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고사성어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0-2500년 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의 말과 행동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이 책에 소개되는 고사성어의 원천이 되는 주요 책자의 인물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은
고사성어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여
이들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보기로 한다.
孔子(공자, BC 551-479)
동양의 사상가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분은 누가 뭐래도 공자이다.
공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 춘추시대 노(魯) 나라
창평향(昌平鄕)의 추읍(陬邑)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부친 숙량홀(叔梁紇)과 안씨(顔氏)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키가 9척이 넘는 장신의 거구이고 태어날 때부터 머리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고
양쪽 머리가 위로 튀어나와서 언덕을 닮았다는 뜻으로 구(丘)라고 이름 지었다고
사마천(司馬遷)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전하고 있다.
버지니아 페어팩스에 있는 조지메이슨대학에 가면
커다란 공자의 동상이 있는데 참 위엄있는 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공자는 어렸을 때 늘 나무로 만든 제사 그릇을 늘어놓고,
예의와 자태를 갖추어 제사 지내는 놀이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가난하고 지위도 낮았지만, 작은 벼슬아치로 있을 때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였다고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전하고 있다.
공자는 특별한 스승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독서와 사색으로 지식과 식견을 쌓고 뚜렷한 유교(儒敎) 철학, 사상관을 확립하였다.
그의 나이 30이 되었을 때 세상에 나서 그의 사상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예수님이 30세에 공생활을 시작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 흥미롭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공자가 주(周)나라의 노자(老子)를 만났다는 기록을 남겼다.
노자는 공자를 만나
‘다른 사람의 자식이 된 자는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말고 다른 사람의 신하 된 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오’라는 다소 혹독한 질정(叱正)을 하였는데,
공자가 떠나갈 때
‘내가 듣건대 돈 많고 신분이 귀한 자는 사람을 배웅할 때 재물로 하고,
어진 자는 사람을 배웅할 때 말로써 한다고 하오. 나는 말로써 그대를 배웅하려 하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노자 역시 공자의 어짊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그 후 제자들에게 노자를 만난 이야기를 하며 ‘새가 잘 나는 줄을 나는 알고,
고기가 잘 헤엄치는 줄 나는 알며, 짐승이 잘 달리는 것을 나는 안다.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싯줄로 잡을 수 있으며,
나는 것은 줄 화살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에 이르러서는 나는 능히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용과 같았다’라고 말했다.
공자의 노자에 대한 존경과 공자 자신의 대인배적(大人輩的) 인품을 드러내는 일화이다.
공자는 30대에 이미 가장 박식한 사람으로 노나라에서 유명해졌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직책을 구하려 했으나 잘 풀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제후들의 관심이 온통 부국강병(富國强兵)에만 쏠려있었기 때문에
인(仁)과 의(義)에 바탕을 두고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공자의 정치 이상(理想)에
수긍은 하면서도 당장 치세에 활용하기는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우리나라가 60년대 이후 경제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때 산업기술 관련 연구 개발이
당장의 과제였기 때문에 기초 과학 연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인정은 하면서도
당장의 우선순위에서 일단 밀려났던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공자는 52세에 노(魯)나라의 사구(司寇, 법무부 장관과 같은 직책) 벼슬을 하여
훌륭한 업적을 보여주었으나 당시 세력가인 계씨(季氏) 일가로부터 견제당하여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3년 만에 그만두었다.
그 후 그는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주유하며 유세(遊說)에 나섰으나
제후들에게 푸대접을 받기도 하고 길에서 깡패들을 만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제후국들의 소인배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제후들이 그를 배척하도록 모함하였고 공자는 그의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인재 주위에는 시기 질투하여 방해하고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하여 인재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학식과 지혜만 높은 것이 아니라 유머와 너그러움도 갖춘 사람이었다.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공자가 제자들과 주유열국(周遊列國) 중
정(鄭)나라에 갔을 때 길에서 일행이 강도를 만나는 봉변을 당하고 서로 헤어져서
다니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길이 어긋나 공자 홀로 성곽의 동문에 서 있었다.
그런데 정나라 사람 하나가 그를 보고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에게 그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당신의 스승 공자가 풀죽은 모습이 마치 상갓집 개(喪家之狗)와도 같았다’고 말했다.
자공이 눈치 없게 이 말을 스승인 공자에게 들은 대로 말했는데도 공자는 껄껄 웃으며
‘내가 저들의 모습과 꼭 맞을 수는 없지만 상갓집 개와 비슷하다고 한 말은 맞다
맞아!’라고 말했다.
보통 사람이면 화를 내거나 욕을 했을 수도 있을 터인데 공자는 자기 모습을 있는 대로
말한 정나라 사람의 말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웃어넘겼을 뿐 아니라
눈치 없는 제자 자공도 나무라지 않았다.
말이 그렇지, 속좁은 범인(凡人)들이라면 사실 따라 하기 힘든 일이다.
지난 2500년의 중국 역사에서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 정치가들이 나타나
밤하늘의 별처럼 명멸(明滅)하며 많은 사상과 명언, 저서를 남겼으나
긴긴 세월 동안 거르고 걸러져서 많지 않은 사람들만이 끊임없이
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그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다.
공자는 그중에서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세월에 무관하게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주옥같은 말씀과 가르침을 남겼다.
또한 우리나라 고려, 조선왕조를 통하여 지금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유가 사상이 한국인의 생각과 삶에 대한 규범의 기초가 되었다.
현대에 와서 공자와 유교 사상을 극렬히 비판하는 사람도 있으나 우리의 생각 속에는
공자의 가르침이 알게 모르게 자리 잡고 있고 우리의 정신문화를 형성하는데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면서부터 그들은
공자의 인(仁)에 기초한 도덕 정치가 공산주의 이념과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으므로
60년대 문화혁명 때 유가의 전통을 파괴하는 신(新)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만행을
저질렀고 소중한 유가(儒家)의 문화유산이 대부분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 공산당 정권은 공자의 사상을 교묘하게 재포장하여
아전인수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공산당 이념을 전 세계에 퍼뜨리기 위해
소위 공자학원이라는 것을 세계 각국에 수없이 설치하였는데 많은 나라들이
그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퇴출하는 추세이다.
이는 중국인들이 스스로 자기 조상과 역사를 모욕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그를 존경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우러났다고 하였으며 공자는 가히 지극한 성인(聖人)이라고 말하고 그의 일대기를
열전(列傳)에 포함시키는 대신 세가(世家)의 한 편으로 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