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시판에 관하여서는 공지글에 자세히 안내했습니다. 1월 1일부터 31일까지 후원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계시가 가득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마침내 우물 밖으로 나간 개구리가 어느 날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 ‘아, 어떻게 저러고 살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우물 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거기서 살다보면 거기가 정상이라고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기에,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염려가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숨을 쉬듯 걱정하면서 사는데 그것이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걱정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이 없다고 나무랍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말씀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들도 은연중에 항상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걱정근심을 하면서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잠재의식 속에 쑤셔 넣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 까요? 저 자신을 보며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제 삶 가운데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저를 돌아보다 알게 된 것들이지, 저는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에 대해 제 삶 가운데 몇 번의 깨달음이 있었고 그때마다 영상으로 말씀을 나눴는데,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긴다는 것은 한번 깨닫고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은연중에 항상 걱정근심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나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걱정근심은 그것이 표면으로 떠오를 때마다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럼 이제 해결책을 말해보겠습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러니까 내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아뢰라는 것인데,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아시는 분인데 왜 마치 ‘알려드리라’는 어감으로 표현됐을까요? 그것에 대해 제가 찾은 답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더 보겠습니다. 바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킹제임스 흠정역으로 보면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정리하면, 모든 일에 대해 염려 대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그때 감사도 함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라는 번역은 약간의 오해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서 자녀가 공부를 못해서 걱정이라면 그 자녀가 건강한 것에 대해 감사하라, 이런 식으로 우리가 뭔가에 대해 또는 누군가에 대해 불만이 생기고 걱정이 된다면 그것에 대한, 또는 그 사람에 대한 장점, 감사한 점을 생각해 보라는 식의 조언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저는 이 구절이 그것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감사를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 앞 절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지금 바울은 옥중에 있는데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뻐할 이유는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빌 1:18). 그러니까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그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보면서 기뻐할 일, 감사할 일을 찾아보라는 얘기가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복음 때문에 기뻐하고 구원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얘기지요.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 구원 받은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것을 감사한다면 우리가 걱정근심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이것은 맞는 말이지만 나와는 너무 멀게 느껴지는 극도로 성숙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거기까지 성장하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바로 “아뢰는 일”입니다. 말을 하라는 것이지요.
말을 하는 것에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토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에게 하면 불평불만이 되고 하나님께 하면 기도가 됩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아뢰는 이유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분은 이미 아시기 때문에 내 문제들을 그분께 알려드리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 아뢰다 보면 내가 어떤 걱정을 왜 하고 있는지 나 자신이 깨닫게 됩니다. 내가 무슨 염려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 맡기니까요.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내가 하는 염려걱정이 어떤 것들인지 깨닫고 나면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내가 아니란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물론 자잘한 것들까지 걱정하고 근심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가장 근본적인 염려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직접 해결하려고 했을까요? 솔직히 말해 그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걱정근심의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염려하는 일에 대해 기도와 간구를 할 때, 먼저 나를 구원해 주신 그 복음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께 다른 것들을 왜 맡기지 못하겠습니까?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일들은 (주로 다른 사람의 선택의 문제) 내 책임이 아닙니다. 물론 그 사람의 선택이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아주 어린 자녀를 제외하고 타인의 삶은 궁극적으로 내 책임이 아닙니다. 타인의 삶에 대해 내가 염려걱정하고 있다면 주님께 맡기십시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고 섬길 책임이 있을 뿐, 그의 삶을 책임져야할 임무를 맡지는 않았습니다. 그 임무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교만입니다. 내 마음이 교만한 상태라 평안이 있을 수 없는 것이고요. 누군가를 사랑으로 섬기는 것과 그 사람의 삶을 내가 책임지려고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께 맡기십시오. 맡기지 못하고 있다면 혹시 주께서 돌보고 계심을 의심하고 있는지 돌아보아 회개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합니까?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한 원칙, 소리 내어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내가 근심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될 때마다 그분의 돌보심을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먼저 그 부분을 회개한 뒤, 가장 귀한 예수님을 나에게 내어주셔서 내 구원의 문제를 이미 해결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하나님께 내 모든 염려근심을 맡깁시다. 나보다 더 잘 아시는 그분이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부터 한번 더 읽어보십시오. 이해가 더 잘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