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밑줄 친 ㉠과 ㉡의 왕명을 순서대로 쓰시오. [2점]
∙왕 11년 7월에 ㉠백제 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 서쪽의 40여 성을 쳐서 빼앗았다. 8월에 또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으로 가는 길을 끊으려 하니, 왕이 당 태종에게 사신을 보내 위급한 사정을 알렸다. ∙㉡왕 원년(元年) 정월 17일에 비담을 베어 죽였는데, 이에 연루되어 죽은 이가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牛頭州)의 군주(軍主)에 임명하였다. 당 태종이 사신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서, 전(前)왕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고, 아울러 ㉡ 왕을 주국(柱國)으로 삼고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
[김종권 세상의 모든 역사 한국사 p51, p54] 의자왕, 진덕여왕
㉠의자왕 ㉡진덕여왕
▶선덕여왕 때 난이 발생하고, 당시 선덕여왕은 죽고, 이후 진덕여왕 때 난이 진압됨
[우리역사넷] 선덕여왕 16년(647)에 비담(毗曇)·염종(廉宗)의 반란이 일어났다. 비담은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擧兵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비담 등 30여 인이 죽음을 당했다. 이 난을 진압하는 과정은≪三國史記≫金庾信傳(上)에 상세히 전한다. 비담의 군대는 明活山城에 포진하고 김유신이 지휘하는 王軍은 月城에 포진하여 10여 일 동안 공방전을 벌인 끝에 비담을 죽이고 그 九族까지 처형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선덕여왕말 진덕여왕초이고 처음 비담군이 여왕을 폐위시키려 했으나 “왕이 스스로 방어했다”는 것이다. 비담의 난이 일어난 선덕여왕 16년(647) 전후는 신라가 일대 위기에 봉착했던 시기였다. 즉, 선덕여왕 11년에는 백제에게 大耶城 등 40여 성을 빼앗겨 김춘추가 고구려에 청병외교를 갔었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김유신이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 접경에 가서 김춘추를 돌려보내라고 시위한 것도 양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진덕여왕 원년(647)에는 김춘추의 對唐外交로 羅唐軍事同盟이라는 획기적 성과를 얻었으나 이 동맹이 백제를 제압하는 데 직접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선덕여왕 14년에는 唐의 고구려 침공을 도와 신라에서도 3만 군을 동원해서 고구려 南境을 공격함으로써 준군사동맹의 체제로 들어갔지만 이 틈에 백제에게 國西 7城을 빼앗겼던 것이다.
문제된 비담의 반란 명분은 선덕여왕 12년에 당으로 파견된 신라사신에게 당 太宗이 말한 것과 일치하므로 주목된다. 태종의 발언은 신라의 독자성을 무시한 모욕적 언사였지만 비담 등은 현재의 왕실을 척결하기 위하여 이를 이용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비담의 난은 당의 책동에 자극받아 일어난 신라 내부의 국론분열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또다시 여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과 王黨派 사이의 대립으로 표출된 것이다.
비담의 난에 대한 견해는 첫째, 이 난을 일으킨 편은 실제 상대등 비담이 아니라 퇴위를 강요받은 善德女王측이라는 주장으로서, 곧 왕당파의 친위쿠데타라는 것이다. 둘째,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 왕위에 대한 결정은 和白의 의결사항이며 그 첫 대상은 상대등이므로 이 난은 상대등 비담이 왕위쟁탈을 목적으로 일으켰고 추대될 사람도 바로 비담이라는 주장이다. 셋째, 김춘추·김유신 등 新興勢力과 비담 등 舊貴族勢力간의 쟁패전이었으며, 선덕여왕 개인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핵에서 밀려난 原銅輪系의 反眞智王系 運動이라는 견해이다.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중에 죽은 점으로 보아, 왕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줄을 알고 왕위계승을 의논하던 중, 비담 등은 진덕여왕의 옹립을 반대했고, 김춘추·김유신과 이들과 제휴한 閼川 등은 진덕여왕의 옹립을 적극 주장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여의치 않았던 비담이 직접 왕위획득을 목적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비담의 난 결과, 진덕여왕을 옹립한 왕당파가 승리함으로써 신흥세력인 김춘추·김유신 등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김춘추의 태종무열왕권을 창출시킬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된 듯하다. 따라서 진덕여왕 5년(651)에 설치한 執事部는 이런 정치세력의 변동과 그 맥락을 같이했다고 생각된다. 집사부의 기능이 王命의 시행과 일반 행정관부의 통제였다면, 화백회의 및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통제하려는 전제왕권의 필요에 의한 설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왕권전제화를 표방하면서 실은 김춘추·김유신 등이 실권장악을 위한 조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들 신흥세력이 확고한 권력기반을 형성했다지만 김춘추가 귀족사회를 대표하는 제1인자는 아니었다. 진덕여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에 오른 이찬 알천이 그 대표적 존재였다. 당시 다른 귀족이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지만, 알천이 席首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당시 상황을 잘 전해준다. 결국 구귀족에 속하면서 신흥세력에 가까운 알천이 신·구세력의 중재에 적격자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