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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계신 말씀
(24.3.31)
<요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오늘부터 요한복음을 공부하기로~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가르치셨던 천국복음을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라 하고 이 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 한다. 공관복음이란 같은 관점에서 보는 복음이라는 의미인데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기록이 유사하거나 중복되어 나타나기에 공관 복음서라고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앞의 세 복음서에는 없는 7가지 표적(가나 혼인잔치..물이 포도주/왕의 신하 고침/38년 병자 고침/ 물 위를/ 오병이어/날 때부터 소경을/죽은 나사로 살리심)등과 여러 사람들과의 긴 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바리새인과의 긴 논쟁, 마르다 마리아와의 대화, 그리고 13장~16장의 긴 다락방 강화나 17장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등에는 ㅎ님의 구원에 대한 경륜적 비밀들이 다수 함축되어져 있다.
아시다시피 사복음서는 각각의 특징이 있다. 에스겔서나 계시록 4장에 보면, 네 생물의 얼굴 모습들이 나오는데(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이 네 생물이 사복음서로 암시된 IX의 사역의 4가지 속성을 나타낸다. 용맹한 사자로 상징하는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IX를 나타내고, 마가복음은 섬기는 종으로 오신 송아지로, 누가복음은 연약한 인자로 오심을 상징하며, 그리고 요한복음은 세상을 초월하여 창공을 나는 독수리로 비유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영의 복음이라고도 한다.
성경 66권이 다 어렵지만 그 중에서도 교리를 다룬 로마서나 지난주까지 공부한 산상수훈, 그리고 요한복음이 더 깊고 비밀한 비유들이 많아 어려운 성경에 해당된다. 계시록이 어렵다지만 앞서의 이런 성경이 풀리면 저절로 열리는 곳이 계시록이니 다 순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로마서나 산상수훈을 다루었기 때문에 요한복음 역시 이제는 공부해도 될 때가 된 듯하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차근차근 기대를 같고 요한복음을 함께 열어보자.
1절 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의 태초는 창1;1절의 태초와는 다른 태초이다. 창1장의 태초는 세상을 시작하는 태초이고, 여기서의 태초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의 세계인 영원 전을 말한다. ㅎ님은 영원 전에 미리 사람의 구원 계획을 설계 하시고 그것에 따라서 모든 것이 적합하게 갖추어진 삼라만상이 있는 이 세상을 창조 하신 것이다.
그래서 엡1장을 보면 ㅎ님의 구원의 경륜에 대해 언급이 되는데, 창세전에 IX 안에서 소수의 어떤 무리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시사 그들을 IX의 피로 죄사함을 얻게 해서 ㅎ님의 아들들을 얻고자 하셨다는 비밀을 말씀하고 계신다(우리는 이미 공부). 그와 같은 ㅎ님의 작정에 따라 이 세상이 가시적으로 창조되었고 지금도 ㅎ님의 구원 역사가 진행되기에 이 세상은 유지 운용되는 것이다. 언젠가 ㅎ님이 택하신 자들이 다 구원되면 ㅎ님은 일체의 미련도 없이 이 세상을 소멸하여 없애버릴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내용이다.
그런데 1절을 보니 예수께서 이미 창세전인 영원 세계에서 ㅎ님과 함께 말씀으로 존재하고 계셨다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말하고, 말씀은 성자 ㅎ님을 말한다.
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함께 수립하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줄여서 창세전 언약).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실행할 자는 다름 아닌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이러한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아들의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택한 자들을 자신의 형제로 기쁘게 수용하셨다. 그들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그들의 죄를 자기 몸에 담당하여 죽을 것까지도 수용하신 것이다.
(빌2:6-8) 예수님은 ㅎ님과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진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그 계획을 다 수용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ㅎ님은 이 아들이 너무도 흡족하셔서 만물을 그 무릎아래 끓게 하셨다고 하심. 마3장에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하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ㅎ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1절에서 아들을 말씀으로 소개한다. 아들을 말씀으로 말하는 것은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증거할 자라는 뜻이다.
<히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구약의 율법과 규례 절기, 성막의 모든 제사, 제물, 기구 등등이 다 IX의 십자가 모형임)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주님은 옛세상을 멸하고 새세상을 여시러 오심 그 후는 항상 세상 끝임..말세이다)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천국의 상속자)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요14: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주세요../주님~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어찌?~..보이라고 하지? 책망하심, 죄인이 ㅎ님을 막바로 보면 즉사, 해서 성육신하심이 은혜인 것임. 예수를 통해 ㅎ님의 성품과 인격을 앎)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구원 얻은 성도)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십자가 대속)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ㅎ님 보좌 우편에 좌정해 계심)
예수 등장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은 철저히 비밀에 감추어져 있었다. 예수가 등장하자 성경이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요5:39)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 이 성경이 곧 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치 않는 구나! (주님을 믿지 않는다고 탄식)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아들의 말을 듣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속한 말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땅의 일: 모세가 준 율법의 본 뜻을 깨닫지 못함- 죄를 들추어냄이 목적인데 착각함->보물지도를 보물로 오해..몽학선생인데 착각/ 주님의 말씀 전체가 진리이며 하늘의 말씀인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함. 세상의 정신사조와 충돌됨..인과응보, 상선필벌 등등).
이 세상을 한마디로 정의 하라면 인과율과 상선필벌의 정신사조이다. 인과응보나 상선필벌의 베이스는 인간에게도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ㅎ님이 보실 때는 인간은 본질 자체가 부패하고 더럽고 가증한 존재들임. 창6장과 렘17.9절(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사람의 마음). 그러하니 ㅎ님 앞에서 인간은 자기 가능성의 명함을 못 내미는 게 마땅한데(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축사? 많은 권능을?-자랑함, 주님은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불법(ㅎ님의 의를 버리고 사람의 의로..)
선악과 먹은 인간은 ㅎ님처럼 되려는 자아사랑이라는 탐심이 발동이 되어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선교하거나 교회를 건축하는 등의 많은 종교적 업적을 쌓거나 구제 등의 착한 일도 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버리는 희생을 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들의 평판과 명성을 통해 자기가치 챙기기와 영광을 얻는 일이고, 더 나아가서는 ㅎ님께도 인정받아 구원받고 상을 받는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ㅎ님은 속이지를 못한다. 자기를 위한 열심이고 충성이니 탐심이요, 우상숭배다(자신을 섬김이다)
이렇게 세상과 하늘은 차원이 단절되어 있어 소통이 불가능하다(예, 마20:1-16 포도원 품꾼 비유- 각각 더 많은 시간 일한만큼 더 많이 요구함. 종들이 주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함, 품꾼들은 ㅎ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단순히 남과 비교해서 자기가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행태를 보임). ㅎ님의 나라는 오직 긍휼과 은혜와 용서의 나라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먼저 들을 귀를 허락하신 후 듣게 하신다. 이것이 거듭남(성령을 받아야 가능함)의 비밀이다.
2절 보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한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함께 있다고 하나 되지 않는다. 생각의 하나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서로 ‘소통’이 되는 관계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소통의 단절이다. 인간의 특징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가정에서 자녀를 키워본 부모는 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고 할지라도 인생관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는 한 공간에 있어도 생각이 하나일 수는 없다. 그러나 성부 ㅎ님과 성자 ㅎ님은 모든 가치관이 하나이셨다는 말이다. 이것을 ‘함께 계셨고’ 라고 표현한 것이다.
성부 ㅎ님과 성자 ㅎ님은 분명히 다른 인격체이시다. 그런데도 하나라고 하는 것을 삼위일체라고 한다. 인격체가 같으면 삼위라고 할 수가 없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다른 인격체인데 생각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들이신 예수가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때에 가능해진다. 예수님은 성부 ㅎ님의 뜻이 너무도 달고도 맛있게(즉, 지당하게) 받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뜻도 있지만 다 접어두고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십자가를 앞두고 자기주장과 싸우신 겟세마네의 기도이다(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그러나 내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자기부인 하심) 영원 전부터 이미 창조를 설계하는 단계부터 삼위 ㅎ님의 합의에 의해 구원의 시나리오가 세워진 것이었다. 성부의 설계를 성자 예수의 희생의 피로의 실행, 그리고 성령께서 죄사함 받은 각 사람 안에 임재하심으로 ㅎ님과 연합을 이루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 3박자 구원임. 이것을 시사하는 말이 2절의-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이다.
이것은 창 1장에 일곱 날 동안의 창조 기사를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창1장의 ㅎ님이라는 용어를 원어로 보면 엘로힘(엘:단수)이라는 복수로 등장한다. 그리고 6째 날에 가면 더 명확해진다. ‘우리가 우리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에서 우리란 바로 삼위일체이신 복수의 ㅎ님을 의미한다. 이 영원 전 창조의 시나리오대로 역사는 펼쳐지는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예외는 없다. 믿는 자들의 세계나 이방인들의 세계, 모두가 다 ㅎ님의 예정대로 진행되는 인간 역사다.
애굽의 바로 왕이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다 ㅎ님이 쓰시는 이용물이다(ㅎ님은 이들보고도 내 종이라고 하심). 필요에 의해서 역사에 잠깐 나왔다가 용도가 끝나면 소멸되는 운명들이다. 일회용 주사기처럼 구속사의 악역으로 쓰임 받다가 용도폐기 된다. 그러나 교회는 ㅎ님이 운용하시는 구속사의 주인공들이다. ㅎ님의 자녀들 아닌가? 성령으로 하나된 자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의 생각으로 소통이 되는 자들이다.
(엡2:13-14)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IX 십자가로 ㅎ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화평케 되고, 이웃과도 하나됨/ 교회는 한 몸으로 부름 받은 은혜를 아는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이 은혜 안에서 소통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모두 은혜에 빚진 죄인들로 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무도 잘난 자도 못난 자도 없다.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동일한 신분으로 모이기 때문에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차별이 존재하는 한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3절 보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만물이 그를 위하여’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위해서임을 아는 게 중요하다.
(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보이지 않는 하늘의 천군천사도 이 세상의 사단의 세력과 그의 통치를 받는 매시대의 각 나라와 군왕들도 다 아들 예수에 의해 예수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말씀이다. 링컨의 캐치스버거 연설(of, by, for 더 피플?=> 천국은 예수를 위한 나라다). ㅎ님은 아들이 영광 받는 것을 보시고 당신도 영광스럽게 생각하신다. ㅎ님의 관심을 오직 아들 예수에게 가 있다.
그래서 창1.1절에서도 태초에 속에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창 1장의 일곱 날의 창조는 물질세계의 창조가 아니라 사람의 구원에 대한 IX의 사역과 성령의 일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날 빛이 있으라(해달별은 4째날에~), 1째날의 빛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함. 2째날 궁창은 공중에 달리신 십자가 사건을 의미함(이 날만 ㅎ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없음) 3째날(부활을 물에서 땅이 드러남으로 비유함)..초목?(4째날-해)/물리적NO
4째날(오순절 성령을 받고 전도하는 사도들과 교회를 말함, 궁창 위에 해달별-십자가 복음이 해로 상징된 진리를 상징, 달은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를, 별은 전도자들 사도들을 상징),
5째날(전도로 교회가 확장됨- 가라지와 알곡으로 나누어짐: 바다의 물고기, 공중의 새로 비유) 6째날(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를 남자와 여자로 표현함- 구원의 완성임).
7째날(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시는 ㅎ님을 상징함) (요1~2장 : 6일 창조 언급..나중에)
여기서 1절의 태초에가 중요하다. 베레슈트(히/3단어 합성어) => 베트(집)+ 로쉬(머리이신 IX) + 타브(완성 : 인치다, 십자가 상징) => 십자가로 타브(완성)을 이루신 IX를 지칭한다. (다 이루었다). 즉 베레슈트(태초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IX 안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이고 이를 6날의 창조사역으로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창1장의 비밀이다. 엡1장(IX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사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구속 죄사함을 통해 ㅎ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이다.
사43장을 보면, 이 백성을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곧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여기서도 나를 위하여 지었다..나는 성부 ㅎ님 이시며 동시에 성자 예수임을 말한다.)
-요8장: 나는 처음부터 말하여 온 그다(구약의 ㅎ님이 바로 자신이심을 밝히심)
마22장을 보면 혼인 잔치 비유가 등장한다. 2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그 천국 잔치에 예복을 입는 것이 바로 IX로 옷 입는 것이다. 즉 IX를 믿는 믿음의 의로 구원을 받는 것을 IX로 옷 입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IX롤 옷 입을 수 있는가? 이게 구원을 바라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요 숙제가 아니겠는가?
-갈3.27을 보면(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X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란 죽음인데 언제 어떻게 내가 X와 합하여 세례 받았다고 하는가? 이게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세례를 받기 위하여, 그러니까 같이 죽음에 이르기 위하여 금욕주의로 성화주의로 경건주의로 나아간다.
자신의 육체를 억제하고 자갈 물리기 위해 금식하거나 외딴 곳에서 고립되어 살거나 천주교 사제처럼 결혼도 금하고, 죄를 안짓기 위해서 TV나 신문도 안 본다. 중들처럼 속세를 떠나 때 묻히지 않겠다는 일념에서 나온 자학이다. 중세 수도승들이 그러했다. 자기 육신을 미워해서 때리고 굼기고 묶고 상처내서 발동을 억제하는 별의별 기이한 짓들을 해왔다.
마치 불교계의 거성으로 알려진 성철스님이 도를 닦듯이 수행한다. 성철승려는 8년 동안의 장좌불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잠을 적게 자고, 적게 먹고, 말하지 말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가르쳐 왔지만, 임종시에는 내가 부처에게 속고 달마대사에게 속았다고 한탄하면서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고 탄식하며 죽었다. (아마도 말년에 ㅎ님이 지옥을 보여준 듯함. 그의 80년 수행이 죄를 해결하지 못한 처참함을 보여줌으로 유언을 남긴 것인 것 같다)
(이런 일화도 있음) 어떤 수도승이 30년 동안 산속 암자에서 도를 닦고, 이제는 득도 했으니 하산하자해서,,,속세로 내려오다가 산등성에서 나물 캐는 여인네를 보고 음욕이 일어나서 그동안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하고 옷을 벗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승려 포기). 이렇듯이 인간이 아무리 고행을 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게 육신의 본성인데, 이것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게 종교인들임. 말짱 헛수고일 뿐이다.
구원은 ㅎ님이 은혜로 입혀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스스로 쟁취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자력구원을 추구하지만 기독교는 타력 구원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없기에 구원자 IX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피 공로로 죄사함의 대속을 이루시고 그 의를 자기백성들에게 선물로 부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담에게 입혀주신 가죽옷 아닌가? 범죄함 아담을 버리지 않으시고 ㅎ님이 숨어 떨고 있는 아담을 찾아가셔서 손수 가죽옷을 입혀 주신 것은 IX의 대속의 은혜에 대한 강력한 예표적 그림자이다.
죄인에게 조건 없이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ㅎ님이 택하신 야곱의 행로에서도 잘 부각되고 있다. 창27장을 보면, 야곱이 아비 이삭을 속여서 ㅎ님의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복음의 진수이다.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먹고 ㅎ님의 축복을 빌어주겠다고 장남 에서에게 말을 했지만,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는 아내가 제일 잘 만드는 게 이치다. 남편의 취향을 누가 가장 잘 알겠는가? 결국은 리브가의 도움으로 야곱은 이삭의 축복을 받게 된다.
이때의 리브가는 성령을 상징한다. 여기서 리브가가 만든 염소 새끼 별미는 죄인을 대속하신 예수의 십자가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을 상징한다(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영생이다. 이는 대속죄일의 ㅎ님을 위한 염소이기도 함). 또한 이삭이 에서에게 말한 축복 정보를 야곱은 알지도 못했는데, 리브가의 안배로 축복을 받게 된다(성령의 간섭 상징). 형 에서로 꾸미고 형으로 위장하여 받는 축복이다. 그래서 형의 옷을 입고 손과 목을 염소 가죽으로 꾸몄다.
그리고 음식을 들고 들어가면서 야곱이 아버지여!~하고 부르자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는 물음에 뭐라 대답? =>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그러자 이삭의 말이(음성은 야곱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ㅎ님의 축복을 빌어주게 된다. 이게 복음이다. 이삭이 야곱인 줄을 알지만 에서의 옷 때문에 축복하듯이, ㅎ님은 우리가 야곱, 즉 죄인인 것을 너무도 잘 아시지만 우리를 보고 구원하시는 게 아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은 아들 예수의 피 공로를 보고 죄를 묵과하심으로 긍휼로 용서하시는 구원을 주신다. (이것을 함축하여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임)
에서의 옷으로 야곱이 축복받듯이 죄인인 우리가 예수의 가죽옷을 입고 구원받는 것이다.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 말처럼 은혜가 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 말을 신약식으로 버전 업 한다면? ㅎ님이 너는 누구냐? 물어보실 때에(IX의 십자가 은혜로 사는 자입니다.)이다. 여기에 다른 말을 덧붙이면 사망이다.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다. 그래서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죽인 로마 군병들이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지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우리 죄로 예수를 죽였다. 우리가 모두 로마 군병들이라는 메시지다.
그러므로 천국은 내 공로로 가는 게 아니라 오직 IX의 십자가 은혜로 가는 것이다. 이것을 줄여서 타력구원이라고 한다. 성경은 인간을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규정한다. 이것을 빗댄 표현이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라고 하며, 혹은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로 비유하기도 한다. 마른 뼈가, 죽어서 사망의 냄새를 풍기는 자가 스스로 무덤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주님이 말씀하실 때에 가능하다(나사로야 나오너라!). 예수의 말씀에 사망도 복종한다. 죽은 자가 사망에서 놀임을 받고 살아나는 것이다.
야곱으로 대표되는 이들이 누구다?(창세전 IX 안에서 택하여진 소수의 무리들이다.) 주님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요6.37절에서 주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온 것은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살리는 이것이다(하심). 모든 죄인은 죽어있다. 택하신 그들에게 주님이 찾아가 ‘아무개야 나오너라’ 하면 따라 나오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창세전 택함 받은 자들이다.(12제자가 다 그러했다)
이들에 대해, 요10장에서는 내 양은 목자인 내 음성을 알아듣고 나를 따른다고 하신다. 따른다는 말은 십자가 복음을 들을 때에 기뻐하며 공감하여 주님을 믿는다는 말이다. 이처럼 성경은 제한 속죄를 말씀한다. 그런데도 많은 소경된 종교 지도자들은 ㅎ님이 그렇게 편협하시고 부당하실 리가 없다며,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주장한다. 이게 말이 안되는 것은, 인간의 영적 실상이 죄와 허물로 죽은 송장이요 마른 뼈들이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의 의를 말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을 당달봉사라고 한다. 눈뜬 봉사다.
이처럼 천국은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그래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한다. 천국 입성의 열쇠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달려 있다(마22장 혼인예복을 안 입은 자..결박 바깥 어두운 곳에서..슬피 울며 이를 갊-왜냐? 온 평생 수고하며 열심 충성 다 헛것임을 그제야 앎).
그리스도와 관계 맺는 자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문제를 예수님에 의해 해결 받은 자를 말한다. 이들이 천국을 상속 받을 자들이다. 이들에게 천국은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 말하는 것이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피로 생명을 얻은 교회가 영원히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송하는 곳이다. 이 천국을 하나님께서 지금도 세워가고 계신다.
<본문4-5절>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라고 말한다. 생명이 뭔지 아시나? 생명이란 살아가야할 이유이고 목적을 말한다. 나인성 과부에게 있어서 생명은 외아들이다. 외아들을 생명삼고 사는데, 이 아들이 죽으면 살 이유가 없다. 성악가의 생명은 음성이다. 목소리로 노래하는 게 자신이 살 가치와 이유이다. 그런데 목소리가 고장나면 살 이유가 없어진다. 사업가의 생명은 사업이다. 행여나 사업이 망하면 살 이유가 없어져서 자살하는 자들이 있다. 사업을 생명으로 삼기 때문이다.
성도의 생명은 말씀이신 IX이다. 성도가 살아야할 이유와 가치와 소망이 예수라는 말이다. 예수가 우리의 전부이다. 목숨을 잃어도 생명이신 예수를 잃지는 말아야 한다. 그래서 본문은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는 것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있는 자들에게 예수가 빛으로 오셔서 참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주신다는 말이다. IX가 삶의 이유와 의미이고 목적이라는 말이다. 내 구원이 목적이 아니다. IX가 목적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 빛을 미워한다. 세상은 사단의 세력이기 때문에 빛과는 대척점에 있다. 어둠은 다른 게 아니다. 인간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정신 사조를 말한다. 또한 윤리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아서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곳에 간다고 믿는 이방의 정신사조 역시 어두움이다.
그런데 예수가 오셔서 그들의 행함의 의를 다 기각하시고 발로 밟아버리면서 - ‘너희가 만드는 의는 다 거짓되고 더러운 것이야, 내가 참 빛이야 나를 믿는 게 영생이야!’-그러니까 귀를 막고 마침내는 예수가 너무도 미워서 죽여 버린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의와 ㅎ님의 의는 원수지간이다. 사람의 의를 주장하는 육신의 생각은 ㅎ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하고 할 수도 없다. 자기 의가 있는 자는 죽었다 깨도 IX를 믿지 못한다는 말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생명을 주기 위해서였다. 누가 예수의 생명을 얻는 자일까요? 자신에게 생명이 없음을 알고 있는 자이다. 이들이 예수님이 아는 자들이다.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아는 것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마7:21~ 주여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나이다. 그런데 예수는 -난 너를 모르는데..). 이처럼 예수가 나를 알고 있는 가가 중요하다.
예수님이 아는 자의 특징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깨닫고 애통해 하는 자다. 이게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이다. 산상수훈에서처럼 예수님 하시는 일은 말씀의 빛으로 비춰 어둠의 실상을 폭로하는 일이다. 그래서 산상수훈 설교가 마5장~7장까지 끝나니까 자신이 문둥병자로 드러난다. 영원한 죄의 형벌로 지옥가야 마땅한 자를 문둥병자로 비유하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죄인인 걸 알 때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엎드리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성령의 임하심으로 되는 일이다. 행9장을 보면, 자기 의로 똘똘 뭉쳐 살았던 바울에게 IX가 빛으로 나타나 눈의 비늘을 벗겨주신다. 그동안 바울은 자칭 빛이라고 자부하며 어깨에 힘주고 살아왔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이 살아온 자기가 아니던가? 그런 자가 성령의 빛을 받아 눈의 비늘이 벗겨지니, 자신이 지옥 자식인 걸 발견한다. 의는 고사하고 똥 밖에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바울이 이때 얼마나 아팠을까요? 교회는 바울의 이 경험을 통과한 자들이다. 이 아픔을 통해 그리스도의 비밀을 보게 된 자이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아직도 어둠이 남아 있었다. 사역 초기에는 자신을 일컬어 ‘나도 사도야’라고 말했다. 사도란 예수를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은 12제자를 말하는데, 자신도 부활의 주님을 보았고 광야에서 3년 동안 성령님의 단독 과외를 받았으니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누구보다도 사도 맞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낮아지더니, 더 시간이 지나니까 더 낮아져서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작은 자라고 고개를 숙인다. 그러더니 순교를 앞두고 적은 딤전 1장에서는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딤전1:15~16> 읽고,
(바울은 긍휼로 구원 받는 자의 샘플(본)임- ㅎ님의 구원이 이런 거구나를 밝히는 본보기)
이게 IX의 빛을 제대로 받은 자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다. 진리의 참 빛이신 IX를 더 깊이 사귈수록 자신의 더럽고 추하고 가증한 것들이 고스란히 밝혀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빛 앞에서 자신의 실체가 발각된 자들이 복 있는 자들이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 문둥병자처럼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하고 주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주님의 긍휼을 바라는 자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5절처럼 은혜로운 말씀이 또 있을까? ‘미쁘다 이 말이여~예수께서 죄인을 구하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 아멘 할렐루야, 주님 감사합니다. 이런 구원을 베푸시는 ㅎ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주 예수를 찬양 합니다. 아멘~(기도하겠습니다.)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김기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