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오는 날, 수제비
240911 송언수
비가 오지는 않았다. 바람도 그저 그렇게 불었다. 일본열도를 훑을 예정인 아주 큰 태풍 때문에 우리나라도 영향을 받을까 두려워 미리 풍랑주의보가 내려졌고, 그에 따라 결항 공고를 일찌감치 보냈었다.
섬의 어르신들이 “꼴랑 이런 바람에 와 배를 안 띄운단 말고” 하실 정도의 바람이었다. 오후엔 배가 뜰런가 기대하였으나, 이미 결항을 하기로 마음 먹은 선사는 하루 종일 배를 멈췄다. 섬에 발이 묶였다.
마을 위원장이 뜬금없이 수제비 이야기를 꺼냈다. 나중에 소득사업으로, 청각을 넣어 수제비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바닷가에 청각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청각은 식이섬유가 많아서 노폐물 배설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철분도 많아 빈혈에 좋다 한다. 뿐만아니라 비타민 C와 셀레늄이 많아 면역력에도 좋다고 한다. 여름이면 청각으로 냉국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무엇보다 김장할 때 넣으면 빨리 익거나 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젓갈 비린내를 잡아주기고 한다. 통영의 김장 김치에는 청각이 들어간다.
그 청각을 갈아 넣고 밀가루 반죽을 해서 수제비를 해 먹자고 이야기가 되었다. 남아 있는 직원들 몇몇이 같이 먹는 것을 생각했는데, 위원장이 일 벌이는 선수라는 것을 간과하였다.
홍합을 넣어야 한다더니 내지 아는 형님 집에 가서 홍합에 병어, 구워 먹을 생선까지 잔뜩 받아왔다. 기왕 하는 거 마침 영화 촬영차 들어왔다가 역시나 발이 묶인 8명까지 불러 청각 수제비의 맛을 보여야 한단다. 일이 커졌다.
10시, 마을에 갔다. 밀가루에 청각 간 것을 넣어 반죽을 치댔다. 수제비 반죽은 오래 치대야 쫄깃거린다. 푸른빛이 도는 청각 반죽과 그냥 밀가루 반죽 두 가지를 준비한다. 한 시간이 넘게 반죽을 치댔더니 손목이 욱신거린다. 아기 엉덩이 같은 반죽을 만들던 언니가 생각났다. 그 정도까지 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들었다. 이 사람들에게 맛있는 수제비를 먹여야 한다는.
반죽을 치대는 동안 호박과 감자를 썰라 하고, 큰 냄비에 멸치육수를 내도록 하였다. 준비한 호박과 감자가 적어 보여서 더 달라하였다. 밀가루는 호박과 같이 먹어야 해독이 가능하다. 호박 많이~~.
식사 시간 12시에 맞춰 병어는 회를 치고, 위원장이 직접 한 오이무침과 김치, 달걀말이 등으로 상을 차렸다.
육수가 끓기 시작했다. 반죽을 뜯어, 물 묻은 손으로 얇게 얇게 펴 넣었다. 수제비는 얇아야 맛있다. 호로록호로록 부드럽게 입에 들어가야 한다. 자그마치 12인분이다. '이걸 왜 한다고 했을고' 싶었다.
그냥 밀가루 반죽은 얇게 떠지는데, 청각 넣은 반죽은 얇게 떠지지 않는다. 밀가루에 뭔가 다른 게 들어가면 질감이 달라지는 것이다. 어쨌든 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얇게 후다닥 후다닥.
다행히 시간 안에 반죽을 다 뜯어 넣었다. 청양고추 쫑쫑 썰어 칼칼한 맛을 내주고, 파도 한 움큼 넣어 달큼한 맛을 더했다. 간은 소금과 국간장으로. 큰 냉면 그릇에 한 그릇 담아냈다. 너도나도 뚝딱 보약 먹는 마음으로 먹었다.
오랜만이다. 수제비. 세 그릇이나 먹고는 배 통통 두드리며, 오랜만에 섭취한 정제 탄수화물 포만감에 속도 없이 흐뭇하다. 태풍으로 발이 묶인 덕이다.
고객 피드백,
-청각이 너무 잘게 갈려 맛이나 식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국물에 넣거나, 고명으로 올리자.
-대용량으로 끓일 경우 반죽을 미리 준비하여, 얇게 밀어 뜯어놓기. 비닐에 켜켜이 쌓아놓으면 된다.
-수제비와 육수는 따로 끓여 국물이 텁텁해지지 않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