이름이 나왔는데 강현, 양천경 등이 ‘길 삼봉은 최영경이다.’고 말했다. 심문할 때 최영경은 자신은 길삼봉이 아니 라고 했지만 결국 죽었다. 정개청은 ‘배절의(排節義)’설을 지어 후학을 현 혹했다는 정암수의 상소, 정여립을 찾아갔고 편지를 주고받는 등 교분이 두터웠다는 홍여순의 말로 인해 죽었다.18) 홍중인이 볼 때 정언신, 최영경, 정개청은 심하게 왜곡하고 없는 것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말을 만들고 퍼뜨 린 사람들 때문에 죽은 가장 억울한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이야기를 앞쪽에 배치했던 것이다. 반면, 『대백록』에서 성혼과 이이는 자신들의 이해 및 편의에 따라 사실 또는 학설을 왜곡하여 해석한 사람들로 나타난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 가는 길에 성혼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서인들이 변호한 내용을 쓰고 이에 대해 반박했다. 이이의 경우 입산했던 사실, 퇴계와 그의 학설을 낮추 보고 비판했던 내용을 서술했다. 성혼이 의리를 왜곡하여 자신에게 유리하 게 해석하고, 이이의 이기설은 주자의 논리와 부합하지도 않고 그가 입산했 던 것은 불효이며, 심지어 이이의 학설은 불교적 색채가 강하게 되었다고 했다. 홍중인이 볼 때, 이것들은 모두 왜곡, 잘못된 학설이고 성혼과 이이가 왜곡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처럼 『대백록』은 사실을 왜곡, 거짓화 된 것들을 거론하면서 왜곡의 정도나 양상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그가 책 서두에서 밝혔
17) 김수항, 『문곡집』 권21, 〈左議政松江鄭公請諡行狀〉, “其後儒生梁詗疏陳彥信當 上變日, 議欲斬上變者, 上益怒, 命再鞫彥信仍賜死. 公又啓曰, 宋朝家法, 未嘗戮 一大臣. 我朝二百, 除反逆外, 未嘗殺一大臣. 仁厚之風, 無異趙宋, 今宜遵之. 上 不聽, 他相不敢言, 公獨再啓論救, 得減死遠配” 18) 이정철, 「정개청 옥사와 그 배경」, 『역사학연구』 61, 호남사학회, 2016, 71∼78쪽.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73
듯이 ‘공정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점철된 공안(公案)’을 공적 소통의 장에 내놓음으로써 깨뜨리고자 했던 의도와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대백록』이 언제 편찬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아주잡록』 편찬이 어느 정도 진척된 이후 『아주잡록』을 편찬하면서 동시에 『대백록』을 편찬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익이 묘지명에서 ‘만년에 서사를 좋아하여 찬집한 글이 많다.’고 하면서 『아주록』 30권을 언급했는데 홍중인이 ‘붕당이 생긴 이후로 기록들이 편파적이다.’라고 비판하면서 『아주잡록』을 편찬했다고 하였다.19) 또 『아주잡록』 권107은 이중환의 『택리지』 내용을 베껴 놓은 부분이다. 『택리지』는 1751년에 저술했고, 이 글에 대해 홍중인은 ‘살피건 대(按)’라고 하면서 『택리지』 내용을 분석, 평가하였다. 아주(鵝州)는 한산 (韓山)의 별칭이다. 아주라는 이름을 넣은 것은 그가 한산군수를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가 1741년이므로 『아주잡록』 편찬은 그 때부터 시작 하여 거의 1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권상일은 편지에서 ‘아주잡록을 겨우 한번 봤을 뿐’이라고 했는데 이 편지에 ‘인생 7,80’이라는 표현이 있다. 권상일이 1679년 태생인 점을 고려할 때 7,80살 정도라면 적어도 1749년에 이후에 『아주잡록』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주 잡록』을 본 권상일은 편지에서 ‘이 기록은 세교에 큰 도움이 될 터인데 장 차 바른 논의로 되돌아가는 것은 백 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20) 하였다. 여기에서 ‘대백’이란 표현이 나온다. 홍중인이 책 이름을 ‘대백’으로 한 것이 이 말을 수용한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권상일의 생각과 비슷했을 터이고 이 단어를 보고 ‘대백’으로 굳혔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대백록』은 『기축록』을 비롯하여 『일월록』 『괘일록』 『서애연보』
19) 이익, 『성호선생전집』권61, 〈敦寧府都正洪公墓碣銘〉, “晩而悅書史, 矻矻不少倦, 所撰輯甚多. 嘗謂黨立之後, 記載偏頗, 遂取舍於其間, 有鵝州錄三十卷.” 20) 권상일, 『淸臺先生文集』 권7, 〈答洪良卿〉, “令公此錄, 大有助於世敎, 將來歸正之 論, 當待百世後爾.” 74 한국고전연구 53집
『탄옹집』 『향동문답』 『노서유고』 『우득록』 『은대일기』 『운암록』 등에 있 는 일화, 편지, 묘지명 등의 내용을 발췌하여 그대로 쓰고 있다. 이 책들과 글들은 거의 모두 『아주잡록』에 실려 있다. 이를 테면 ‘윤증이 어떤 사람에 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탄옹이 윤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윤선거 가 말하기를’이라고 하면서 편지 일부 내용을 직접 인용했다. 이 내용들은 각각 〈답권자정이진(答權子定以鎭)〉21) 〈여윤인경(答尹仁卿)〉22) 〈여권사 성론최사축사(與權思誠論崔司畜事)〉23)라는 제목으로 『아주잡록』에 실려 있다. 즉 『대백록』에서 인용한 글들은 『아주잡록』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대백록』에는 기해년 예송과 관련한 항목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여기서 홍중인은 주로 윤증이 쓴 〈대호서유생논예소(代湖西儒生論禮疏)〉를 집중 적으로 분석, 비판하였다. 그런데 이익이 1750년 홍중인에게 쓴 편지 3통은 모두 예론에 관한 내용이었다. 기해년 예송은 효종에 대해 자의대비가 어떤 복제에 따라야 하는지가 논의의 중요한 관건이었다. 효종을 장자로 규정할 지, 차자로 또는 서자로 규정할지 등이 논란거리였다. 이익은 편지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잘 생각해보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는 홍 중인이 이익에게 예론-복제 문제를 문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로써 본다면 『대백록』의 예송 부분은 이익과 상호 논의하면서 집필했을 가능성 이 높다. 이러한 여러 점을 감안할 때 『대백록』은 아주잡록과 동시에 정리, 편집 했거나 적어도 아주잡록을 대강 정리한 이후에 기축옥사, 정릉변고, 예송 등과 관련한 내용만 골라 편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아주잡록』을 편찬 하면서 각각의 기록들에 대한 논의를 붙이고, 1740년 후반에서 홍중인이 사망한 1752년 사이에 『아주잡록』 기사들 중 당론과 관련된 것들 특히 기
21) 『아주잡록』 제42책 권96 『명재유고 상』에 있다. 22) 『아주잡록』 제38책 권86 『탄옹집』에 있다. 23) 『아주잡록』 제37책 권83 『노서유고』에 있다.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75
축옥사와 관련한 것들만 선별하고 자신의 논의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4. 『대백록』에 나타난 서술 전략들 『대백록』은 시배들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되고 거짓화된 공안(公案)을 깨뜨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공안들이 너무 많아 그것을 깨뜨리고 세상의 생각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홍중인은 자신의 글을 읽고 ‘분노하 는 자가 많고 기뻐할 자는 적을 것’이라고24) 우려했다. 소수 의견을 세상에 내어 다수 의견에 균열을 내는 일의 어려움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글 서술 에 치밀한 전략을 구사해야만 할 필요성이 강하다는 말이다.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다수의 시배들 공안에 대해 서술 방식상 전략적으로 대응하 고 있다. 1) 자료의 병치: 객관성 확보 『대백록』 우선 자료 병치 방식을 활용했다. 시배들의 공안이 ‘왜곡’된 것이라고 비판한 만큼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대백록』에서는 다양한 논거를 수집, 제시한 다음 그에 대해 논평하는 방 식을 취하였다. 정릉의 변고에25) 관한 서술에서 유성룡이 쓴 〈정릉사〉와 성혼이 쓴 〈봉
24) 『대백록』, “見此錄者, 必怒者多 而喜者少 甚可畏也.” 25)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사건이다. 정릉의 경우 파헤쳐진 상태 에서 시신이 구덩이에 있어다고 하고 이를 다른 곳으로 옮겨 봉심했다. 이 때 유성룡, 성혼이 함께 살폈다고 한다. 유성룡은 시신이 중종 것이라고했고 성혼은 중종 것이라 고 단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능 옆에 불에 탄 시신의 재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성혼의 논의 쪽으로 기울어 봉심했던 시신은 버리고 능 옆에 있던 재를 모아 다시 묻고 능을 조성했다고 한다. 76 한국고전연구 53집
심후정대신의〉, 〈여이참의별지〉 3개를 나란히 배치했다. 〈정릉사〉에서는 파헤쳐진 능 안에 있던 시신이 분명 중종의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반면 성 혼은 시신이 중종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주장을 펼쳤다. 서로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대백록』에서 두 사람의 글을 나란히 놓았다. 물론 성 혼의 글에 대해 논평을 가하기는 했지만 자료를 있는 그대로 병치함으로써 독자들이 판단할 여백을 두었다. 그럼으로써 『대백록』의 논평이 얼마나 객 관적인지를 보여주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26) 기축옥사와 관련한 서술에서도 자료를 나란히 놓았다. 기축옥사는 이후 여러 사건 및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며 정쟁(政爭)거리가 되었고 숙종대 서 인과 남인이 갈등할 때도 현안으로 불거져 나왔다.27) 중심 쟁점은 이발의 어머니와 아들을 죽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문제였다. 『대백록』은 먼 저 단정하지 않았다. 대신 김장생이 황종해에게 보낸 편지와 『기축록』 기 사를 나란히 제시하였다. 사계 김장생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르기를 “유정승이 위관이 되 었을 때 이발의 늙은 어미와 어린 아들이 어찌 살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그런 데 죄 없는 80세 늙은 부인을 구제하는 말을 한 마디로 하지 않아서 …(중략)… (10세도 되지 않는 아이의) 목을 꺾여 죽었다. …(중략)…그런데도 그 허물을 오직 송강에게 돌리고 있으니 어찌 편벽되지 않는가”라고 했다.…(중략)… 『기 축록』에 이르기를 “경인년(1590년)2월에 …(중략)…조대중의 옥사로 인해 교지
26) 3개 자료의 원래 내용을 그대로 실은 후 홍중인은 성혼의 논의에 대해 반박한다. 정릉의 시신의 진위 여부는 우선 오래된 것인지 최근의 것인지를 기준으로 삼았어야 했다는 점, 오래된 시신이라면 금방 구할 수 없으므로 진짜 중종의 시신이라는 점, 성혼은 ‘왜적이 우리를 속이려고 가짜 시신을 광에 넣었고, 오래 되어 시신이 마르고 손상되었다.’고 했는데 왜적이 가짜 시신을 가져다가 광에 넣었을 까닭이 없다는 점, 시신을 후장하면 오래 되어도 시신이 썩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어 성혼의 논의가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27) 정호훈, 「조선후기 당쟁과 기록의 정치성」, 『한국사학사학보』 33, 한국사학사학회, 2016, 154쪽.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77
를 내려 위관을 교체하여 정철을 다시 위관에 임명했다.”고 했다.…(중략)…『서 애연보』에 이르기를 “4월에 휴가를 청하여 안동으로 돌아갔고 5월 29일 고향에 있을 때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6월 그믐에야 조정으로 돌아왔다.”고 했다.28) 김장생이 쓴 편지, 『기축록』 『서애연보』 세 자료를 나란히 놓았다. 논의 초점은 이발의 어머니와 아들이 죽은 때가 5월 13일인데 그 때 위관이 누구 인가였다. 그에 따라 두 사람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가가 밝혀지는 일이었 다. 김장생은 ‘유정승이 위관’이 되었을 때라고 했고, 『기축록』에는 2월이 지나 정철이 위관이 되었다고 했다. 『서애연보』에서는 유성룡이 5월에 고 향에 있었고 6월에야 조정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김장생은 유성룡을 지목 하고 『기축록』과 『서애연보』는 구체적 날짜를 언급하여 정철을 지목했다. 이에 대해 ‘정철이 다시 위관이 된 때는 3월이었고 9월 10일까지 체차된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이 죽은 때는 유성룡이 우의정에 임명되기 전이었고 아직 조정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였다.’고 논증했다.29) 이 세 자료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두 사람이 죽은 때에 위관이었던 사람이 누구인가를 추론하게 하고 자신의 논증과 그 결과가 사실을 왜곡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럼 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2) 서인 논리 역이용: 편당성 배제 『대백록』이 겨냥한 것은 이른바 시배들이 왜곡한 ‘공안’들이었다. 시배
28) 『대백록』, “金沙溪與人書曰 柳相之爲委官也, 李潑之老母稚子, 豈不欲其生也. 無罪八十老婦, 無一言救之, 竟斃杖下. 未滿十世兒不卽死…(중략)…則折其項殺 之. …(중략)…今也專歸咎於松江, 豈不偏哉. 按己丑錄云 庚寅二月, 沈守慶拜右 相 仍爲委官, 以曺大中獄事, 遭嚴旨遞委官而鄭澈還爲之. …(중략)…西厓年譜云 四月 乞假歸覲安東 五月二十九日 在鄕拜右相,六月晦 始還朝. 29) 『대백록』, “澈自三月還爲委官, 至九月初十日, 崔守愚再入獄, 而其間澈更無遞易 之事, 潑之母子之死, 又在西厓未拜相, 未還祖之前.” 78 한국고전연구 53집
들이 사실을 자의적으로 편집하고 자기 쪽에 유리한 당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30) 곧 편당성이 문제였다. 편당성은 자기 쪽 논거만을 이용할 때 더 심해질 수 있다. 『대백록』에서는 상대편 논리를 이용하여 논의의 편당 성을 피하고자 하였다. 논거를 다양하게 제시하되 서인들의 글을 이용하여 자신의 논의를 강화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송시열이 조사달에게 쓴 편지에서 이르기를 “‘노선생께 과연 우계에 대해 의심 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었다.’하였으니 이는 바로 능변 이후의 일을 지적하신 겁니 다. 당시의 일은 선사만 의심한 것이 아니라 우계를 아버지처럼 섬겼던 황추포까 지도 오히려 의심하여 간쟁하였습니다. 이것을 어찌 헐뜯었다고 하십니까”31) 〈여조사달(與趙士達)〉이란 글이며 『송자대전』에도 있다. 노선생은 김 장생을 가리키고 능변의 일이란 정릉이 변고 문제에 대한 성혼의 태도를 말한다. 성혼은 정릉 안에 있던 시신이 중종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고 당시 논의했던 이들이 성혼 의견을 수용하여 불탄 시신의 재를 거두 어 능을 다시 조성했다. 김장생, 송시열은 물론 성혼 제자였던 황신까지 성 혼의 태도나 의견에 이의를 달았다. 『대백록』에서는 그들 사이에 있었던 논 의를 끌어와 성혼이 주장했던 정릉변고 논의에 문제가 있었음을 증명했다. 처음에 최영경을 국문할 때 송강이 손으로 자신의 목을 그으면서 말하기를 “저 공이 내 목을 이와 같이 자르고자 했다.”하였다. 윤선거문집에 나온다.32)
30) 원재린, 「조선후기 남인 당론서 편찬의 제 특징-『동소만록』과 『조야신필』을 중심으 로-」, 『한국사상사학』 53, 한국사상사학회, 2016, 205∼208쪽. 31) 『대백록』, “宋時烈與趙士達書曰 老先生(沙溪)果有疑於牛溪, 而其所疑之義矣, 是指陵變後事也. 其時之事, 不惟先師疑之, 雖以黃秋浦之父事牛溪, 猶不免甚疑 而力爭之, 豈以此爲訾毁者哉.” 32) 『대백록』, “永慶初鞫時, 松江以手畫其頸曰 彼公欲斫吾頭如此.”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79
이 글은 윤선거가 쓴 〈우계연보후설 봉품신독재〉에 나온다.33) 강현과 양천경이 ‘최영경이 곧 길삼봉이다.’라고 상소했고 최영경은 체포되었다. 최영경은 평소 정철을 소인으로 지목하면서 비방하여 정철이 원한을 품었 다.34) 정철은 최영경을 보자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는데 심수경은 죽 을 사람에게 측은한 마음을 갖는 게 사람의 도리라고 충고했었다. 하지만 정철은 임금에게도 최영경이 괴이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이 사실은 서인 이었던 윤선거 글에도 있다. 정철이 이런 행동을 한 사실들이 홍중인과 같 은 당색인 사람들의 기록에도 있을 터이지만, 『대백록』에서는 도리어 윤선 거의 글을 논거로 제시하여 정철이 자신이 ‘나는 최영경을 효우라고 칭찬했 다.’는 설을 강력히 부인하였다. 그러면서 최영경이 길삼봉이라고 말한 ‘양 천경은 정철의 문인이라는 것이 성문준과 윤증이 이미 말했으니 정철이 사주했다는 의심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했고 ‘손으로 목을 그 어서 머리를 자르는 형상은 윤선거 또한 가리고 숨길 수 없었으니 그의(정 철) 마음속에 쌓인 생각이 이와 같다면 (최영경)을 구원하려는 마음이 어디 에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라며35) 논평을 가했다. 서인들의 말을 인용함으 로써 자신의 논평이 정당하고 편당성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독재 김집이 윤공에게 답장으로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군자의 진퇴는 오 직 의리 여하에 달렸다. 부르는 명이 있는지 없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선생의 진퇴가 과연 단지 부르는 명이 있고 없고에 달린 일인가?…(중략)…이는 의리가 근본이라는 것을 살피지 않고, 다만 부르는 명이 있고 없다는 것만을 위주로
33) 이 외에도 『노서유고』 〈與權思誠論崔司畜事〉에도 나온다. 34) 김강식, 「선조 연간 최영경의 옥사와 정치사적 의미」, 『역사와 경계』 46, 부산경남사 학회, 2003, 4쪽. 35) 『대백록』, “千頃之爲澈客, 成文濬 尹拯已言之, 白沙亦言其捏造輳合出於千頃, 則澈安得免指使之疑. 而畫頸斫頭之狀 尹宣擧亦不得掩諱, 其處心積慮如此, 則 伸救之心, 從何處出乎.” 80 한국고전연구 53집
한 것이다. 이 어찌 어폐가 크지 않은가? 세상 사람들이 괴이하게 생각하는 것 을 능히 풀어줄 수 있겠는가?” 신독재문집에 나온다.36) 송시열이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임진왜란 당시 한 가지 일에 대해서 는 우리 또한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고 했다.37) 청음선생이 말하기를 “처음에 만약 나아갔다면 끝내 위태로워지는 단서가 없 었을 것이다.” 윤공과 그 문도들이 비문을 고쳐달라고 세 차례나 청했지만 청음 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 가르침 또한 난리가 났을 때 나아가지 않은 것은 옳지 않았다는 것이다.“ 석실어록에 나온다.38) 이 글은 성혼 관련 내용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 가는데 성혼이 나와 뵙지 않았다. 이 일은 이후 잦은 논란거리였다. 윤선거는 성혼의 외손 자였으므로 외할아버지 행적에 관해 세간의 의혹, 논란을 잠재우려했다. 성혼이 나아가지 않은 것은 선조가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며 임금이 부르지 않는데 나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즉 당시 성혼은 벼슬하지 않 은 산림 처사였기 때문에 명이 없으면 나아갈 수 없었다고 하면서 이를 중국의 양구산, 윤화정, 호문정 등도 명이 있을 때에야 나아갔다는 전례에 비유했다. 하지만 김집, 송시열, 김상헌 등은 성혼의 태도를 비판했다. 임금이 위태 로운 지경에 처했을 때에 신하가 임금을 뵙는 것은 군신간의 당연한 의리인
36) 『대백록』, “金愼獨齋答尹公書曰 凡君子之進退, 惟義理如何耳. 召命有無, 固不 足言也. 先生之進退, 其果只於召與不召耶. …(중략)…是未察義理之事爲本, 而徒 以召命有無爲主. 豈不是語病之大者, 而其能解世人之怪乎.(出愼獨齋集)” 37) 『대백록』, “宋時烈書曰 壬辰一款 吾輩亦未歸一.” 38) 『대백록』, “淸陰先生曰 初若赴亂, 則畢竟似無臲卼之端矣. 槪尹公及其徒三次請 改碑文, 而淸陰終不許. 有此敎亦不赴難爲不是耳.(出石室語錄)”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81
데 부르는 명이 있고 없음을 기준으로 삼아 나아가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 고 평가하였다. 특히 김집은 군신간 의리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부르는 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폐이며 세간 의혹을 풀어줄 수 없다고 충고한다. 김집, 송시열은 서인-노론의 중추적 인물이다. 특히 송시열의 말은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홍중인은 송시열 의 위상에 관해 ‘송시열의 권세가 온 세상에 진동하자 그에게 맞서는 자는 몸이 가루가 되고 부서졌다. 공경으로부터 일반 선비까지 감히 어기지 못하 였다, 자제들은 부모형제를 배신해도 감히 송시열을 배신하지 못했다.’라 고39) 설명했다. 그리하여 성혼을 옹호하는 ‘시배’들의 논의가 그들 안에서 조차 힘을 갖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에 대해 군부가 피난가고 종사 가 무너지는데 신하가 산림의 선비로 자처하면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 성혼이 사는 곳 가까이 임금이 지나갔는데도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 등은 중국의 세 사람 일과도 다르고40) 『춘추』에서 말한 ‘다른 나라에 갔지만 아직 벼슬하지 않은 이가 본국에 환란이 일어나면 돌아와 옛 임금을 위해 죽는다.’는 의리와 맞지 않다고 비판한다.41)
이처럼 『대백록』은 시배들이 만든 논의를 깨기 위해 시배들의 논의를 이용한다. 대개 공적 논의를 자기편에 유리하게 하려면 자기편의 논거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는 편당성 시비를 낳는다. 홍중인은 자신이 곧바로 비 평하는 방법을 쓰지 않고 저편의 논의로써 서술함으로써 편당성 시비에서 비껴갈 여지를 확보한다. 실제로 홍중인은 『대백록』에서 당시 정철을 여러 사람들이 싫어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논거로 송시열이 쓴 『석실어록』 내
39) 『대백록』, “時烈權勢振一世, 當之者糜 觸之者碎. 故上自公卿下之韋布 莫不趨 附, 無敢違忤.…(중략)…爲其子弟者, 寧負其父兄, 不敢負時烈.” 107쪽. 40) 『대백록』, “其所引三先生事亦有說, 中國士大夫與我國不同…(중략)…牛溪此時, 方有實職, 而聞變之初, 終不奔問, 駕過其居, 亦不出迎, 此與三先生事, 同耶否耶” 41) 『대백록』, “春秋傳所謂, 去國而未及士者, 本國有亂 歸死舊君者 亦何義耶.” 82 한국고전연구 53집
용을 제시하면서 ‘이상은 모두 정철과 같은 당색인 사람들의 말이다. 정철 은 소인이고 최수우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은 당대의 공의(公議)로 정해 졌다.’고 썼다.42) 자신의 논의가 편벽되거나 당파에 치우치지 않았음을 명 백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자성(自省)적 서술: 공정성 확보 자성이란 자기 쪽 인물이나 상황을 객관적,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이다. 홍중인은 저편 ‘시배’들만 비판하지 않는다. 자기편도 냉정하게 비 판한다. 민종도와 유명현 무리들이 허적을 우러러 본받아 어두운 지경에서 술수를 사 용하였다. 이에 권모술수를 자랑하는 일이 한때의 풍속이 되었다. 남인들의 화 는 전적으로 여기에서 기초가 되었다.43) 눈치 빠르고 민첩하다는 것은 곧 영리함을 다르게 말한 것이다. 영리함이 어 찌 사대부의 일이 되겠는가. 이 또한 남인 풍습이 크게 변한 것인데 그 유래를 따져보면 허적이 앞장서서 이끌고 유명현과 민종도가 그 뒤를 이었다.44) 이 글들은 허적을 비판한 내용이다. 허적은 기사년 이후 남인을 실질적 으로 이끌어가면서 권력이 강하였다. 김석주와 결탁했지만 김석주의 계교 에 빠져 몰락하였다. 홍중인은 허적이 어두운 속에서 권모술수를 쓰고 자랑
42) 『대백록』, “右皆鄭澈同色人之言也. 莫不以鄭澈爲小人, 崔守愚爲寃死, 則一世之 公議, 可爲大定矣.” 43) 『대백록』, “閔宗道 柳命賢之徒, 又慕效許積, 用其術於幽暗之境, 故一時風習多 以權謀術數自衒者, 南人之禍, 專基於此耳.” 44) 『대백록』, “機警卽伶俐之變稱也. 伶俐豈士大夫事乎. 此又南人風習之大變者, 究 厥所由來, 則許積實倡之於前, 而柳命賢閔宗道繼之於後.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83
하는 사람으로 규정했고 민정도와 유명현도 그 부류라고 하였다. 허적이 술수를 부리는 풍습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고 결국 ‘남인이 화를 입게 된 기 초’라고 비판했다. 남인이었던 남하정도 허적을 ‘김석주의 정탐정치 속내를 간파하지 못해 역모로 몰락한 인물’로 규정했다.45) 홍중인은 더 나아가 ‘남 인을 술수나 부리는 부류로 전락시키고 몰락시킨 근본적 원인 인물’로 규정 했다. 남하정보다 더 가혹하다. 사계의 문도 송시열 이유태 이상의 무리가 학자라고 빙자하여 등용되었는데 입으로는 성명을 떠들면서 행동은 장사꾼 같았다. 남인들은 국외자로 자처하면 서 그 행동들을 절통해 했다. 도에 대해 돌아서서 혹은 허탄한 행동을 하거나 모함하는 논의를 했다. 학자들을 희롱하고 모욕하는 일을 고아한 운치로 여겼고 시배들을 격하게 비방하는 일을 기세가 드높다고 여겼다. 자제들 중에 학문에 뜻을 둔 이가 있으면 떼로 일어나 조소하니 한때 풍속이 크게 변했다.46) 여기서는 서인의 태도와 비교했다. 서인들은 학자로 행세하며 떠들썩하 게 자신들을 드러내는데 남인들은 마치 ‘국외자’인 듯 행동했다고 했다. 서 인들의 행태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는 자세를 비판했다. 남인들도 모함하는 일, 학자를 모욕하고 시배들을 비방만 하는 일을 드높이고 학문하는 데에 뜻을 둔 이들을 조소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남인들의 이러한 태도가 좋은 풍속을 변화시켰다고 비판했다. 서인에 대해 절통만 할 뿐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비난만 했던 남인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 고 비판하였다.
45) 원재린(2016), 앞의 논문, 210쪽. 46) 『대백록』, “沙溪門徒宋時烈李惟泰李翔之徒 假托學者, 紛然進用, 口談性命, 行 若駔驓. 南人自處以局外, 絶痛其所爲. 一反其道, 或爲浮誕之行, 或爲詖險之論, 以琓侮學者爲高致, 以激訐時輩爲氣岸, 子弟之有留意學問者, 則群起而嘲笑之, 一時風習大變.” 84 한국고전연구 53집
기해년 이후 예를 논한 상소 중 미수(眉叟)만이 예론의 득실을 따질 뿐이었 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이겨서 빼앗고자 하는 데에 마음이 있었다. 이미 국가의 예가 바로 잡혔고 죄인이 쫓겨났으니 여기서 그쳤어야 했다. 그런데 갑인년에도 6년간 예론으로 시종을 삼아 지리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마치 이것을(예론) 서 인을 협박하는 칼자루로 삼는 것과 같았다.47) 기사년에 남인이 득세한 것은 매우 부정(不正)했고 반나절 정청 또한 책임을 모면하려고 임시로 꾸민 일임을 면치 못하였다. …(중략)…기사년 이래 6년 동 안 조정에 공정한 논의는 하나도 없었고 오직 임금을 가리어 당을 비호하는 것 만 일삼았다. 이런 술수를 갖고서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데 6년 동안 나라를 맡았으니 또한 오래 버틴 것이다.48) 남인들이 득세할 때 상황을 평가했다. 기해년 예송 때 서인인 송시열은 효종을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간주하여 기년복을 주장했고 남인인 윤 휴는 효종이 왕실의 종통을 계승한 적자로 인정해야 한다면서 참최 3년복 을 주장했다.49)기해년에는 기년복이 채택되었는데 갑인년 다시 복제 문제 가 발생했고 기해년 기년복에 대한 논의가 재발되었다. 거의 6년 이상 예송 이 진행되었는데 홍중인은 그 빌미를 제공한 쪽이 남인이라고 보았다. ‘이 미 국가의 예가 바로 잡혔고 죄인들이 쫓겨나’ 기해년 예송은 결론이 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예송 문제로 서인과 남인의 갈등을 격화시킨 일을 비판한 것이다. 더구나 남인들의 의도가 올바른 예를 정립하
47) 『대백록』, “己亥以後論禮疏, 眉叟但論禮得失而已. 其餘皆未免有意於傾奪耳. 旣 已釐正邦禮, 罪人斯黜, 則斯可已矣. 而甲寅六年, 以禮論相終始, 未免支離, 而亦 似乎以此爲脅持西人之欛柄耳.” 48) 『대백록』, “己巳南人得之, 甚不正. 半日庭請, 亦未免塞責.…(중략)…己巳六年之 內, 朝庭無一公議, 專事蔽上護黨, 持此術, 雖一日不可居, 六年當國, 亦已久矣.” 49) 김정신, 「기축옥사와 조선후기 서인 당론의 구성, 전개, 분열-노(老) ‧ 소(小) 분기 과정에서 성혼에 대한 논란과 평가를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53, 한국사상사학 회, 2016, 144∼146쪽.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85
려는 게 아니라 ‘서인을 협박하는 칼자루’로써 사용하려는 데 있다고 했다. 『대백록』 ‘예송’에서 윤증의 글을 논박하면서 서인이 제기한 예론을 세세히 따져 물었다. 그렇다고 남인 쪽 예송 태도가 모두 옳다고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남인들이 지루하게 예송을 끌고 간 것은 서인을 협박을 위 한 것이라고 하면서 남인들의 속내를 그대로 폭로했다. 기사년 남인이 득세한 일도 ‘올바르지 않다.(不正)’고 혹평했다. 장희빈 이 아들을 낳자 숙종은 곧바로 원자로 책봉하려 했다. 남인들은 동조했고 송시열과 서인들은 극력 반대했다. 송시열과 서인 대신들이 귀양갔고 남인 들이 권력을 잡았다. 서인들이 ‘왕비 소생이 있을 수 있다.’는 명분으로 반대 했다. 홍중인 입장에서 후궁 소생 아들을 출생 직후 즉시 원자로 책봉하는 일에 동조하여 득세한 일은 결코 바른 것이 아니었다. 또 집권했던 6년간의 행태가 공정하지도 않고 ‘임금을 가리고 자기 당만을 비호하는’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올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득세하였으므로 최소한 정치는 공평하 게 해야한다는 것이 홍중인의 생각이었다.50) 그러면서 하루도 못 버틸 술 수를 갖고 6년이나 버틴 남인의 세력은 그나마 ‘오래간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남인 인물과 행태를 객관적 입장에서 조망하면서 솔직하고 가혹한 비판을 감행한다. 이런 서술 태도는 같은 남인인 남하정과 대조적이다. 『동소만록』에서 남하정은 남인 집권 시기의 정치와 사회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경신년 살육 이후 원망의 기운이 온화한 기운을 범하여 매년 흉년이 들어 공적,사적으로 저장한 것이 부족했다. 기사년에 남인이 정권을 잡은 이래로 평 온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중략)…사대부들은 마시고 즐겼고 임금 또한
50) 홍중인은 각 당파의 행태에 대해 양비적 관점을 견지했다. ‘동인은 옳고 서인은 틀리 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서인은 옳고 동인은 틀리다는 것도 잘못이다.’라고 했다. 이를 보면 홍중인이 생각하는 ‘공론’은 자기 당파만의 이해만 고집하지 않는 의견이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6 한국고전연구 53집
함께 즐겼다. …(중략)…갑술년 이후 해마다 흉년이 들어 창고가 텅 비었다. 병 자년과 정축년에 이르러서는 큰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들이 길에 가득했 다. 무인년에는 역병이 돌아 사방에 전염되어 사대문 밖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 었다.51) 경신년(1680, 숙종6)과 갑술년(1694, 숙종20)은 남인이 실세하고 서인이 득세했었다. 남인은 기사년(1689, 숙종15)에 득세하여 5,6년간 지속했다. 그 때를 ‘평온’ ‘풍년’ ‘즐거움’ 등으로 표현한 반면, 서인의 집권 시기에 대해 ‘원망의 기운’ ‘흉년’ ‘기근과 역병’ 등으로 표현했다. 남하정은 남인들이 정 치를 잘하여 태평시절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반면 홍중인은 기 사년 이후 남인들의 정치 행태가 ‘임금을 가리고 자기 당만을 비호’하는 정치였다고 혹평했다. 남하정과 정반대 평가하여 남인만을 편드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대백록』의 평가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 공평하다는 것 을 보였고 그럼으로써 『대백록』 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평가의 신뢰성을 높였다.
5. 나가는 말 『대백록』에서 홍중인은 자료 병치, 상대편 논리 역이용, 자성적 서술 등 의 방식을 썼다. 이는 자신의 논의의 객관성 및 공정성을 확보하고 상대 논리의 정당성과 신뢰성을 약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많은 이들이 당쟁과 관련한 사건, 인물 이야기들을 수집,
51) 남하정, 『동소만록』 권3, “庚申殺戮之後, 怨氣干和, 比年凶歉, 公私皆藏俱乏. 及 至己巳午人當國以來, 時和歲豐.…(중략)…當路士大夫, 爭務飮樂, 上亦與之同 樂.…(중략)…甲戌以後, 歲又荒歉, 府庫蕩然, 及至丙子丁丑, 大無饑, 殍在路, 戊 寅疹疫, 八路蔓延, 京都門外, 積尸如山.”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87
기록하는 등 정치사 중심으로 자료를 모으려는 경향성을 띠었다.52) 홍중인 은 노‧ 소론‧ 남인 간 대립이 격화되었다가 점차 노론 논의가 공인화되어 힘을 얻어가는 시기에 살았다. 영조는 탕평을 내세웠지만 1740년 경신처분, 1741년 신유대훈으로 소론 대신들의 관작이 추탈되고 대신 노론 대신을 신원했고 이에 따라 노론 중심의 탕평기반이 마련되었다.53) 신임옥사에 대 한 서인 노론의 주장이 정론으로 확정되면서54) 노론의 논의는 공적으로 힘을 갖게 되었다. 반면, 소론 및 남인은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남인들은 영조 연간 무신난, 을해옥사(나주괘서사건) 등으로 적지않은 타격을 입었 다. 오상운, 이덕형 가문과 안정복, 권철신 등 소수의 남인만이 정치에 참여 했을 뿐 소수세력, 정치 권력에서 소외된 재야세력이 되었다.55) 노론에 비 해 상대적으로 위축된 상태로 명맥을 이어가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17세기 이래 『진감』 『이대원류』 『단암만록』 등 서인들의 기록들이 많아지고56) 널리 퍼지면서 실록과 같은 공식적인 기록에도 올랐 다. 왕조실록은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공적 텍스트였던 만큼 실록에 오른 기사는 공안(公案)으로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과거 역사적 사실에 관한 서인 중심적 관점에서 재구성된 논의들이 공적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 했고 세간 인식도 편향성을 지닌 상황이었던 것이다.
52) 안대회, 「『패림』과 조선후기 야사총서의 발달」, 『남명학연구』 20, 남명학연구소, 2005, 319쪽. 53) 최성환, 「영조대 후반의 탕평정국과 노론 청론의 분화」, 『역사와현실』 53, 한국역사 연구회, 48쪽. 54) 원재린, 「영조대 후반 소론‧ 남인계 동향과 탕평론의 추이」,『역사와현실』 53, 한국역 사연구회, 2004, 75쪽. 55) 이근호, 「조선후기 남인계 가문의 정치 사회적 동향-한음 이덕형 가문을 중심으로」, 『역사와 담론』 69, 호서사학회, 2014, 72쪽. 56) 정호훈, 「『아아록』의 조선 정치사 서술과 인식태도」, 『역사와 현실』 85, 한국역사연 구회, 2012, 39쪽. 88 한국고전연구 53집
이런 상황 속에서 남인들의 논의는 공적 영역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홍중인은 ‘시배들의 왜곡’에 대응하여 바로 잡을 필요성을 절감 했다. 정치적 위상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사실 자체가 왜곡되거 나 제대로 서술되지 않은 내용을 꼼꼼하게 고찰하고 재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57) 객관성, 공평과 공정성 확보는 더 긴요했다. 무조건적 비방은 소통의 장에서 오히려 역효과를 부른다고 여겨 ‘시배를 비방하는 것을 기세 높은 것’으로 여기는 남인들의 병폐를 비판했다. 되도록 공평하고 객관성 띤 논의로 재구성하여 소통의 장으로 끌여들이고자 했다. 이런 태도는 서인 또 노론의 논의가 옳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하는 질문을 던지고 답변하는 방식을 써서 자신의 판단과 관점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아아록』의 방식과 대조적이다.58) 남하정이 『동소만록』을 편찬할 때 소론과 노론의 자료를 포괄하여 편당성을 극복하려던 것과는 비슷하나59) 자기 당이 집권할 시기 를 칭송했던 것과는 차별적이다. 그럼으로써 공적 소통의 장에서 인정을 끌어내고 공안(公案)으로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다. 『대백록』이 이런 서술 전략을 구사한 것은 서인과 남인, 노론과 남인이 대립하면서 각각 자기편 당의 논의에만 갇혀 있는 데서 벗어나 상호 소통함 으로써 세간의 편파적 인식에 균열을 내고 균형감 있는 인식을 재구축하려 는 데에 있었다. 『대백록』에 대해서 당시 또는 후대인들의 구체적 언급은 찾기 어렵다. 홍중인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것을 세상에 내놓았으므로 오 히려 『아주잡록』이 상대적으로 더 알려졌다. 『대백록』의 내용들이 『아주 잡록』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 ‘시배들의 문집, 패
57) 원재린(2016), 앞의 논문. 58) 정호훈, 「『아아록』의 조선 정치사 서술과 인식태도」, 『역사와 현실』 85, 한국역사연 구회, 2012, 60쪽. 『아아록』은 노론 문사인 남기제가 편찬했다. 정호훈에 따르면, 정 치를 자신의 관점에서 재정리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어 저자의 주관을 적극 개입시 키면서 노론 논의에 동조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하였다. 59) 원재린(2016), 앞의 논문. 210쪽. 소통의 관점에서 보는 『대백록』 서술 전략 고찰 89
사, 야사’를 두루 보고 ‘사실에 근거하여 그 설들을 변별’해보았다고 하면서 자료를 재배치하고 논평을 덧붙였다. 이런 점에서 『대백록』은 자기 구체적 정보를 제공하여 소통함으로써 당파 내부적 단결 및 자성을 유도하고, 대외 적으로는 서인-노론 및 세상 사람들의 인식 전환을 도모하고자 한 텍스트 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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