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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밭에 킹
정영혜
할머니들만 많은 마을이 있었어. 봄부터 가을까지 품앗이로 농사짓고, 겨울이면 마을 회관에 모여 한솥밥 해 먹으며 살고 있었지.
늦여름 뙤약볕에 논두렁 콩들도 당글당글 영글어 가는 날이야.
머리카락이 라면처럼 꼬들꼬들한 할머니가 몸빼바지를 추스르며 밭으로 내려갔어.
밭두렁엔 누렁누렁 호박이 익어가고 참깨, 들깨는 따글따글 여무느라 하루해가 짧았지. 고구마는 자줏빛 잎줄기를 토하며 기어오르고 싶어 안달이야.
“아따, 시뻘건 고추가 야물딱지게 익어가구마잉. 고추장 맹글면 허벌나게 맛나것다.”
할머니는 고추장이며 고춧가루를 아들, 딸 나눠줄 생각에 싱글벙글했어.
“사나흘 지나면 할망구들 불러서 고추 따자고 해야 쓰것네.”
고추밭 위에는 조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지. 할머니가 조 밭으로 올라갔어. 조 키가 할머니보다 컸지.
“워메, 이뿐 것! 겁나게 달려부렀네잉.”
할머니는 탐스럽게 달린 조를 흐뭇하게 바라보았어. 그러더니 갑자기 우거지상을 짓는 거야.
“워쩐댜. 참새가 떼거리로 달려들 것인디.”
작년에 허수아비를 세워뒀지만 별 재미를 못 봤어. 그때 길 건너 도로 확장 공사장에 서 있는 마네킹이 보였어.
“천날만날 팔 흔드는 저 놈을 세워두면 딱일 것인디, 쩝!”
할머니가 마네킹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어. 팔을 흔드는 마네킹이 할머니한테 반갑다고 인사하는 것 같았거든.
할머니가 새벽 댓바람부터 찬거리를 준비하러 밭으로 갔어.
“아따, 잘 잤는가?”
할머니가 이슬을 털며 오이랑 풋고추, 깻잎을 소쿠리에 담았지. 돌아오다가 보니 마네킹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거야.
“그려, 니도 좀 쉬어야 한당께. 천날만날 얼마나 힘들것어?”
할머니는 밤낮으로 팔 흔드는 마네킹이 좀 불쌍하다고 생각했지.
다음 날 밭으로 가는데 마네킹이 보이지 않는 거야. 할머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공사장으로 내려갔어.
마네킹이 쓰레기 더미에 널브러져 있었지. 얼굴엔 시커먼 타이어 자국이 또렷하고, 오른쪽 귓불은 떨어져 나갔어. 팔은 부러지고 왼쪽 다리는 뒤틀려 있었지. 손가락 두 개는 댕강 부러지고 말이야.
“오매오매, 불쌍한 것. 운전 조심하라고 안내하다가 오히려 사고를 당해부렀네.”
마네킹을 세워보니 풍선인형마냥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어.
“아따, 사고가 났으면 치료를 해 주든가 고쳐주든가 해야재, 부서졌다고 그냥 버려부렀네잉”
할머니는 마네킹을 들고 집으로 갔어. 부러진 조각들도 모조리 챙겨서 말이야.
집에 가자마자 노란색 안전요원 옷부터 벗겼어. 떨어진 곳은 붙이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다리며 손목은 천 조각을 끼워 덜 움직이게 했어.
땀으로 목욕을 하고, 손엔 접착제가 끈적거렸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마치 수술하는 외과의사 같았지.
손을 다 본 할머니가 마네킹의 엉덩이를 철썩 쳤어.
“딱 좋아부러!”
그 바람에 마네킹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어.
‘할머니, 정말 감사드리지…… 으흡!’
마네킹이 고마워서 인사를 하는데 할머니가 마네킹 얼굴을 걸레로 쓱쓱 닦지 뭐야.
“워메, 얼굴 꼬라지가 말이 아니랑게.”
‘퉤퉤! 꽃보다 잘생긴 얼굴을 걸레로 닦으면 안 되지 말입니다.’
마네킹의 말이 들릴 리 없는 할머니는 한술 더 떴어.
“어디 보자. 요놈을 조 밭에 허수아비로 세워두면 딱이랑게. 사람 맹키로 서 있으면 참새들도 깜박 속을 것이여.”
‘나를 허수아비로 세운다고라고라? 그러시면 정말 곤란하지 말입니다.’
마네킹은 할머니에게 고마웠던 마음이 싹 사라졌어.
할머니가 마네킹의 옷을 입히다가 다시 벗겼지.
“인자부터 니는 안전요원이 아니여. 이런 옷은 필요없당게.”
‘정 그러시다면, 모델도 울고 갈 옷으로 부탁드리지 말입니다.’
하지만 할머니 생각은 달랐어. 옷만 벗긴 채로 밭에 세우려고 했던 거야. 그런데 홀딱 벗은 게 좀 민망했지.
“옷을 안 입힝게 쪼까 거시기 하구마잉. 맞춤한 옷이 있을랑가 모르겄네.”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한참을 꾸물댔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옷을 입혀주려나 봐. 얼마든지 기다리지 말입니다. 안전요원 옷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지 말입니다.’
마네킹은 잔뜩 기대하며 콧노래까지 흥얼댔어.
삐그덕,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나왔는데, 빈손이야.
“마땅한 옷이 하나도 없어부러야. 이럴 줄 알았으면 영감탱이 옷이라도 하나 남겨 둘 것인디, 걍 이대로 밭에 가야 쓰것다.”
‘헐! 이러시면 진짜 창피하지 말입니다. 아까 안전요원 옷도 근사하지 말입니다.’
마네킹이 아무리 징징거려도 소용없었지.
할머니는 마네킹을 옆구리에 끼고 다짜고짜 집을 나섰어.
고방 앞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뒷걸음질 쳤지.
“긍게, 작년에 입혔던 허수아비 옷이 어디 있을 거구마잉.”
할머니가 마네킹을 벽에 세워두고 고방으로 들어갔어.
마네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
잠시 후, 할머니가 티셔츠를 들고 나와서 먼지를 탈탈 털었어.
‘빨간색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지 말입니다.’
“작년 건 참새가 똥을 싸대서 그런가, 영 때깔이 이상하더랑게. 요놈은 손자가 벗어 놓고 간 옷인디 맞을랑가 모르겟네잉.
할머니가 마네킹의 머리부터 티셔츠를 입혔어. 그런데 팔이 들어가지 않는 거야.
“벗길 때는 잘 되었는디, 왜 이랴?”
할머니가 발부터 끼웠다가, 머리부터 끼웠다가 아주 야단이 났어.
마네킹은 간지러워서 낄낄거리느라 야단이 났지.
“아하! 요놈 팔을 쏙 뽑았다가 다시 끼워야 쓰것구만.”
겨우 옷을 입힌 할머니가 마네킹을 번쩍 들었어. 마네킹의 배꼽이 쏙 보이네.
“워메, 곰돌이 푼가, 하는 고놈 같네잉. 갸도 바지는 안 입었응게.”
‘할머니, 아니 할매. 잠깐만요! 참새 똥 싼 바지도 괜찮지 말입니다. 아까 안전요원 옷도 멋쟁이지 말입니다.’
마네킹은 완전 울상이 되었어.
할머니는 마네킹을 요리조리 보고는 등짝을 철석 쳤어.
“딱 좋아부러!”
‘아이고 내 팔자야. 패션모델이 되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빨간 배꼽티만 입은 허수아비라니!’
마네킹은 펑펑 울고 싶었지.
할머니가 밭에 가자마자 옥수숫대를 쑥쑥 뽑아냈어. 그 자리에 구덩이를 파서 마네킹을 세웠지. 마네킹의 발에 큼지막한 돌을 얹고, 그 위에 흙을 덮어 꼭꼭 밟았어.
마네킹의 떡 벌어진 어깨를 보니 참새가 얼씬도 못 할 만큼 듬직해 보였어. 할머니는 마네킹 등을 토닥토닥 해줬지.
마네킹은 바지도 안 입혀준 할머니가 미워서 째려봤어.
할머니가 가고 한 무리의 참새 떼가 날아왔어.
“얘들아, 이것 좀 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니?”
“그러게.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옷이 진짜 웃긴다.”
“바지도 안 입고 좀 창피하겠다, 하하하.”
참새들은 지들끼리 찧고 까불고 한바탕 난리가 났어.
‘아이고, 망신스러워라.’
마네킹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지.
며칠 뒤, 할머니네 고추를 따는 날이야. 동네 할머니들이 품앗이 하러 왔어.
방앗간 할매가 밭두렁에 서 있는 마네킹을 보았어. 방앗간 할매는 예전에 방앗간을 해서 쭉 그렇게 불러.
“못골 댁, 워디서 요런 요상한 물건을 주워 왔당가?”
“뭔 소리랴? 나가 교통사고 난 걸 모셔 와서 수술까지 시켜줬는디.”
할머니가 흐뭇한 눈으로 마네킹을 보았지.
“워메, 참말로 잘 생긴 총각이구마잉.”
호랭이 할매도 한마디 거들었지. 호랭이 할매는 말끝마다 ‘호랭이가 물어갈 놈’ 하고 욕을 해대서 붙은 별명이야.
방앗간 할매가 마네킹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았어.
마네킹은 조 밭을 지키기는커녕 조 속으로 들어가 숨고 싶었지.
“잘생기긴 혔는디 어째 좀 민망하당게. 하다못해 못골 댁 몸빼라도 입혀주지 워째 홀랑 벗고 섰당가.”
할머니가 펄쩍 뛰며 말했어.
“아따, 허수아비가 아랫도리 입은 거 봤어? 봤냐고?”
방앗간 할매가 한발 물러서며 말했지.
“거시기 뭐냐, 허수아비는 작대기에 지푸라기 붙인 거고, 이놈은 마네킹이니께.”
“내 밭에서 요래 섰으면 마네킹이 아니라 허수아비여.”
호랭이 할매가 히죽 웃으며 마네킹 엉덩이를 봤어.
“그람, 저기 허리춤에다 호박잎이라도 가려 주든가.”
방앗간 할매가 맞장구를 쳤지.
“호박잎은 까끌까끌 해서 안 된당게. 매글매끌, 토란잎이 제격이여.”
마네킹이 울상이 되어 비명을 질렀어.
‘나, 돌아갈래!’
방앗간 할매가 고추 담을 마대자루를 꺼내며 말했어.
“나중에 못골 댁 꽃무늬 몸빼바지라도 좀 입혀주시오잉.”
“아따, 아무시랑토 않구마 워째 저 난리당가. 알았응게 얼른 얼른 고추나 따 주시오잉.”
할머니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고추밭으로 내려갔어.
다음 날부터 할머니는 무척 바빴어.
호랭이 할매 고추도 따 주고, 방앗간 할매 고추도 따 주고, 할머니 고추도 바싹바싹 말려야 했거든.
정신없이 며칠을 보낸 할머니는 그제야 허수아비가 생각났어.
“오매오매, 나가 몸빼바지라도 입혀준다는 것이 깜박 잊어부렀네.”
할머니는 옷장을 죄다 뒤졌지만 적당한 걸 찾지 못했어. 헐수할수없이 입고 있던 줄무늬 몸빼바지를 바꿔 입고 헐레벌떡 밭으로 갔어.
“워메, 이것이 머시당가?”
마네킹이 바지를 입고 있었지. 바람 송송 자주색 이파리 바지를.
글쎄, 밭두렁 아래에 있던 고구마 줄기가 마네킹의 발목을 타고 올라간 거야.
‘할머니, 내 바지 멋지지 말입니다.’
할머니가 입을 벌린 채 마네킹 주변을 돌았어.
“오메 오메, 겁나게 멋져부러!”
잘 익은 조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 마치 마네킹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 같았지.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
“이제부터 너는 킹이여. 조 밭에 킹!”
할머니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지.
“요렇게만 잘 지켜라잉. 조 걷어서 시장에 팔면 멋들어진 옷 한 벌 사 줄랑게.”
‘할매! 딱, 좋아부러!’(*)
2021년 7.8월 아동문예 발표
첫댓글 사투리가 찰지게 멋지구만유~^^
잘 읽어 보았습니다 ~^^
감사합니다
마법풍님, 겁나 감사혀요잉~^^
역시 킹입니다~~!!! 킹!! 훌륭한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