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문화사(2)-여의도(汝矣島)
서울의 중심을 가로질러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는 한강에는 여러 개의 섬이 있었다. 여의도, 노들섬, 밤섬, 뚝섬, 저자도(楮子島), 잠실도, 선유도, 무동도(舞童島) 등이 그것인데, 저자도, 무동도 등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한강 가운데에 있는 섬(河中島)이면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속해 있는 여의도는 대한민국 정치, 금융의 중심지로 평가받는 곳이다. 서쪽 끝에는 국회의사당이 있으며, 동쪽 끝에는 63빌딩이 있고, 가운데에는 서울국제금융센터(IFC), LG트윈타워, 전경련회관, 파크원 타워, 증권거래소 등 주요 기관과 기업의 사옥들이 즐비하다. 그야말로 여의도는 대한민국 수도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곳이 원래부터 이처럼 중요시되었던 곳은 아니었다.
여의도는 조선이 세워지면서부터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제사에 쓸 희생물을 공급하기 위해 돼지와 양 등의 가축을 기르는 장소로 지정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 소속되어 음식을 만들거나 가축을 기르는 일을 했던 노비(典僕)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동물들을 길렀는데, 그들의 생활이 매우 문란하여 명종 때부터는 남자만 이곳에 머물면서 일을 하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여의도, 잉화도(仍火島), 나의주(羅衣洲)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조선 초기인 1530년 국가에서 편찬한 공식적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여의도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잉화도라는 지명은 세종 때부터 나오고 있으나 명종 이후에는 공식적인 사료에서 사라졌고 개인의 기록에만 나타나고 있다. 나의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에만 등장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최종적으로는 여의도가 공식적인 지명으로 되면서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한강에 홍수가 나면 여의도가 물에 잠기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사람이 고정적으로 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이 세워진 때로부터 왕실의 목축장으로 지정하여 세종 때까지만 해도 전생서(典牲署)와 사축서(司畜署)의 관원을 보내 관리하도록 하면서 제사나 연회에 쓸 염소, 양, 돼지, 닭, 오리 등의 가축을 기르도록 했다. 그 관아에 딸린 노비들이 동물을 관리하기 위해 여의도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사람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 벌거벗고 다니는가 하면 친척끼리도 혼인하면서 아주 문란하게 생활하므로 문제가 심각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명종 11년인 1556년에는 섬의 집을 모두 철거하고 이들을 이주시킨 후에 죄를 물어 벌하도록 하고, 가축을 기르는 일은 남자만이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다고 한다. 이런 여러 기록으로 볼 때 여의도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어려웠던 공간으로 동물이나 기르던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자표기로만 보았을 때는 여의도의 뜻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한자의 뜻풀이만으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었다’, ‘-리라’, ‘-뿐이다’ 등의 뜻을 가지면서 어조사로 쓰이는 글자인 ‘矣(어조사 의)’가 중간에 들어가 있어서 더욱 그렇다. 여의도라는 지명의 참뜻과 어원은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민족 대백과사전에서 여의도 명칭의 유래를 찾아보면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은 홍수로 섬이 잠길 때도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서 ‘나의 섬’, ‘너의 섬’하고 말장난처럼 부르던 것이 한자화되면서 이런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국책사업으로 국가 기관에서 만든 백과사전에 이처럼 민간에서 누가 한 말인지도 모르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증거 자료로 남기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민간에서 어떤 호사가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한 것을 공식 기록으로 남기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한자의 뜻만으로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은 이두식 표기임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이두는 고구려에서 만들어져 신라에서 완성된 것으로 한자의 뜻(訓)과 소리(音)를 가져와서 우리말을 발음에 가장 가깝도록 표기하는 방식이다. 우리말은 명사+조사, 어간+어미의 두 가지 결합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명사와 어간에 해당하는 것은 한자의 뜻을 가져오고 조사와 어미에 해당하는 부분은 소리를 가져와서 하는 표기 방식이 바로 향찰이다. 향가가 대표적인 향찰 표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보다 더 풍부한 것은 땅이름(地名)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의 수많은 땅이름 중 향찰로 되어 있는 것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여의도라는 지명도 이 중의 하나다.
여의도의 우리말 표기는 ‘너ᄫᅴ섬’이다. 지금의 말로 하면 ‘넓은 섬’ 정도가 된다. 한강에는 여러 개의 섬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크고 넓은 섬이 바로 여의도여서 이런 뜻을 가진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보면 된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그림을 보면 잠실도(蠶室島)가 매우 큰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래도 여의도만큼은 되지 못했고, 지금도 한강에서 이보다 더 큰 섬은 없다. ‘넓다’는 ‘너ᄫᅳ다’에서 ‘넙으다’로 되었다가 다시 ‘넙다’로 변했다가 지금의 ‘넓다’로 되었다.
한글에서 ‘ㅸ(순경음 비읍)’은 결속력이 약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분리되거나 구성 요소의 일부가 생략될 가능성이 있는 자음이다. ‘ㅂ’이 ‘ㅇ’에서 분리되어 앞의 글자로 붙으면서 ‘넙으다’로 되었다고 보면 된다. ‘‘너ᄫᅴ’에서 어간은 ‘너’가 되는데, 이것이 향찰로 표기할 때는 ‘汝(너 여)’로 되었다. 즉, ‘汝’는 어간인 ‘너’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뜻을 취해서 이렇게 표기했다. ‘너ᄫᅴ’에서 어미에 해당하는 것이 ‘ᄫᅴ’인데, ‘ㅂ’이 생략되거나 앞으로 붙으면서 사라지고 ‘의’만 남게 된다. 이것은 어미이기 때문에 향찰로 표기할 때는 소리를 취해야 하므로 ‘矣(어조사 의)’로 되어 ‘의’로 발음 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글자인 ‘島’는 명사이기 때문에 ‘섬’이라는 우리말을 그대로 살려 한자의 뜻을 취해서 표기했다.
잉화도(仍火島 내화도)도 여의도와 마찬가지로 넓은 섬이라는 뜻의 이두 표기다. 우리말에서 仍은 인하다, 따르다, 기대다, 자주 등의 뜻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乃(이에 내)와 통해서 썼던 글자이기도 하다. 乃는 주로 대명사 역할을 하는 글자인데, 당신, 너, 그대 등을 나타내는 데에 쓰인다. 그러므로 ‘仍’은 ‘乃’와 같은 용법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고, 汝와 같이 뜻을 취해와서 ‘너’가 된다. 중세 우리말에서 火(불 화)는 ‘ᄫᅳᆯ’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ㅸ’에서 ‘ㅇ’이 탈락하면서 ‘블’로 되었다가 ‘븐’으로 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잉화도는 ‘너블섬’, 혹은 ‘너븐섬’이 된다. ‘너ᄫᅴ섬’과 같은 말이다.
‘너ᄫᅴ섬’, 혹은 넓은 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섬을 이두의 방법으로 표기하면서 汝矣島, 혹은 仍火島로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 섬은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차오르고 인천 앞의 바닷물이 역류하면 잠기는 일이 빈번하였다. 물이 들어왔다 나간 뒤에는 모래가 쌓이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여의도는 모래땅으로 되었다. 물이 빠진 모래땅은 매우 단단하므로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이곳에 비행장을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1968년도에 발표된 ‘마포종점’이란 노래 가사에 ‘여의도 비행장에 불빛만 쓸쓸한데’라는 표현이 이런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한강을 정비하면서 행주산성 아래쪽에 행주 수중보를 만들어서 바닷물이 역류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홍수 때도 물에 잠기는 일이 사라졌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에는 선유봉(선유도)의 돌을 캐서 윤중로 둑을 만들기도 했는데, 한강의 수로 정비 등 이런저런 일로 인해 여의도는 홍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여의도는 완성되었는데, 여기에 화려함과 복잡함이 더해져 서울에서 매우 혼란스러운 지역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