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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왜 성령의 권능은 나와는 무관할까?>의 줄거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너무 유명한 구절이지만 이제 더는 나 자신과는 실제로 별 관계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임하심도 권능을 받음도 증인 됨도 모든 성도, 모든 교인, 모든 선민에게 일어나야 할 필수적인 일인데 말입니다.
왜 성령의 권능은 나와는 무관할까?
(사도행전 1장 6절~8절)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왜 성령의 권능은 나와는 무관할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왜 성령의 권능은 나와는 무관할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고, 남편이거나 아내이고, 부모이거나 자녀이고,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어진 신분에 상관없이 성령이 임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권능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는 권능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성령이 임하심으로 주어지는 권능을 삶에서 확인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2장 8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 또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령의 권능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본문 6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는 때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때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고 다윗 왕국의 재현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이 제자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충격적 사건이 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제자들은 이 사건들의 의미를 아직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놀라운 사건이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직 세상과 분리되어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있었기에 이러한 질문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7절을 보면 ‘때와 시기’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같은 말을 반복하신 것처럼 여겨집니다. 다만 원문을 보면 “때”로 번역된 크로노스(χρόνους)는 하나님의 계획표 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정해진 시점을 의미하고, “시기”로 번역된 카이로스(καιροὺς)는 내게 그 사건이 일어나는 상황의 때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계획표 상에서 있었던 사건이 내게 일어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크로노스는 객관적 시간개념이고 카이로스는 주관적 시간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7절의 의미를 풀어보자면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을 대표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획표 상에서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 나에게 일어나도록 하시는 그 상황이 되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즉 세상일에 대해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접할 때 내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기준에 놓는다면 말씀의 의미는 상실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준에 놓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라를 회복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세상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언제 어떻게 들어가 있는지 또 그 일이 나에게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8절에서 오직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일로써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증인이 된다는 부분을 다루기에 앞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라는 말씀에 집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된다는 말씀은 모두 부활의 자리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단어들입니다. 이 단어 하나하나를 반복하여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늘은 먼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고, 다음 시간에 이어서 증인이 된다는 내용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정리하고 권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그리스도 연쇄사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겪으신 일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연쇄사건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임하시면 연쇄적으로 단계가 구분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를 성령의 연쇄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연쇄사역의 첫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 연쇄사건과 나의 마음이 연합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제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연쇄사건과 마음이 따로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버림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이 아직 예수님만의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일생일대의 충격적 사건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음이 예수님과 분리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과 분리된 제자들의 마음을 연합시켜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내 죽음으로 믿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연쇄사역의 두 번째 단계는 마음이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과 내 마음이 연합하여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예수님과 연합한 마음은 예수님이 향하신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 안으로 끌어들이신 분도 성령님이시고, 예수님 안에 들어온 마음이 하늘을 향하도록 인격의 변화를 일으키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의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있음의 느낌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일 때에 마치 발이 닿지 않는 심연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과 같은 불안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다른 대상의 있음을 느끼고자 합니다. 또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채워지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좋음의 확신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에 의해 소원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죄가 아닌 마음의 욕구자체이고 기본적 속성이 발현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를 통해 세상을 접하며 살아가기에 마음은 기본적으로 육체와 붙어있게 되었습니다. 육체를 통해 만나는 세상의 대상들에게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을 갖고 소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육체 대신 나의 마음과 성령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령이 보고 듣고 느끼시는 대상에 대해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을 갖게 됩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구절로 기도가 시작됩니다. 이는 곧 “오직 아버지만을 소원하게 해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렇게 아버지만을 소원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성령의 두 번째 사역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마음과 육체가 붙어있어서 육체를 통해 접하는 세상 것들에 대해 반응하던 마음이 변화됩니다. 육체 대신에 성령과 붙어서 성령을 통해 접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반응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고 소원하는 상태가 됩니다.
성령의 연쇄사역의 세 번째 단계는 성령이 나를 대신하여 세상을 살아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과 연합할 때에는 온전히 하늘을 향하기 때문에 더는 세상을 향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좋음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소원을 가질 수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령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나의 마음이 되어주십니다. 나의 마음은 하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살기 위해 필요한 마음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이 나의 지정의와 언행을 움직이시는 마음자리를 대신하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보면 성령의 열매가 언급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인격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나에게서 온유함과 절제가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나의 인격을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이 세상이 아닌 하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을 대신하여 살아가시는 결과로 온유함이나 절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러한 성령의 연쇄사역의 내용을 살펴보았고 오늘 다시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연쇄사역을 통해서 권능이 주어집니다. 권능에는 인격적 권능과 기능적 권능의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인격적 권능이란 내가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기능적 권능이란 기적과 이사 혹은 특정한 사역이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연쇄사역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연쇄사역을 따라서 권능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권능은 인격적인 권능과 기능적 권능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 예수님의 인격적 권능입니다. 그리고 이 권능이 성령의 연쇄사역의 과정을 통하여 내게도 주어지게 됩니다. 한편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기능적 권능을 보여주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성령의 연쇄사역의 과정을 통하여 내게도 주어지게 됩니다.
이 두 가지 권능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인격적 권능에 대해 살펴봅니다. 그동안 우리가 권능이라는 단어에서 연상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기능적 권능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것을 권능이라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을 예로 들자면 병을 고친 적도 없었고 기적을 행한 적도 없었습니다. 어려운 과제나 일을 잘 수행했다는 뚜렷한 기록도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말씀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스데반 집사님은 권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스데반 집사님처럼 성령을 받았다는 표현이 강렬하게 묘사된 부분은 예수님 외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령 충만을 통하여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하였으니 성령을 가장 강력하게 받고 성령 충만이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진 상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능적 권능만을 염두에 둔다면 스데반 집사님이 받은 권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를 전하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님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가 많은 기적을 일으켰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권능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으로부터 권능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는 인격적 권능에 대해 무지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여 소원이 발생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속성은 그럴 수밖에 없는 성질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세상을 이기는 인격적 권능을 받게 되면 마음의 속성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 것들이 마음에 다가와서 스며들지 못하게 합니다. 마음이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자 하지 않고 좋음을 확신하고자 하지 않기에 세상에 대한 소원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데도 세상을 소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세상을 이겼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 권능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세상이라는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방수 처리한 것과 같은 상태를 떠오르게 합니다.
영화에 나오는 슈퍼맨을 보면 달려오는 트럭을 한 손으로 세우고 빙빙 돌리다가 던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을 이기는 권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세상을 이기는 권능이란 마음에서 나타납니다. 세상은 마음을 향해 강렬하게 쇄도해 들어옵니다. 이때 나타나는 권능이란 쇄도해 들어오는 세상에 마음이 밀리거나 삼켜지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멈춰 세우고 집어던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몸에 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마음에는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옵니다. 암이 트럭처럼 달려와서 마음에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그 쇄도해 들어오는 암이라는 사건이 멈춰지고 던져집니다. 돈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슈퍼맨이 적들을 내팽개치듯이 성령의 권능은 내 마음에 쇄도해 들어오는 돈 문제를 내팽개치십니다.
이것이 인격적 권능입니다. 마치 마음이 방수처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마음까지 스며들어오지 못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에 대한 인식 또한 달라집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는 슈퍼맨이 지구를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몸은 지구에 살면서 지구를 접촉하는 접촉점입니다. 몸이 죽는다는 것은 지구를 잃는 것이고, 인간세상 전체를 잃는 것입니다. 인간세상 전체를 잃는 그 순간에도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에서는 세상에 대한 있음의 느낌이 조금도 다가오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인격적 권능이 있어야 기능적 권능 또한 주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풍노도 속에서 깊은 잠을 주무셨고 일어나신 후에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성령의 인격적 권능과 기능적 권능이 모두 잘 드러납니다. 광풍노도 속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을 이기는 인격적 권능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예수님의 마음에 파고 들어올 수 없는 평온과 평화를 유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광풍노도에 명령하셔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신 일은 기능적 권능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인격적 권능을 전제로 해서 기능적 권능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능적 권능이란 우리가 아는 사전적 권능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권능(權能)이란 권세와 능력이 합쳐진 말입니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조직에 특수부대 출신의 행동대원이 있습니다. 이 대원은 능력이 뛰어나기에 시키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원이 무엇을 할지 말지는 보스가 결정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직장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직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직원이 하는 일을 결정하는 사람은 고용주입니다. 권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권능이 권세와 능력이 합쳐진 말인 것처럼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세 즉 결재권이 반드시 우선됩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권능을 마치 물건 취급했습니다. 일단 받으면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기능적 권능이란 결코 그렇게 행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 사용의 결재가 내 안에서 이루어질 뿐입니다. 결코 내가 임의로 판단하여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을 접하든 내 마음에 계신 하나님께서 능력의 결재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에 어떠한 능력이든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능적 권능을 받은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께 아버지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을 무한하게 보내주셨고, 성령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예수님에게 그대로 이식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에서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앞서 성령의 연쇄사역의 세 단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의 연쇄사건과 나의 마음이 연합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성령이 나를 대신하여 세상을 살아가시게 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 사역과 두 번째 사역이 성령의 인격적 권능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고, 세 번째 사역이 기능적 권능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몰입될 때에 세상에 나눠줄 마음은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령께서 육체로 접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기능적 권능을 행사하십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복사판이신 성령님께서 아버지의 전능하신 능력이 발산될 수 있도록 결재를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하나님이 삶의 현장에서 내 안에 계시며 결재하시는 기능적 권능은 인격적 권능이 전제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치 슈퍼맨이 트럭을 쳐내듯이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을 이기는 인격적 권능이 나타날 수 없다면 기능적 권능 또한 결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인격적 권능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반드시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기능적 권능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일의 성격에 따라서 나타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필요 없다고 여기신다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타난다고 하여도 그 내용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격적 권능입니다. 슈퍼맨이 쇄도해오는 트럭을 튕겨내듯이 내 마음에서 세상을 튕겨내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놀라운 권능입니다. 마음에 세상이 스며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있음의 느낌이 차단되고, 세상에 대한 좋음의 확신이 죽어버리고, 오직 하늘을 향해서만 소원이 발생하는 인격적 권능이 중요합니다. 이 인격적 권능이 있기에 세상은 나를 이길 수 없고, 세상이 슬며들어 올 수 없고, 세상이 나를 좌절시킬 수 없고, 세상이 나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이 인격적 권능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주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러한 권능을 받기 위해 제자들이 느꼈던 강도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기도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윗사람 앞에서 아랫사람 앞에서 언제 어디서든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었고 또한 주님과 함께 부활하였음을 기억하고 잊지 않기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가 이루어질 때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실 것이고 권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삶은 세상을 이기는 순간들로 진행되어갈 것입니다.
8절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다음 시간에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만 이보다 더 복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십자가가 제자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뼛속 깊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기도하시는 마음으로 하루를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오늘도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권능을 경험하시되 특별히 인격적 권능을 경험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들으며 설레는 이 마음이 실제상황 속으로 이어져 나갈 수 있도록 오늘 주님의 십자가가 내 뼈에 각인되어서 잊혀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 임하셔서 권능이 주어져 이 세상 것들이 마음을 향해 쇄도해 들어올 때 슈퍼맨이 쳐내듯이 튕겨져 나가는 인격적 권능의 상황을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