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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잉태 마리아만 하나?>의 줄거리:
마리아는 가톨릭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어머니’(데오토코스)가 아닙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육체적이고 생물학적 차원의 어머니일 뿐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비천한 여성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생물학적으로 잉태한 사건, 이 사건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에 대한 영원한 비유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잉태 마리아만 하나?
(누가복음 1:26~38)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 잉태 마리아만 하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 잉태 마리아만 하나?’
제목을 달리 말하면 “마리아만 예수님을 잉태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과 그 이유를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시는 대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출생의 비밀이 본문만큼 자세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이렇게 출생의 비밀을 자세히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누가는 단순히 예수님의 생애 동안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독립적인 기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세례 요한의 출생의 의미 또한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들은 시간상의 차이를 두고 일어난 사건들을 하나의 주제의식 아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형태는 누가복음뿐만이 아니라 공관복음서 전체에서 나타나는 특성이기도 합니다.
누가가 복음서를 집필할 때에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복음의 토대 위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났고 이로부터 신약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경험한 누가는 완성된 복음의 빛 아래에서 세례 요한의 출생의 비밀이나 예수님의 출생의 비밀을 조망합니다. 이러한 일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누가의 의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기록들이 복음의 완성 순간인 승천 아래에서 조망되고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를 기차를 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일단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을 생각하고, 또 경기도를 빠져나갈 것을 생각하고, 또 충청도를 빠져나간 후에 경상도를 빠져나가서 부산에 도착하는 차편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이미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도착하는 차편을 찾기만 하면 됩니다. 도착지가 출발점을 결정짓습니다. 예수님 출생의 비밀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승천이라는 도착지로 향하게 된 출발점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승천이라는 사건의 빛 아래에서 예수님 탄생의 비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누가의 관점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해석해보자면 다른 복음서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출생의 비밀을 기록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하는 모습과 이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 그리고 세례 요한을 잉태한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뱃속에 있던 세례 요한이 기뻐 뛰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마치 소설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는 엄연한 사실로써 누가의 마음속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바탕으로 ‘예수님 잉태 마리아만 하나?’라는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사건은 이방인이었던 누가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경이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곧 비천한 처녀의 뱃속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잉태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누가를 놀라게 했던 것은 땅과 하늘의 연결입니다. 사람에게서 땅과 하늘이 맞닿고 연결되는 경이로운 일이 일어났음에 누가는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신화나 로마신화 혹은 세속 종교들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의 모습을 보면 그것들은 인간의 도우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미 승천을 경험한 누가로서는 진짜 신이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 안에서 땅과 맞닿고 연결되는 사건이 일어났음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께 마음을 둔 자들의 마음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음을 염두에 두고 사건을 기록해 나갑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사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문 35절을 보면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누가는 미천한 신분의 한 여인에게 하늘이 와 닿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을 이러한 구체적인 서술을 통해 드러낸 것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사건은 그 자체로 기적이며 역사적 사실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의 기적을 마지막 사건인 승천의 빛 아래에서 연결시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잉태 모습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서 마음이 승천하게 된 모든 사람들의 믿음상태에 대한 비유적이고 예언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의 잉태는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낸 사람들의 삶이 이 땅에서 진행되는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누가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이러한 모습을 마리아를 통해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성모 즉 하나님의 어머니로(테오토코스, Θεοτόκος)로 추앙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생물학적으로 잉태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마리아의 잉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비유적 사건으로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승천하는 사람들의 믿음의 상태가 마리아를 통해 비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서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의식과 마음을 구분하여 설명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의식이란 깨어있어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마음의 공백은 채워져야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고 행복이 결정되는 처소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원하는 대상을 의식적으로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있는 의식 안에서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이 시대에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다고 해봅니다.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몸이 불편할까봐 잉태한 아이를 잠시 집에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는 대통령을 만나든 무엇을 하든 예수님을 잉태한 채로 그 일들을 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도 발견되어야만 하는 신앙적 모습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 사태가 다시 확산되고 있습니다. 만약 마리아가 이러한 시대 속에 살고 있다면 재난이 일어나고 정치가 혼란하다고 해서 예수님 잉태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령 지진이 일어나고 태풍이 불고 홍수가 나더라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의 의식은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예수님을 의식 속에서 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의식이 예수님을 향하여 항상 깨어있어야 하며, 의식 안에 예수님을 담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예수님의 잉태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을 따라 승천하게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모습에 대한 영원한 비유 사건이 됩니다. 모든 사람은 비유적으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생물학적 차원에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예수님을 의식 안에 잉태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반드시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있는 동안 예수님은 점차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온전한 모습을 갖추신 후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은 자궁과도 같습니다. 의식 속에 예수님을 잉태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날 때에도 예수님께 의식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앞에서도 예수님은 의식되어야 하며, 지진이 났을 때에도 예수님은 의식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유산과도 같은 일이 습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의식 안에 담고 있고 예수님에 대해 깨어있는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타나시게 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10개월 동안 몸에 담은 결과 예수님이 태어나시게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먹고 자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품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성경공부나 신학공부가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직분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의식의 자궁 안에 예수님을 담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의식의 자궁 안에서 기억하고 잉태하기만 하면 그 기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은 점점 온전한 모습을 갖추어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시며 소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온전한 모습을 갖추어 가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소원도 온전한 모습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마리아가 때가 되어서 예수님을 출산하였던 것처럼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서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는 초장에서 마지막 지점인 예수님의 승천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 태어나게 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리아를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마리아의 잉태에 하늘이 동원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고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으로 덮으시고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도 만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들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한 사람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입니다. 믿음이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의식 안에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것을 초장부터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령에 의해 수태를 고지 받은 마리아의 반응은 두려움과 놀라움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자신을 통해 나타날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루살렘도 아닌 변방 나사렛에 살고 있었고 정혼한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아직 요셉과 동거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신이 메시아를 잉태하리라는 고지를 접하게 된 놀라움이 기독교인에게는 감격이 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전혀 감격하지 못합니다. 의식 속에서 예수님을 잉태한다는 생각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식 속에는 여전히 세상 문제들이 가득합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사업 문제를 잉태하고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어지럽다고 느끼며 의식 속에서 세상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의식 속에 담은 세상의 가치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동원하고자 한 적은 있어도 예수님을 의식 속에서 잉태해보고자 한 적은 없습니다. 아기를 잉태한 엄마가 자신의 몸보다도 아기를 가까이 느끼는 것처럼 의식 속에서 예수님을 가깝게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밖에 계시고 의식은 언제나 세상의 가치들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돈을 의식 속에 잉태하고 돈 문제가 아름다운 아기의 모습으로 출산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산파처럼 불러들이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의식 속에서 잉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의식 속에서 세상을 잉태함도 끝나게 됩니다. 잉태된 세상은 유산되어야만 합니다. 잉태한 세상을 훌륭하게 낳아서 자식으로 키워보겠다 여기고 있기에 인생은 이토록 힘이 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잉태한 동안에만 세상을 잉태한 마음은 죽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우리의 마음 또한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식은 세상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기쁨과 만족이 생겨나며 평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에 평강이 이루어질 때에 이 땅에서는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를 통해 예수님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계속해서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예수님을 의식의 자궁 속에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가 지속될 때 세상이 잉태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표현을 누가는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 사건에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특별한 활동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가 믿음을 키우지는 않습니다. 진심으로 부탁드리고 요청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의식 속에서 잉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함이 언제 어디서든 지속되었던 것처럼 코로나가 발생하든 장사가 안 되든 배우자가 무슨 말을 하든지 자녀가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의식은 예수님을 향해 깨어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 의식하기를 지속할 때에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이 탄생하셨듯이 이윽고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이 나타나시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의식하기를 통해 마리아의 감격은 우리의 감격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덮으심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자나 깨나 장사가 잘되나 못되나 몸에 병이 들었든지 건강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의식적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기억하여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나를 덮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언제 어디서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기억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될 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러한 바람대로 예수님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나의 바람이나 추구가 힘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덮어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덮은 자들은 의식 안에서 예수님을 잉태하게 됩니다.
온라인으로 상호 대화할 수 있는 만남의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것을 십자가 생활화 119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삶의 현장에서 어느덧 의식 속에 세상을 잉태하고 예수님을 유산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119구조대가 필요합니다. 온라인에서의 만남을 통하여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유산하는 일을 방지하게 됩니다. 저뿐만 아니라 참여하시는 다른 목사님들과 대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십자가 생활화를 훌륭히 해나가고 계시는 권사님 집사님들 일반 성도님들과도 교류해가며 서로가 예수님을 유산시키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저 또한 여러분들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온라인 만남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임산부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은 마리아에게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진정한 믿음의 상태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역사적이고 기적의 사건이지만 성령님에 의한 말씀의 감동을 통해 영원한 예언이자 비유로써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과 살아있는 동안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승천할 사람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의식 안에서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잉태함이 유지되고 보존됨에 따라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출산한 것처럼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 전반에 걸쳐 예수님이 나타나는 일이 삶에서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누가는 이것을 초장에서부터 선언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굳건히 담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의식의 자궁 안에 예수님을 담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예수님을 유산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