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는 통영 나들이
-통영 골목길 소풍
송언수
날씨가 화창한 가을 초입이다. 책갈피언들이 일요일 아침잠을 마다하고 통영 나들이를 가자 한다. 중앙동 ‘청마우체국’에서 모였다. 청마우체국이 어딘지 몰라서 검색해서 찾아왔다는 J에게 청마 선생의 친일 논란으로 개명을 반대한 소수가 있어서 그냥 중앙우체국으로 남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손 편지를 썼던 그때 우리는, 편지를 쓸 때면 청마 선생이나 김춘수 선생의, 그 당시 한없이 ‘달달구리’했던 시를 옮겨 적으며 가슴 가득 낭만을 채웠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는 그런 달달한 말들을 편지지에 옮겨 적으며 흐뭇했던 기억. 처음 통영을 돌아보며 골목 곳곳에서 그 시인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청마는 세병관이 학교였던 시절 그 학교를 다녔고 교정에서 본 어린 여학생을 마음에 품었다. 일본 유학시절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키웠고, 귀국하고는 결혼했다. 그의 시적 감성은 그가 품은‘사랑’이라는 감정의 보따리가 많아질수록 더욱 풍성해졌다. 과묵해서 말수는 적었으나, 그의 시적 감성은 여인들의 마음에 걸린 빗장을 푸는데 손색이 없었나보다.
그에게서 가장 많은 편지를 받았던 정운 선생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청마 선생이 돌아가신 후 쏟아질 염문이 두려웠다. 서둘러 그동안 받았던 청마의 편지를 엮어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을 냈다. 절절한 구애의 내용도 있으나 다수는 간단히 적은 그의 일상이었다. 일상을 나누는 것 또한 연인들의 일상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뒤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삼도수군통제영의 성곽 위로 난 골목이다. 오늘은 통영의 골목길을 걸어볼 참이다. 서피랑으로 오르는 중앙동 뒷골목은 일제강점기 때 기관장들 사택이 많았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차가 많은 시절이 아니었다. 그때는 집에서 내다볼 때 풍광이 좋은 집이 우선이었단다. 서피랑 이쪽 언덕에선 강구와 그들의 사업체가 있던 항남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당이 잘 가꿔진 양옥집들. 처마처럼 끝을 올린 축대는 일제의 건축기법이다.
가을 햇살은 뜨거웠으나, 바람이 선선해서 걷기에 참 좋았다. 만하정 자리를 지나 서포루로 오르는 계단에는 뱀이 기어가고 있었다. 아직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라서 참 다행이다. 서포루 아래쪽에‘돌아와요 충무항에’가사비가 서있다. 해방다리 옆에 살았던 통영의 가수가 불렀던 이 노래는 그의 사후 조용필 가수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꿔 부르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조선시대 둑사가 있던 뚝지먼당은 백호정이라는 활터가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 공원으로, 공설운동장으로 사용했다. 제주도의 이중섭미술관에 걸려 있는 ‘남망산 가는 길’ 그림을 그린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일본인 기관장들의 사택에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해 배수지를 지었고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통영문화원 김일용 원장의 연구로 2019년에 둑제를 복원한 후에는 시에서 둑사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포루에서는 저 뒤쪽 명정고개와 북포루를 지나 동피랑에서 통영항까지 360도 조망이 가능하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더듬으며 통영성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눈으로 살펴보았다. 통영성 길을 함께 걸었던 P는 서문에서 북포루로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는 걸 알고 있다. 서포루 앞에 고지도가 있기는 하였으나, 무슨 일인지 표지판이 쓰러져 있어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P는 통영 토박이다. 어릴 적 통영의 모습을 기억하는 그녀의 추임새는 문화원 향토사 강좌에서 배운 것들을 책갈피언에게 전하는 내 설명에 간간이 섞여 이해를 도왔다. 명정고개와 충렬초등학교 뒤쪽이 공동묘지였다. 통영의 곳곳이 시대를 달리하며 이야기에 섞여간다. 임란 이전에는 그저 고성현에 속한 작은 어촌에 불과한 이곳이 임란 이후 삼도수군통제영이 생기면서 통영이 되었고, 300년의 통제영 시절을 지나 일제강점기로 해방 이후로 또다시 현대로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켜켜이 쌓인다.
교통이 불편해 고을 간의 이동이 그리 많지 않았던 조선시대다. 고성현의 작은 어촌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박경리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두루미 목처럼 가는’ 아주 좁은 길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작은 목이 끊어졌더라면 통영은 섬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길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배로 우륵개까지 와서 명정고개를 넘어야 했다. 명정고개에 벅수 한 쌍이 있는 이유다.
서피랑 아래쪽 절개지에 있던 집들을 다 헐고 복토작업을 하고 있었다. 경사지 위험지역에 해당하여 집을 헐고 공원화하는 중인가 보다. 봄이면 매화꽃이 흐드러지고 가을이며 대추가 주렁주렁 달렸던 그 집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대추나무 혼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옛날 서문고개를 넘어 명정동으로, 도천동으로 가는 골목 갈림길에 서서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명정동으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 골목엔 김극천 주석장의 장석집과 하동집이 있다. 소목에 장석은 필수다. 나무가 틀어지는 것을 막는 용도였으나, 솜씨 좋은 장인들은 장석을 그대로 붙이지 않고 모양을 내어 소목의 멋을 살렸다. 예전 다른 지역의 어느 식당 입구에서 본 반닫이에는 네모반듯한 장석이 달려 있었다. 늘 통영의 장석을 단 소목만 보다가 그걸 보며 놀랐던 기억이 났다. 명품의 차이는 작고 사소한 데서 드러난다.
공덕귀 여사 생가와 박경리 선생이 사시던 집까지 살폈다. 아침 일찍 만나 식사도 거르고 길을 걸었던 탓에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마침 ‘충렬도나스’ 집이 가까이 있다. 충렬초등학교를 다녔던 P의 기억으로 학교 앞 문방구도 그때 그대로, 도나스 집도 그때 그대로라고 한다.
영어로 도넛인 이 도나스는 도넛일 때보다 도나스로 부를 때 더 맛있다.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불러야 할 때가 있었다. 짜장면이 옳은 표현이 아니라며 자장면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주장에 한동안 자장면이 되었던 짜장면은 짜장면이라 불러야 진정한 짜장면 같았기에 사람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자장면과 짜장면 둘 다 표준어로 사용한다.
충렬도나스 집의 명물은 단연 고로케다. 크로켓의 일본식 발음인 고로케 역시 크로켓 보다는 고로케라 해야 고로케의 맛이 난다. 달걀과 채소로 속을 만들고 밀가루 반죽에 넣어 빵가루를 묻혀 튀겨낸 고로케를 먹고 싶었던 지난 겨울, 시내 프렌차이즈 빵집에서 사먹고는 실망이 컸다. 역시 고로케는 충렬도나스 집에서 사야 한다. 속이 꽉 찬 맛있는 고로케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이 더울 때는 속이 쉽게 상한다며 겨울에만 고로케를 만드는 집이다.
도나스를 잔뜩 사 들고 서피랑의 카페로 갔다. 친절한 카페 사장 덕에 맛난 커피와 함께 도나스를 먹으며 쉴 수 있었다. 주문한 커피 외에 얼려 두었던 생과일주스를 서비스로 주었다. 이렇게 친절한 그가 우리에게 묻는다. 어느 지역에서 오셨어요? 우리 통영 사람들인데요 했더니, “통영사람들이 아침부터 이렇게 몰려다니기 쉽지 않은데요”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관광객이 되기로 했다.
카페를 나와 옛길을 따라 도천동으로 간다. ‘서더레’ , ‘동더레’를 이어주던 다리가 있던 곳에서 복개한 가죽고랑을 따라 내려가서 해방다리를 지나 도천동 안쪽 골목을 훑고 해저터널을 지났다. 처음 해저터널을 찾은 관광객들이 아쿠아리움을 상상하고 들어섰다가 실망한다는 얘기를 나누었다. P의 설명에 의하면 외지에 나간 통영 남자들이 ‘뻥’을 심하게 쳐서 그렇단다. 대학 오리엔테이션 때, 우리도 출신 고등학교 이름 앞에 모두 대(大)자를 붙였었다. 통영고등학교에 대자를 붙이면 대통영, 대통령이 된다는. 그렇게 허풍을 떨며 통영 소개를 하다 보니 해저터널이라는 곳에 가면 바다의 상어며 물고기들이 떼 지어 다니는 걸 볼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해저터널로 버스가 지나다녔다는 사실을 못 믿는 책갈피언들에게 산 역사의 증인 P가 있어 다행이다. 버스가 어떻게 다니냐며 일방통행이었냐고 묻는다. 지금은 터널 양쪽으로 턱이 있는데, 당시엔 그게 없었다. 당시의 버스는 지금처럼 대형 사이즈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은 뭐든 크지만, 조선시대에는, 아니 근대까지 방도 집도 차도 참 작았지 않은가.
봉수골로 오른다. 해평열녀비가 있는 비석군과 인간문화재 장인들의 비석군까지 돌아보고 골목길을 지나 봄날의 책방에 갔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어서 우리도 점심을 먹기로 했다. 늘 사람들로 붐비는 텐동집에 오늘은 손님이 적다. 오전에 도나스를 먹었는데, 또 다시 튀김덮밥이라니. 그러면서도 마침 뒤늦게 합류한 L과 함께 온천 달걀 터뜨린 간장밥에 튀김을 곁들여 한 그릇씩 뚝딱 비우고 봄날의 책방에 들어섰다.
통영에 자리 잡은 출판사가 운영하는 작은 서점엔 시중 책방에서 잘 볼 수 없는 좋은 책들로 가득하다. 선택지가 많지 않아서 책을 고르는 수고가 덜한 장점을 가진 특색 있는 동네 책방이다. 아기자기한 책방을 둘러 보다 통영을 스케치한 색칠 북을 골라 나누었다. <오늘도 바다로 그림 산책을 갑니다> 라는 색칠 북에는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과 우리가 색칠할 수 있도록 색깔 없는 그림을 번갈아 두었다. 십인십색이라 하였으니 우리도 각자만의 색으로 칠하기로 하였다.
일요일에 가족을 집에 두고 나온 엄마이자 아내인 그들은 오늘 아침부터 온전히 ‘나’로서 시간을 보냈다. 조금 더 그런 시간을 갖고 싶었나보다. 의기투합하며 L의 차로 카페에 가기로 했다. 미수동의 카페에 가자 했다가 운행 중에 당동에 있는 다른 카페를 들먹인다. “그럼 거기로 가자” 했는데, 잠시 후 또 다른 카페가 생각났나보다. 인평동의 거기로 가자 해서 다시 차선을 바꾸었다. 조금 전까지 ‘걸어서 참 좋다’던 이들이, 이번엔 “차가 있어서 참 좋다” 한다. 걷는 것도 좋고 차 타는 것도 좋고, 그저 함께인 것도 좋은 이들이다.
갤러리 카페인 그곳은 화가의 감각이 더해져 분위기가 좋았고, 주문한 음료의 세팅이 훌륭했으며 맛이 좋았다. L이 준비한 이번 주 숙제 글을 나누었다. 코로나로 모이는 횟수가 예전만 못해지고, 그렇게 동기부여가 느슨해지면서 숙제하는 횟수도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책을 읽고 싶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이 책갈피언들을 붙잡고 있다. 그래서 더 고마운 이들이고, 그래서 더 고마운 하루였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