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괄호 안의 ㉠의 즉위를 가능하게 한 제도를 쓰고, 괄호 안의 ㉡에 들어갈 인명을 쓰시오. [2점]
(가) ( ㉠ )의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아버지는 진평왕이며 어머니는 마야 부인 김씨다. 성골 남자가 없어 여왕이 즉위하였다. - 三國遺事 -
(나) 정관 17년 계묘(癸卯, 643) 본국의 ( ㉠ )이/가 글을 올려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중략)… 명하여 분황사(芬皇寺)에 있게 하니 …(중략)… 조정에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불교가 우리 동방에 전해져서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주지(住持)를 받드는 규범이 없으니 법규로써 다스리지 않고는 바로잡을 수가 없다 하고, 칙명으로 ( ㉡ )을/를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승니(僧尼)의 모든 규범을 승통(僧統)에게 위임하여 주관하도록 하였다. - 三國遺事 - |
해설 : ㉠골품제, ㉡자장
[세의 모든 역사 한국사, 김종권 p.53, 54] 성골로서 왕위 계승
3) 선덕여왕(632∼647)
① 의미: 진평왕 이후 성골 신분의 남성이 없는 상황이었고 이에 성골로서 왕위를 계승할 사람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덕만 밖에 없었다. 따라서 선덕여왕의 집권은 성골의 왕위 계승으로 이해할 수 있다.
② 643년 당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원군을 요청하였다.
③ 황룡사 9층 목탑: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건립(호국불교, 645)
④ 분황사를 세우고 첨성대를 건립하였다.
⑤ 비담과 염종의 반란: 이 과정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김춘추와 김유신의 공이 컸다.
[신뿌샘 1권 p272, 273]
<진골과 성골은 어떻게 구분되었나>
기록에 따르면, 신라왕은 중고기 진덕여왕까지 성골이었다고 한다. 진평왕이 죽었을 때 성골 남자가 없어 성골 여자인 그 딸이 즉위하니 그녀가 곧 선덕여왕이며,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진덕여왕이 즉위했으나 성골 왕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진덕여왕의 뒤를 이은 태종무열왕은 진골이라 했다.
진골은 내물왕의 후손들이 자기 혈통과 정치적 위치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 만큼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골’층 중에서도 ‘진정한 골’층임을 주장함으로써 생긴 이름이다. …
진골은 자기가 국왕의 친족이라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를 높이자면 먼저 국왕의 권위를 더욱 신성한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현재의 국왕과 장차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왕자들을 ‘신성한 골’이라는 뜻의 ‘성골(聖骨)’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사정에서 비롯한 일이다. … <272쪽>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골은 신분이라기보다 왕이 될 자격을 정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
또 현재 왕에게 아들이 없어 장차 동생에게 왕위를 전할 예정이지만 왕이 건강하여 오래 산 경우에는, 동생의 아들에게 왕위가 돌아갈 수도 있으므로 동생을 왕에 책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의 자식만 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갈문왕이다. 갈문왕에 봉한다는 것은 그가 왕위를 계승할 성골로서의 자격이 있고, 그 자식도 마찬가지임을 인정하는 의미를 지녔다. <2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