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경상도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 여정지는 군위 한밤마을 돌담길이다
내륙의 제주도라 불리는 한밤마을
한밤마을은 신라시대부터 형성된 마을로 천년의 세월을 품고 있다.
한옥을 끼고 돌담길이 굽이굽이 이어진 옛 모습이 가득한 마을이다
마을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오래된 돌담 너머로 수백 년 된 고택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은 ‘아름다운 전통마을’이란 수식어를 붙이기에 손색없다.
고려 중엽에 시중을 지낸 홍란(洪鸞, 또는 洪蘭)을 시조로 하는 부림 홍씨는 남양 홍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전한다.
홍씨의 원조 천하와의 계대는 헤아릴 수 없으나 그의 선대는 남양 홍씨로 그가 부림으로 옮겨가 뿌리를 내림으로써 후손들이 부림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홍천뢰는 1564년(명종 19) 3월 23일 한밤마을에서 통정공 홍덕기의 장남으로 태어나 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20만 명이 대거 조선에 침입하여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국토수호의 중책을 지닌 수령들은 대부분 임지를 버리고 도주한 가운데 나라의 위급함이 진실로 풍전등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29세이던 홍천뢰는 부모봉양을 두 동생 홍몽뢰, 홍명뢰에게 부탁한 다음 조카뻘되는 족질 홍경승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불과 100여 명으로 구성된 소부대였으나 나중에는 그의 뒤를 따라 모여드는 의병의 수가 1,300명을 넘게 되었다.
홍천뢰 장군은 영천 신녕(新寧)의 권응수 및 인근 각지에서 온 의병장들과 더불어 영양(永陽)에서 단을 쌓고 하늘에 맹서하고 ‘창의정용군’을 편성한 다음 스스로 그 선봉대장이 되었다. 그는 도처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특히 그해 7월에 일본군 부대가 집결하여 준동하고 있던 영천성을 공격함에 있어 돌격전의 선두를 맡았다.
당시 일본군은 그를 가리켜 ‘천강홍장군(天降洪將軍)’, 즉 하늘이 내린 홍천뢰 장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그의 활약 덕분에 자인, 경주, 군위 등지의 적병을 격퇴할 수 있었고 영천과 경주 사이의 교통망도 복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를 계속해온 홍천뢰는 마침내 중병에 걸려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의진 동지(義陣同志)들과 작별하고 한두 차례 귀가요양을 부득이 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 조정에서 논공하고 행상할 때 그는 소외되었다.
정유재란을 맞이하여 홍천뢰 장군은 또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그 공로로 ‘훈련원정’이라는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3년 만에 사직하고 귀향하여 은거하다가 51세에 생애를 마쳤다.
관찰사 홍훈의 영세불망비가 있었다
홍훈은 음사(蔭仕)로 관직에 올라 1871년(고종 8) 에 예방승지로 시상되었다가 1873년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도 대사간에 재임명되었다가 곧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고종과 민씨 척족과는 꽤 사이가 좋았던가 보다
어쨌든 이곳은 군위군 지역으로 팔공산과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 일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값진 사료들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경상도 대구 선산지역이 그렇듯이 한때 근대물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70년대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가 요즘은 찾는 관광객이 적어 폐쇄 방치한 흔적이 한쪽에서 보였다
우리는 대율리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마을 어귀부터 탐방을 하였다
마을 전체를 감싸는 돌담이 6.5km나 이어진단다
군위 대율리 석조여래입상은 대율사의 용화전에 봉안되어 있다. 문을 걸어잠가 밖에서만 보았다
육계는 절반가량이 파손되었으나 크고 둥근 형태였음을 알 수 있으며 머리카락이 표현되지 않은 소발(素髮)이다.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 경상도 지역에 유행했던 대형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더욱 앳되고 아담한 양식을 보여주는 개성이 강한 작품이다.
한밤마을의 부림홍씨는 모두 경재敬齋 홍로洪魯의 후손이란다.
경재 홍로(1366~1392)는 1390년(공양왕 2) 25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로 지낸지 1년만에
정4품직인 문하사인文下舍人에까지 올랐는데, 1392년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리는 것을 보고 고향으로 낙향해 이곳 한밤마을을 대율리로 불리게 하는 등 조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
이 경재실기 문집이 있는데 1790년(정조 14) 홍로의 후손 홍희우(洪羲佑)·홍철우(洪哲佑)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이헌경(李獻慶)·허조(許稠)·정원교(鄭元敎)·홍병훈(洪炳勳)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정범조(丁範祖)·홍종섭(洪宗涉)의 발문이 있으니 남인계 인물들과 교류가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한밤마을에는 부림홍씨 종택과 대율리 대청(대율동중서당), 양산서원, 숭덕사, 척서정 등이 있다.
대청은 한때 서당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마을 어른들의 모임과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대율리 대청은 조선 전기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 후 1632년(인조 10)에 중창된 학사이다.
대율동중서당大栗洞中書堂이라고 1906년 완성군完城君 이희李爔가 쓴 현판을 볼 수 있다.
대청 바로 옆에는 남천고택이 있다
남천고택은 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이다. 지어진 시기는 1836년경(현종 2)으로 추정되고, 조선 후기 실용주의 개념을 건축에 도입한 점이 곳곳에 보인다. 원래는 독특한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중문채와 아래채가 철거돼 현재는 ‘ㄷ’ 자형 안채와 일자형 사랑채, 사당이 남아 있다.
일반인 출입금지란 글귀 때문에 더 깊숙히 탐방할 순 없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64호로 선정될 만큼 보존 가치가 높은 고택이다.
멀리 팔공산이 펼쳐져 있다
양산서원과 숭덕사, 척서정은 보지 못하고 나왔다
양산서원陽山書院은 홍로, 홍귀달, 홍언충을 배향하기 위해 1786년(정조 10)에 건립되었다.
'양산'은 서원의 뒷산 이름으로 경재 홍로의 행적이 백이·숙제의 수양산에서의 행적과 유사하며 산 이름까지 비슷하여 양산서원이라 붙여졌다 한다.
[출처] [WHERE] 부림홍씨 종택, 옛 부림의 땅에서 천년을 이어오다 #군위한밤마을|작성자 한국국학진흥원
겨울답지 않은 따스하고 쾌청한 날씨에 좋은 마을을 소요하니 마음이 한층 힐링되어 좋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