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촌(尨村) 황희(黃喜)선생 유적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산 127번지)
이 곳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조선초기의 명재상이며 청백리의 귀감인
방촌 황희(尨村 黃喜 1363-1452)선생의 유적지이다.
선생의 자는 구부懼夫,호는 방촌.본관은 장수로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판강릉대도호부사 군서의 아들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관직에 나오게 되었다.
황희선생은 고려말기 부터 조선초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고 세종연간에는
18년 간의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재직하면서
세종성세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문종2년 1452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탄현면 금승리 선영에 예장하고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이 외에도 앙지대, 경모재, 황희선생의 동상등이 있으며
입구에는 선생의 업적과 유품을 전시한 방촌기념관이 있다.
청빈한 삶 "단벌 정승 황희" 일화
진눈깨비가 내린 어느 겨울날, 퇴궐한 영의정 황희가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서둘러 옷을 뜯어서 빨아주시오. 밤새 말리고 꿰매면 내일 아침 입궐할 때 입
을 수 있을 것이오."
영의정 황희의 겨울옷은 단벌이었다. 황희가 속옷차림으로 책을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대감마님. 속히 입궐하라는 어명이십니다."
부인은 당황했다.
"에그머니 대감, 큰일났습니다. 어서 입궐하셔야겠는데, 무얼 입고 들어가신단 말입니까?"
황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하는 수 없소. 그 솜을 이리주시오."
"솜이라니요?"
"바지저고리를 뜯어 빨았으면 솜이라도 있지 않겠소?"
"대감도 참 딱하십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글쎄, 솜만 꿰고 입궐하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럼 어쩌겠소? 어명이니 입궐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벌거벗은 채 관복만 걸칠 수는 없는 일이니, 어서 솜을 가져오시오."
황희는 부인이 가져온 솜을 몸에 둘렀다.
"부인, 실 좀 주시오. 굵은 실로......."
부인이 바지솜과 저고리 솜을 실로 얼기설기 이어주자, 황희는 그 위에 관복을 덧입고 서둘러 입궐했다.
영의정 이하 중신들을 불러놓고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칠 대책을 강구하라 이르던 세종의 눈에 황희의 관복 밑으로 비죽이
나온 하얀 것이 얼핏 보였다. 세종은 양털인 줄 알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 참 이상하도다. 청렴하고 검소하기로 소문난 황 정승이 양털로 옷을 해 입다니......'
회의가 끝나고 세종은 황희를 가까이 오라고 이르셨다.
"과인이 듣기로 경의 청렴결백이야말로 타의 귀감이 되며 하늘에게까지 상달된 것으로 아는데, 어찌 오늘은 양털옷을 입으시었소?"
황희는 당황하여 가까스로 대답했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호나......실은 저어......이것은 양털이 아니오라 솜이니이다."
"솜? 솜이라니? 왜 솜을 걸치고 다니시오?"
"예, 전하, 신은 겨울옷이......단벌이니이다. 오늘은 마침 일찍 퇴궐하였사옵기에 그 옷을 뜯어서......"
"아니, 이럴 수가...... 영상, 이리 좀더 다가오시오, 이럴 수가......"
세종은 황희의 옷 밑으로 빠져 나온 솜을 만져 보았다.
"영상, 일국의 영상이 청렴한 것도 분수가 있지요. 단벌옷으로 겨울을 난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여봐라!"
"예이!"
"영상 대감에게 당장 비단 열 필을 내리도록 하라!"
황희는 정색을 하며 아뢰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방금 내리신 어명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지금 이 나라 백성들은 계속된 흉년으로 인하여
헐벗고 굶주리는 자가 많사옵니다. 이런 때에 어찌 영상인 신의 몸에 비단을 걸치리까? 솜옷 한 벌로 과분하오니, 이 점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오! 과연 경다운 말이오. 과인이 용포를 걸치고 있음이 부끄럽소이다."
결국, 세종은 비단 하사하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본래의 영당 건물은 6.25때 모두 불탔으나,
1962년 후손들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양식의 맞배집으로 복원하였고
영당 내부 중앙에 별도의 감실을 두고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며 멀리 군초소가 보이지요.
유적지내에는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세조1년 1455년
후손들에의해 건립된 황희 선생 영당과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후
여생을 보낸 반구정이 위치하고 있다.
반구정은 원래이름은 낙하정(落河亭)이다.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기암절벽위에 위치하는데
예로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갈매기를 벗삼는 정자"라는 뜻에서 이름지었다.
정자내부에는 미수 허목의반구정기와
여러 개의 중수기 편액이 있다.
앙지대( 반구정 옆에 있음)
1392년 정몽주 등의 반대에도 공양왕을 몰아내고
이성계가 조선의태조가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유신들과 황희를 온갖 방법으로 회유했지만
그들은 외부와 완전히 연락을 끊고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에 은거하며
아무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두문 불출"
이란 말이 유래되었다.
위는 앙지대.
아래는 반구정.
한편 황희의 능력을 아까워한 두문동의 선비들은 황희를 설덕하여
결국 태조의 간청에 응하게 되어 나이 서른에 성균관의 학관과
세자의 스승인 정 7품의 "세자우정자(세자의 선생)"를
겸하게되어 세자를 잘 가르치고 보필할 것을 명받았다
경모재: 황희선생님의 영정을 모신곳
황희 정승의 동상
세종대왕
성군과 명재상과의 만남
황희가 남원에 유배된지도 어느덧 4년이 되었다,
상왕이 된 태종은 미숙한 세종의 내일을 걱정하며
경험이 많고 사람들에게 칭송를 받았던
황희를 천거하여 황희는 1422년 세종의 부름을 받고
정2품인 의정부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비록 장자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상소로 인해
유배생활을 보냈지만 태종은 큰죄라 여기지 않았어며
그의 덕망 높은 인품과 학식을 높이사 세종의 한축으로써
과감한 결단과 실행으로 개혁정치를 단행하는데
크다란 업적을 남기게 된다.
18년 동안 세종대왕과 황희 정승이 함께 이룬 업적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예법의 개정
,천첩(賤妾)소생의 천역면제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으로 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작품도 전해진다,
파주의 방촌 영당.상주의 옥동서원등에 제향 되었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타지역에 있는 황희 선생 유적지.
광한루-남원
1963년1월21일 보물 281호로 지정.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양식이다.
황희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광한루는 춘향전으로 많이 알려졌으며 본래 이름은 광통루였으나
세종16년에 정인지가 광한루로 개칭하였다.
지금있는 건물은 정유재란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 (1638년)다시 지은 것이다.
(참고)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울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함.
소공대-삼척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황희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관동지방 백성들이 세운 것이다.
옥동서원-상주
1518년(중종13)황희 황맹헌,황효헌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하여 창겅하였다.
1580년 (선조13)백화서원으로 이름짓고
영당을 지어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다가
1789년(정조13년) 옥동이라는 사액을 받아 옥동서원으로 개칭하였다.
황희정승의 유적지입구
말하기 좋다고 남의 말 말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
-옛 조상들이 읊은 노래-
황희 정승과 두 마리 소
황희 정승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나중에는 훌륭한 정승이 되었지만
젊었을 때는 자신의 재주만 믿고, 제멋대로 행동한 적이 많았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함부로 말했다가 후회를 한 적도 많았다.
황희가 벼슬아치들의 미움을 받아 잠시 쉴 때 일이다.
황희는 이 기회에 전국 유람이나 하여 견문을 넓히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남쪽 어느 지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때는 마침 모내기 시기라 들판에는 사람들이 많이 흩어져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황희는 땀을 식히려고 나무 그늘에 들어가 앉았다.
그런데 맞은 편 논에서 늙은 농부 한 사람이 누렁소 한 마리와
검정 소 한 마리를 부려 논을 갈고 있었다
.
황희는 한참 구경하다 그 농부가 가까이 오자 물었다.
“누렁 소와 검정 소 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
그러자 늙은 농부는 일손을 놓고 일부러 황희가
있는 그늘까지 올라오더니 황희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누렁 소가 더 잘 하오.”황희는 농부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그만 일을 가지고 일부러 논 밖으로 나오시오.
또 귓속말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늙은 농부는 이 말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였다
“두 마리가 다 힘들여 일하고 있는데 어느 한쪽이 더 잘한다고 하면
못한다고 하는 쪽의 소는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오.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잖소?
황희는 농부의 말을 듣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달았다.“감사합니다.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황희는 농부에게 큰절을 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하였다.
이 후 황희는 죽을 때까지 남의 단점이라고는 이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늘 날 까지 훌륭한 정승으로그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