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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02
에베소서 5장 8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은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위로라는 말을 통해 전제되는 것이 괴로움 혹은 슬픔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괴로운 일 그리고 가장 슬픈 일은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때문에 죄인 된 자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고,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본래는 죄의 종으로 있었고, 마귀의 종으로 있었지만 죗값을 치르심으로 죄의 종,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문의 답변에서 우리가 좀 더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할 때 나의 몸과 영혼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원론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텐데, 국어사전에 의하면 대상을 고찰함에 있어서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원리나 원인으로써 사물을 설명하려는 태도 또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정의합니다. 쉽게 말하면 선이 있으면 악이 있다는 것이고, 창조자가 있으면 피조물이 있다는 것이고, 영혼이 있으면 육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대립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가 초대교회 당시 영지주의(靈知主義,gnosticism)라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영지주의란 쉽게 말해 영적 지식이 곧 구원과 직결된다고 보는 이단입니다.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이들이 말하는 영적 지식이란 비밀스러운 지식을 의미합니다. 신적 계시와 현몽에 의한 초자연적 지식(그노시스), 그것을 소유해야지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중심 사상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영혼은 선하고 순수하며 신비적인 데 반해 육체 혹은 물체는 악하고 타락한 것이라는 이원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 혹은 물체는 악하고 타락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저급한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 혹은 물체는 악하고 타락한 것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추구하거나 때로는 쾌락주의로 연결해서 주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육체는 악하고 타락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성육신이 아니라 단지 사람처럼 보인 것이 불과하다, 다시 말해 가현설을 주장하는 것이 저들의 중심 사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소위 물질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어서 보이는 것만 실체라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 자체를 두지 않으려고 하지만, 인간의 구성 요소가 단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영혼과 육체를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할 때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좀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교회사 안에 보면 사제, 수도사와 같은 영적인 직업은 고급한 삶이요, 세속적인 직업은 저급한 삶인 것처럼 말하던 시대도 있었는데, 여기에도 사실은 이원론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조가 지나칠 때 세상과는 분리하여 살아야 한다는 그런 사고도 이원론적 사고에 바탕은 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원론적 사고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으로 와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나의 몸과 영혼이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영혼만이 아니라 나의 몸, 다시 말해 나의 육체도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 모두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단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육체의 구원, 다시 말해 전인의 구원이 보장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아니고서는 결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보존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의 뜻이 있어 머리털이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고난 가운데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만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다가 순교한 사람들처럼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살아 있을 때만 우리를 보존하시는 게 아니라, 죽음과 관련해서도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으로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보존하십니까? 비록 고난 가운데 있다가 죽게 되지만 그리스도의 것으로 죽는 자들은 죽음을 통해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소위 이 땅에서는 성화의 과정 가운데 있게 하시지만, 죽음 이후에는 성화의 과정을 끝내는, 다시 말해 더 이상 죄와 싸우도록 하지 않는 완전 성화를 주십니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때 죽음으로 말미암아 육체는 썩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잘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제37문), 신자들이 죽을 때 신자들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신자의 육신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어 부활 때까지 그들의 무덤 안에서 안식합니다. 비록 육체는 썩어져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육신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죽었지만 그런 죽음도 안식하는 것이라고 표현까지 하는 겁니다.
이처럼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위로라면, 그것도 유일한 위로하면 우리는 이 위로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위로만을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이 위로만이 견고하다는 것인데, 왜 이 위로만이 견고한 것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 우르시누스는 두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로 오직 그것만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것이 무너지지 않는가? 이 위로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혜와 능력의 하나님, 그래서 그 지혜와 능력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섭리하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데, 누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오직 그것만이 사탄의 온갖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르시누스는 사탄이 어떤 식으로 유혹하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전체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너는 죄인이다.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의 위로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에 대해 보상하셨고, 그의 보혈로 나를 구속하셨으니,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것이다.
② 너는 진노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원수다.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화목되기 전에는 본성으로 그러했으나,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 되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하나님께 영접을 받았다.
③ 너는 반드시 죽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로부터 나를 구속하셨으니,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질 것임을 안다.
④ 이 세상에서 온갖 악한 일들이 의인에게 일어난다.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그런 상황 아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며, 오히려 그것들이 합력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도록 하신다.
⑤ 하지만 만일 네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천국으로 가는 길이 길고도 험하니 네가 죄를 범할 수도 있고 낙망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공로로 내게 그의 은택들을 베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내가 낙망하거나 그의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그 가운데서 나를 보존하시고 나로 하여금 끝까지 인내하게 하신다.
⑥ 하지만 만일 그의 은혜가 네게 미치지 않고, 또한 네가 주께 속한 자들에 속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나 그 은혜가 내게 미치며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을 내가 분명히 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나의 영과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하시기 때문이요, 또한 내게 참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은 보편적인 것으로서 믿는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⑦ 하지만 네게 참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게 참된 믿음이 있다는 것을 그 결과들을 통해서 분명히 안다. 나의 양심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또한 주님을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진정한 열망과 의지가 내게 있기 때문이다.
⑧ 하지만 네 믿음은 연약하고 네 회심은 불완전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연약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믿음은 참되고 거짓이 없으며, 또한 내게는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눅19:26),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라는 복된 확신이 내게 있다.
그러면서 우르시누스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는 이처럼 극심하고 위험한 갈등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위로가 흔들림없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와 그가 베푸시는 모든 은택들이 내게도 해당되도다”라고 결론짓는 것이다”고 설명합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것이 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고백하는 것처럼(제36문) 현재 생애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고, 또 양심의 평안과 성령 안에서의 기쁨을 누리게 되며, 그런 과정 속에서 은혜가 증가하고 그 안에서 끝까지 보존이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럼 이런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지난주 살핀 로마서 14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것이 된 신자의 삶이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도 보겠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서 14장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고 했다면, 고린도전서 6장은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으니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 이것이 그리스도의 것이 된 신자의 삶이어야 합니다. 특별히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이 몸에 대하여 ‘성령의 전’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표현 자체는 몸이라고 되어 있지만 영혼을 가진 몸, 즉 전인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너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구체성은 성경 여러 군데서 말씀하고 있지만 두 구절만 언급하자면, 먼저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무엇보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 오히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별을 따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마태복음 5장 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로마서 12장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은 결국 너희의 착한 행실로 나타나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기준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도덕 혹은 윤리 차원에서의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 이하에 보면 율법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율법이 말하는 수준까지 나타내는 것, 여기에 착한 행실이 있습니다. 이때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말하는 정도의 율법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뜻하신 의미의 율법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혀주시는데 착한 행실이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진의,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로 이해하자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게 되는 것, 여기에 착한 행실이라는 말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것으로 착한 행실을 나타낼 수 있는가? 율법의 모든 내용을 다 지킬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고 해서 율법의 모든 내용을 다 지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종에서 해방되긴 했지만, 그래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긴 했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것인 우리와 그리스도의 것이 아닌 사람들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에게는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저들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켜 보존하시되 모든 것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신다는 것,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며, 영생을 가진 자로 있기 때문에 더욱 그를 위하여 살기를 바라게 만들고,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십니다. 한마디로 이 땅에서는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 이끄시느냐?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 지는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계속 일하심으로 그렇게 이끌어 가신다는 겁니다. 여기에 진정한 위로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이 위로를 통해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주 앞에 설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이 위로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가? 이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문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2문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나머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전체 내용이기도 합니다.
2문.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되게 살고 죽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알아야 합니까?
답.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마11:28-30, 눅24:46-48, 고전6:11, 딛3:3-7). 첫째로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요(요9:41, 15:22), 둘째로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요(요17:3, 행4:12, 10:43), 셋째로 그 구원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엡5:8-9,11, 벧전2:9-10, 롬6:1-2,12-13).
이런 구조는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5장 8절을 통해 그대로 나타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첫 번째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두 번째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인 그 구원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여기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에베소서 2장에서 설명되는데, 첫 번째인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두 번째인 우리가 어떻게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4절에서 9절에서 말씀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특히 7절에서는 왜 우리를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목적이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죄와 비참함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은혜, 우리 스스로는 구원의 1%도 이루어낼 수 없지만 그런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이 은혜를 오는 여러 세대에게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어떻게 나타내고자 하시는가? 그것이 세 번째 내용입니다. 그 구원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인데,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주의 뜻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0절을 보시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만이 아니라 로마서 전체 내용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 세 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대해서는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까지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는 로마서 3장 21절에서 11장 36절까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감사에 대해서는 로마서 12장 1절부터 16장 27절까지입니다. 물론 상세하게 보자면 구원을 말하는 부분에서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자면 이런 구조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경이 이 구조로만 가르치는가? 분명 성경은 큰 틀로서 이 세 가지를 가르치지만 그것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방금 에베소서 2장 부분을 살폈지만 에베소서 1장으로 가시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에 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작정의 실행으로 모든 역사가 있다고 할 때 실행의 역사 속에서는 죄와 비참함, 그리고 구원, 구원에 대한 감사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영원 전부터 작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작정은 모든 만물에 대한 것이지만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해 선택과 유기, 다시 말해 예정에 대한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신다고 할 때 우리를 선택하실 이유가 있어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실행의 역사 속에서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를 죄와 비참함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비참함에게 구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때도 우리에게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은혜이기에 예정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할 수밖에 없음을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불변하신 은혜이기에 더욱 굳은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가르칩니다.
에베소서 1장만이 아니라 로마서의 경우 구원에 대한 내용 속에서 예정에 대한 가르침을 가르치기도 하는데, 로마서 9장에서 11장이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순서상으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이 가장 앞서지만 이런 가르침의 위치는 구원과 관련하여 설명할 때 위치하게 하여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더욱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성경의 많은 내용이 죄와 비참함, 그리고 구원, 구원에 대한 감사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위로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죄와 비참함, 그리고 구원,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감사의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역사의 실행 속에 있는 이 세 가지만이 아니라 이 세 가지 내용과 함께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바, 특별히 예정에 대한 내용까지 개혁신앙 안에서는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정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이 없고, 그런 점에서 이것보다 더 큰 위로의 내용은 없기 때문입니다. 칼빈의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 사용하는 가장 중대하고 위험한 유혹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파선을 면하려면,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바위(선택에 대한 잘못된 생각)를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선택을 바르고 합당하게 검토하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위로의 열매를 거둔다.”(3권 24장 4)
다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으로 와서 우리가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알아야 하는데, 첫 번째는 우리의 죄와 비참함입니다. 물론 죄와 비참함 자체가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위로보다는 경계심을 갖도록 하는데, 왜 이것을 배워야 하는가? 우르시누스는 세 가지로 그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지식이 우리 속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의 죄악성과 비참함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복음을 들어도 전혀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아는 지식도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의 이유로 설명합니다. 첫째, 우리가 낙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알았으나 구원의 길을 제시받지 못하면, 우리가 낙망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구원을 바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모르면 바라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동일하게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알지 못하면 그 어떠한 위로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우리 스스로 다른 구원의 방도를 만들어 내거나 다른 이들이 만들어낸 것을 채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섯째, 그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은 믿어야 하는데, 이 믿음은 지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면 바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가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는 구원이 있는가?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열매가 없는 구원이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구원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감사를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여기서는 네 가지로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째,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기에 참된 구원이 베풀어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6절 말씀처럼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 목적으로 있기 때문에 감사의 내용은 반드시 필요하고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를 돌려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감사한다고 해서 내 기준을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감사도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감사에 대해서도 성경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셋째, 자칫 감사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감사 부분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의 내용이 있는데, 그런 순종으로 우리는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감사의 내용임을 배움으로 그것이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문에 감사의 내용을 배워야 합니다. 넷째, 우리의 믿음과 위로가 증가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혹은 감사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열매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열매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의 선택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 전에 에베소서 1장 6절을 언급했지만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정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에베소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 다시 말해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런 열매 없이 선택의 확신, 구원의 확신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감사의 내용을 배워야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 이 세 가지 내용을 순서대로 배우겠지만, 사실은 1문 안에서 2문의 전체 내용을 살필 수 있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 시간부터 배우게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런 내용을 배움으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고, 그런 가운데서도 구원하신 은혜와 그 은혜로 인하여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워 아무쪼록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평생토록 찬송하며 사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