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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유씨(대호군 마나님) 묘지석 소고小考
아-, 유 씨 묘를 북녘산하에 두고 온지 70여 년!
북한 땅에 묻혀있는 야자산소(또는 독바위산소. 대호군 승부의 마나님 전주유씨 묘소)묘지석이 당국에 압수돼 국립중앙박물관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니 경천동지할 일이 아닌가. 2014.10.10일의 일이다.이 묘지석이 어찌 북한과 중국 두 나라 국경을 넘어 남한 땅으로 들어왔단 말인가. 이는 분명 남한 도굴꾼들의 사주를 받은 북한 도굴꾼들의 짓이리라.
산넘고 물건너, 국경을 두번 건너 온 전주유씨의 묘지적. 전주유씨의 행적 만큼이나 묘지석도 곡절이 깊기만 하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유 씨 할머니의 묘소가 북녘 땅에 온전히 남아있다는 점이 아닐까. 이미 북한 당국이 식량증산계획의 일환으로 웬만한 야산은 묘가 있건 없건 가리지 않고 모두 농지로 개간한 사실이 알려진 터인데, 50m에 불과한 야산에 있는 유 씨의 묘 역시 개간대상이 됐음이 분명해 보이는데 그대로 남아 있다니 기적이 아니고 뭔가.
양덕첨사陽德僉使의 딸
할머님은 연백군 금산면 금계리 송골 전주유씨 집성촌에서 태어나시어 평남 양덕첨사陽德僉使(절도사에 속한 진의 종3품 무관벼슬. 족보엔 양덕감무로 되어 있으나 양덕에 감무파견은 조선조 들어서이고, 그 이전은 첨사가 주둔하고 있었다.)로 계시던 아버지 유제충柳濟忠을 따라 양덕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침 공민왕23년(1373) 낙성군(김선치.11세)께서 삭방도朔方道(함경도와 강원도 일원)도순문사都巡問使(고려시대 지방에서 변란이나 재해가 일어났을 때 두루 돌아다니며 사건을 진정시키던 임시 외방근무 특사)로 함경도 순행 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지나는 길에 양덕을 순무巡撫(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램)하게 되었지요.
양덕은 평안남도 동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골로 함경도와 강원도, 경기도를 연결하는 지리적요충지라 그 옛날부터 줄 곳 군사를 주둔시켜왔고, 이성계도 이 양덕을 넘나들며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첩첩산골답게 산수가 수려하고 양질의 온천까지 풍부해 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을 불러들였음은 물론, 공무중인 관리들도 머물기를 즐기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낙성군께서도 양덕관아 신세를 지게 되면서, 마침 이곳에 머물고 있던 첨사의 과년한 딸에 눈길이 갔을 게 분명합니다. 처자가 이곳 양덕풍광만큼이나 티 없이 순수하고 곱상했으니 깐요.
“어허! 이 산자수명한 산천에 아리따운 규수라!”
낙성군께선, 20여 세의 젊은 청년 승부承富(대호군)와의 가연을 떠올리지 안을 수 없었습니다.
혼사를 주선함에 원만한 성혼이 이루어졌지요.
시부媤父(낙성군) 따라 낙향
가정을 이룬 유 씨는 한동안 개경인근에 정착해 사시다가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뒤엎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조不事二朝를 고집하시는 시부를 따라 남편과 함께 관향貫鄕인 상주로 낙향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망국의 한이 그리도 깊었던지 시부에 이어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보내는 아픔이 유 씨를 찾아들었습니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두 왕조 교체기에 한 가계가 겪어내야 했던 수난사가 아닐 수 없겠는데, 이미 역성세력易姓勢力들이 고려 유신들의 관직과 녹봉은 물론 토지와 경작권까지 몰수해버린 터라 경제기반이 무너지는 등, 생활터전자체를 송두리 채 앗겨버린 타관에서 곤고히 보낸 8년여가 그리도 힘에 부쳤던가, 낭군께서 정종2년(1400)경 4월 2일 40줄 중반나이에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마도 역사는 굽은 길을 더듬더듬 더듬어가라는 모양입니다.
유 씨는 남편을 고위동원考位同原(아버지 묘소와 같은 언덕)에 통한의 장례를 치르고 나니 살길이 막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전라도 참빗장수
날개가 꺾이고 깃털이 뽑힌 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격랑과 마주한 유 씨는 특단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호구책을 찾아 관향을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오라는 사람도, 오라는 곳도, 갈 곳도 없었지요. 유 씨는 고심 끝에 외아들 세진世珍(13世)을 데리고 시부께서 오랜 기간 관직생활을 보냈고, 또 남편의 출생지(공민왕 3년(1353) 경 나주에서 출생 추정)로 유년기를 보내기도 한 전라도 땅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뀐 마당에 그곳 인심 역시 기대했던 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 씨는 당혹스러움을 뒤로하고 다시 환향還鄕이라는 단안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이미 올라올 노자조차 거들이 나버린 터라, 유 씨는 전라도지방 사람들의 방물특산품方物特産品인 전라도참빗(靈岩참빗)을 팔아가며 고향 길 노비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결심을 굳히자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지요. 가물가물 머나먼 고향을 찾아 눈길에 길을 묻고, 발길에 갈 곳을 물어가며 북으로, 북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전라도참빗하면 영암이고, 영암하면 전라도 참빗입니다. 위 사진은 월출산에서 본 영암벌이고 저 멀리 영암만이 보이네요. 이곳에는 고려시대 정부양곡을 보관하던 조창이 모여있어서 늘 왜구의 약탈대상이 돼왔기에 나주에서 조창판관이 파견돼 방어에 임해왔습니다. 낙성군께서도 한동안 부임해 왔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전주유씨 할머니께서 호구책을 찾았던 곳도 이곳이 아닐까요. 아! 영암, 전라도참빗의 고장, 영암!
이 동네 저 동네, 이집 저집을 찾아 참빗을 팔다보면 어떤 날은 한 마리의 개가 유 씨의 행색을 보고 짖으면 온 동네의 뭇 개들이 덩달아 짖어대는 바람에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지요.
하루해가 저물면 아무 처마나 나무 밑에서 잠을 청하곤 했지요. 어떤 날은 걷고 또 걷다가 길섶에 홀로 핀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두둥실 날아오르자 유 씨는 유난히 긴 눈길을 주며 의미를 곱씹어 보았지요. 외로운 듯하지만 왠지 강인함이 더 느껴지는 저 민들레 홀씨처럼 민들레마음이 되어 끝끝내 문중 민들레 꽃을 피우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승화하기도 했지요. 그 날 밤 잠자리에 들자 문중의 불씨를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소명감 하나가 자라나 한여름 능소화凌霄花처럼 확 벌어지는 불꽃이 되어 고향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가는 길 이 아무리 멀더라도, 가는 길을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 가로 막더라도, 산넘고 물 건너다보면 고향 땅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따랐습니다. 이윽고 곡절을 넘어 천신만고 끝에 배천白川 땅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주 길의 고초를 일일이 필설로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고향에서 유 씨에게 ‘전라도참빗장수 할머니’라는 별칭이 늘 따라다니는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화산花山(甕岩) 정착
유 씨가 첫 정착지로 찾은 곳이 평산平山(지금의 연백군 목단면)땅 방골[方洞]로, 그 곳 모려산慕麗山(현牧丹山)에 여말麗末 시부를 비롯한 상주출신 고려유신들이 한 때 머물렀던 연고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방골에 걸었던 실낱같은 기대는 환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번 뒤집힌 세상민심은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옛 정서는 실종 된지 오랬고, 주변의 업수이여기는 거친 시선과 손길도 유 씨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 뒤끝은 유 씨에겐 엄청난 것이었지요. 그곳에 외아들[世珍]마저 잃는 아픔이 따랐던 것입니다. 유 씨는 “이건 안 돼! 안 돼!”라며 울부짖듯 되 뇌여 보았지만 피가 얼어붙듯 가장 아픈 손가락을 잃는 슬픔이 따랐을 뿐,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젖먹이 딸린 며느리의 개가까지 지켜봐야 했으니 유 씨의 상심이 얼마나 크고 깊었을까요. 생채기뿐인 귀향이 됐지요.
전주유씨의 환향경로.연백-상주-나주-연백
그때의 상흔기록들을 가승家乘에 남기기를, 세진의 묘가 방골 평산平山 방골[方洞] 제궁촌齋宮村 윤 씨 성을 한 집 뒤 우병사禹兵使의 묘 아래에 평묘平墓로 있고 그 아래에 오씨吳氏묘가 있다고 했습니다. 훗날 7데손 평산부사 김완金浣과 8대손 김동필金東弼(20世)이 강화유수로 있으면서 세진의 묘를 훼손한 것으로 알려진 우 씨들을 여러 차례 엄중심문하였으나 입을 굳게 다무는 바람에 묘를 영영 실전失傳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진에겐 부인의 기록이 없어요. 웬일일까. 최초의 상산김씨 대동보인 계미보癸未譜서문에 답이 있어 보입니다. 바로 ‘집 나간 여자는 기록하지 않는다.’라는 문구지요. 세진이 별세하자 젖먹이 딸린 마님이 개가한 것입니다. 이 분의 존재를 추정할만한 기록이 있어요. 6대손 김상金尙(18世.청육 김덕겸의 아들)은 상소록尙所錄에서 세진의 아들 형衡(14世)에게 아우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상소록은 부사맹공副司猛公(조선시대 5위의 종8품 무관벼슬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미상임)이 홍치弘治9년 병진년丙辰年(연산2년.1496)에 기록한 성화회문기成和會文記(일종의 분재기?)를 인용하여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衡의 아우가 있었다.”고 했어요. 연산군 2년이면 유 씨가 별세한지 불과 43년 후의 기록이니 믿어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왜 유 씨는 과수댁이 된 며느리에게 형衡의 아우를 데리고 나가게 했을까. 젖먹이에겐 어미 품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또한 유 씨 자신도 과수신세로 그 고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며느리에게 까지 홀어미 짐을 지워주기에는 가혹하다는 생각 때문이리라.
하여간, ‘衡’에게 아우가 있었다는 기록을 짐작케 할 만한 고향구전이 있다. 바로 “이웃 어느 고을에 조상의 묘를 잃어버렸다 하여 족보에서 떼어버린 돌[石] 상산김씨들이 살고 있다”는 구비전승口碑傳承이다. 어찌 조상 묘를 잃어버렸다 하여 족보에서 떼어버린단 말인가! 조상 묘를 잃어버린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도대체 그게 족보에서 떼어버릴 명분이 될 법이나 한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여기엔 필시 피치 못할 사연이 있음직하다. 곧 과수댁이 데리고 나간 아들의 후손들의 존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아! 돌아보면, 타관에서 시부에 이어 남편까지 잃는 고초, 환향 길에 참빗장수 호구, 그리고 외아들의 객사와 며느리의 개가 등, 유 씨가 그믐 밤 보다도 더 캄캄하고 암담한 시련들을 감당하기에는 어림없는 멍에들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유 씨가 어린 손자[衡] 하나를 데리고 재차 찾아든 곳이 화산花山(화성면 소재 산이밭과 부처바위 일원) 땅 옹암甕岩이었다.
유 씨가 옹암을 택한 데는 우선 친정 인근이라 정신적지주로 삼을 수 있을 것 이라는 기대심에다가, 옹암이 비록 궁벽한 땅이긴 하나 ‘花山’이라는 지명이 의미하듯, 꽃피고 새 우는 순박한 곳인데다가 인심까지 넉넉해 유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리라 봅니다. 시원하고 물맛 좋은 찬 우물가 아낙들의 지순한 관심과 후한 인심, 숫드리개의 즐비하게 핀 꽃 버들에 산하를 온통 붉게 물들인 참꽃군락, 어느 것 하나 유 씨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는 것이없었습니다. 아울러 주변에 산재 해 있는 와촌瓦村도 유 씨의 눈길을 끌기에 넉넉했지요. 빈손의 유 씨가 호구책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고력苦力 뿐이었으므로 주변의 옹기 촌(와촌동)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충분조건이 됐으리라 봅니다.
고손자 양진당養眞堂 김택金澤(16世)이 화산을 예찬한 글을 보면 유씨가 옹암을 택한 이유가 될 법도합니다.
화산촌의 흥성/花山村興
궁벽한 처소를 좁은 땅이라고들 하나/境僻爭應少
물맛 좋아 한층 소중한 곳이요/泉甘契轉重
옷과 양식 터전이 상급이라/衣粮田頃上
스승과 벗들이 글을 소중히 여기는구나./師友簡編中
고금을 통해 호계삼소의 고장이라/今古價三笑
걸음을 멈추니 오직 한결같은 의지요/行藏只一笻
생애를 이것 따라 다하리니/生涯從此盡
작은 일도 분별해서 하늘의 조화에 맡기리./微分信天工
호게삼소虎溪三少:진대(晉代)의 승려 혜원(慧遠)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서 수도하면서 호계(虎溪)를 건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거(安居)하겠다고 맹세했으나, 서로 마음이 통하던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할 때 무심코 건너게 되었는데, 호랑이 울부짖는 소리에 맹세를 어긴 것을 깨닫고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
어떤 사람이 거처를 묻자 글로 써주다./有人問居處因書贈
해서(황해도)의 한 면이 은천군인데/海西一面銀川郡
이름난 산촌 곳곳이 꽃이요/山以名村村是花
냇가에 드리운 버들 듬성듬성한데/垂柳數株溪水上
비스듬한 초가집이 내 집일세./半傾茅屋是吾家.
은천군: 화산이 속해있던 황해도의 한 군
이렇게 해서 역성개국의 희생양이 된 채 바윗덩이보다도 더 무거운 문중의 명예를 짊어지고 1,500리 길을 돌고 돌아 귀향한 유 씨는 홀 손자와 끈질긴 생명력으로 신산辛酸같은 역경을 넘어 옹기 촌에 뿌리를 내리는 밑 거름이 되었습니다.
야자산소也字山所(독바위 산소.甕岩)
이윽고, 유 씨는 단종4년(1453)5월 24일, 고려가 망한지 60여년, 과수가 된지 50여년 만에 40을 넘긴 손자에게 “할아버지의 묘가 ‘고위동원考位同原’이고 ‘4월2일이 기일忌日’이란다”라고 당부하면서 90을 훌쩍 넘긴 나이에 한을 놓으시니 유 씨의 시련은 곧 우리 문중을 배태하는 초석이 되었지요.
유 씨 할머니가 영면에 들자, 차마 돌아가셨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손자 형은 그저 앞을 가리는 눈물 앞에 솟구치는 슬픔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은 주어진 내 소임이 이루어지기를 원치 않는 모양이구나. 어찌 이다지도 매정히 내가 의지하던 할머님을 빼앗아 간단 말인가!”
"애고-, 애고-"
그 곡소리가 어찌나 애절하고 구슬펐던지 지나던 탁발승托鉢僧이 찾아들었다고 하네요. 스님은 유 씨의 구절양장九折羊腸같은 역정歷程을 전해 듣고는 ‘응보應報가 있을 것’이라며 묘 자리를 점지點指해주고 떠나기에 이르렀으니, 그 곳이 바로 옹암에서 서쪽으로 오리가웃 떨어진 ‘야자산소也字山所’ 또는 ‘독바위산소’지요. 해발 50m에에 불과한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야자也字(풍수에서 야자산을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다.)’라는 산 이름이 시사하듯 소문난 길지로 전합니다.
이 산소에 7대 손자 김우석金禹錫(19世 歸來堂 貞穆公)이 유씨할머니가 별세한지 230년 만인 신유년辛酉年(숙종7년.1681)에 새로 치산治山하고 비석을 세웠고, 그 7년 후인 숭정崇禎 6년 무진戊辰(숙종14년. 1688) 4월 근지謹誌(誌石)를 넣었지요.
구글에서 인공위성으로 보는 화산지도 입니다. 중앙 윗부분의 큰 마을이 상산김씨 집성촌 화양리(일명 부처바위)이고 그 아래 일대가 화산이 되겠습니다. 유씨의 묘가있는 야자산소는 화양리 좌측 아래쯤으로 짐작이 되는데 정확한 위치는 감이 안 잡히네요.
위 사진은 구글이 250m상공에서 본 야자산소 조감사진입다. 지평선위 약간 솟아오른 산 밑이 야자산소 같습니다.
유 씨의 인고사忍苦史를 먹고 자란 문중
이 같은 유 씨의 인고사忍苦史는 후대 며느리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좌우명으로 삼게 되었는데 이 글도 그 구전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때문에, 배천의 상산김씨들은 최초의 낙향조모落鄕祖母 전주유씨 할머니를 ‘문중을 재건한 기걸奇傑’로 존경해 왔고, 또 그 후손들도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할머니의 인고사를 교훈삼아 문중을 일취월장 번성시켜 나가는 거름으로 삼았지요. 양진당 김택과 김덕겸 및 김덕함의 형제를 비롯하여 11명의 대과 급제자를 활화산처럼 줄줄이 배출해내는 기적을 황의산 자락에 시현한 것입니다.
때문에 할머니의 시제時祭가 오면 후손들이 인근과 원처를 가리지 않고 구름같이 모여들어 온 산을 하얗게 뒤 덮었다고 합니다. 멀리 한양에서 까지 찾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례가 끝나면 남쪽 상주에 두고 온 낭군의 망배례望拜禮로 이어지곤 했다네요.
고위동원考位同原
유 씨가 상주 고위동원에 두고 온 낭군의 묘는 어찌되었을까.
이 묘를 처음 찾은 분이 귀래당 김우석으로, 숙종16년(1690)의 일이니 할머니께서 세상을 뜨신지 290년 만이다. 성주목사를 사임하고 귀경길에 낙성군묘를 참배 차 개운동을 들렀지만 대호군묘소도 찾았을 게 분명합니다. 더구나 9년 전에 유 씨 할머니의 묘를 치산했고, 또 2년 전엔 지석까지 묻은 후의 일이니 관심사는 오직 ‘고위동원’이었을 것입니다. 족보의 다음기록이 그것을 보증하지 않을까요.
“살피건대, 공의 묘소는 가전구첩家傳舊牒에 의하면 낙성군묘와 같은 언덕(考位同原)이라 했다. 다른 묘는 다 표석이 있으나 공의 묘는 표석이 없어 찾아 물으니, 그 아래 곽씨묘 사이에 표석 없이 무너진 채 있는 한기의 고분을 그 산 아래 세거해오는 방손傍孫들도 그 묘가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하기에. 이에 잠시 그 상황을 기록하노라.”(按公墓所依家傳舊牒書之而洛城君墓同原之地.諸子孫墳山皆有表公墓則無表可尋而其下郭墓之間,有一古墓崩圮無表傍孫之世山下者亦不知其爲某墓姑記此以候之)
대호군의 묘로 추정되는 묘소가 낙성군 묘와 곽 씨 묘 사이에 고분으로 무너져 내려있다는 내용으로, 비석이 없어 대호군의 묘인지 아닌지를 단정하지 못하고 있네요.
어찌됐던, 정목공 김우석의 나들이를 시작으로 그 후 많은 발길들이 개운동을 드나들며 묘 찾기에 나섰으나 말만 무성히 남긴 채 더 이상 진전이 없었습니다. 아니 진전은커녕 대호군 묘로 추정되던 고분마저 어느 날 아예 살아지고 말았지요. 이건 실묘失墓가 아니라, 시묘矢墓가 돼버린 것입니다. 자연적이던, 인위적이던 고분형태의 묘마저 평토되어 묘의 흔적은 고사하고 그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지요.
사정이 이렇자, 개운동을 찾는 사람마다 고위동원의 위치를 놓고 낙성군 묘 위라는 사람, 옆이라는 사람, 아래라는 사람, 아니 옆 능선이라는 사람까지 가지각색이었어요. 허나 묘의 위치를 놓고 ‘낙성군묘와 곽묘지간의 고분’이라 했으니 고위동원의 위치는 낙성군묘 아래가 정답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렇게 왈가왈부하던 차에 필자가 서울은행 재직 중 1982년 부산으로 발령을 받는 바람에 상주가 가까워지자, 이때부터 짬을 내 개운동을 자주 찾게 되었습니다. 당시 상주시 공보실장으로 있던 내원령 문중의 김태희金泰熙님으로부터 귀중한『상주지』를 얻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며, 다른 원로 분들로부터도 자문을 구하는 등 차차 시묘의 윤곽이 잡혀가자 마침내 1989년 8월9일 휴가 길에 위치 실측에 나섰습니다. 당시 묘역 관리인 김상근金相根씨로부터 도움을 받아가며 측량한 것을 방한지를 첨부해 ‘대호군시묘지고大護軍矢墓址考’라는 제목으로 6쪽짜리 답사서를 쓰기에 이르렀고, 이 답사서를 근거로 문중친목회에서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위치에 대호군 묘비를 세우게 되었지요.
대호군 묘지 복원실측도
복원한 묘의 위치는 옆의 상안尙安묘역을 피해 곽묘지간의 원 위치보다 서편으로 4m정도 물러난 자리에 설정했습니다.
후손들이 복원한 전주유씨의 낭군 대호군 승부의 묘역에서 절사를 올리고 있다.아래쪽에 쌍분의 곽씨묘가 있고, 우측엔 사람이 집고 있는 상안의 묘비와 묘의 일부가 살짝 보인다.
상주에 묘역이 마련되고부터 대호군시제도 복원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황해도의 유 씨묘를 향한 망배례도 응례應禮로 복원하게 되었습니다. 제례가 끝나고 황해도 배천방향을 향해 망군배례亡君拜禮를 한 번 더 올리게 되었지요.
첫댓글 전주유씨 환형경로 및 구전내용을 상세히 설명하신 쿨마님 감사합니다. 자세히 읽고 황해도 연백군 청착하게된 경위를 알았습니다.
우리문중으로서 전주유씨는 어느 재상이나 판서보다도 위대한 위치에 있는 분이십니다. 이번 지석 발견을 계기로 다시한번 유씨 할머님를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대호군공의 장인 어른인 전주류씨 양덕감무 류제충은 전주류씨 시조와 같은 세대의 인물입니다. 따라서 선계는 고려초에 평장사를 한 류방헌의 일족으로 보이며, 전주류씨는 고려말에 왕당파 문화류씨 류경 등에 의하여 무신파인 전주류씨 류능이 살해됨에 따라 몰락하여 류능이 살해된후 역 2세대를 지나서 시조가 다른 3파[濕, 渾, 池]의 전주류씨가 나타났습니다. 전주류씨 습파 류기송.
관심을 갖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많은 자료 부탁합니다.
전주류씨 대종회에 인터넷을 통해 양덕 류제충에 기록은 찾을수가 없다 하네요 ㅠㅠㅠ 세월이 너무 오래 흘러 기록들이 소실 되어 더이상 알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안아도 아주 오래전에 전주류씨 대종회에 공문을 보내 류씨할머니 족보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으나 답을 얻지 못한바 있으며, 고심끝에 국립도서관 족보실에서 전주유씨족보를 삿삿이 뒤졌으나 역시 실패했습니다. 앞서 댓글을 달아주신 반포(전주류씨 습파 류기승)님의 글을 보니 곡절끝에 落譜한 후손이 아닌가 합니다. 류씨문중 반포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돋안 많은 분들이 어찌 북한에 있는 묘지석이 남한으로 왔느냐는 의문들이 많았는데, 오지 여행가 한비야씨가 쓴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4권 '울어도 넘지못한 국경, 두만강 3미터반" 에 의하면 한국의 보따리 장사꾼들이 중간에 심부름하는 연변조선족이랑 북한 사람들을 통해 북한의 전지역을 드나들며 골통품을 거둬들인다는 군요. 그러니 북한에 멀쩡한 묘가 남아 있을런지 의문이 가네요. 결국 전주유씨 묘도 이들에의해 도굴되었다고 봐야지 않겠어요?
전주유씨 할머니의 뿌리가 오리무중이었는데 전주유씨 뿌리탐구에 의하면 존재하는 파외에 또 다른 파로 보는 견해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전주유씨 유능은 고려무신의 집권자 최항의 문객으로 있으면서 최의가 권력을 계승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최의의 신임을 믿고 권세를 부리다가 고종45년(1258) 김준, 유경(문화유씨) 등이 무오정변을 일으켜 최의와 유능 등이 함께 피살되면서 전주유씨가 몰락하고 그 후손들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다가 약 2세대가 지난 후 유습, 유혼, 유지를 시조로하는 전주유씨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유망된 전주유씨들이 존재하게 되었으니 우리 전주유씨가 바로 이 부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