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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1) 달란트와 열 므나 비유
11.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
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
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
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
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
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이
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
나이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
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
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
가 있나이다 26.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눅19:11-27)
우리가 므나 비유 말씀을 읽었는데 이곳은 접어놓고, 마25장의 달란트 말씀을 먼저 좀 보겠습니다.
달란트 비유 말씀을 이미 여러분에게 다루어 드렸는데, 성영님께서 제게 계속 마땅해 하지 않으시
는 느낌을 주시면서, 다른 말씀 준비를 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왜 그러시는가를 계속 물으니
달란트에서 더 깨달아야 한다는 감동을 주셔서, 달란트에 대해 좀 더 말씀을 드릴 것으로 하고 므
나로 가려합니다. 달란트와 므나는 그대로 연결되는 비유입니다. 달란트는 신구약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고, 므나는 신약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을 믿기 원하면 누구든지 먼저
남기라는 것을 깨달아 알고 남겨야 하지, 남기지 않으면 한 달란트를 땅을 파고 감춘 악하고 게으
른 종으로 판결되어 심판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금 달란트'라 한 '금'은 신영한 하나님의 일로써
그 하나님의 일을 자신에게 남기라고 맡겨주신 사명을 말하고, 둘째는 믿음을 말한다고 말씀드렸
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일,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고
그리스도가 오시도록 하는데 길의 사명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같이 피 흘리러 오실 구주, 곧 메시
아에 대한 믿음을 굳게 가지고 맡기신 일을 충성되게 하여야 했습니다. 그것이 달란트 비유 14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렇게 구약 성도가 행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의 일을 신약 사람
들이 받아서, 구약 성도가 남긴 그 일, 즉 하나님의 그 속에 두신 의미와 뜻을 깨달아 자신에게 적
용한 그 믿음으로 서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신약 성도가 받아야 할 달란트의 일이요, 달란트를
남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개개인이 달란트를 남겨야 그다음 므나 비유에 해당이 됩니다.
달란트를 남기지 않으면 므나 비유에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남겨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
이요, 그 사명을 행하는 것이 바른 믿음이 되는 일로써 자신에게 달란트를 남기는 것이 되는 것입
니다. 달란트에서 '남겼다'는 것으로 표현했잖아요? 그래서 남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요, 믿음의 일이예요, 이해됐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달란트(행할 사명)를 주시면서 그것을 장사하여 남기라고 하셨습니다. 율
법을 지켜 행하라 하시고 율법을 고의로 범한 자는 돌로 쳐 죽이고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율법을 지키라는 것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고, 그 수백 가지의 율법을 지키
려고 애쓰지만, 지켜낼 수 없는 인간의 약함을 통하여 인간 자신이 하나님께 죄 범한 죄인임을 깨닫
게 하시는 데 있다고 항상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들의 죄성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인 불가피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죄를 모르는 흠 없
는 가축에게 죄를 전가하여 생명의 피를 흘려 제물로 드리게 함으로써 죄를 용서받게 하셨고, 그렇
게 율법을 범하여 죄를 지을 때마다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
랑과 자비를 알게 하고, 그 죄를 대신 지고 피 흘려 생명을 내놓아 단번에 죗값을 치르실 그리스도
가 오실 것을 가르치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언약하시고, 피 흘려 죄를 용서해주실 분이 오실 때까지
그 예표로 정결하고 흠 없는 소나 양, 염소 등으로 피 흘리게 하여 화해의 제물로 가지고 나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사람들이 달란트를 남기는 일은, 이 믿음을 가지고 언약의 말씀과 함
께 종교법이라고 하는 성전 제사, 절기, 또는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대로 준수하
며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여 알게 하는 일이
요,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달란트는 율법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요,
제사나 절기나 안식일이나 성전의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죄인을 구원하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을
알게 하여 연합을 이루는 것임을 아는 것이요, 그 예수님께 연결이 되었을 때 그것이 달란트 장사
를 잘한 것입니다. 또한, 백성에게 그 뜻을 가르쳐서 같은 믿음 안에 있게 하는 것이 달란트 장사
를 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약 성도가 이 뜻을 그대로 받아 배우고 앎으로서 자신에게 적용
하여 예수님을 만날 믿음의 능력을 갖추는 그것이 달란트를 남기는 일입니다. 한 달란트의 일을 깨
달아 한 달란트의 일을 남기는 자가 되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의 뜻을 배우고 받아들인
믿음이 되고, 모세와 언약하신 율법의 뜻과 성전을 배워 받아들인 믿음이 되는 그것이 달란트
남기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는 마음과 눈과 귀를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다 두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께 맞힌 지혜가 있어 장사를 뜻대로 잘하여 예수님께서 오실 수 있는 길을 열어놓게 되었습
니다. 그러면 다섯 달란트는 누구이며 두 달란트는 누구인가? 아브라함이 다섯 달란트입니다. 이
스라엘이 두 달란트입니다. 한 달란트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의 바리새인 서기관 사
두개인 또한 성전 제사 직무를 맡은 대제사장 또 제사장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 구주의 언약을 가지
고 소나 양 잡아 피 흘리며 기다린 그리스도 예수님이 그들 눈앞에 오셨는데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 몰아 십자가에다 못 박아 죽였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기다린 메시아를 눈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고, 직접 들으면서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습니까? 한 달란트를 땅을 파고 감
추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하시고, 하나님에게서 내쫓김을 받게 되
었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다고 하는 것은 의도적인 행위로서 그것은 무엇을 말
하는지 우리가 깨달아 보았잖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계시 위에다, 하나님의 뜻 위에다, 자기 생각
과 이론을 올려놓고 자기주장을 세워놓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을 맞추어야 하는 하나님으로 만
들어 놓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같이 인간의 생각에 맞는 하나님으로 만들고 섬긴다고 했으므로
표적에서 완전히 나가 버린 것이라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한 달란트의 사명을 받은 그들은
그같이 한 달란트를 남기지 않고, 자기 본위를 말씀 앞에 세웠으므로, 그것은 죄 중의 죄로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하여 돌이키라고 외치게 하였지만 오히려 그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것은 고의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겠다는 것을 자기가 선고한 것이 되었고, 오늘날도 또한 이같이 보내신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고 비난하고 냉소적이면, 그것은 고의적인 죄가 되어 큰 심판에 함께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남겨야 하는, 남기라고 주신 달란트는 무엇인가를 이제 다 알게 되
었지만, 이같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살피고, 자기도 절
대 절망에 처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달란트 남기는 일입니다. 율법을 들여다볼 때, '아!
나도 절대 절망에 빠진 죄인이구나, 피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것이 자신에게 남기
는 달란트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인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도록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
고, 인간이 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고 있으니, 그러므로 부지런히 성경을 살펴 그것을 알라는 것입
니다. 오늘 한 달란트를 감추어 두었더니, 그것이 하나님 앞에 겸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인
줄 알고 있던 이들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고 하셨다는 것 아닙니까, 자기는 그것이 합당한 것인 줄 알고 자랑스럽게 땅에 감추어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다드렸는데, 하나님은 네가 표적을 잘못 맞히었다, 그러므로 악하고 게으른 자라
고 내쫓으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실지로 이 같은 자리에 있는 허다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서 자기 믿음을 인정하시리라 믿고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가 아니면 다 표적
에서 빗나간 것이라는 것도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달란트를 주셨다고 하는 것은 장사하여 자기에게 이윤을 남기라고 하는 것이니, 그러면
여러분, 장사하려면 부지런해야지 게으르면 그거 망하기로 작정한 것 아니겠습니까? 장사하려면 부
지런해야 하지요, 게으르면 망해 먹겠다고 작정하고 덤빈 것이지요. 장사하는 사람들 보면, 이득을
남기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억척스럽게 하잖아요.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들 합니다. 그 같은 정신
으로 달란트를 남기기에 열심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은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장사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물건을 보는 눈도 키워야 하고, 손해 입지
않고 이문을 남길 수 있는 좋은 물건을 고를 수 있는 안목도 있어야 합니다. 장사는, 학문을 많이
했다고 해서 잘하는 것 절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학문이 없어도, 글을 잘 몰라도 장사를 잘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여럿 보았습니다. 장사 잘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여럿 보았어요. 돈 많이 벌었다는
것을 제가 성공이라고 표현했는데, 잘못 표현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달란트를 남겨야 하는
것에는 이처럼 장사하는 것과 같아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남겨야 하는 것들을 찾아
서 성경을 부지런히 살피고 탐구하여 남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 얻는 길이요, 영의 양식이
되어 생명을 풍성히 얻는 일입니다.
"아유~ 나도 달란트 열심히 불려서 남기고 싶은데, 알면서도 장사할 재주도 없고, 성경을 어떻게 봐
야 하는지 도무지 능력도 안 되고, 성경을 봐도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도 없으니, 나는 어
떻게 하면 좋으냐?"라고 낙심하는 사람에게 달란트 남기고자 하는 소망이 분명히 있다면, 27에 뭐라
고 하셨습니까? 네가 장사 소질이 없는 것이면, 참으로 달란트를 남기기 원하면 그러면 네가 마땅
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 돈을 은행에 맡기면 나중에 본전과 함께 이자가 따라와요,
안 따라와요? 이자가 붙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너 스스로가 달란트 남기는 능력이 안 되면 은행에
다 본전을 맡겨 이자를 받듯이 마13:52에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주인과 같은 천국
의 제자 된 서기관에게,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을 잘 연결하여 깨닫도록 가르쳐주는 그 서기관에
게 잘 듣고 배워서 네 것으로 남기지 않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으리라
는 말씀입니다. 또는 내가 내 원금과 이자를 네게서 받게 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많
은 사람을 제자로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을 맡겨 준 그런 예수님의 사람들에게, 천국의 제
자 된 서기관에게 듣고 배워서 깨달아 남기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깨달을 능력이 되지 않으면 듣고
배우는 열심을 가지고 너에게 이득이 있게 하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핑계할 수가 없습
니다. 이해됐습니까?
그러면 첫째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남겨야 하는 달란트는 무엇입니까? 율법으로 자신이 절대 절망의
죄인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것이고, 둘째 남겨야 하는 달란트는, 율법에서 피 흘리는 목적이
뭡니까? 죄를 사하시는 것이므로 곧 피 흘리러 오신 예수님께 표적이 되었을 때 달란트 남기는 것
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죄인의 구주로 오셔서 피 흘려주신 구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말씀을
따르는 것이 자기에게 달란트 남기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모르는 분 있습니까? 여러분은
죄인이요, 예수님은 구주시라는 것, 여러분이 모를까 봐서 제가 오늘 이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최
소한 이 달란트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속게 되어 있으니, 모르면 믿음을 바로
가질 수가 없으니 확실히 알고 믿자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 달란트 가지고 다 무엇으로 나갔습니까? 사명, 재능, 이런 뜻을 가졌다니까 달란트를
감당해야 한다.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으로 다 나가서, 달란트 감당해야 한다고 행위 위주가
되어 무조건 열심히 뛰지 않습니까? 참으로 하나님과 관계없는 직분들 떠맡기고, 또는 맡아서 열심
히만 하면 된다는 종교심으로 쫓아다니게 하는, 이런 행위의 외적인 것들로 하나님의 일한답시고
착각하고, 그것이 잘 믿는 것인 줄 아는 것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심지어 자기 목사도 인격적으
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기보다는, 신처럼 떠받들고 섬기는 것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겁니다.
'달란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재능이 있는데, 그 재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
달아 알고 자신에게 남길 수 있게 하려고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재능은 곧
성영님의 적극적인 개입입니다. 성영님으로 말미암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불릴 수 있
는 하늘의 재능을 주셨다는 뜻이에요. 또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 사명
은 하나님의 모든 뜻으로 자신에게 남기는 것으로 불리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로 이 달란트를 남길
수 있도록 가르치고 전하는 일을 맡겨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므나의 일이예요.
그러니까 뛰어다니는 것하고 맞아요, 안 맞아요? 맞지 않습니다. 말씀의 의도, 달란트의 뜻하고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는 것으로서 사람이 반드시, 절대로 자기에게
남겨야 하는 하나님께 들어가는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15에 '재능대로'한 '재능'이 각 사람에게 '성영님이 주신 대로'라는 말입니
다. 재능을 '소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소질! 마16장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
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를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
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셨습니다. 네 머리가 알고 있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네게 알게 하셨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영님이 오셔서 기록된 하나님의 전 뜻을 알려주시고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머리로 아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되어
오늘 30의 말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영님으로 성경 보고 성영님으로 깨닫
고 성영님으로 알고 성영님으로 행하고 성영님으로 말하고, 성영님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재능, 그 달란트는 자신에게 남긴 것도 없는데, 뭐나 된 것처럼 사명 감당한답시
고 뛰어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깨달아야 할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 바
랍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불려 나가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장사로 비유하신 것이고 그것이 각 사
람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늘의 것을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
을 깨달은 사람, 거기다 맞추는 사람에게 주시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것을 소유하
려고 하는 간절함이 되어야 자기에게 하늘의 것을 남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땅의 것 주려고 오신 것처럼 하면 그것은 달란트를 왜곡하여 놓는 자기 머리요, 자기 생
각이요, 오늘 본문 24,25에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한 달란트 받은 자가 한 말을 들어보겠습
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
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
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30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들이 아까도 말했지만, 달란트를 연결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서 열
심히 일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달란트를 감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달란트는 돈의 명칭이니 돈은
사용하라는 데 있다는 점을 들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재능을 사용하라고 주셨으니 자기에게 있는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달란트라는 돈의 명칭을 말씀하신 것은, 돈은 사고파는데 사용되는 것이므로, 그같이 장사
꾼이 장사하듯 너희가 마귀의 것은 팔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은 사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장사
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러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달란트)은 무엇일까'
하고 보니 자기가 노래를 좋아하고 목소리가 남보다 좀 좋다는 생각이 드니 '아! 나는 찬양 부르는
것으로 달란트 감당하라고 내게 좋은 성대 주셨는가 보다'하고 기분에 들떠서 나가 찬양 부른다고
하다가 자기 열심, 자기도취에 빠지는 겁니다. 또 내게 주신 달란트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가르
치는데 소질이 있다는 자기 생각에 아이들의 교사가 되어서 열심히 성경 이야기를 가르칩니다. 인
간의 이야기로 풀어서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하는 것이지요. 복음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제대로 알
고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복을 받는 길이라고 인간적인 선으로 선행하게 하는 훈련을 하고
있음으로써, 사람들에게 길을 잘못 가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아서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이 되고, 복음의 의가 세상
에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종교로 전락시켜 놓는 것입니다. 교회가 참 좋은 일 한다고 세상이 칭찬
하고 들어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말입니다. 교
회가 좋은 일 하여 세상에 인정받아야 사람들이 교회를 친근히 여겨 나오지 않겠느냐 하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은 인간 열심이요, 인간 생각이요, 인간 방법이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인간 중심에
서 나는 인지상정의 발상입니다. 사람이, 교회가 참 좋은 일 하는 것 보고 감동이 되어 교회 나왔
다고 한다면, 그도 종교인 노릇을 하는 사람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니 새겨듣기 바랍니다.
달란트를 주신 것은, 마귀의 것은 깨끗이 팔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은 부지런히 사서 자기의 것으로
남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6:28,29에 하나님의 일은 뭔가 열심히 행동하고 다녀야 하는 줄로 알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
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
신 분이 누구예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무엇을 해야 그것이 예수님 잘 믿는 것인
줄로 오해하던 것,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 복 받는다고 오해하던 것 다 내려놓고 먼저 자기에게 달
란트 남기라고 주신 그 사명부터 철저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또 저의 이 말들에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장소에는 해야 할 일들
이 있지 않습니까? 청소라든가 식사라든가 등등의 따르는 일들이 있는데, 이런 공동체 모임에서 있
는 일들은 어떤 특정인이 복 받는다고 하는 일처럼, 또는 그것이 사명이라서 해야 하는 것처럼 생
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교회 일원으로서 사명감처럼 생각하여 맡아서 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
나 이 공동체 생활은 믿음이 있어서 또는 사명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너 나 할 것 없이 같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든 없든 상관없습니다.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눈에 띄면 하는 사람
따로 있으니 하고 못 본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소 같은 것도 참여할 그런 정신이 돼야 하
고, 할 일이 눈에 띄면 몸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정신으로써, 그 기본 정신이 돼야 신앙
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자를 기억하십니다. 기억하신다는 것은 바로 그 행함을 복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다음 셋째 우리가 남겨야 하는 달란트는 무엇이겠습니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땅에 달란트를
감추어 두고 자신에게 남기지 않았으므로 악하고 게으른 자라고 하는 판결을 받고, 심판에 떨어진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의 사명은 무엇을 말하는지 지난번 달란트 말씀에서 우
리가 깨달아 보았잖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이 죄인의 구주라는
것도 알게 되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였으니, 자신에게 달란트를 남긴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셔 들일 수 있는 자격, 구원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은 그같이 먼저 한
달란트를 자신에게 남겨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행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인본, 자기 본위는
절대로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는, 하나님과 원수이므로 그것을 알고 철저히 죽음에 넣어야 하는 것
이 한 달란트 남기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인본이 되어 자기 본위로 산 것임
을 말합니다. 나를 지으신,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서 살아온
것, 그래서 하나님께 심판받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심판을 받
아주셨으므로, 이제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신 그 예수님을 믿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산 인본의
죄를 회개한 자는 용서받게 된 것입니다.
내 중심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함께 죽었음을 믿고, 죽음에 내줘 버리고, 즉 깨끗이 팔아 버리고
이제 그곳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나의 주인이고, 나의 구주시고, 나의 생명이 되시니 자기 안
에 모셔 들인 예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바로 한 달란트를 자기에게
남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말은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
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 신앙을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말로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첫째, 둘째, 셋째의 달란트
를 자신에게 남기는 진정이 있어야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자'로써 구원받은 것이라는 말입니
다. 셋째에 남겨야 하는 한 달란트의 사명이 되지 않으면, 구원받을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달란트 비유로 이것을 알게 하시려고, 성영님께서 지난 비유 말씀에 이어 다시 이 비유로 들어와서
성경의 분명한 의지와 뜻을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구원받았다는 말은 있는데 사실 그들 속에 구원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성영님
께서 감동으로 깨닫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배운 바가 없기 때문
이라고 했습니다. 인격적 관계가 안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여 신앙의 확신도 없고 성영님과 영적으
로 교제가 되지 않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땅의 가치관이 하늘의 영적인
가치관으로 바뀌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삶의 초점이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에게 온전히 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주셨다고 찬송하고 감사는 하는데도, 세상에서 잘 되고 높여주
셨다고 찬송하고 감사는 하는데, 하나님께서 복 주셨다고 찬송은 하는데, 그들 속에 가치는 하늘의
것에 있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썩지 않는 양식, 영이요 생명이 되는 영의 말씀은
듣는 것에 둔하고 하늘 성소는 희미하여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기회가 된다면, 이 같은 예수님의 가르치신 말씀들을 성영님을 의지하여 듣
고,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지 말고 성영님의 도와주심을 구하여 철저히 자신에게 남기는 기회가
되기를 참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달란트 남기는 첫째, 둘째, 셋째의 일은 바로 달란트 비유 말씀에
서 말하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일입니다. 바로 그런 것은 작은 일이라고 하셨어요.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하셨습니다. 많은 것은 바로 함께 즐거움에 참예한 천국
을 유업으로 받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음을 뜻하고, 성영님의 권능을 입었으니 바로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비유의 말씀 가운데서 이것을 확실히 깨닫고
받아들여 행하는 믿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깊은 사귐이 되고 예수님 안에서 하늘
의 신영한 복에 들어 참자유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빌3:18에 사도 바울도 이것을 계속 말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것을 계속 말하였듯이
사도 바울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
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
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는 그것이 얼마나 안타깝고 안타까우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겠습
니까? 그런 것에서 돌아 나올 수만 있다면 저도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지 못할 이유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으면 자기에게서 예수님의 성품이 나타나야지 왜 자기 의가 나타나고, 자기
열심이 나타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자기 이론을 높이고 세상 방법을 앞세우는 인본이 나오는 것
이 웬 말입니까? 설사 그런 순간이 있다 해도 성영님이 계시니 또 순간 회개하여 즉시 돌이키는
것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마16:24에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자기는 타락한
죄인입니다. 자기라는 것은 타락한 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마귀를 따라 지옥으로 들어가
는 존재입니다. 예수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좋은 일, 착한 일 많이 했다고 천국 들어가는 것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어도 죄인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누구로 인하여 갑니까? 예수
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받을 형벌을 대신하여 우리 자아, 인본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시고, 그 영혼이 지옥의 깊숙한 사단의 보좌인 접전지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사망이 예수님을 잡아 둘 수는 없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이 은혜를 믿는다면 예수님이 죽으실 때 자기도 죽고 예수님이
다시 사셨으니 예수님으로 다시 살게 되었다는, 그 믿음이 확실하여야 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자기
의 죽은 그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른다면 자기주장이 나올 수 없고 자기 이론을
내세울 수 없는 겁니다. 자기를 죽음에 내주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님은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십자가 형벌에 달려야 할 하나님과 원수이므로 예수님과 함께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10:38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분명히 자
기의 죽은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아니하면 예수님께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
을 말씀하셨음에도, 구원을 말하는 사람이 여전히 인본(자기)에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속이
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자신에게 속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 맞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이 된다
는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경험할 수가 없으니 영혼을 위한 것에 그리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어떤 모습,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안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신 말씀의 뜻이 안 보인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눈에 들어
오지도 않고 보이지 않아요. 들리지 않아요. 말씀의 눈이 없다 그 말이에요. 말씀 안에 계신 예수
님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면, 죽음에 던져 넣지 않으면, 그것은 아직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5년, 10년, 20년, 100년 됐다고 년 수를 자랑해도 그것은
자기가 말하는 세월이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한 달란트를 땅
에 묻어둔 악한 자로서 심판받을 자라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
값을 치러버린 그 죄인으로 살겠다고 하면, 예수님의 그 은혜를 거절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 여전히 지옥의 심판에 들어갈 자기를 포기하지 않겠
다고, 자기로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세상에 그것만큼 잘 먹히는 것이 어디 있다고 그것을 포기
하라 하느냐고, 자기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위하여 피 흘린 것은 내가
분명히 믿는 것이니 나는 구원받았다,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뭘 그렇게 복잡하고 요구가 많
은 것이냐 하는 식으로 예수님과 맞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비웃듯이, 말하고 싶으면 당신이
나 실컷 말하시오 나는 듣고 말 테니까 하는 태도들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로 살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이 강당에서 나가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꾸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 앞에 자기가 드러나니 말씀 전하는 나를 말씀 잘못 전한다고 비난하
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너무 지나치게 강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 힐책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입장이 서게 되고 유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라는 그 성, 평생을 쌓아 올린 자
기라는 성과 탑을 허물어뜨린다는 것이 도무지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자기에 대한 신념을 굳게 잡고
놓지 않는 겁니다. 놓으면 자기 인생이 끝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같이 잠시 잠깐의 것 때문에
영생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택하여 결국 자신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가 증명해주고 있
는 것입니다. 믿기로 하였으면, 믿는다면, 말씀 앞에 자기를 쳐 복종할 때에 성영님께서 그 영혼의
기쁨과 평안함의 영적 경험을 주실 것인데, 영혼에 덕지덕지 낀 더러운 때가 벗겨져 얼마나 가볍고
깨끗한 마음이 들 텐데, 마음에 두려움과 쌓아 올린 자기 것에 대한 집착하는 자기 아집의 틀에 갇
혀서 놓지 않으려 하니, 설교 말씀에 당연히 거부 반응이 일어나서 듣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설사 말씀 앞에 왔어도 자기가 바라는 것이 아니면, 여기 말씀은 틀렸다고 자기가 판단하여 줄 그
어놓고 교회 나오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자기 생각을 신뢰하여 절대 굴하지 않고 자
기는 믿음이 들지 않는다고, 예수님이 왜 감사한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드
리면서 말씀에 복종이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의 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함께 죽었음을 알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못 박힌 십자가를 지고 예수
님을 따르는 것이면, 이 강단에서 나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들으면 들을수록 자기를
살린 말씀이요, 생명임이 너무 달게 느껴지고 꿀 송이와 같아서 그 영이 아멘으로 함께 복창하게
될 것입니다. 영이 살았으면, 또한 살 자이면 영에 맞는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영이 기쁨
이 차고 행복해서 함께 복창하고 나오는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21에 뭐라고 했습니까? 달란트 남긴 자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작은 일에 충성하면 많은 것을 맡겨주시고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에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영혼이라면 벌써 저의 전하는 이 같은 말씀들 앞에서 영혼의 즐거움
이 샘솟아 올라와 아멘으로 복창하게 되어 있습니다. 즐거움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기 영혼에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못 박힌 십자가를 진 사람은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요,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함께 죽었음을 알고 자기가 죽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으로 사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한 달란트 남긴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많은 것을 너희에게 맡기리
니"하신 말씀대로 이제 성영님이 그 영혼에 오셔 계시니, 성영님의 소원을 품고 성영님으로 행하
여 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요6:68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했던 베드로의 고백처럼
바로 이 말씀 앞에서도 "예수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말이 아닌, 인본의 누룩이 아닌 예수
님의 생명의 말씀을 주고 계시니, 이제 우리가 이 말씀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못 박은 십자가
를 지는 일입니다. 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일까요? 여러분! 여러분이 50Kg정도의, 아니 30kg정도
의, 아니 10kg정도의 짐을 평생 지고 살아야 한다면, 그 짐을 의식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의식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처음엔 별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짐
이 얼마나 고달프고 원수와 같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심신이 지쳐서 질식해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악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할 만큼 무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 창조 이래 온 우주 만물을 다 품으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나의 죗값이 맞먹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0kg, 30kg의 짐을 지고 살아야 한다면 그 무게를 단 1초도 의식 안 할 수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것은, 바로 그같이 날마다 분초마다 자기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의식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십
자가에서 죄와 함께 자기는 죽었다는 것을 의식하라, 의식해!! 그래서 죽은 자기가 올라올 때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나는 예수님으로 사는 자다!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
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남긴 달란트의 일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달
란트가 여러분에게 확실히 전달되었고, 각자 자신에게 남기는 것이 되어서, 하나님의 즐거움에
함께 모두 참여하신 복이 있게 되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눅19장 므나 비유로 갑니다. 11에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
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
이러라 했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임할 줄로 생각한 것은 므나 비유 바로 위의
9에서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시고 예
루살렘에 가까이 오시니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오늘 12에서부터 그
말은 당장에 나타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실
것이라고, 갔다가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여기 어떤 귀인은 누구를
비유한 것일까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늘 보좌로 들어
가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왕위를 받아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비유입
니다. 성도를 데리러 다시 오실 때, 이것을 강림(재림)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때 각각 장사하라고
한 므나를 주고 간 것의 결과를 평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었다' 므나도 돈의 단위인데 은화 열 므나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돈은 사고파는 것에 사용하려고 있는 것처럼 종을 왜 불렀는가? 장사하라고 불렀다, 즉 일하라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종 열''열 므나'하는 '열'은 이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맡겨주
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영님의 가르침을 따라 장사할 자로 부름받은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것은 땅에서의 수입니다. 언제도 말씀드렸지만, 열은 땅(신앙의 전 일)의 수이고, 백은 예수님의
수이고, 천은 하늘의 수입니다. 이해됐습니까? '은 므나'라 한 것은, 은은 단련되어 나온 것, 불순
물이 섞이지 않은 순은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믿음은 그 같은 단련함이 있어 순(純)은과 같게
나오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시12:6에....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슥13:9에 불 가운
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하셨듯이 은이라는 것은 불순물을 제거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은이
되려면 도가니의 풀무 불에 일곱 번 단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 므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도 믿음의 단련을 받고 세상에 예수님을 비추는 빛이 되어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종으로
서의 일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이 일곱 번 풀무 불에 단련되어 나온 것 같은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우
리가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자 안에 오셨으므로 이제 성영님과 함께 연단을 받으며,
세상에 예수님을 비추는 빛의 사명을 행하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달란트는 자신에게 남겨야 하는
사명이고, 므나는 자신의 믿음을 위한 연단과 고난을 받으며 이웃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 사
명을 행하라고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 아닙
니까, 이제 예수님의 것으로 성영님께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사람들을 향해 비추고 전하고 가르쳐 지
키게 하는 그 장사하라는 말입니다. 장사를 잘할 수 있도록 성영님을 모시고 성경의 뜻을 배워 앎으
로서 이제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 장사하라는 말입니다. 자기 속사람이 성장하는 훈련과 연단을 받
으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입니다. 막16:15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
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셨고 마28:18-20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영
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
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신 이 명이 바로 은 므나의 장사요, 이 명하심
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합당히 행하는 것이 곧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믿음이 되었으면, 자기의 받은 복음을 전해야 합니
다. 인간이 죄인 됨과 피 흘리심과 용서와 구원과 영생과 저주와 심판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죄를 못 박고 부활하셔서 영생을 주셨다고 하는 이것을 전하는
사명도 감당하여 자신에게 므나를 남기라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의 장성을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고 자꾸 새겨듣는 그 훈련을 통해서 진리로 완전한 자유를 얻기까지 자신을 위한 장사를
부지런히 하여 자기 속사람의 장성함으로 므나를 남기고, 또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비추는 빛이
되어 그들로 예수님 앞에 나와 죄인으로 무릎 꿇어 죄 사함과 구원을 얻게 하여, 영혼의 구원을
위한 은 므나도 남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15에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하셨습니다.
16에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했습니다. 한 므나로 몇
므나를 남겼다고요? 열 므나, 그러면 몇 배나 남긴 장사입니까? 열 배지요. 열 배라는 것은 땅에서
의 자기 사명을 온전히 행하여 하늘의 열매를 거두는 일에 충성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였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 하나님 나
라에 열매로 거둘 수 있게 하는 그 일에 온전히 충성하였음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
첫째가 나아와'했는데 그 첫째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의 첫째로서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것입니다. 그래서 17에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한 종
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열 고을
권세는 땅의 권세를 말하는데 이 권세는 이제 천년 시대로 들어가서 그 시대의 사람들 전체를 권세
로 다스리고 가르치는 일을 말한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 이후에 합당한 자들도 이 권세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18에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했습니다. 여
기서 '둘째'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 이후 이방인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소유의 일을 한
처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닦는 모든 수고의 일은 장자 된 이스라엘이 하였기에, 그
래서 둘째는 종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셨고,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
으니'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은 종으로서의 작은 일에 충성한 일이 아니고,
자신이 구원 얻기 의하여 자기를 위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버린 작은 일을 한 것일 뿐이기에, 단
지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다섯 고을 하니까 다섯 군데 고을을 맡으라는
말이 아니라, 이제 천년 시대로 들어가면 사도들을 위시하여서 다섯 므나의 일, 가르치는 일을 하
는 것입니다. 다섯 고을의 권세라는 말입니다. 그때는 권세가 얼마나 큰지 자연에 명하기만 하면,
예를 들어 무화과나무에 '열매를 내라' 명하면 열매를 내는 그런 엄청난 신비한 일들로 가득 차 있
는 신비한 세계일 것입니다. 영원한 세계에 가서도 그 영광은 계속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 보좌
심판 이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그 세계에서도 그 영광은 계속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셨습니까?
그런데 14에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使者)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여 다시 오실 때는 만주
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방인들, 즉 예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놓으
시고 하늘로 가신 뒤, 이 복음을 받고 구원받아야 할 백성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자기들의 왕 됨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했는데 여기서
'그 백성'은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에 대한 표현이고, 미워했다는 것은 그 배후에 마귀가 있다
는 것이고, 사자를 뒤로 보냈다는 것은 마귀가 이후에 그 같은 자들을 하나님의 선지자인 것처럼
세워서 예수님을 믿게는 해도 바른 믿음이 되지 못하도록 조종한다는 말입니다. '뒤로 보내어'하
는 것은 뒤에서 거짓말한다, 떳떳지 못한 속임으로 인간의 도리와 교훈의 말씀이 되게 하여 말씀을
왜곡하여 놓는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의 배후는 마귀요,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마귀의 자손들이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사자를 뒤로 보내어 예수님께
서 왕 됨을 원치 않는 일을 계속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20,21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
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
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했습니다. 한 므나 받은 것을 자기가 수건으로 싸 두었다가 다시 그
한 므나를 가져왔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수건은 율법을 말합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산에서 하나님
과 함께하며 율법을 받아 내려오는데 그 얼굴이 광채가 났습니다. 하여 백성들이 광채 나는 얼굴을
보고 모세를 신처럼 대할까 염려되어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수건으로 가린 겁니다. 그것을
고후3:13에 말하기를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라고 하여 그 수건을 율법으로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수
건으로 싸 두었었다. 다시 말해 율법 속에 넣으신 본뜻은 무엇인지 그것은 하나님 당신이나 알지,
우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 혹 내가 당신 것을 잘못 건드릴
라치면 나를 심판하실 것 아니냐? 당신은 두지 않았어도 취할 수 있고 심지 않은 것도 거두는 능력
이 있으니, 감히 인간인 내가 어떻게 당신 일을 알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당신 것을 손대겠느냐,
그래서 무서워서 두려워서 하나님의 것 건드리지 않고 수건으로 잘 싸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왔으니
당신 것 당신이 도로 받으시는 것이니 피차 손해는 없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20,21이, 율법은 죄를 말하고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도무지 보려고 하지
않았던 유대인의 지도 계층에 있던 사람들의 그 같은 태도를 비유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
가 고후3:14,15에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므나 비유 20,21과 고후3:14,
15의 말씀은 예수님 당시와 이후와 오늘날의 모든 믿는다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주신 은혜의 복음을 듣고 믿음을 시작하였지마는 결국 율법으로 돌아가더라
는 말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깨달아 진리로 자유케 되는 믿음으로 서지 못하고, 오히려 율
법에 가려서 진리가 사람 속에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복음을 받긴 받았는데 예수님 믿는다고, 예수
님 믿고 구원받았다고 말은 하는데, 사실은 율법적이 되어서 복음을 율법에 가두고 율법 속에다 감
추어 버리고, 자신이 율법에 지배받는지 복음의 지배를 받는 것인지 도무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
러니까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달란트에서 자기에게 남기라 하신 그
자기에 대한 사명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다고 했지만, 영으로는 영
접이 될 수는 없는 것이요, 자신에게 그 달란트 남기는 것이 없으니, 구약의 말씀, 율법의 본뜻을
깨닫지도 못하고 아는 바가 없는 겁니다. 복음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엄청난 복을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것만 가진 것입니다.
자기 양심의 눈으로 성경을 보니까 어떻습니까?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율법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죄하고 정죄 받는 율법만 가지고 사는 겁니다.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여태까
지 진정 듣고 깨닫기 원했으면, 귀담아듣고 새김질하는 진정이 있었다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다고요? 오실 예수님을 예표하고, 상징
하여 나타내 주는 것인데,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하고 귀와 눈을 두고 율법의 뜻을 깨
닫기 원했다면, 성영님께서 눈이 되어 그것을 깨달아 알 수 있고 보게 하여 주실 것인데, 사람들이
그러하지를 못하고 또한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에서 보아야 할 예수님을 볼 수 있겠습니
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볼 수 있겠습니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은 하나님을
거부한 원수이니,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것이기에 죽은 그 양심의 눈으로 성경을 보고, 율법을 보
면 문자의 말은 알아도 그 속뜻은 절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건으로 덮어져서 수건 뒤에 광채
(예수님을 비춘 것)는 보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속에서 뭐만 보이느냐, 21에서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처럼 잘못하면 벌
주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율법을 범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 하시
고 심판하시겠다고 하니 그저 두려운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신
예수님은 작게 보이고 율법 속에 하나님의 심판은 크게 보여서 그곳에 마음이 붙들려 그 마음이
일생 율법의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당신은 조금만 잘못해도 심판하는 분이니,
제가 무서워서 그냥 당신 것 그대로 싸두었다가 가져왔다고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전능하셔서 못하시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신데, 제가 당신 것 손해 끼치면 안 되잖습니까? 그래서
당신 것 잘 지켰다가 가져왔으니 제가 손해 하나도 입게 하지 않았으니 잘한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머리가 있다 그 말이에요. 그 정도 생각은 있습니다. 성경 볼 줄 아는 머리가 있다는 말이지
요. 계산할 줄 안다 그 말입니다. 무엇이 내게 손해이고 무엇이 내게 유익이 될지 알고 있다는 말
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믿는다는 것이 다 이 자리에 있습니다. 자기 머리로 알려고 하는 데에 다
걸려서 머리로 믿느라고 수고하고 애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공력을 시험하실 때 다 불타버리고
남은 것이 없게 되니 이후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손해 볼 것 같고, 억울할 것 같고 망할 것 같고,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그렇게 살 수 있지만 우리는 사람이지 않느냐 하는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머리로 계산하고 저울질함으로써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22에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신 것을 취할
것이고, 심은 것을 반드시 거두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판단하는 네 말로 하나
님께서도 그렇게 판단하신다, 네가 나를 판단하였으니 네가 심판 받을 자라고 네가 너를 말하였다
는 말입니다. 네 말대로 판단하겠다. 네가 너를 정죄할 자로 말하였으니 그 말한 대로 정죄 받는
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23에 뭐라고 했는지 누가 읽어보세요.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
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그 뒤 그에게서 한 므나도 빼앗아 있는
자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달란트에서 말씀한 것처럼 네가 네 머리를 내려놓고 차라리 천국의 제
자 된 서기관에게 잘 듣고 배워서 네게 남긴 것이 있게 했다면, 그에게서 성영님의 가르침을 듣고
따라 행하였더라면, 내가 와서 너에게 남긴 그것을 너에게서 찾지 않았겠느냐는 말씀이에요. 자기
에게 남긴 것이 있으면 그것은 삼위의 하나님과 연결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연결됩니다. 자기
가 깨달을 수 없으면 머리로 알려고 하는 것 깨끗이 내려놓고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에게, 저 같은
사람에게....,아닌가요? 좀 듣고 배워서 남긴 것이 있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냐. 그러나 때가
늦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때가 늦는 그런 불행을 맞지 않길 바랍니다. 지금 기회가 있을
때, 여러분이 이 땅에서의 날이 얼마나 있는지는, 뭐 100년까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
의 날은 얼마이겠습니까? 70년, 50년, 20년, 한 10년, 그러나 가는 것 순서 없습니다. 내일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기회 주셨다고 생각한다면, 준비하는 기회로 삼는 지혜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자기
를 철저히 내려놓고, 아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식하여 진정으로 믿고 나는 죽었
다. 나는 예수님으로 산다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과 함께 자기 죽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
에 힘쓰며, 말씀의 바른 가르침을 제대로 받으며 예수님 사랑하고 말씀을 따라 사는 기회가 되라는
말입니다. 늘 기도하여 성영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진짜 믿음이 되는 여러분이 되시라는 말입니
다. 이후 구절 말씀은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이니 오늘 달란트와 열 므나의 비유 말씀은
여기서 마칩니다.
우리에게 말씀의 뜻을 깨달아 알고 바른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영님께 감사하고
모든 영광을 삼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제 2 장 (1) 달란트와 열 므나 비유.p35-p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