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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별 | 경기 | 충청 | 경상 | 전라 | 황해 | 강원 | 함경 | 평안 | 합계 |
개소 | 24 | 69 | 233 | 88 | 0 | 9 | 0 | 9 | 432 |
*부곡의 설치가 가장 많은 곳이 주전장이었던 경상도일 뿐 아니라, 그 내막을 보면 소백산맥 지역인 상주 24․선산10․용궁6․예천3․영주10․풍기3곳 등에 부곡이 몰려있는데, 상주․선산․용궁․예천은 원산성전투지역이며, 영주․풍기는 조물성전투지역에 해당하는 곳이다. 상주의 북부산악지역과 남부낙동강유역일대가 거의 다 부곡지역에 들어 있었다.
부곡민의 발생과 변질
삼국통일과업을 완수한 왕건은 신분질서와 징세, 부역, 유이민流移民의 정착 등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전국의 군현郡縣을 재정비 하면서 전란 중 왕조성립에 공이 컷 던 재지세력들과는 달리, 왕조질서에 역류逆流한 반 왕조적 세력과 그 근거지에 거주한 주민들을 정치세력에서 철저히 배제시켰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재편되어 타 지역으로 사민徙民 또는 한주限住 시키기까지 하면서 몰락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열약한 위치로 몰아넣었다. 이들의 신분은 양인良人 이었음에도 잡척雜尺․ 향鄕 ․ 부곡 ․ 소所 ․ 장壯 ․ 처處 등 부곡제部曲制로 통칭되는 특수행정조직에 소속시켜놓고 그 상부 조직인 군현과는 신분상 구별하여 형벌의 차등적용, 승려로 출가금지, 입학금지, 과거참여금지, 출사제한 등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하였음은 물론, 단순농업생산에 참여 외에도 역인驛人, 진인津人, 국둔전경작國頓田耕作, 포역布役, 공역貢役 등 강도 높은 노동에 종사시켜왔다. 더불어 이들은 부곡의 영역도 떠나지 못하게 하였고, 설사 공로功勞가 있어 입사入仕하더라도 5품 한품의 적용을
받는 신분이었다.
이러한 부곡영역의 통치는 계내界內의 주현主縣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을 취해왔으므로 주현에서 파견된 이속吏屬 층의 집중적인 수탈대상이 되어왔다. 차차 수탈이 심화되면서 부곡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에 부딪혀 부곡제는 서서히 무너지는 수순으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즉, 나라의 재정규모 확대는 물론, 지배층의 부패와 사치 등과 맞물려 부곡에 대한 과도한 수탈이 행해짐에 따라 이를 견디지 못한 부곡의 피역민彼役民들이 생활근거지를 떠나 도류逃流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를 막아보고자 감무監務를 파견해 단속해 보기도 하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그 무마책으로 6대 성종(재위 981-997)을 비롯해 8대 현종顯宗(재위 1009-1031) 9년(1018)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아예 이들에게 신분적 지위를 향상시켜 주고 이에 맞는 향직鄕職도 부여해 주기 시작했다. 아울러 11대 문종文宗(재위 1046-1083) 18년(1064)에는 주州 군현郡縣의 무반武班으로도 입사가 가능해짐으로써 군공軍功에 의한 신분적 지위향상도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부곡민들의 차별대우는 국가질서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이었던 만큼 고려의 왕권이 차차 안정을 찾아가게 되자 부곡제는 점차 변질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우리 보윤공의 생존 무렵인 문종 시기에 이르면 성이나 본관이 많이 태어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필시 부곡의 해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하겠다.
명예 향직 보윤
부곡민에게 신분적 지위를 실질적으로 향상시켜 준 때가 군현제 개편(태조 23년ㆍ941)이 있은 지 대략 70-120년 쯤 지난 시기로, 상산김씨 시조 '김수金需(1012?-1049? ․ 配位가 전하지 않음)가 보윤이라는 관직을 받고 시관始貫 되는 무렵과 거의 일치한다. 이 시기는 고려의 부곡제가 실질적으로 해체되는 고려 8대 현종부터 11대 문종 연간(1009-1083)에 해당한다.
이쯤해서 보윤이라는 관직을 살펴보면 보윤공의 성격이 어느 정도 규명되리라 본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관리 만을 대상으로 하는 문무산계제文武散階制로 시행하다가 성종 대에 와서 잡류雜類 등 하층민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 기존의 제도에 향직을 신설하여 향리, 관직이 없는 군인, 서리, 여진의 추장 등에게 수여하였는데, 이것은 실직이 아니라 일종의 작爵같은 명예직이었다. 향직의 효시였던 것이다. 향직의 구조는 9품16계로 이루어졌는데 보윤은 8품에 해당한다.
그러나, 보윤공이 향직을 받고 부곡인의 신분질서에서 벋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이기는 하나, 이 시기가 부곡인의 전반적인 신분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보윤공의 활동시기를 넘기고도 120여년을 더 보낸 17대 인종仁宗(재위1122~1146)3년(1125)부터 잡류의 자손들에게도 차차 과거를 허용함으로써 비로소 그 효시를 열기 시작했다. 그 후 의종 24년(1170) 정중부등이 주동인 된 무신정권이 들어서자 공주에서 일어난 명학소의 난을 비롯해 운문雲門(청도)의 김사미金沙彌, 초전草田(울산)의 효심孝心등이 일으킨 들 불같은 광범위한 봉기 가 그 금역禁域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부곡인들이 일시에 금역의 허물을 벋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한 세기 가까운 기다림을 더 필요로 했다. 상산김씨의 경우를 보면 100여 년간의 무신정권통치 기간이 끝나갈 무렵인 8세世부터 급제한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는 것으로 봐서 부곡제가 해체되고서도 다시 2-3세대의 시련기를 더 넘기고서야 실질적으로 부곡제의 업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관명貫名 상산과 보윤공
‘상산’이라는 호칭이 우리나라에 처음등장하기 시작한 기록은 고려 6대 성종成宗(981-997) 때인데 바로 ‘상주尙州’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상산이라는 말은 중국고사에서 유래한 것인데, 역사적으로 ‘의義를 지켜내려는 어진이 들이 사는 곳’ 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상산사호商山四皓 고사古史이야기가 그것이다.
운보 김기창의 상산4호도. 商山이란 중국 陝西省 商縣의 南山으로 동원공東圓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를등 4명의 현인들이 의를 지키며 숨어살던 곳이다.
중국, 진나라 말기에 난세를 피하여 섬서성 상산으로 숨어들어 온 4명의 은사隱士들 고사에서 보듯 덕망과 높은 뜻을 지켜낸 지사志士를 뜻하는 말에서 시작했다. 4명의 은사들은 머리도 눈썹도 하얗게 희었기에 ‘상산사호’ 라 했는데 이들은 중국문화의 원류로 일컬어지는 옛 상나라 사람들로 인仁과 의義가 지켜지는 정신, 즉 지志가 흐르는 ‘유가儒家의 후예들이었던 것이다.
운보 김기창의 상산4호도. 商山이란 중국 陝西省 商縣의 南山으로 동원공東圓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를등 4명의 현인들이 의를 지키며 숨어살던 곳이다.
그렇다면 고려 성종은 왜 상주에 상산이라는 별호를 줬을까.
성종은 명군으로 평가받는 보기 드문 유가적 인물로 최지몽崔知夢의 자문을 받아 고려의 관제와 제도를 정비하면서 상주인들이 자존과 절개를 저버리지 않고 후삼국통일전쟁을 치러낸 과정을 지켜봐왔고, 또한 부곡제 등 숫한 역경 속에서도 한사적寒士的 얼과 기질을 간직해온 상주인들의 정신을 높이 산 때문일 것이다. 성종은 관제개편을 하면서 이 점을 높이 사 상산이라는 별호를 부여한 게 아닌가 한다. 따라서 상주인들은 상주라는 지명 보다는 ‘상산’ 이라는 별호를 즐겨 쓰기를 주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간 상주명호의 변천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상주의 명호名號변천사
➀沙伐國이 185년 진한의 속국에서 독립.
➁첨해왕 3년(249) 사벌국이 백제로 돌아섬.
➂법흥왕 11년(524)사벌국을 정벌하고 이듬해 上州를 설치함.
➃진흥왕 18년(557) 백제가 사벌주를 공략하자 주를 폐지하고 甘文(김천)으로 옮김.
➄신문왕 7년(687) 사벌주로 다시復州
➅경덕왕 16년(757) 尙州로 개명
➆혜공왕 12년(776) 沙伐州로 환원
➇고려 太祖 23년(940) 尙州로 복구
➈成宗 2년(982) 尙州牧으로 昇格하며 ‘上洛’, ‘洛城’, ‘商山’으로 달리는 불리는 별호가 등장.
⑩조선 선조26년(1593)경상감영을 상주에서 대구로 옮김
이렇듯 상주인들이 치러낸 그 많은 부곡촌권역 중에는 무림부곡이 들어있는데, 바로 이 곳에 우리 상산김씨들의 선대유허지로 추정되는 강생포가 속해있었다.
선대유허지가 부곡촌에 속해있다 함은 선대 분들 역시 부곡민으로서 그곳에 살아왔었다는 해석이 된다. 곧 선대 분들은 부곡의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채 버거운 삶의 무게에 눌려 자신들의 고졸한 기개와 자존을 묻어둔 채 뿌리를 숨기거나 아예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불가피성이 따르게 되었을 테다. 하지만, 이 불가피성에는 새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끝을 예측할 수 없는 기나 긴 세월을 감내해내는 숭고한 얼이 죽은 듯 살아 있었다.
보윤공에서 파조에 이르기까지
고려무신정권의 대두 이후 토지소유제도의 문란과 잦은 전란, 이에 따른 유민流民을 발생시켰고 이에 따라 그간 억눌려 살아왔던 부곡민들을 자각시키는 지렛대로 작용함으로써 이들로 부터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를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신흥사대부의 원초적 모습은 능문능리적能文能吏的 관료로서 이들의 선대는 권문세가들의 침탈 대상이 되는 부곡인들로 향역鄕役이 과중해짐에 따라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강렬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역에서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유망流亡하거나 관료신분을 취득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유망으로 향리가 하나도 없는 주현과 향․소․부곡이 속출하기 까지 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고려사〮 충렬왕 22년 5월).
이들은 신분상승 수단으로 과거급제나 군공을 적극 이용함으로써 이들 계층에서 많은 신흥사대부를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리학을 신봉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전반의 개혁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었던 점에서 기왕에 등장하였던 권문세족이나 문사들과는 달리 학문․사상적 측면에서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즉 권귀權貴에 아부하지 않는데다가 청렴하여 달관達官하여도 치부하려하지 않아 한사寒士와 같은 자질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왕을 앞세워 개혁을 도모하기를 즐겨했으므로 기존의 보수세력들로부터 강력한 압박과 배척을 받아 많은 신흥사대부들이 중도에 희생되거나 도태되기도 했다. 두문동사건에서 보듯 고려가 망하자 숫한 의인들이 순절하거나 낙향은둔으로 끝내 선비의 기개를 접지 않았으니, 이들은 다 신흥사대부의 후예들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중앙 진출은 꾸준하게 이루어져 끝내 부원세력附元勢力과 권문세족들을 축출하고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으니, 뒷날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는 양반관료의 근간이 되었다.
지금 것 돌아봤듯 부곡민들이 여러 단계와 과정을 거쳐 신흥사대부를 배출하게 되었듯이 보윤공 역시 이 기간에 부곡촌장에게 주어지는 향직을 계기로 상산김씨로 시관始貫 하기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상 언급한 부곡인에 대한 고려의 신분변천조치과정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치세 | 서기 | 신분변천과정 | 비고 |
태조23년 | 940 | 고려부곡제 실시 | 후삼국 통일 |
성종2년 | 982 | 전국 군현을 개편하다. 상주를 牧으로 승격하다. | 상주를 상산으로 호칭시기 |
성종12년 | 992 | 군현에 향리직을 신설하다.
| 향직의 효시를 열다. |
문종18년 | 1064 | 부곡인에 관직진출허용 | 각 성씨들의 創貫현상이나타남. |
인종3년 | 1125 | 부곡인 등 잡류에 과거허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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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24년 | 1170 | 무신정권등장(1179-1270) | 신흥사대부 등장 |
원종14년 | 1273 | 상산김씨들이 고려사에 첫 등장하다.(삼별초난 발발) | 9세 金鎰과 金侁이 別將과 上將軍이 되다. |
위 표를 보면 보윤공이 출생하기 불과 20여 년 전에 상산이라고 부르는 별호가 상주에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상산김씨 중에서도 상산의 긍지를 뚜렷이 시현 해 낸 분이 보윤공의 11세손 파조 분들이다. 특히 고려 정당문학政堂文學 난계蘭溪 김득배 형제들이 두드러진다.
선생은 문무겸전의 선비로서 공민왕의 정치개혁에 앞장서서 고려를 좀먹고 있던 부원세력과 권문세족들을 몰아내고, 조선조 사림파학통에 뿌리를 내린 유종儒宗이었을 뿐만 아니라, 양차에 걸친 홍두군의 침입으로 온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들자 득제, 선치 두 아우와 함께 붓 대신 창을 빗겨 들고 질풍같이 말을 몰아 적을 무찌르고 고려사직을 구해 낸 군웅軍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생의 공을 시기한 권간權奸들의 간척姦斥으로 그 이理가 무너져 내리자, 이를 안타까이 여긴 난계의 제자 정몽주가 피눈물로 제문을 지어 선생의 영전에 바친바 있다.
이로부터 김득배 선생이 뿌린 ‘충혼장백忠魂壯魄의 이理’는 마치 상국商國의 혼을 지켜낸 정신과 같다하여 상주에서는 그를 상산의 표상으로 삼아왔으니, 조선팔도의 노래 중 상주 편에 부곡의 출현과 김득배 형제를 두각을 칭송한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그 역정을 짐작할 만 하다.
백화산에 석성石城이요 사벌국의 고성古城 있다.
폐현廢縣과 부곡部曲이며 역원驛院도 많고 많다.
인물은 김득배金得培형제와 박안신朴安臣이 났다네.
그 후, 정경세鄭經世(1563-1633)가 광해와 위정자의 폐정에 항거하여 마지막 6년간을 상주로 낙향해 향민의 교화에 힘썼다. 이 때 정경세와 함께 이준李埈 ․ 김식金湜이 권귀를 멀리하고 향리에 칩거하자 상주사람들이 이들을 ‘상산삼로 商山三老'라 불렀다.
보윤공의 생거지生居地
보윤공의 탄생과 활동지를 찾는 일은 처음부터 엄두가 나지 않았으나 끊임없이 두드리고 의문을 던지자 뒤안길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대 분들이 머물렀던 지명고地名考와 그 흔적들, 그리고 그 분들이 묻혔던 실전묘군失傳墓群을 전해주는 기록에서 배어나오는 정황들이 그것이다. 이 정황들 따라 좀 더 소상히 언급해보고자 한다.
상산김씨 족보에 따르면 상계上系의 묘가 제일 먼저 나타나는 곳이 ‘강생포康生浦’다. 이곳에는 8세 지연之衍, 10세 록祿, 11세 원리元理, 13세 보개甫介, 추錘등을 비롯해 그 이후에도 여러 후손들이 그 주변으로 흘러들어왔다가 묘를 남기고 떠난 흔적들이 곳곳에서 산견되고 있다. 이곳 강생포의 공식 지명은 경북 문경시 영순면 말응리末應里 원호동遠湖洞에 해당한다.
원호라는 지명은 이곳에 고려 때 축조한 원호지遠湖池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遠’자에는 ‘먼 조상’ 이라는 뜻이, ‘湖’자에는 ‘호해지사湖海之士’라는 의미를 각각 담고 있어서 원호의 뜻은 ‘강호江湖에 은둔해 살았던 먼 조상’ 쯤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이곳에 호해지사가 은둔한 먼 조상이 있었다는 의미가 되겠는데 그 먼 조상은 몇 가지 긍정적 정황들로 해서 상산김씨의 원조遠祖(시조의 윗대 조상)일 것이라는 영감이 따른다.
우선 상산김씨 선대 묘들이 그곳에 산재해 있었다는 사실 외에도 김득배 선생이 공민왕 1년 조일신의 모함으로 한 때 낙향해 있던 곳도, 공민왕 11년(1362) 김용의 간계奸計에 일시 피신해 있던 ‘산양현山陽縣 선영先塋 산막山幕(祭室)’도 실은 이곳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김득배의 가족들이 김용의 수하들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던 곳도 원호동에서 멀지않은 용궁龍宮관아로 전하고 있으며, 김득배의 처 서흥김씨瑞興金氏가 남편을 여의고 머리를 깎아 절을 짓고 입산入山했다는 곳도 문경의 윤필암潤筆庵으로 알려진 점을 보더라도 선대 분들의 활동무대는 지금의 상주 보다는 문경(옛 山陽) 쪽이 더 가깝다.
그뿐이 아니라 이성계의 역성개국易姓開國으로 고려를 잃게 된 김득배의 아우 김득제 ․ 김선치 형제들과 김원리金元理(典書公派祖)등이 불사이조의 절의를 굳히고 이곳 영강가[穎江濱]가로 낙향해 여생을 편히 맡길만한 포구라는 뜻으로 ‘강생포’라 명명하고 낚시를 드리워가며 잔생殘生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이 같은 근거는 숙종 30년(1704)에 세운 김선치의 신도비문에 “산양현山陽縣으로 물러나 …낙파洛波(낙동강물가)에 낚시 드리우며 스스로 절개를 보전하시니…,”라는 구절이 있고, 또 영조44년(1768)에 세운 김득제의 묘비에도 삼원수의 출생지가 산양현 ‘영강빈穎江濱’이라고 한데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강생포라는 지명은 지금 ‘멍갓'으로 달리불리고 있다. 이 이름은 상산김씨 들이 떠난 후 뒤 따라 입향한 부림홍씨缶林洪氏(입향조 洪貴達은 낙성군 김선치의 증손녀 사위)들이 정착하면서 앞서 상산김씨들이 사용하던 지명인 원호遠湖를 개명한 것이다. 이 마을 향토사학자 홍재덕洪在德씨에 따르면, 멍갓은'遠湖'라는 지명에서 ‘湖'자를 ‘枝’자로 바꿔 遠枝라고 개명하고 그것을 한글 발음으로 읽은 것으로, 자손들이 나뭇가지의 새싹처럼 멀리 뻗어 번성하라는 의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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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동(강생포). 상산김씨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이 마을 멀찌감치 흐르는 영강은 원래 마을을 끼고 돌아나갔으나 일제 때 직강공사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원호동은 사진 속의 원호지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저수지 축조에 고려의 많은 부곡민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 저수지는 조선조에서 폐지廢池 되었다가 왜정 때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저수지 건너 멀리 보이는 마을은 홍귀달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부림홍씨들의 집성촌 멍갓 이다. 홍귀달은 함창사람으로 상산김씨 김선치의 증손녀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뒷날 이 일대도 사패지로 받아 홍 씨들의 오랜 터전이 되어왔다. 저수지 언덕 너머에 홍귀달과 그의 부인 상산김씨의 묘가 쌍분으로 조성돼 있다.
그뿐 아니라, 문경지聞慶誌에서도 점촌의 깃골을 상산김씨 김득배 형제들이 크게 현달한 마을로 자세히 소개하고 있듯이, 김선치 선생이 학동學童시절 사용하던 벼룻돌(김선치 벼루:시도유형문화재384호)이 이 동네 우물에서 수습 됨 으로써 상산김씨들이 상주로 진출하는 중간 기류지쯤으로 여겨진다. 점촌의 깃골과 상주의 관동리에도‘깃골’이라는 이름이 같이 남아있음으로써 곧 상산김씨 들이 원호동에서 점촌의 깃골을 경유하고 상주의 관동리官洞里 깃골을 거쳐 상주로 입성하는 단계적 과정으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여러 정황들로 해서 원호동이 상산김씨의 먼 조상분들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에 수긍이 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아! 옛 부곡 땅 원호동. 우리네 조상 분들의 호해지사 얼이 서린 곳, 아니 상산김씨들의 발상지 원호! 오래 기억하고,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일까, 필자가 원호지 탐사 길에 원호지 방죽을 서성이며 받은 느낌도 마치 내 육신이 금방이라도 빨려들 것만 같은 선동仙洞의 정경과도 같았다.
정청淨淸하다 못해 신성스럽게 느껴지는 원호지 분위기는 세상의 모든 고통의 목소리를 다 들어 줄 것만 같은 어머니 품이었고, 조는 듯한 수면에 붉디붉은 노송 그림자를 살짝 드리우고 바람결 따라 노니는 모습은 천년을 하루 같이 견뎌온 원혼遠魂들의 모습처럼 말없이 호해湖海의 전설 만 잔물결에 무던히 쏟아내고 있었다.
원호지遠湖池 푯말. 비석은 이 마을 禊長 洪同極씨가 1953년 6월 원호지 제방에 세운 공적비 옆면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 이 원호지도 그 옛날 부곡민의 피와 땀으로 조성되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