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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 이이순의 가학 계승과 「도산구곡」 창작의 의미
이원걸(문학박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한국한문학 전공)
1. 머리말
2. 가학의 계승과 실천
3. 「도산구곡」 창작의 의미
4. 맺음말
1. 머리말
한국문학사에서 주자朱子의 「무이도가武夷棹歌」 수용은 성리 이념 체계의 강화와 함께 산수 문학사에 주요한 동기를 제공하였다. 조선조 16세기 지식인들 사이에 「무이도가」 차운이 유행했는데 이런 경향은 구곡시 창작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무이지武夷誌를 탐독하거나 무이구곡도를 감상하는 시대적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이후 조선조 유학자들은 주자의 무이구곡 운영 형태를 계승하여 자연 풍광이 수려한 곳을 골라 구곡원림을 운영하며 구곡 관련 시문을 창작하였다.이러한 토대 위에 구곡시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구곡시는 성리 이념과 산수 흥치를 시적으로 형상한 작품이다. 특히 안동 지방은 이러한 구곡 문화의 발흥지로 의의를 지닌다. 퇴계를 중심으로 한 한국유학사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는 인물들이 안동에서 배출되었다.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태백산을 통과하고 청량산에 이르러 강을 형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낙동강은 수많은 골짜기와 협을 형성하여 도산은 구곡원림 형성의 최적지 여건을 갖추었다.
퇴계의 후학들은 퇴계가 강학 활동을 전개하던 도산을 중심으로 하여 ‘구곡九曲’을 설정하는 한편 구곡시 창작 활동을 통해 퇴계 학문을 전승하고 영남 학맥을 공고하게 하려는 시도를 이어나갔다. 퇴계에 대한 조정의 배려도 도산구곡 창작의 주요 동인이 되었다. 이러한 문학 운동은 퇴계 가문 후손들이 주축을 이룬다. 후계後溪 이이순李頤淳(1754-1832),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1755-1831),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1768-1844)이 대표적 인물이다.
도산구곡은 과거 역사 속의 화석 같은 공간으로 명맥만 이어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안동의 역사․문화와 함께 여전히 살아 있는 고품격 문화로 재창출되어야 한다. 도산구곡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측면과 생태 환경적 기반과의 융합을 거쳐 도산구곡은 명품 브랜드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낙동강 도산구곡 문학의 꽃을 활짝 피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산구곡에 대한 단계별 연구와 이를 통합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이에 후계 이이순을 검토하고자 한다. 퇴계 가학 연원과 후계의 가학 계승 실천 사례를 정리하고, 후계가 「도산구곡」을 창작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가학의 계승과 실천
후계는 퇴계 선조를 모신 자부심과 가문 전통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가 일생 이룬 사업 모두가 퇴계 추존 사업과 연관된 것이다. 퇴계 가학 연원을 정리한다.
1) 퇴계 가학 연원
퇴계의 학문 전통은 손자인 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1541-1584)에게 전해진다. 이는 공자의 학문 전통이 손자인 자사에게 전수된 것과 흡사하다. 몽재는 유년 시절부터 조부로부터 가학을 정통으로 계승했으며, 21세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25세 무렵에 학봉 김성일 등과 함께 퇴계를 모시고 청량산에서 주역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당시 퇴계는 그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 시를 지어 주며 격려했다. 퇴계의 손자에 대한 학문적 애정은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퇴계는 손자의 호를 ‘몽재’로 고쳐주며 성리학 공부에 주력해 주길 당부했다.
이후 몽재는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불리했다. 이후 추천을 받아 청전참봉으로 임명받아 직임에 따라 정성을 다해 칭송을 받았다. 이어 상서원부직장을 거쳐 사온서직장을 역임했다. 당시 부친 첨정공 준寯(1523-1583)이 의성 고을 원으로 재직했는데,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시 사직서를 제출하고 낙향했다. 애석하게도 부친은 그가 고향에 도착하기도 세상을 떠났다. 몽재도 1584(선조17))에 병을 얻어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몽재의 가학 전통은 현손인 청벽靑壁 이수연李守淵(1693-1748)에게 이어진다. 청벽의 유년기 어진 행적이 주목된다. 청벽이 11세 무렵, 맏누이가 종기로 몇 년을 고생했는데 손수 간병을 했고, 모친이 이질에 걸렸을 때에도 주야를 가리지 않고 간병했다.
이와 함께 청벽은 가학을 부지런히 익혀 청년 시절에 이미 명성을 얻었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퇴계의 가학을 전승한 효자로 인정받았다.청벽은 가학을 이어받아 예학과 이기설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그는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와 육경을 바탕으로 하여 심경․근사록․주자서절요 등을 중심으로 학문 체계를 다졌다.
특히 그는 퇴계집에 유의해 군자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했으며, 심혈을 기울여 가학 계승을 실천했다.이따금 그는 퇴계가 노닐던 단사협으로 뱃놀이를 즐기며 ‘청벽’으로 호를 삼았다. 청벽은 선조 유촉지를 탐방하면서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했다. 만년에는 퇴계의 옛집인 한서암으로 집을 옮겨 퇴계집 연구에 몰두했다.
이후 청벽은 가학 연원을 막내 아들 역와櫟窩 이세윤李世胤(1730-1798)에게 전해주었다. 역와도 가학 계승을 일생의 과제로 여겼다. 그리고 평소 단아한 선비로 재물에 초연했으며, 177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내 장릉참봉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제용감봉사․상서원직장․사헌부감찰․의금부도사․사직서령을 역임했다.
1792년에 적성현감으로 부임하여 청렴한 정치를 구현하여 칭송을 받았다. 아울러 그는 퇴계집과 주자대전을 깊이 전공한 학자로 명성을 남겼다. 이러한 학문적 기반으로 심경석의․주퇴서차의 등의 저작을 남겼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후계의 조부 이세헌은 후계를 역와에게 보내 그 전통을 이어가게 했다. 때문에 후계는 선조의 학덕 계승 의지를 일찍부터 체득했으며, 역와를 통해 가학 연원을 곧바로 계승했다.
일찍이 적성공 이세윤에게 나아가 배웠다. 적성공은 청벽 이수연의 학문을 이었다. 청벽공은 또 위로 몽재 이 안도의 학문을 계승했다. 몽재는 공자 문하의 자사와 같은 분이다. 후계 공이 전수 받은 가학의 연원은 탁월하며 연원의 유래가 있다.
공자의 학문이 손자인 자사에게 전해진 것처럼 퇴계의 학문이 손자 몽재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후 몽재의 가학 전통은 현손인 이수연에게 전해졌다. 이수연의 가학 전통은 다시 이세윤에게 전해져 후계는 그를 통해 가학 연원을 이었다.
후계가 이은 가학 전통은 아들 소계素溪 이휘병李彙炳(1790-1869)에게 이어진다. 이휘병은 「신사척사소」를 올렸으며, 벼슬은 하지 않았고 「영남만인소」 소수疏首로 활약했다. 이휘병에게 전해진 퇴계 가학 연원은 이휘병의 아들 둔와遯窩 이만손李晩孫(1811-1891)에게로 이어진다.
이만손은 한말에 외세 침범의 기미를 주목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척사를 주장했다. 그는 영남유생으로 민씨 일파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던 중,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봉헌하자, 이에 분개하여 강진규 등과 함께 영남 유생을 규합하여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이로 인해 그는 조정을 비난했다는 죄목으로, 강진현 신지도로 귀양을 갔다. 이듬해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게 되자 해배되었다. 이어 후계의 가학 실천 사례를 정리한다.
2) 후계서당 건립과 가법 계승 교육
후계는 1811년에 후계서당을 지었다. 유년기부터 가학을 체득하고 이를 실천하기를 다짐한 후계는 만촌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강학 활동을 전개했다. 후계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십년 동안 속세에서 지내며 十年塵世間
참으로 세월 많이 허비했네 光陰幾枉費
늦게 부족한 솜씨 부렸지만 晩來鳩拙功
겨울 다가도록 끝맺지 못했네 終冬卒猶未
시와 집 완성하지 못했으니 詩與屋未成
서툰 재주에 힘을 허비했네 才拙功且費
집 이름을 후계라 칭했는데 名堂擬後溪
이 뜻 아는 사람 몇 일런지 此意人知未
퇴계의 「도산기」에 ‘집 뒤에 물이 있어 퇴계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퇴계는 우리 가문이 대대로 살던 곳이다. 거처를 옮긴 이후 마음이 일찍 계상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 뜻에서 당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이는 주자周子와 주자朱子가 예전에 살던 곳의 산수 이름을 취해 당호를 붙인 사례를 따른 사례이다.
위의 시는 후계서당이라는 당호를 붙인 것에 대한 해명이다. 자신이 시냇가에 있던 선조 퇴계의 옛 초가가 있던 계상에서 태어났기에 그곳을 잊지 못해 그렇게 당호를 지었다고 했는데 이는 선조를 추존하기 위함이라고 했다.이는 주자가 ‘염계서당’을, 회옹이 ‘자양정사’를, 사모해서 그렇게 했던 전례를 따른 것이다.이처럼 그는 족적을 남길 때마다 퇴계를 추존하는 의식을 발휘했다.
그런 점에서 후계의 삶 전체는 퇴계의 삶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집을 세우는 것과 당호를 짓는 것에도 퇴계의 삶을 반추하여 그대로 따랐다. 이처럼 후계는 후계서당을 수축한 뒤, 그는 자신을 경계하여 남들이 보지 않은 곳에서도 남들이 보는 것처럼 근신했고, 뜰에는 매화와 국화를 심어 산수 자연의 멋을 즐기며 세상의 영욕과 득실에 초연한 삶을 즐겼다.이러한 산수 자연미를 즐기며 자연합일을 추구하였던 것도 퇴계의 정신 지향과 일치한다.
이후 후계는 그곳에서 주야로 퇴계가 남긴 글과 경서에 심취했다. 그는 평소 문중 자제들에게 가법을 준수해 주길 당부하며 권면했다. 조카에게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가법이 ‘근謹’․‘졸拙’ 두 글자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이를 힘써 지켜 줄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무첨가」를 지어 자손들을 엄히 교육시켰다.
그는 이처럼 선조가 남긴 정신과 학문을 자신이 손수 이었을 뿐 아니라, 자손들이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여 선조의 학덕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경계시켰다. 그의 가법 계승 정신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친척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 선조의 정신을 잊어버릴까 염려하여 「삭회종안」의 규정을 마련했다. 이어 자손들을 정기적으로 모이게 한 뒤, 퇴계집과 주자서절요를 강독했다.
이와 함께 「삭회종안」의 말미에 자손들을 권면하는 열 가지 조목을 붙여 ‘존조경종尊祖敬宗’의 뜻을 강조했다. 이처럼 후계는 가업 계승에 주력했을 뿐만 아니라 친족들에게 가학 전승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자부심을 진작시키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3) 청량정사 수축과 계산세고의 편찬
후계는 78세가 되던 1831년에 유림들과 의논하여 퇴계 선조가 즐겨 찾았던 청량산에 정사를 지어 당호를 ‘오산吾山’이라 했다. 이 사업은 유림들의 숙원 사업이었는데 당시 그가 주도하여 이 일을 완수했다.이처럼 그는 선조를 추모하는 사업에 있어 매사 열성을 다했다.
이듬해에 후계가 별세했던 점을 감안하면, 후계로서는 이 사업이 생전에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였다. 후계는 팔십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평생 숙원 사업이던 청량정사를 세웠다. 청량산은 선조가 오산으로 이름을 붙이고 사랑했던 유촉지였던 만큼 후계는 거기에 정사를 건립하여 선조의 학덕을 길이 전하고 싶었다.이 건축 공정에서 건축물의 제도와 규모는 농운정사의 제도를 따랐다.
이 역시 퇴계를 계술하기 위한 노력의 일단이며,도내 유림의 뜻에 부응하기 위함이었다.이와 함께 후계의 또 다른 가학 전승 사업은 계산세고 3책을 간행한 일이다. 다음 시는 계산세고를 편찬한 직후 지은 것이다.
시내 연원이 있듯이 산에도 산맥 있어 溪有淵源山有脈
오랜 가문 상서로운 비결 한 부 전해져 百年家世一符傳
선조의 지극한 가르침 몽재가 기록했고 過庭至訓蒙翁記
탐구하던 남은 빛 청벽의 책에 남아있네 玩佩餘光壁老篇
만호에게 큰바다까지 궁구토록 했더라면 如使晩湖窮大海
보배 거문고로 선조의 여음을 이었을 것 庶幾寶匣續遺絃
세 편을 모두 합해서 후세까지 전하리니 三編合部垂來後
경건하게 명을 써서 어찌 힘쓰지 않으랴 敬把書銘盍勉旋
계산세고는 몽재․청벽․만호의 시문집을 한곳에 모아 엮은 문집이다.퇴계의 가학 연원이 몽재를 거쳐 청벽에 이르렀던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만호를 거쳐 가학이 계승될 수 있었으나 그가 요절한 탓에 그 학문 전통이 그를 거쳐 이어지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였다. 이어 계산세고에 나타난 몽재․청벽의 가학 계승 실천 노력과 만호의 문집이 굳이 여기에 편성된 이유를 해명하고자 한다.
퇴계는 몽재에게 성리 서적을 접하게 하여 이에 대한 공부에 주력하도록 권면했다. 이와 함께 퇴계는 「성학십도」를 교정하는 과정에서 손자에게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게 했다.이는 몽재가 조부 퇴계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이뿐만 아니라 몽재는 퇴계 사후, 선조가 ‘사후에 비석을 세우지 마라’고 한 유훈을 두고, 제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몽재는 직접 나서서 문도들과 서찰을 교환하면서 그들을 설득시켜 분분한 여론을 선회시켜 퇴계의 유훈대로 따르게 했다.또한 몽재는 퇴계 사후 퇴계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퇴계연보」 초본도 작성했다.그런 점에서 몽재는 퇴계 가학 전승 선봉자 역할을 잘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청벽의 경우, 퇴계집의 오류를 정정하고 관련 서적을 편찬했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가문의 후손 및 자제들에게 성리 서적 공부에 주력하기를 당부하는 한편 자신은 퇴계집 연구에 전념했다.이후 그는 후인들에 의해 퇴계집이 편찬되었지만, 오류가 많은 점을 발견하고 이를 찾아내어 바르게 고쳤다.이와 병행하여 퇴계의 시문을 재수집하고 정리하여 퇴계선생속집을 편찬했으며, 도산급문제현록․퇴계시집주해 등의 저작을 남겼다.청벽은 퇴계 관련 저술을 통해 계술 사업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만호를 보기로 하자. 만호晩湖 이세정李世靖(1730-1767)은 퇴계의 7대손이며 몽재에게는 5세손이 된다. 그는 8세에 부친상을 당했고, 9세에 외숙부를 통해 학문을 익혔다. 평소 홀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는데 23세에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암기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두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운이 맞지 않아 이내 과거를 포기하고 독서에 전념했다. 이후 수준 높은 성리학 경지를 터득하며 위기지학에 몰두했다. 그는 본디 약한 체질이어서 병에 걸려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후계는 어렸을 때 그가 독서하며 사색하던 광경을 지켜보았던 기억에 남아있다고 술회했다. 그렇지만 직접 그와 상면해 교류하지는 못했다. 평소 그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지녔고 성취한 바가 많았던 점을 인정했다.
후계는 만호가 남긴 저작이 많았겠지만 그가 병에 걸린 뒤, 병이 조금 호전되었을 때 가동을 시켜 30여 평생 지은 난고를 모두 불태우게 해서 저작이 남아 있지 않다. 다행히 만호가 남긴 시집 2책이 남아 있어 호산췌언湖山贅言라고 이름을 붙인 뒤, 이 시집과 산문 일부를 모아 계산세고의 말미에 실었다.
원래 후계는 몽재․청벽의 글을 모아 계산세고를 완성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만호의 생애가 기구하고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이 탁월해서 문인들의 정평이 우수한 만큼 감히 민멸시킬 수 없어 뒤에 붙여 편찬했다고 밝혔다.그가 조금만 더 장수하였더라면 가학 연원을 이어 퇴계 계술 사업이 더욱 번성해졌을 것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피력했다.후계는 만호가 비록 가학 계승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가학 연구 활동의 공은 인정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후계의 계산세고 편찬 사업과 청량정사 수축을 통해 퇴계 계술 사업의 큰 틀이 완성되었다. 후계는 임종 1년 전까지 청량정사 건립에 간여할 만큼 선조 추숭 열정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그러한 의식이 결국 만호의 계술 성과를 수긍하게 했다.
4) 도산서원 원장의 역할
그는 도산서원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퇴계 문집 200여 판의 오류를 정밀하게 수정하여 개간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당시 도산서원의 수장으로 당시 영남 선비들이 퇴계 학문의 적통을 세우는 일로 인해 서애와 학봉을 사이에 두고 ‘병호시비’가 불거진 사태에 직면하여 중도적인 입장을 고수해 도산서원 전체가 그 시비의 소용돌이에 말려들 위험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러한 시비는 당시 영남 유림들이 문묘에 김성일․류성룡․정구․장현광을 종사하게 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리는 과정으로 비롯되었다. 이후 이러한 논의는 이상정을 호계서원에 추향하려는 과정에서 재차 불거졌다.
당시 퇴계 후손들은 대체로 중립을 유지해 왔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학봉 후손들이 주장하는 호론을 지지하는 부류가 생겨났다. 그러나 후계는 이에 대해 시종일관 함구했다. 간혹 문중에서 일부 인사들이 이에 대해 동조하는 사례가 발생하면 나무라면서 다시는 이 일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울러 도산서원의 유생들에게도 당부하여 시론에 얽매여 편당을 조장하는 일에 앞장서지 않도록 각별히 경계시켰다.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로서 편당을 지어 논의를 일삼는 폐단이 발생되지 않도록 했다.이는 선조의 학문과 덕행이 후인들에 의해 손상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3. 「도산구곡」 창작의 의미
위와 같이 후계는 평생 퇴계 계술 사업으로 일관했다. 후계는 향토 선현들의 유촉지에 대해 각별한 애정 의식을 지녔으며, 이런 의식을 기반으로 문헌적 고증과 탐사를 통해 지난 역사와 문화 복원에 이바지했다. 「도산구곡」 서문에 후계의 그러한 의식이 명확히 드러난다.
세상에서 ‘도산’을 일컬어 ‘무이’라고 한다. 지역상 서로 떨어진 것이 1만여 리이고 시대상 서로 떨어진 것이 오백여 년인데 두 산이 서로 이름을 가지런히 하는 것은 참으로 양항숙이 ‘땅은 사람이 뛰어나기 때문에 같아진다.’고 말한 것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땅의 빼어난 경치 또한 서로 멀지 않으니 두 선생이 지은 「잡영」을 살펴보면 「무이잡영」의 12수와 「도산잡영」 18절이 또한 절절이 서로 부합된다.
후계는 ‘무이’와 ‘도산’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무이와 도산의 밀접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자와 퇴계의 학문적 연관성을 공고히 한다. 주자가 강학하던 무이와 도산은 지리상 일만여 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적으로도 이미 오백 년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두 곳은 상호 근친성을 확보하고 있다.후계는 양항숙의 말을 빌려 땅은 뛰어난 사람으로 인해 같아진다는 논리를 들어 반증해 보였다.
무이가 주자로 인해 그 절경이 천하에 회자되듯이, 도산은 퇴계가 있기 때문에 무이와 같은 승경을 지닌 곳이 된다는 것이다. 「무이잡영」 12수과 「도산잡영」의 18절은 동일한 성리학 사유 의식의 문학적 형상화라는 점에서 상호 동질성을 갖는다.무이구곡이 배를 띄울 수 있는 것처럼 도산의 낙천도 선유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다. 이처럼 무이와 도산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때문에 주자가 은거구도했던 무이처럼 도산도 그러한 성리학 성지 공간으로 자리매김이 된다는 것이다. 후계는 서두에서 도산과 무이를 동일한 선상에 두고 주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 두 곳은 성리학 유풍이 깃들고 철리적 사유가 구현되며 천인합일이 이루어진 신성한 지역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어 무이구곡과 도산구곡의 상관관계를 구체적으로 해명한다.
이에 한두 동지들과 물을 거슬러 오르며 굽이를 따라 노닐면서 강산의 승경을 토론하였다. 저 ‘영지산’과 ‘부용봉’이 구름 끝에 솟은 것은 ‘만정봉’과 ‘옥녀봉’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학소암’과 ‘갈선대’가 가파른 절벽에 임한 것은 ‘금계동’과 ‘선장봉’과 매우 닮았으며, ‘동취병’과 ‘서취병’은 참으로 ‘대은병’과 같다. ‘청벽’과 ‘단사’는 그대로 ‘벽소’와 ‘도원’이다. 처음에는 수많은 골짜기와 바위들의 그윽하고 깊은 곳을 찾았는데, 끝에는 시내의 근원에서 별천지의 기이한 절경에 임하여 가득히 얻어 호연히 돌아오니 거리가 멀고 세월이 아득하다는 한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것은 산천과 운물이 서로 닮았을 뿐만 아니라 천지 사이에 우리 도가 한 가지 기맥이 북에서 남으로 서로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에 마음에 감동을 받고 언어로 표현된 것을 구비에 따라 차운하여 구비마다 지난 일을 기록해두었으니 후일 이곳을 찾는 이들이 이 청량산은 무이산과 다르지 않으며 지리상 멀지도 않은 곳임을 알게 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다. 또 도산지를 편찬하여 구곡의 승경을 실어 무이지와 짝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 청량산의 복이 아닌가? 나는 이로 인해 깊은 기대를 갖고 있다.
후계는 동지들과 함께 ‘무이’와 ‘도산’의 산천 지리적 유사성에 착안하여 구곡의 위치 설정에 대해 토론을 했다.도산의 ‘영지산’과 무이의 ‘망정봉’을 견주었다. 이어 도산의 ‘부용봉’과 무이의 ‘옥녀봉’을 비교했다. 이어 도산의 ‘학소암’을 무이의 ‘금계봉’에, 도산의 ‘갈선대’를 무이의 ‘선장봉’에 비교했다. 도산의 ‘동취병’과 ‘서취병’을 무이의 ‘대은병’에 비교하였다. 이는 매우 의미가 있는 표현이다.
도산서원이 ‘동취병’과 ‘서취병’에 위치한 것처럼 무이정사가 ‘대은병’에 위치해 있다는 의미이다. 퇴계가 학문을 강학하던 도산서원이 도산구곡의 제5곡에 있고, 주자가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대은병’이 무이구곡의 제5곡에 있기 때문이다. 이어 도산의 ‘청벽’을 무이의 ‘벽소’에, 도산의 ‘단사’를 무이의 ‘도원’에 비교하면서 도산의 지리적 특성이 무이의 지리적 특성과 상호 부합됨을 강조했다.
이어 도산의 ‘청량산’과 무이의 ‘무이산’은 짝을 이루고, 도산지와 무이지도 절묘한 대를 이룬다. 이로써 ‘무이’와 ‘도산’은 주자의 학문을 계승한 퇴계의 학문 정신이 깃들어 있고 유학의 정수가 온축된 성지로서 명실상부한 공간임이 확증된다고 밝혔다.
이제 후계는 도산과 무이의 상호 부합성을 인지시키고 나서,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구곡 설정에 자신이 직접 나선다. ‘청량산’에서 ‘운암’까지 명승지를 충분히 관찰하고 무이구곡에 견주어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다음처럼 구곡을 설정한다.
내가 보건대 ‘청량’에서 ‘운암’까지 4-5리 가운데 명승지가 많은데 도산이 그 가운데 자리하여 상하를 관할하며 하나의 동천을 형성한다. 시험 삼아 그 굽이를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곳을 무이구곡의 예에 따라 나누면, ‘운암’이 제1곡, ‘비암’이 제2곡, ‘월천’이 제3곡, ‘분천’이 제4곡, ‘탁영담’이 제5곡에 있는데 여기에 도산서당이 있다. 제6곡은 ‘천사’, 제7곡은 ‘단사’, 제8곡은 ‘고산’, 제9곡은 ‘청량’이다. 굽이굽이 모두 선생의 제품과 음상이 미친 곳이다.
후계는 자신이 직접 도산구곡의 위치를 추적하고 현장 답사를 거쳐 퇴계의 유촉지를 실사,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후계는 ‘시험 삼아 무이구곡의 설정 선례를 따라 도산구곡의 위치를 설정한다’고 했다.무이구곡은 주자의 학문이 온축된 성지인 만큼 도산의 퇴계 유촉지에 한국 유학의 유토피아적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런데 후계의 구곡 설정은 일부 다르다. 후계는 2곡을 ‘비암’, 3곡을 ‘월천’으로 설정했다. 오가산지에 의하면, 2곡을 ‘월천’, 3곡을 ‘오담’으로 설정했다.이러한 이유는 후계의 의식 근저에는 도산구곡은 무이구곡의 지형과 유사성을 확보해야 마땅하다는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후계는 주자의 학문 전통이 퇴계에게 그대로 전승되었듯이, 무이구곡의 지형과 도산구곡은 외형상 일체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점을 고수한다. 그래서 무이구곡의 2곡에 있는 여성 이미지의 ‘옥녀봉’을 닮은 바위가 도산구곡의 제2곡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굳이 ‘비암’을 2곡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본다.
아울러 도산구곡 제3곡에도 무이구곡의 제3곡에 있는 ‘가학선’을 닮은 벼랑이나 바위가 존재해야 한다고 신념했기 때문에, ‘부용봉’이 있는 ‘월천’을 제3곡으로 설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후계는 무이구곡 제2곡 ‘옥녀봉’을 의식하면서 도산구곡 제2곡에서 ‘비암’을 두른 푸른 숲의 모습을 여인이 머리를 길게 닿은 것에 비유하여 정감이 있게 표현했다.
이런 정신은 실제 구곡시 창작 과정상 현장 답사 후 구곡의 실제 위치와 관련 인물 행적을 정확하게 기록했으며,구곡시를 지을 때 반드시 퇴계 시문 가운데 한두 구를 인용하여 창작한 데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보다 중요한 것은 후계는 무이와 도산을 비교하면서 상관관계를 시종일관 강조한 점을 유추해 볼 때,후계 의식 저변에 도산구곡과 무이구곡의 지형성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위와 같이 2곡을 ‘비암’으로, 3곡을 ‘월천’으로 설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후계의 구곡 설정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의 학문 계술 의식이 철저하게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계의 「도산구곡서시」를 보기로 한다.
높은 도산이 영지산에서 나오고 嶪嶪陶山出自靈
끝없는 낙동강 청량산 지나오네 源源洛水來過淸
산과 강물 따라 선조 유적 찾고 並山沿水尋遺跡
굽이마다 다시 구곡시 짓는다네 逐曲重賡一棹歌
도산구곡의 전경을 「무이도가」의 운을 빌려 표현한 서시이다. 퇴계의 도산은 주자의 무이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 영지산 줄기가 뻗어 나와 도산의 경관을 형성했고 낙동강이 태백산을 거치고 청량산을 지나 도산으로 흘러드는 정경을 그렸다. 낙동강이 도산에서 만나는 정경과 그 굽이를 따라 선조의 유촉지를 탐방하면서 구곡시를 짓는다고 했다.
여기서 후계의 산수 강산 탐사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가 굳이 산수를 직접 탐방해 선조의 남긴 학덕을 추모하며 계승 의지를 굳건히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후계의 의지는 1801년(순조1)에 낙동강의 원류를 직접 탐사하고자 황지를 직접 다녀와서 「황지가」를 지은 데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1곡은 ‘운암’이다.
확 트인 골짜기 일곡에 배 띄우니 谽谺一曲僅容船
위 고암에서 큰 냇물을 굽어 보네 上有高巖頫大川
현인들 토론처를 구슬피 바라보니 悵望諸賢論討處
유적이 여전히 구름안개에 젖었네 至今遺跡濕雲烟
운암은 도산 남쪽 5리에 있는데 도산구곡의 입구이다. 선생과 후조당․읍청정․설월당․일휴당․면진재․월천 제공과 운암사에 노닐며 주역과 문장을 토론했다. 선생 시에 “주역과 문장을 토론하였네” 라는 구절이 있다.
첫 번째 곡에서는 광산 김씨 집성촌을 배경으로 하여 퇴계와 당대 안동을 대표하는 학자들과 주역을 강론하며 문학 활동을 전개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추모의 정을 담았다. 후계는 운암의 위치 고증과 함께 퇴계의 시를 인용하면서 1곡을 시작했다. 후계는 지리적 고증과 함께 선조의 시구를 인용하여 1곡을 표현했다. 운암을 거쳐 다다른 곳은 선성현의 얼굴인 ‘비암’이다.
이곡은 코 모양의 바위봉우리 二曲巖如鼻起峯
선성이 이로써 얼굴을 삼았네 宣城得此以爲容
한 폭 그림인 석양 참 예쁘고 更憐斜日開圖畵
땋은 머리는 겹겹이 푸르구나 點點螺鬟翠幾重
비암은 운암 북쪽 오리, 선성읍진 서쪽에 있다. 선생의 시에 “석양에 전송하는 곳, 그림 속에 선성을 지나네”라는 구절이 있다.
2곡에서도 ‘비암’의 지리적 위치를 언급하고, 선조의 시구도 인용하였다. 선성 고을은 입구에 서 있는 이 바위로 인해 이름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후계는 무이구곡의 2곡에 있는 ‘옥녀봉’을 의식하여 이 바위 주변에 푸르게 어울린 숲과 넝쿨을 여인의 치렁치렁한 머릿결에 비유하여 여성 어조로 표현하였다. 석양 무렵, 여인 머리 모양을 하고 서 있는 비암은 한 폭의 그림과 흡사하다. 이어 ‘부용봉’이 솟은 ‘월천’으로 향한다.
삼곡 높은 연근은 배와 닮았고 三曲亭亭藕似船
부용이 빼어나 천백 년 지났네 芙蓉秀出百千年
제일 강산에 지금 주인은 없고 江山第一今無主
달빛만 빈 집에 비쳐 구슬퍼라 月白空堂更可憐
월천은 비암 동쪽 8,9리 부용봉 아래에 있다. 선생은 이곳이 “강산 제일” 이라 하였고, 부용제작에 차운한 시에서 “계상서당의 흰 달 월천서당에도 밝네” 라고 했다.
세 번째 곡에서도 ‘월천’의 지리적 배경을 설명하고, 3,4구에서 퇴계 시구를 인용하였다. 후계는 무이구곡 제3곡을 의식해서 ‘부용봉’이 서 있는 ‘월천’을 제3곡으로 선정했다. 월천은 일찍이 퇴계가 승경을 극찬했던 곳이다. 후계는 계상서당에 비친 달이 월천서당에도 비칠 것이라는 선조의 시구를 끌어와 월천이 떠나고 서당만 남은 정경을 그렸다.
주인을 떠나보낸 서당은 황량하기만 하다. 하지만 200여 년 전에 계상과 월천을 비쳐 주던 달을 통해 지난 역사를 회고하면서 퇴계와 월천의 학문 전통을 떠올렸다. 다음 구비는 농암의 유촉지인 ‘분천’이다.
네 구비 따라 농암대를 찾아가니 我從四曲訪聾巖
옛 누대 비었고 풀만 드리웠다네 巖古臺空碧草毿
선백 풍류를 높이 우러르던 곳에 仙伯風流山仰地
어부 노래와 달빛이 연못 가득해 一聲漁父月滿潭
분천은 월천 서북쪽 5리쯤에 있다. 농암 선생 정관이 여기에 있다. 농암 선생이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와 아이들을 시켜 어부사를 부르게 했다. 선생 시에서 농암을 ‘노선백’이라 칭했다.
‘월천’ 서북쪽 분천에서 퇴계 시구를 인용하면서, 농암의 사적을 회고하였다. 농암대에 주인은 없고 풀만 드리워져 있고 어디선가 ‘어부가’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선조 퇴계가 ‘농암’을 ‘노선백’이라 부를 만큼 농암은 풍류한적의 멋을 누렸다. 그 옛날 풍류와 멋이 깃든 이곳에 달만 높이 떠서 분강의 맑은 구비를 비쳐주고 있다. 이제 분강 굽이를 지나 잔잔한 ‘탁영담’으로 배를 저어간다.
오곡으로 배 저어가니 연못 물 깊고 五曲移舟潭水深
앉아서 보니 지는 달이 연림 비추네 坐看殘月繞烟林
백세 후에 통천의 작은 소리 끊기면 通泉百歲輟微響
다시 어느 누가 이 마음을 알겠는가 更有何人知此心
탁영담은 분천 동쪽 2리쯤에 있는데 도산서당이 그 위에 있다. 연림 26곳 가운데 하나이다. 선생의 「탁영담범월시」에서 “백세의 통천 후에 다시 그 누가 정음을 이을지 알 수 없네”라고 했다.
5곡은 도산서당이 위치한 곳으로, 9곡 가운데 무게 중점이 있는 곳이다. 시에서 ‘백 세 후에 통천의 작은 소리가 그치면 다시 누가 이 마음 알겠는가?’ 라고 했는데, 이는 퇴계의 학통을 누가 이어가겠는가? 라는 반문이다. 이는 퇴계로 이어진 성리학을 자신이 이어가겠다는 내심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함께 자신이 이러한 일을 수행하겠다는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다.
후계는 도산구곡의 중심인 5곡에서 퇴계 학문을 자신이 제대로 계승하겠다는 다짐과 그러한 포부를 드러내었다. 그만큼 5곡은 후계에 있어 심장과 같은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퇴계의 강학 활동 중심인 5곡인 만큼 후계는 이 구비에 초점을 두고 학문 계승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어 배경이 ‘내살미’인 6곡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곡의 홍류가 맑은 물굽이 이루었고 六曲紅流玉作灣
취병과 자하오가 합하여 문을 이뤘네 翠屛紫塢合成關
돌아보니 옛절이 누대 위에 황폐한데 回瞻古寺荒臺上
산의 달만 무심하게도 비쳐주고 있네 山月祗今照等閒
천사는 탁영담 동쪽 4,5리에 있고 동취병․서자하오가 있다. 낙천 곁에 7대가 있고 대 위에 월란암이 있다. 선생의 「천사곡」시에 “고운 무지개 마을 안고 기우네.”라 했고, 「우월란」 시에서 “산의 달이 외로운 이불 비치네”라고 했다.
‘탁영담’ 동쪽에 위치한 육곡에는 무지개빛 강물이 물굽이를 형성했고, 양쪽으로 ‘취병’과 ‘자하오’가 관문을 이루고 있다. ‘자하오’는 퇴계가 처음 기거하려고 했던 마을이며, 퇴계가 이곳을 배경으로 하여 지은 시가 남아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월란암’도 황폐해져서 이제는 이곳을 찾는 이로 하여금 서글픈 마음이 들게 한다. 세월의 무상감 속에 변함없는 달만 허공에서 천사를 비쳐주고 있다. 회고 정서와 퇴계 추모심이 복합된 작품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7곡인 ‘단사’이다.
칠곡엔 구슬 병풍 맑은 여울 둘렀고 七谷瑤屛繞玉灘
구름 일어나고 꽃 피니 그림과 같네 雲生花發畵圖看
단 만드는 비결 누구에게 물어 보리 煉丹秘訣從何問
신선 떠난 천년 세월 옛솥이 차갑네 仙去千秋古鼎寒
단사는 천사 북쪽 2,3리에 있다. 선생의 「단사곡」 시에 “푸른 절벽에 구름 필 것 같고, 푸른 나무 그림 속으로 들 어가네.” 라고 했다. 또 “꽃이 무릉도원 경계에 피려하네.” 라고 했으며, 또 “가운데 만 곡의 모래를 감추었으니 비밀스런 보배 하늘이 경계 했네” 라고 했다.
7곡은 절벽과 나무, 꽃이 어울려 그림과 같은 광경을 선사해 주는 곳이다. 인용한 퇴계 시에서 보는 것처럼, 조물주가 천연색을 배합하여 만든 자연의 조화가 빚어낸 그림 같은 곳이다. 강가에 길게 펼쳐진 모래와 자갈은 시인을 절로 감탄케 한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8곡인 ‘고산’이 나온다.
가장 기이한 팔곡에 하늘이 열려지고 最奇八谷得天開
긴 노로 외론 배 저어 거슬러 오르니 鶴棹孤舟爲泝洄
벽 위에 적어 놓은 시 지금도 있는지 壁上題詩今在丕
슬피 구름산 바라보며 홀로 읊조리네 雲山悵望獨吟來
고산은 단사 북쪽 7,8리에 있다. 성재정사가 있다. 선생의 「고산석벽시」에 “날골 주인 금씨의 아들께서 지금도 잘 있는지 강 건너서 소리 질러 불러본다네”라고 했다.
단사의 북쪽에 있는 고산에는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1530-1604)의 유적인 성재정사가 남아 있다. 예전에 천둥이 치고 벼락이 쳐서 바위가 깨어지자, 그 사이로 강물이 흘러 이처럼 멋진 풍광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석벽에는 퇴계가 성성재에게 지어주었던 시가 새겨져 있어 후계에게 감명을 주었다. 높은 벼랑에 구름이 깃들 만큼 절경을 형성한 8곡에서 지명 전설과 선조의 시를 인용하면서 추모의 정념과 실경을 함께 그려 내었다. 이제 한 구비 더 돌면 ‘청량산’이 나타난다.
구곡의 산은 깊고 더욱 높고 높으니 九谷山深更卓然
열두 신선 봉 그림자 시내에 비치네 仙峯六六影流川
정말 서른 여섯 동천이 있다고 하면 宛如卌六洞天在
이곳이 응당 제일 동천이 될 것일세 此亦當爲第一天
청량산은 고산 북쪽 5,6리에 있다. 선생께서 「무이구곡도발」에서 ‘삼십육 동천이 없으면 모르겠지만 있다면 무이산이 당연히 첫째일 것이다’ 라 고 했다. 육육봉은 열두 봉을 말함이다. 그러나 육육봉과 삼십육 동천의 차이가 없다면 이제 육육봉을 삼십육 동천 가운데서도 첫째로 삼을 수 있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무이구곡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경치가 있는 곳이라 해도 청량산 만한 곳이 있을 지 모르겠다.
도산구곡의 절정인 청량산의 위용이 장관인데 후계는 이 청량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청량산은 퇴계 성리 철학의 궁극점을 상징하기에 엑센트를 부여했다. 이와 함께 청량산 앞을 흘러가는 낙동강은 유학의 도가 쉼 없이 흘러가는 현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청량산 찬미 의식의 배경에는 퇴계 학문 계승 의지의 구체적 발현이란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위에서 언급했던 후계의 황지 탐방은 이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 과정에서 후계는 주자의 무이구곡과 지형적 유사성을 확보한 도산구곡을 설정하고, ‘무이구곡’과 ‘도산구곡’을 일치시킴으로써 도산을 퇴계의 학문 정신이 깃들고 성리 이념이 구현된 청정한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후계는 도산의 산수 자연 공간이 무이산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거듭 드러내었다. 즉, 후계는 향토 산수자연 의식이 남달랐는데, 이것이 도산 산수 자연 우월 의식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후계의 도산 산수 의식과 퇴계의 산수자연관 체득이 도산구곡 창작의 기저가 되었다. 후계의 계술 정신 발현이 도산구곡 설정과 구곡시 창작으로 결실되었다. 도산구곡의 설정과 구곡시 창작은 퇴계 성리학 실천 공간의 문학적 형상화를 통한 ‘심화된 퇴계 계술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로써 당대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 퇴계의 학문 전통이 지속되기를 희망했다. 후계는 도산구곡마다 정확한 위치를 지적해 두었고, 작시를 하면서 선조 퇴계의 시문을 인용하여 구비마다 지형 및 지리적 특성, 전설을 융합한 도산구곡을 창작했다. 이러한 창작 과정에서 후계의 계술 정신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4. 맺음말
퇴계가에서 집중 창작된 도산구곡시 창작 배경과 활동 양상 연구를 거쳐 도산구곡 문학 전개사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퇴계 가학을 충실히 계승했던 후계의 도산구곡 창작 배경을 검토했다.
퇴계 가학 연원을 정리했다. 퇴계의 학문이 손자인 몽재 이안도에게 이어졌으며, 이후 몽재의 가학 전통은 현손인 청벽 이수연에게 전해졌다. 이수연의 가학 전통은 다시 역와 이세윤에게 전해졌다. 후계는 역와를 통해 가학 연원을 이었다. 후계의 가학 연원은 아들 소계 이휘병에게 이어졌다. 이휘병에게 전해진 가학 연원은 아들 둔와 이만손에게로 이어졌다. 이들은 한결같이 선조 퇴계 추존 의식이 투철하였으며, 퇴계학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특히, 후계는 후계서당을 건립하여 후학들을 지도하며 퇴계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가도록 추동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퇴계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선조가 추구하던 산수 자연의 즐거움을 누렸다. 후계는 가업 계승에 주력했을 뿐만 아니라 족친들에게까지 가학 전승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자부심을 진작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몽재․청벽․만호의 글을 모아 계산세고를 완성했다. 그의 계산세고 편찬 사업과 청량정사 수축을 통해 퇴계 계술 사업의 큰 틀을 완성했다. 후계는 임종 1년 전까지 청량정사 수축에 참여할 만큼 선조 추숭 사업의 열정이 강했다. 그리고 그는 도산서원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퇴계 문집 200여 판의 오류를 정밀하게 수정하여 개간하였다.
그리고 당시 병호시비가 불거졌을 때, 중도적 입장을 고수했다. 도산서원 유생들과 자손들이 이 일에 휩싸이지 않도록 조치함으로써 더 이상 이 문제가 확대되지 않도록 대응하였다. 이는 선조의 학문과 덕행이 후인들에 의해 손상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후계는 도산 산수에 대해 각별한 애정 의식을 지녔다. 후계는 선조 퇴계처럼 아주 특별하게 청량산을 애호했던 인물로, 향토 산수 자연 애호가였다고 할 수 있다.후계는 도산 산수 애정과 미학적 감수성을 지녔다. 후계의 도산 산수 우월 의식과 퇴계의 산수자연관 체득이 도산구곡 창작의 기저가 되었다.
후계의 이러한 퇴계 계술 정신 발현이 도산구곡 설정과 구곡시 창작으로 이어졌다. 후계의 도산구곡 설정과 구곡시 창작은 퇴계 성리학 실천 공간의 문학적 형상화를 통한 ‘심화된 퇴계 계술 실천 사례’이다. 이로써 후계는 미래에까지 퇴계의 학문 전통이 지속되기를 염원했다.
일련의 검토를 통해 후계의 도산구곡 설정과 구곡시 창작 배경에 이러한 퇴계 계술 정신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하계는 당대 도산구곡 창작과 유포 과정에서 광뢰, 하계와 변별되는 독특한 캐릭터를 지녔다. 그는 평생을 ‘가학 계승에 주력하면서 퇴계 존모 사상으로 일관하며 계술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도산구곡 관련 개별 작가 및 작품의 심층 분석, 작품 창작 배경과 작품 간의 연관성 검토, 도산구곡 문학사의 체계화를 통해 도산구곡의 고품격 문화 재창출․도산구곡의 명품 브랜드화․낙동강 도산구곡 문화의 만개를 기대한다.
[안동문화](제31집), 안동문화원,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