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으로 69세 되던 해를 막 넘기려는 겨울 어느 날(1996년 1월 17일).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뇌졸중이라는 병을 얻어 쓰러졌다. 대번에 말이 막히고 오른쪽 반신이 마비가 되었다. 그 와중에 제일 먼저 내 머리를 스친 것은 “이제 모든 것이 끝이 났구나. 시간이 정지하고 말았다”는 느낌이었다. 순간 지난 날 수많은 일들이 생생하게 겹쳐 지나갔다. 나는 새까맣게 굳은 오른손을 왼손으로 움켜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만일 주님의 은혜로 내가 기적과 같이 회생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의 오른손이 붓을 다시 들게 된다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동안 주님께 받은 은혜를 회고하는 글을 남기리라 다짐했다. 나의 삶과 한국 침례교회의 역사를 나의 자녀들과 손자들, 그리고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발자취를 남기고 싶었다. 이것이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다.
아직 정신이 맑고 기억력이 있을 때, 내가 보고 듣고 행동했던 것들을 조금도 가감 없이 기록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시켜주신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한다. 간절히 소망하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셨다. 이제 나의 삶을 한국 침례교의 역사 속에서 마무리하는 마음으로 붓을 든다.
우리는 전쟁 중에 태어나 자랐고, 지금도 소리 없는 숱한 전쟁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1910년 한일합방 이래 일본의 수탈과 학대 속에서 35년을 견디어 왔다. 국토도 빼앗기고 언어와 성씨까지 몰수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을 이 땅에서 가장 비참한 백성으로 만들었고,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 뒤, 우리는 계속되는 혼탁한 정치와 사회 혼란 속에서 이승만 정권의 붕괴, 5ㆍ16 군사쿠데타,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 전직 두 대통령의 수감 등을 경험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렵고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실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한국 침례교회도 일본의 교회말살정책과 공산당의 교회박멸에 혹독한 박해를 받아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으로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말씀대로, 우리 한국 침례교회는 견디기 어려운 박해가 올 때마다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며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
이런 사실들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기쁘고 감회가 벅찬 일이다. 이 일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한없는 기쁨과 자부심이 일어나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우리의 신앙유산에 대한 긍지가 싹터온다. 때로 우리가 걸어온 길은 정도에서 빗나가는 듯 보일 때도 있었고, 그로 인해 서로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우리의 신념은 그 길이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하신 길이었다는 믿음이다.
이 모든 일들을 통해 깨달은 것은 “주님의 길을 가는 데 지름길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지름길이 없기에 그 길은 더욱 힘들고 지루해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가야 할 그 길이기에 우리는 인내하며 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간다면, 무엇을 더 망설이고 두려워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