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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남씨 족보 (宜寧南氏 族譜)
의령남씨 족보는 조선 후기 문신 남익훈(南益薰)이 1693년(숙종 19년)에 편집하여 간행한 의령남씨의 족보이다. 체제는 표지, 서문, 보도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1697년(숙종 24년)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지었다. 보도는 8층 횡간으로 구획되어 있고, 매 면은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가 매겨져 있다. 서문에 따르면, 고려말 영양남씨 남진용의 세 아들 중 둘째인 남군보(南君甫)가 의령남씨로 분관하였다. 이 족보는 의령남씨 족보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체제와 내용이 비교적 충실하여 자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의령남씨 족보 1693년 간행된 계유보
분량은 4권 2책이며, 권1은 1책, 권2∼4가 1책이다. 2책 말미의 “계유년에 함흥부에서 간행했다(癸酉歲咸興府開刊)”이라는 간기에 따르면, 1693년 함흥부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제와 판심제 모두“의령남씨족보”이다. 크기는 반곽이 가로 20.5cm, 세로 26.6m이며, 유계(有界), 서문은 8항 16자, 주쌍행(註雙行),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 체제는 표지(表紙), 서문(序文), 보도(譜圖)로 구성되어 있다. 범례와 발문은 없으며, 1책의 맨 말미에는 남재(南在)의 시문과 남재, 남심(南深)의 왕지(王旨)주1가 판각되어 있다.
서문은 1697년(숙종 24년)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것이다. 이 서문에 따르면, 의령남씨는 신라 때 귀화한 남민(南敏)의 후손으로 그 원류는 영양남씨(英陽南氏)였다. 그러나 고려말 남진용(南鎭勇)의 세 아들 중 장자 남홍보(南洪甫)만 영양남씨를 유지하고, 차자 남군보(南君甫)가 의령남씨, 3자 남광보(南匡甫)가 고성남씨로 분관함으로서 남씨도 3관으로 분리되게 되었다. 즉 의령남씨는 남군보를 시조로 하는 영양남씨의 한 분파임을 알 수 있다.
의령남씨 서첩(書牒) <용인시박물관>
- 조선시대 / 8.2×66.5 / 구238
의령남씨의 가계를 기록한 문서이며 시조 남민과 8대 남홍보, 남군보, 남광보가 각각 영양남씨, 의령남씨, 고성남씨의 시조가 된 사실, 의령남씨 1세 남군보부터 5세 남재와 남은까지 기술하였다. 남은의 인적사항은 일부만 있고 나머지는 잘려 나간 것으로 보인다.
역시 서문에 따르면, 의령남씨는 17세기 이전에 이미 두 종류의 구보가 있었지만 내용이 매우 소략하여 남선(南銑)이 이를 수정하였지만 이 역시 미비점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남익훈(南益熏)이 동종을 탐방하고 여러 자료를 수합하여 보다 완본(完本)을 편찬한 다음 임지인 함경감영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당시의 각판(刻板)은 남익훈(南益熏)의 아우 남치훈(南致熏)이 경주부윤에 임명되자 바닷길을 통해 경주로 옮겼고, 부윤직에서 해임되자 다시 의령 소재 남진용의 산소 아래로 옮긴 것을 진주목사로 부임한 막내 동생 남지훈(南至熏)이 영구 보관을 위해 장판실(藏板室)을 지어 보존하였다고 한다.
보도(譜圖)는 8층 횡간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매 면은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字標)가 매겨져 있다. 권1의 첫 장에는 남씨의 시조 남민의 약전을 기록한 다음 중간 부분에 8층 횡간을 그어 맨 위의 남주(南倜)부터 그 아래로 7세손 홍보 · 군보 · 광보 형제까지 수록하였다. 남주를 맨 상단에 둔 것은 남민과의 계대(系代)가 미상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다음 장에서는 의령남씨의 시조인 남군보에서 그의 현손대까지 수록하고 그 하단은 공백으로 처리한 다음 장을 바꾸어 남재부터 수록하고 있다. 이는 이 족보가 군보의 손자 천로(天老)의 장자 을번(乙蕃)→재(在) · 은(誾) · 실(實) · 지(贄) 계열과 차자 을진(乙珍)→근(瑾) · 이(珥) · 규(珪) · 집(緝) · 속(續) · 약(約) 계열을 중심으로 편집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런 방식으로 1책에는 군보의 11세손까지, 2책에는 대략 15∼16세손까지 수록되어 있다.
각 인물의 주기는 17세기 이전에 활동한 사람은 비교적 자세한 편이고, 이 이후의 인물은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전자의 경우 현달한 인물은 자(字), 호(號), 과거(科擧), 관직(官職), 시호(諡號), 봉호(封號), 묘향(廟享) 관계, 묘소(墓所) 위치, 배위(配位)의 성관(姓貫), 처부의 이름, 묘소 위치 등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고, 그 나머지 인물도 과거, 관직, 묘소의 위치, 배위의 성관, 처부의 이름은 반드시 기재하고 있다. 사위와 외손은 대부분 본관이 생략된 채 과거 또는 관직만 기록되어 있다.
자녀는 선남후녀(先男後女)에 입각하여 등록되었으며, 외손과 서자녀도 수록되어 있다. 외손은 대략 3대를 수록하였고, 서자계열은 수록에 있어 대수 제한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단 다른 족보와는 달리 서자는 측자(側子), 서녀는 측녀(側女)로 표기한 것이 이채롭다. 양자로 나간 경우는 본생(本生) 항목의 이름 하단에 “출위○○후”(出爲○○后)라 표기하고, 양계(養系)에서는 이름 위에 계(繼) 자를 표기하여 출계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한편 1책 말미에 수록된 시문은 남재 친필의 시를 판각한 것이다. 이 시는 초서체의 7언시인데, 그 내용은 “붕격청운만리여(鵬擊靑雲萬里餘) 한림호기숙견제(翰林豪氣孰肩諸) 월봉여득신시구(月峰如得新詩句) 막석송창지척서(莫惜松窗咫尺書)이며, 하단에 구정남재(龜亭南在)라 씌여 있다. 왕지는 1399년(건문 1) 남심(南深)이 통훈대부에 임명될 당시의 왕지와 1415년(태종 15) 9월 남재가 “순충분의동덕개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령부원군 수문전대제학세자부(純忠奮義同德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宜寧府院君修文殿大提學世子傅)”에 임명될 때 작성된 왕지이다. 이처럼 선대의 시문이나 왕지(敎旨) 원본을 판각하는 예는 다른 족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매우 드문 경우라 하겠다.
이 족보는 의령남씨 족보 중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로서 체제와 내용이 비교적 충실하여 자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선남후녀적인 수록 방식과 출계 사항을 명시한 점 등을 고려한다면 유교적 종법 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17세기 중후반 족보의 전형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남재(南在) 친필의 시문
남심(南深)의 통훈대부 임명 왕지 1399년
의령남씨 족보는 남익훈의 조상에 대한 헌신과 의령 선조들의 노력으로 현재까지 후손들의 기록을 더해 전해져 오고 있다. 첫 번째 족보인 계유보는 1693년 남익훈(南益熏)이 편집, 간행하고 1697년에 남구만이 서문을 작성 주관하였다. 두 번째 족보 무인보는 1758년 남유용(南有容)이 주관하였으며 세 번째 족보 갑자보는 1808년(순조8년)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주관하여 편찬하였다.
1808년(순조8년)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주관한 갑자보<용인시박물관>
2024년 7월 26일 의령남씨 의산공파 25세손 남진우 종친은 의령남씨 족보 15점을 용인시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기증한 족보가 1808년 남공철(南公轍)이 주관하여 편찬한 갑자보로 보인다.
▶ 의령남씨 족보 편찬을 위한 선조 행적기록 수집
의령남씨 족보는 17세기 이전에 이미 두 종류의 구보가 있다 전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미비하고 서첩(書牒) 형태로 7代의 기록만 전할뿐 이후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완하고자 남선(南銑)이 이를 수정하였지만 이 또한 족보의 형태보다는 간략히 작성한 것이다. 그 후 의령남씨 족보 간행을 위해 남익훈(南益熏), 남구만(南九萬)이 여러 종친을 찾아다니며 선조의 기록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간행하였다. 이들은 각 지방의 종친과 서찰을 통해 관청의 기록을 찾아 선조의 기록을 필사하였다. 현판이나 비석이 있으면 탁본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나주호장일기(羅州戶長日記)에서 남씨 관련 기록을 필사한 문서가 남아 있으며 이 문서는 남구만 또는 그 후손이 작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서찰을 통해 남치근의 관한 기록을 확인해서 보내라는 지시와 그에 대한 답변 문서가 남아 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수년간의 선조행적을 수집하여 1693년 남익훈이 계유년 함흥부에서 편집, 간행하였으며 1697년(숙종 24년)에 영의정 남구만이 서문을 작성하였다.
위 같은 서찰과 문서는 남구만 가계의 편지와 시문, 제문, 축문등과 함께 용인시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나주호장 기사(羅州戶長 記事), 남치근(南致勤) 관련 문서는 현재 용인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남구만 가계의 고문헌 112건 편지, 교지, 시권, 호구단자, 고서 등이 있다.
▶ 나주호장 기사(羅州戶長 記事)
나주호장 기사(羅州戶長 記事) 일부<용인시박물관>
이 문서는 금성일기(錦城日記)에서 남씨 관련 기록을 초록한 것이다. 금성일기는 전남 나주(羅州) 관아에서 고려말부터 조선말까지 관원의 부임 및 이임, 사신의 도착과 출발 일자를 기록한 일지로, 금성호장일기(錦城戶長日記), 나주호장일기(羅州戶長日記)라고도 한다. 이 문서의 서두에‘나주호장일기’라고 적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금성일기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오래되고 믿을 만한 기록으로 인정받아 고증에 활용되었는데, 이 문서의 작성자 역시 여기서 선조 관련 기록을 찾아본 것으로 보인다. 문서의 작성자는 정확하지 않으나, 남선(南銑)과 남구만(南九萬)이 중간에 적어놓은 기록이 있는데, 남선의 기록이 먼저이고 남구만의 기록이 나중이니, 이 문서는 남구만 또는 그 후손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에 등장하는 의령남씨는 남을번(南乙番), 남재(南在), 남질(南秩), 남회(南薈), 남곤(南袞), 남세준(南世準), 남치근(南致勤)이다. 이들은 전라도 관찰사, 나주목사 등으로 부임하거나 차사(差使)에 임명되어 나주를 방문하였다.
- 병인년(1386년) 신우(辛禑) 12년
춘하번 안렴사 남재(南在) 【고려 말 병인년(1386년)부터 우리나라 숭정(崇禎) 계미년(1643년)까지 258년 지나 9대손 남선(南銑)이 겸순찰사(兼巡察使)로 이 도(道)를 다스렸다. 무신년(1668년) 12월 7일 10대손 남구만(南九萬)이 두 번 절하고 기록하다. 】
▶ 남치근(南致勤) 관련 문서
남치근(南致勤) 관련 문서 <용인시박물관>
남치근(南致勤)에 관한 기록을 확인해서 보내라는 지시와 그에 대한 답변이다. 지시를 내린 사람과 답변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모두 의령남씨 가문 인물로 추정된다. 대자(大字) 초서(草書)로 쓴 본문이 지시에 해당하고, 본문 끝에 소자(小字) 해서(楷書)로 덧붙인 내용이 답변에 해당한다.
지시한 사람은 다른 기록을 통해 남치근이 1555년 전라좌도 방어사, 1556년 전라병사, 1558년 순별사를 역임한 사실을 전달하며, 전라 감영에 있는 기록을 확인하라고 지시하였다. 역대 관원의 명단인 선생안(先生案)을 조사하여 정확한 재직 기간을 확인하고, 그 기간에 남치근이 작성한 문서를 모두 베껴써서 보내라고 하였으며, 그밖에 남치근과 관련된 현판이나 비석이 있으면 탁본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아울러 남치근이 제주 목사를 역임한 전력이 있으니, 제주에 있는 문서도 확인하여 남치근과 관련된 것을 베껴써서 보내라고 하였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내린 지시이다.
그러나 답변을 보면 남치근 관련 기록을 찾는 일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안에는 정확한 재직 기간이 없고, 현지에 전하는 이야기도 없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문서가 남아 있지 않으며, 관련 현판도 없다는 것이다. 의령남씨 가문의 후손들이 선조의 행적을 찾는 작업에 몰두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선생안(先生案) : 해당 관청에서 재직한 역대 관원의 명단이다.
▶ 의령남씨 계유보 편찬과 보존한 선조
- 남재(南在) 충경공 5세
조선전기 도병마사, 경기도관찰사, 좌의정 - 계유보에 시문, 왕지를 판간
- 남심(南深) 양정공파 6세
통훈대부, 상호군 - 계유보에 왕지를 판간
- 남선(南銑) 충경공 직제학공 감찰공파 14세
조선후기 이조판서 - 초기족보인 서첩(書牒)을 소략 수정
- 남구만(南九萬) 충경공 충간공 간성공파 15세
조선후기 함경도관찰사, 형조판서, 영의정- 1697년 계유보의 서문 작성
- 남익훈(南益薰) 충경공 충간공 부정공파 16세
조선후기 함경도관찰사 – 종친의 행적수합 편집, 1693년 계유보 간행
- 남치훈(南致薰) 충경공 충간공 부정공파 16세
조선후기 형조참판, 강원도관찰사 – 각판(刻板)을 함경에서 경주로 옮김
- 남지훈(南至熏) 충경공 충간공 부정공파 16세
조선후기 진주목사 – 각판(刻板)을 경주에서 의령으로 옮겨 영양남씨 남진용 묘소 아래 장판실(藏板室)을 건립하여 보존
- 남유용(南有容) 충경공 직제학공 감찰공파 19세
조선후기 홍문관교리, 홍문관제학, 형조판서 – 1758년 무인보를 주관하여 편찬
- 남공철(南公轍) 충경공 직제학공 감찰공파 20세
조선후기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 1808년 갑자보를 주관하여 편찬
의령남씨 족보 계유보 남익훈, 남구만, 남치훈, 남지훈, 남심, 남재, 영의정 남공철
<참고문헌>
의령남씨족보(宜寧南氏族譜)-(계유본)
약천집(藥泉集)-(남구만)
용인시박물관
용인시박물관 자료총서1 - 의령남씨 고문헌 Ⅰ
맑은공기의 산행 여행기 블로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자-김학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