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소재와 그것을 다듬고 다듬는 일
2024. 2. 향기 이영란
눈사람 자살사건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 올랐다.
학교가 천정 석면 공사 중이어서 근처에도 갈 수가 없다. 나처럼 집 나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거지로 칩거 중이다. 아이들 원격수업, 연수 듣기, 책 읽기, 어쩌다 까페 나들이 등 이런 저런 일들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학구파라고 말하기에 어중간한 내게 그 시간들이 그닥 즐겁지만은 않다. 남는 에너지가 향한 방향은 2010년 쯤에 이사 온 후 부서지지도 않고 있는 식탁과 책장, 얼룩진 도배지, 여기저기 갈라지고 물에 부르튼 씽크대 쪽을 노려보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눈에 거슬린다.
그 중 즐거운 일이 하나 있다면, 유튜브를 틀어놓고 정리 정돈을 하는 일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내용의 콘텐츠와, 내 몸을 움직이는 일의 조화로운 만남의 결과물이 만족스럽다. 집은 내가 만지는 만큼 확연히 깔끔해진다. 그렇다. 나는 자살이라는 말의 존재를 키 큰 옷장 위에 무엇을 담아두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은 종이 박스 안에 두고 있었다.
최승호 시인은 그런 콘텐츠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얼굴보다 이름을 먼저 본 사람.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집>을 낸 사람인데, 막연히 아이들 시를 쓰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많이 쓰는 사람이었고, 쓰면서 다듬는 사람, 워낙 많이 쓰면서 다듬다보니 자신만의 문체와 세계를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시인의 강연이란 밭을 가는데 지렁이가 너무 많아서 구구(蚯蚯)전이라고 지었다, 김을 매는데 비가 와서 밖으로 나온 지렁이를 다시 넣어주었다, 집에 손님이 와서 돌아갔는데 모자를 두고 가서, 이거 멋지다 하며 자기가 쓰겠다고 말했는데, 모자가 있으니 그 분 생각이 자꾸 나서 다시 택배로 보내고 말았다는 둥의 이야기들이다. 오늘도 나는 죽림 힐스테이트 분양이 25년 4월 쯤이어서 올 연말에는 아파트 물량이 싼 값으로 대거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는데, 그런 실용?적인 정보에 비해 지렁이와 모자에 대해 떠들어 대는 사람은 어떤가? 그런 사소한 사건들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양 말하고, 마음에 품고 그걸 놓쳐버릴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내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적에 안고 있노라면 꼭 시멘 바닥에 떨어뜨릴까봐 놓쳐버릴까봐 불안한 내 마음들, 사랑이 그런 식으로 정체를 드러내던 그 마음이 시였을 것이다. 내게도 시인의 자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시를 읽을 때, 한 시인의 시집을 통째로 읽어보라고. 그러면 그 사람의 문체를 알 수 있다고. 다르게 말하면 꾸준히 쓰면서 나만의 문체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눈사람 자살 사건>은 시의 발상이 독특하다. 눈사람의 자살이라, 가만히 있어도 녹아 없어지는데, 굳이 자살을 한다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따뜻함 속에서 있고 싶어하는 마음이란...... 어쩌라는 건지 묻고 싶은 시다.
사과를 얻기 위해서는 꽃 피고, 수정하고 열매 맺기 위해서는 햇빛과 비와 바람, 그리고 농부의 정성어린 돌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시는 그저 기교나 우연한 착상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심뽀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언감생심 좋은 시를 바라는 마음까진 없지만, 하루에 몇 줄이라도 건지기 위해 쓰고 다듬는 수고를 당연히 들여야 할 것이다. 끈을 잘 놓지 않는 하루 한 문장은 내게 언어를 다듬어 조금이나마 빛을 발하게 만드는 보람을 느끼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