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된 것은 파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사전적 의미는 사견(邪見)과 그릇된 것을 깨고 정법(正法)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파사현정은 불교 용어다. 원래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육사(六邪) 외도(外道)들의 삿된 견해를 연기법으로 타파(打破) 한데서 온 말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 철학 사상은 두 가지 사상이었다. 하나는 유신론(有神論)적 바라문 사상과 무신론(無神論)적인 유물론(唯物論)의 사문(沙門)사상이었다. 유신론은 바라문 사상으로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상이고, 무신론은 세상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물질요소로 이루어졌다는 사상이었다. 이렇게 신을 믿는 사상과 신을 믿지 않는 사상으로 양분한 것이 인도 종교철학이다. 부처님은 이 사상들이 신이든 물질이든 존재론적으로 보는 견해가 사견(邪見)이라고 파(破)하시고 연기법(正見)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쓰여진 말이 파사현정(破邪顯正)이다. 그러면 존재론은 무엇이고, 연기법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 바라문교(婆羅門敎) 에서는 브라흐만 이라는 신이 우주를 창조(創造)했다고 하였다. 신이 우주를 만들었다고 했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우주를 존재하게 했다는 말이다.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보면 신도 존재하고, 만물도 인간도 존재한다고 보는 사상이다. 존재의 근원은 브라흐만 신(神)이다. 물질도 만물도 다 신이 존재하게 했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창조론과 대동소이한 사상이다. 그와 반면에 사문 사상은 신이 아니라, 이 세상은 물질요소로 이루어졌다는 사상이다. 물질요소를 떠나서 아무것도 없다는 물질요소 론을 주장한 것이 사문들의 사상이다. 이렇게 부처님 생존 당시에 인도에서는 유신론(有神論)과 유물론(唯物論) 사상이 두 축을 이루고 싸웠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을 했다. 오늘 주제는 파사현정이다. 무엇이 사견(邪見)이고, 무엇이 정견(正見)인가? 그것을 알아야 파사현정이 된다. 주장만 하고 논쟁만 한다고 해결이 나지는 않는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왜? 사견(邪見)이고, 왜? 정견(正見)인가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설산에서 6년 수행을 하고 깨달았다. 부처가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야 정견(正見)과 사견(邪見)이 판가름이 난다. 부처님 처소에 하루는 바라문(婆羅門)이 찾아온다. 고타마시여! 일체(一切)라고 할 때 당신은 무엇이 일체(一切)라고 합니까? (瞿曇 所謂一切者 云何名一切) 부처님이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일체는 십이입처니라(佛告 婆羅門 一切者 謂十二入處). 여기서 바라문이 묻는 일체(一切)는 브라흐만 신(神)이 변해서 된 우주 만물을 말한 것이다. 일체라는 것으로 부처님께 우주관을 묻는 것이다. 우주 만물은 브라흐만 신이 변해서 일체가 되었다고 바라문교에서는 보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변설(轉變說)이라고 한다. 태초에 브라흐만 신이 변해서 우주 만물 속으로 들어가서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사상(梵我一如)이다. 바라문이 부처님께 질문한 것은 당신의 우주관은 무엇이냐? 묻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일체(一切)를 십이입처(十二入處)라고 했다. 십이입처(十二入處)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認識)하는 인식기관(認識機關)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은 바라문의 질문에 일체를 십이입처라고 단언을 했다. 여기에 부처님이 깨달은 깨달음이 있다. 이 깨달음만 알고 체험을 한다면 우주의 비밀은 풀어진다.
그러면 십이입처를 하나하나 풀어 보자. 십이입처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하는 내입처(內入處)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하는 외입처(外入處)를 말한다. 여섯 가지 인식기관의 뿌리인 눈 귀 코 혀 몸 의식이 몸에 있다고 해서 內入處라고 했다. 외 입처는 밖에 인식의 대상 세계인 빛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을 말한다. 안으로 있는 여섯 가지 인식기관을 내육입처(內六入處)라 하고 내입처의 인식대상인 여섯 가지 인식경계를 외육입처(外六入處)라고 해서 둘을 합하면 (十二入處)가 된다. 이 십이입처를 통해서 우리는 인식을 하고 사물을 판단한다. 이것을 떠나서 존재를 규명할 수가 없다. 모든 인식은 이 십이입처를 통해서 알고 느끼고 생각을 한다. 눈은 사물을 보고 아름답다 곱다 추하다 하고 판단을 한다. 귀로 천둥소리도 듣고 피아노 소리도 듣는다. 코로는 냄새를 맡는다. 생선 냄새도 꽃향기도 코를 통해서 안다. 맛은 혀로 안다. 쓴 것도 단것도 혀를 통해서 맛을 느낀다. 촉감은 몸 피부를 통해서 느끼게 된다. 차거운 것과 뜨거운 것은 촉감으로 안다. 마음은 앞에 다섯 가지 인식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통합해서 아는 인식을 말한다. 안으로 지각되는 다섯 가지 정보를 불교에서는 법(法)이라고 한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식의 세계 십이입처이다. 이 인식의 세계를 떠나서 따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해체를 해서 분석을 하면 아! 부처님이 왜? 일체를 십이입처라고 하신 까닭을 알 수가 있다. 부처님께서는 십이입처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안색(眼色) 이성(耳聲) 비향(鼻香) 설미(舌味) 신촉(身觸) 의법(意法) 이것이 번뇌에 묶여있는 법(法)이다. 이들을 묶고 있는 번뇌는 탐욕(貪慾)이다. 탐욕이 이들을 묶고 있다는 말씀이다. 십이입처는 우리 마음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눈으로 색(色)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는 것은 얼굴에 있는 눈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마음이 내입처(內入處)의 눈(眼)이다. 우리는 밖에 있는 색(色)을 본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색(色)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은 파장이다. 빛의 파장은 극히 짧은 것부터 아주 긴 것까지 무한하게 존재한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가시광선의 파장만을 인식한다. 적외선은 보지 못한다. 빛은 파장의 장단(長短)만 있지 색깔의 차이는 없다. 빛의 파장에 따라 우리 시신경(視神經)이 자극을 받으면 자극 정도에 따라 색깔을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는 색(色)은 우리 마음에서 생긴 감각을 말한다. 소리도 냄새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보는 마음에 의해서 보여지는 마음이 외입처(外入處)다. 이렇게 분석을 해보면 내입처(內入處)와 외입처(外入處)는 우리의 마음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것을 모르고 우리는 보는 것은 안에 있는 나(眼)라고 하고. 보이는 것은 밖에 있는 나와 다른 것이라고(色) 생각을 한다. 결론은 십이입처는 나(我)와 남(世界)을 분별하는 마음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인식 작용을 통해서 나와 세계를 나누고 쪼개면서 잘못된 사견(邪見)을 가지고 일체(一切) 우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단정을 짓는 것을 살펴보면 나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존재이고, 세계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면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나와 세계를 나누고 쪼개는 것은 부처님은 탐욕이라는 번뇌에 묶여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상의 예를 들어 보자, 책상은 책을 놓고 보는 사물을 말한다. 책상이라는 것이 원래 있는 것입니까? 원래 있는 것은 아니다. 책상은 책을 놓고 보려는 사람들의 욕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물건이다. 사람의 욕구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책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책상에 밥을 놓고 먹으면 밥상이 된다. 똑같은 물건도 사람의 욕구 욕망에 따라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금을 예로 들어 보자. 금으로 반지를 만들면 금반지가 된다. 목, 거리를 만들면 금 목, 거리가 되고, 팔찌를 만들면 금팔찌가 된다. 사람의 욕구에 따라서 반지도 되고 팔찌도 되고 목, 거리도 된다. 우리 의지 욕구에 따라서 나타나는 세계도 다르게 보인다. 이것을 부처님은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고 하셨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다. 마음을 떠나서 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그렇게 본다면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기 때문에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래서 일체(一切)는 십이입처(十二入處)라고 하신 것이다. 마음을 떠나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부처님께서는 언어의 개념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 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말이다. 그렇다면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세상에 모든 언어의 개념들은 생각을 말한 것이다. 그 생각은 어디서 옵니까? 사람의 의지 욕구에서 온다. 그 욕구는 어디를 통해서 옵니까? 우리 마음을 통해서 온다. 마음 작용은 어디서 옵니까? 눈은 빛을 통해서 온다. 소리는 귀를 통해서 온다. 냄새는 코를 통해서 온다. 혀를 통해서 맛은 온다, 몸을 통해서 촉감이 온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기적 인연법(因緣法)으로 나타난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은 인연(因緣)에 의해서 나타난 것을 깨달으셨다. 존재(存在)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나타나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세계도 인연 법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부처님은 만물은 항상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제행(諸行) 무상(無常)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변하기 때문에 고정(固定) 불변(不變)하는 존재(存在)는 없다, 그래서 제법무아(諸法無我)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씀이다. 내라는 동일(同一) 주체(主體)가 없다는 말이다. 천년만년 변하지 않는 항일성(恒一性)을 지닌 것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내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나라는 자아(自我)의 실체가 정말 있습니까? 따져보면 바로 알 수가 있다. 세 살 때 내가 나입니까? 스무 살 때 내가 나입니까? 서른 살, 마흔 살, 쉰 살, 육십 살 어떤 것이 나일까요? 나라는 것도 분석을 해보면 변하지 않습니까?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이렇게 인연 따라 변해 간다. 동일성(同一性)을 가진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세계가 있다. 신이 있다. 물질이 있다, 단정을 짓고 따진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라고 고집을 부린다. 그렇게 집착하는 견해를 사견(邪見)이라고 한다. 왜? 사견(邪見)이냐? 연기 법칙(緣起法則)을 모르기 때문에 사견(邪見)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정견(正見)이냐? 연기 법칙을 깨달은 것이 정견(正見)이 된다. 연기법은 우주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누가 창조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우주 만법의 이치는 이렇게 연기법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은 분이 붓다 석가모니이시다. 그래서 석가를 붓다라고 한다. 붓다는 깨달은 자라는 말이다. 우주의 실상인 연기 법칙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오늘 주제인 파사현정은 연기법(緣起法)이 정견(正見)이고, 사견을 깨는 것은 정견인 연기법이라는 말이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인식의 착각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를 마음이라고 단정을 짓고 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부처님 생존 당시에 인도 사상은 62가지 사상이 있었다. 62가지 사상은 인류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 사변적(思辨的)으로 생각을 해서 체계를 세운 사상들이다. 그 모든 사상을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모두 다 타파(打破)하셨다. 그래서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해서 세계 인류의 진리의 빛이 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으로 파사현정을 주제로 잡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