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02
베드로후서 1장 19절 [1장 1항]
성경으로 가는 길에 있어 성경 해석의 결과물인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되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은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을 통해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살피게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첫 번째 주제로 성경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성경이 모든 신학과 신앙 및 삶의 원리와 규범이라는 정신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1장 2항 참조).
R. C. 스프로울 교수의 경우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이 그들의 신앙 고백적 진술을 성경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하면서 두 가지 원리들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하나는 신적 계시에 대한 개념으로 기독교는 사변적인 철학에 기초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신 것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일종의 계시 종교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확립된 오직 성경의 원리입니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그것은 신학의 모든 문제들에서 그리고 신앙과 삶의 모든 논쟁들에서 궁극적인 권위는 교회의 결정이나 전통들이 아니라, 성경 자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1항은 성경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성(자연)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는 한, 사람들이 핑계할 수 없을지라도(롬2:14-15, 1:19-20, 시19:1-3, 롬1:32, 2:1) 그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고전1:21, 2:13-14). 그러므로 주님은 여러 때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교회에 그의 뜻을 선포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히1:1). 동일한 것을 그 후에 진리의 보다 나은 보존과 전파를 위해, 그리고 육체의 부패와 사단과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의 보다 확실한 설립과 위로를 위해 전적으로 기록에 맡기기를 기뻐하셨습니다(잠22:19-21, 눅1:3-4, 롬15:4, 마4:4,7,10, 사8:19-20). 그것이 성경으로 하여금 가장 필수적이 되게 하며(딤후3:15, 벧후1:19), 그의 뜻을 그의 백성에게 알리셨던 하나님의 이전 계시 방식들은 지금 중단되었습니다(히1:1-2).
조금 전에 신적 계시라는 말을 언급했지만, ‘계시’라는 말의 어원은 ‘나타남’ 또는 ‘드러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요 유한한 인간과 대조적으로 무한하신 분이라고 할 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셔야 합니다. 계시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시하지 않고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두 가지 방식으로 하셨습니다. 신학에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칭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안에서 일반계시에 대한 내용은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역사로 표현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일반적인 방식은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로마서 1장 19절과 20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말하면서(롬1:18),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 다시 말해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지만,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성의 빛입니다. 로마서 2장에서는 본성의 빛과 관련해 양심의 법을 말하기도 합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새기셨는가? 양심이라는 법을 새기셨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러한 양심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양심을 주시고 또 사람 안에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을 새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사람 안에는 종교의 씨앗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처음부터 세상의 어떤 지역, 어떤 도시, 심지어 어떤 집에도 종교가 없는 곳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어떤 암묵적인 고백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신성에 대한 의식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기독교강요, 1559, 1권 3장 1).
그럼 사람 안에만 새겨 놓으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습니다. 사람 안에만 새겨 놓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 밖에도 새겨놓으셨는데, 창조와 섭리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창조의 역사를 지켜본 사람은 없습니다. 창조가 6일 동안 이루어진 일이라고 할 때 사람은 맨 마지막 날, 마지막에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 말은 누구도 무에서 유로 창조되는 것을 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된 만물 자체가, 그리고 창조된 만물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다스려진다는 사실 자체가 결코 우연으로 돌릴 수 없는, 참 신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도록 하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창조와 섭리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증거 한다고 다음과 같이 알립니다. 시편 19편 1절에서 4절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존재를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본성의 빛, 다시 말해 사람 안에 있는 양심이나 종교의 씨앗과 같은 것, 그리고 사람 밖에서 확인할 수 있는 창조와 섭리의 모든 역사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여준다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이상 그리고 사람이 창조되고 섭리의 역사 가운데 살아가는 이상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 자체를 거부하면서 자신은 무신론자임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편 14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14:1)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은 분명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만큼 올바른 판단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 그들은 본성의 빛을 질식시켜 그들 자신을 마비시킨 것으로 설명합니다(기독교강요, 1559, 1권 4장 2). 어쨌든 올바른 판단에서 벗어난 사람들, 그들 스스로 본성의 빛을 질식시켜 버린 사람들은 양심 또한 올바른 판단에서 벗어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와 그분의 섭리 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스스로 부인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부인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기에 충분한가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타락한 인간은 로마서 1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짐으로 하나님 자리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물을 두는 어리석음까지 범하게 됩니다(롬1:21). 그래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롬1:22-23). 칼빈이 말한 것처럼 종교의 씨앗이 있지만, 그래서 종교 없는 곳이 없지만, 참된 종교가 아닌 거짓 종교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종교 자체가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는 증거와 같지만 일반계시만으로는 참된 종교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부분과 관련해 고린도전서 1장 21절과 2장 13절, 14절을 증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즉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일반계시만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전적인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가 함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따라 우리가 고백하는 바는 전적 타락이요, 전적 부패요, 전적 무능력입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 4항이 이 내용을 고백합니다. “이 원래의 부패로부터 모든 자범죄들이 나오는데, 그 부패에 의해 우리는 전적으로 모든 선을 싫어하고, 행할 수 없고, 대적하며, 그리고 모든 악을 향해 전적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입니다. 이 복음은 특별계시의 내용입니다.
다음으로 고린도전서 2장 13절, 14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여기서도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만 가능한가?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이 가르치는 것은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이 가르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만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특별계시입니다.
정리하자면 일반계시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는 것으로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기에는 불충분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하게 되었는가? 특별계시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그러므로 주님은 여러 때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교회에 그의 뜻을 선포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는 내용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장 1절과 2절을 증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말씀하신 모든 내용이 다 성경 기록으로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 부분, 여러 모양이라고 할 때 부분적으로 현현이나 꿈, 환상, 우림과 둠밈 등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계시하신 모든 내용을 다 기록의 형태로 있게 하신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의 형태로 남겨두시길 기뻐하셨는데, 신앙고백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첫째, 진리의 보다 나은 보존과 전파를 위해서입니다. 둘째, 육체의 부패와 사단과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의 보다 확실한 설립과 위로를 위해서입니다.
참고로 칼빈은 성경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기독교강요, 1559, 1권 6장 3). “참으로 만약 우리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허망하게 사악함에 빠져 하나님을 망각하게 되는지, 모든 종류의 오류에 이르는 경향이 얼마나 대단한지, 반복해서 새롭고 거짓된 종교들을 조작해 내는 정욕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망각 가운데 멸망하거나, 오류 가운데 소멸되거나, 사람들의 무모함으로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 이러한 하늘 교리의 인침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감지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망각으로 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인간의 오류로 소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인간의 방자한 행동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특별계시인데, 이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가 보존되며 하나님의 진리가 전파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타락했기에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리석게도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버렸던 것입니다(롬1:22-23). 그런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보존하고 진리 자체를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부패만이 아니라 사단과 세상의 악은 이런 진리를 본성적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 속에는 진리 자체가 없습니다(요8:44). 그래서 늘 진리를 대항합니다. 또한 진리를 왜곡시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던 것이 사단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이런 일이 있는데, 기록되지 않았다면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진리의 보다 나은 보존과 전파를 위해서, 또한 육체의 부패와 사단과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의 보다 확실한 설립과 위로를 위해서 계시하신 바를 전적으로 기록의 형태로 남겨 두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때 신앙고백은 그의 교회에 그의 뜻을 선포하기를 기뻐하셨다고 하면서 ‘동일한 것을’ 그 후에 전적으로 기록에 맡기기를 기뻐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기록되지 않은 계시와 기록된 계시가 다를 수 없습니다. 모든 계시가 다 기록의 형태로 남은 것은 아니지만, 기록으로 남겨둔 계시가 기록하지 않는 계시와 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록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록하지 않은 것과 기록으로 남겨두신 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만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충분하다고 여기시는 만큼 계시하여 기록으로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왜 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는가? 신앙고백이 표현하는 것처럼 성경으로 하여금 가장 필수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반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요, 진리의 보다 나은 보존과 전파를 위해, 그리고 육체의 부패와 사단과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의 보다 확실한 설립과 위로를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잠시 조금 전에 언급한 히브리서 1장 1절과 2절을 다시 살펴보고자 하는데, 1절은 구약 성경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는데, 여러 부분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 기록하여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자체만 보더라도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에녹에게도 계시하셨고, 노아에게도 계시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도 계시하셨습니다. 한번에 모든 내용을 다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또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현현의 방식, 꿈과 환상, 우림과 둠밈, 천사를 통하여, 들리는 음성을 통해서도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다 2절의 증거처럼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은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인데, 기록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시지 않고 에베소서 2장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습니다(엡2:20). 지난주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고 할 때 비상직분에 속하는 자들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교회의 기초직원으로 기독교회의 기초가 성립될 때에만 이런 기초 직원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비상직분에 속하는 자들은 한시적으로만 주어진 직분이고, 계승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시는 계시도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의 완성과 함께 계시의 종결도 말합니다. 소위 오늘날에도 직통계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은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계시의 마지막임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구약에서부터 모형과 예표로 주어졌던 것들이 아들을 통해 완성되어 더욱 분명한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분명한 빛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롭게 뭔가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 1장 19절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여기서 더 확실한 예언은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특별계시인 이 성경을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합니다. 이것과 무엇을 비교하는가? 16절 이하 18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그러니까 사도 베드로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의 강림하심에 대하여 증거 합니다. 이것은 결코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벧후1:16).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로부터의 소리도 들었다고 합니다(벧후1:17-18). 이것은 복음서를 통해 기록할 정도의 사실입니다. 성경이 기록할 정도의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경험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더 확실하다고 말하느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 더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경험은 성경이 기록할 정도의 사실이지만, 그런 경험보다 더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부자와 거짓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분명하게 가르치는데, 누가복음 16장 3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내용인즉슨 죽은 부자가 자신의 형제들을 생각하여 죽은 나사로를 살려 보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 복음을 증거 하면 반드시 믿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이 누가복음 16장 31절 말씀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 살아 있는 자들이 구약 성경을 증거 할 때 그것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할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그런 기적의 역사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보다 더 확실한 예언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장 2항에서 66권으로 된 모든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라고 고백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신앙과 순종의 유일한 규범’이라고까지 말합니다(3문). 소요리문답도 마찬가지입니다. 1문에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이어 2문에서는 1문의 답을 받아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는지, 이것을 우리에게 지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규범을 주셨는지 묻는데, 유일한 규범이 신구약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답합니다. 유일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앙과 삶, 신앙과 순종에 대하여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오직 성경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경 외에 계시가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성경을 신앙의 삶, 신앙과 순종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계시의 완성도 말할 수 없고, 당연히 계시의 종결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난 뒤 더 이상 새로운 계시는 없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항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뜻을 그의 백성에게 알리셨던 하나님의 이전 계시 방식들은 지금 중단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중단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및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위해서는 반드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총대로 참석한 윌리엄 가우지(William Gouge; 1575년-1653년)는 오늘날 성령의 무슨 새로운 조명이나 즉각적인 영감을 받는 것처럼 행세하는 자들은 그냥 가식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믿음의 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입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새로운 조명, 새로운 계시, 그리고 즉각적인 영감을 받는 일 자체가 오늘날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전체 내용을 정리하겠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은 성경에 대한 고백이고, 1항은 성경의 필요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사람 안으로는 본성의 빛을 통해, 그리고 사람 밖으로는 창조된 만물과 모든 만물에 대한 섭리의 일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일반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모른다는 핑계를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일반계시의 충분성은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다,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는 데는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구원에 필수적인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또 다른 계시가 필요한데, 그것이 특별계시입니다.
이 특별계시는 기록을 필요로 하는데, 진리의 보다 나은 전파를 위해서, 그리고 육체의 부패와 사단과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의 보다 확실한 설립과 위로를 위해서입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망각으로 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오류로 소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방자한 행동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바로 성경입니다.
특별계시인 이 성경은 계속해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이후로는 더 이상의 계시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기록하게 하신 것이 사도와 같은 비상직분에 속하는 자들인데, 2항에서 언급하지만 요한계시록까지가 성경으로 있습니다. 그 말은 특별계시의 종결이 있다는 것이고, 특별계시가 종결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기록될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완전성도 말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으로 성경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그리고 구원의 필수적인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위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인 이 성경만을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시편 19편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19:7-8) 이것이 성경의 유익이기에 우리는 오직 성경만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