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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13~16> 소금과 빛
(23.09.0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에는 금수저와 흙수저가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흙수저에 속하지만 일부 소수의 사람들은 금수저에 속한다. 금수저란 태어날 때부터 부자 부모를 잘 만나서 먹고사는 문제가 전혀 없는 사람을 빗대서 하는 유행어다. 그런 금수저에 대해 가타부타 욕을 하거나 공정하지 못하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나? 없다. 부모 잘 만나서 그런 부를 누리는 걸 탓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거 아시나? 신앙의 세계에서도 금수저가 있다는 사실을...구원이란, 사람의 행위로 되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ㅎ님의 은혜로 주어진다고 할 때에, 그 은혜의 수혜자가 바로 금수저들이다. 좀 더 고급지게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창세전 ㅎ님의 택하심을 입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다. 이들을 일컬어 ㅎ님의 자기백성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ㅎ님의 자기백성을 찾아 구원시키러 오셨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그 사역을 증거하신다. 마1장 보면, 천사가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에게 말한 수태고지에서 이름까지 부여하면서 말하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은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임이라.’
그래서 주님의 공생애 시작을 그 택한 자들을 불러 제자 삼으시는 일부터 했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 천국 비밀을 알려주시는 내용이 산상수훈이다. 산상 수훈 시작에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로 시작된다. 다른 무리들은 산 밑에 있었지만 산 위에 예수님 앞까지 가까이 불러서 산상수훈이라는 복의 말씀을 주신다. 제자들을 산 아래 무리들과 구분하시면서, 너희들이 바로 복 있는 자들이고 너희들이 바로 8복에 해당되는 자들이라는 말씀을 주시는 거다. 제자들이 무슨 율법을 철저히 지켰거나 착하고 바른 삶을 인정받아서 제자로 부르심을 입은 게 아니다. 그저 창세전 ㅎ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입어서 주님의 부르심을 입고 제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금수저들이다. 이에 대한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은혜가 또한 이해되는 것이다. 구원된 자가 자기 행함의 공로가 단 0.1이라도 있다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한다. 이처럼 택함에 대한 증거는 성경 곳곳에서 차고 넘친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지만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된 자다. 렘1장에서도 예레미아를 향해 복중에 짓기 전에 택한 나의 종이라고 말씀하신다. 시139편에서는 택함 입은 자에 대해 말하기를 그 형질이 이루기 전에(즉 자궁에서 수정체가 되기 전) 이미 ㅎ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말씀한다. 실로 엄청난 금수저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ㅎ님은 왜 사람을 택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일까? (매우 궁금?). 그것은 죄인된 자, 그 누구도 사람의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인 것임(이 역시 성경곳곳에 증거하고 계심). 그렇기에 ㅎ님의 일방적 택하심을 통해 구원을 주시는 것이며, 이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이야말로 죄 밖에 나오지 않는 무가치한 자인데 ㅎ님의 무조건적인 구원에 감복하여 온 평생 은혜의 빚을 지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ㅎ님의 지혜이다. 그 지혜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복음 이라고 한다. 삭개오처럼 자신은 죄만 지었는데, 졸지에 주님의 부르심을 입는 은혜를 받고 구원받은 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인과율이 도도히 흐르는 곳이다. 자기가 행한대로 보상을 받아 사는 곳이다. 악을 행하였으면 악을 거두고 선을 행하였으면 보상과 칭찬이 따른다. 자신이 애쓰고 수고하여 땀 흘린 만큼 비례하여 댓가가 생기고 그것으로 가치를 창출해서 살아가는 세계다. 한마디로 자기 이마에 땀을 흘려서 먹고사는 곳이다. 율법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열심과 충성도에 따라 ㅎ님의 구원이 임한다고 믿고 기대하는 자들의 세계가 율법종교 체계이다.
그런 곳에 은혜의 복음이 선포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인과율의 정신사상으로 조성된 세상 사람들은 비웃을 것이며, 율법 행함에 가치를 가지고 살아온 자들은 복음을 이단이라고 정죄할 것이다. 이래저래 복음으로 낳아진 성도들은 핍박과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세상의 금수저는 비난하지 않으면서, 영적인 금수저인 ㅎ님의 택하심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고 인정할 수 없다고 비난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로 죽은 자신의 주제를 몰라서 자기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사람이 할 수 있는데 공짜구원은 싫다는 것임)
이처럼 복음은 이 세상에서 용납 될 수 없는 하늘의 사상이다. 이 세상과 융합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ㅎ님의 택하심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복음은 이 세상에서 외면되어지고 왕따 당해서 발로 밟혀지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이 복음만이 구원의 진리이기에 롬1:16에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ㅎ님의 의는 복음뿐이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이 구원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롬1:16~17> 읽으면서 ..
‘16절~ 부끄러워할 수 있다~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나의 구원이 될 수 있냐? 세상은 비웃고 조롱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안다면 복음이 보석처럼 다가올 것이다.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의 말고 다른 의를 주셨는데 그게 복음임. 애당초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라고 준게 아님, 그리된다면 은혜를 모르는 자가 되기 때문임. ㅎ님의 의도는 율법을 잘 지키는 반듯한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라, 죄로 죽은 무능하고 무가치한 자를 조건 없이 거저 구원하심으로 그 은혜를 아는 자를 얻기를 원하셨던 것임.
‘17절~그래서 택한 자에게 은혜로 믿음을 주시면 그 믿음이 마중물이 되어서 예수의 십자가 피의 사건이 자기 때문에 일어났음이 믿어지게 됨. 이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한 것임, 그래서 이렇게 죄에서 구원된 자를 의인라고 하는바, 오직 의인의 생성은 믿음으로 되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을 하는 것임.
(전주에도~) 성경의 구도가 구약과 신약이라고...이는 옛언약과 새언약을 말하는 것이고, 옛언약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한번 이루어보라고 주어진 시험적 기간을 구약이라고 하는데 그 결과가 어떻다?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새언약이 주어지는 것이지요. 새언약의 의미는(한마디로), 인간은 안되니까 빠져서 쉬고 있어, 대신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시고 그 의를 너희 택함 받은 자들에게 줄게 이게 새 언약임.
그래서 십자가를 앞두고 주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이 떡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몸이야, 이 잔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새언약의 피야..말씀 하시고, 다음 날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신 것임(누가 이루었다? 예수께서 다 이루어 내심)-‘주께서 다 이루셨다’는-이처럼 복된 말이 없는 것임(그래서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말이니 얼마나 다행이고 복된 말씀인가?)
이러한 다 이루심이라는 결과가 있기 위해서는 ㅎ님의 작정과 설계가 이미 창세전에 있었던 것이고, 구약에도 곳곳에 새언약에 의한 구원이 복선으로 깔려서 기록되었음 (성경 두 군데만)
<렘31:31~33> 32(ㅎ님이 옆에서 남편처럼 간섭해도 율법을 못 지킴, 배신과 거역), 33(예수님이 율법을 다 이루시고 그 성령을 우리 안에 부어주심으로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말씀임)
<겔16:60~63> 60 그러나 내가 너(남조 유다:포로상태)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옛언약:다짐과 각오)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북조)과 아우(사마리아)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유다가 더 큰 죄를,ㅡ그럼에도 용서)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쌍무언약: 인간의 의지와 결단)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 내가 네게 내 언약(새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은혜 받고 나니, 개차반 같은 나를 구원? 유구무언)
여호와께서 세우신 언약이 변함없기에 네 언약이 아니라 내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이 언약을 소금 언약이라고 함.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나 간에 늘 언약을 배반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으로 자기 백성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소금 언약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합니다. 오직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신 그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참고<레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제(素祭)란 곡식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소제물에 소금을 넣어야 하는데 이 소금을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소제물에 소금을 넣으면서 언약의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소제물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서 깨어지고 부수어져서 우리들의 영원한 양식이 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참고<민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거제(擧祭)는 제물을 들어 올리는 제사입니다. 이 거제물(거제.요제제물의 의미)은 제사장의 몫으로 영구히 제사장(만인 제사장)의 몫으로 준다고 하시면서 이는 영원한 소금 언약이라고 합니다. 소금 언약이라는 말 자체가 변하지 않는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금과 언약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구원은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행함으로 되는 게 아님.
신약성경 전체가 이것을 증거함 (대표 구절: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게 아니요, ㅎ님의 선물이라, 행위..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면 너희는 소금인데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말은?
성도가 소금이라는 말은, 너희가 죄에서 구원된 근거는 너희 행함 때문이 아니라, ㅎ님의 언약 때문이라는 말임. 변치 않으시는 ㅎ님의 언약으로 구원된 자니 ㅎ님의 언약이 너의 생명이라는 것임. (알기 쉽게) 소금은 곧 변치않는 언약이고, 언약은 복음을 말하고, 은혜를 말함. 즉 성도는 복음의 산물이요 은혜의 산물임. 따라서 ㅎ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탄생한 성도가 그 은혜를 잊으면 어찌 되겠는가? 잊는다면 이게 바로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임.
<갈2:21~3:3> 읽고, 육체로 돌아가는 것은 복음을 버리고 다시 율법 행함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함. 복음이 포도주임(극상품 포도주: ㅎ님의 새언약을 상징함) (사5:극상품 포도나무)
포도주에 다른 걸 섞는 것을 성경은 진노의 포도주 혹은 음행의 포도주라고 함 계18장~ 만국이 진노의 포도주에 무너졌다고 탄식하심. 복음(새언약)에 불순물이 섞이는 것을 섞인 포도주, 음행의 포도주, 독주라고 함(복음뿐 아니라 사람의 행함도 있어야 온전한 구원이 된다고 주장: 거짓 선지자들이)). 바울 사도는 이런 자들과 목숨 걸고 싸웠음. 얼핏 들으면 복음에다 ㅎ님 말씀 잘 지켜야 구원이 온전해져-이게 그럴듯함. 뭐가 문제?(은혜의 복음이 훼손됨). 구원의 방편은 오직 은혜, 오직 복음, 오직믿음으로 완성되는 것임(타협? 거짓 종, 거짓선생들).
사람은 인간의 의를 알아주는 것을 좋아함. 그런데 복음은 깡그리 사람의 가치를 무시하니까, 자신들이 설 곳이 없게 됨, 자기지분이 없게 되니 복음을 사람들은 싫어함. 그렇다고 복음에 사람의 해함을 끼워 넣는다는 것은 절대 용납되거나 타협될 수 없는 것임 => (갈1:10/갈3:10/ 갈5:3~4):할례는 율법 조항의 상징임. 할례 하나 끼워 넣으면 다 행해야 되는 것임. 고구마 줄기처럼 다 연결 되어있다. 그래서 아예 행함 구원은 싹을 잘라 내야함.
복음으로 생명을 얻은 성도는 복음을 전하는 자여야 함. 복음이란 사람의 율법행함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 그렇기에 세속화된 기독교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음. 만일 싸우기 싫어서 전하지 않거나 혹은 ㅎ님 보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를 원해서 복음에 사람의 행함을 끼워서 가르친다면 그도 역시 소금이 맛을 잃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다 여기에 해당됨. 그러나 진짜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면 ㅎ님이 이런 길로 망하는 자가 되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이단 속에 빨려 들어가도 끝내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 ㅎ님의 사랑과 능력임을 아시기 바랍니다(시139: 하늘에, 음부에, 바다 끝에 가 있을지라도...찾아내신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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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본문을 봅니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을 오해하듯이 이 말씀도 오해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착한 행실이란 우리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던 선악체계의 착한 행실입니다. 이러한 착한 행실이란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이기에 세상 사람들도 환영하고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이 세상이 어떻게 대접하였습니까? 세상에서 쓸모없다고 내 버리고 발로 밟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살 맛 나게 만드셨다면 이렇게 버림을 받았을까요?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다는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빛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빛과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보기 전에 세상의 참된 빛이 누구신지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참된 빛이 이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보고 나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빛으로서 가신 그 길을 자기 제자들에게도 가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창1:1~3>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땅이 혼돈 공허 흑함의 이유, 물 속에 갇혀 있기에..
=> 그 빛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키 위해 오신 예수그리스도이심(요3:16~)
<사42:6~7> 6.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백성의 의가 되며 이방의 빛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빛이신 분이 하시는 일이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구원사역임.
(사51:4절>“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하나님의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빛을 알고 믿는 자들은(공의가 이루어졌기에)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평강 가운데 사는 자입니다.
참고<요1:1~5절>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9절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그러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좀 전에 살펴본 창세기의 빛에 대한 말씀과 이사야 선지자의 빛의 예언의 성취로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을 요한복음에서 압축하여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하나님이며 생명이며 사람들의 빛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생명이며 참 빛 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의 빛에서 끊어져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들이 어두움에 속하여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채로 사람들은 생명도 이야기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선과 악을 판단하고 빛과 어두움을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선이라는 것은 인류에 빛을 비추어 주었다는 유명한 위인들의 업적과 공로들입니다. 그런데 참 빛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자 그 모든 것들이 어두움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빛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의하여 참빛이 제거 당하였습니다.
참고<요7:7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상태가 빛이 없는 어두움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에 속한 상태에서 인간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아가는 그 상태 자체가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거룩하고 선하다고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독사의 새끼들이며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타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금식과 기도와 전도와 구제를 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빛의 아들들이라고 여겨온 것임. 그런데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보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먼저 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이러한 예수님을 세상이 미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선이라고 하는 것들을 선이라고 인정 해 주셨다면 미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4:3~6절>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복음이란 (어떤 인간의 선행이나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말함). 그런데 이 복음이 가려진 자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임.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세상의 신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음. 그들은 다 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함. 그런데 이 와중에 믿는 자가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로 ㅎ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야 빛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행위를 통하여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어둠에 속한 악한 곳이라고 정죄하는 빛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신이 반드시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는다면 이것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동질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오늘날 중대형 교회 목사님들이 예수님 쪽? OR 바리새인 쪽?..많은 곳이, 세속화된 계17~18의 음녀교회, 큰 성바벨론, / 장**목사 인기 폭발, 연예인급)
다시 본문을 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면서 산위의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산 위의 동네란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유대인들은 빛의 도시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은 실제종교의 아성입니다. 빛의 성이 아니라 참 빛을 증거 한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 선지자들이 증거 한 참 빛이신 예수님마저 살해한 어두움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은 이 예루살렘을 시내산과 하갈과 이스마엘으로 연결하여 땅의 예루살렘이라고 폭로합니다. 그런데 약속의 자녀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자기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늘의 빛을 가진 자들에게는 산위의 동네가 숨겨지지 못합니다. 참빛을 지녔기에 종교적 위선으로 가장된 어둠과 악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여 치는 말을 합니다(계11장 두증인,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함, 너희는 틀렸다, 회개하라). 그래서 그들이 미워하는 겁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것처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착한 행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것이 착한 행실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착한 행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은 세상의 빛이 됩니다. 어떤 빛을 비추는 빛입니까?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그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이 어두움에 속하였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린 이 땅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불로서 멸망당할 이 세상에서 나와, 모든 사람들이 미워한 그 십자가 밑으로 피하라고 전하는 것이 착한 행실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