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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2일 주일낮예배 설교
설교 제목: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1:7~8
설교를 위한 묵상:
지난 주에는 금년의 표어를 담은 신년메시지를 나누지 않고 다른 곳에서 설교한 것을 교우들에게 한번 더 설교를 했다. 독감으로 설교준비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번 주에는 금년도 표어를 담은 설교를 할 예정이다.
나는 최근에 설교나 사역을 전투라고 느낀다. 전투는 좋은 기세 가운데 치를 수도 있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 치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것은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과 투지, 그리고 사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준비는 승리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승리를 준비해야 승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설교는 매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건강의 악화이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다양한 관점과 이념과 주장이 있다. 사람들은 그 가운데 자신이 선택한 생각을 따라서 살고 있다. 신앙은 삶에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 비과학적이며 비현실적이라고 외면되기 일쑤다. 그리고 설교자는 지혜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무신론의 토론장에서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짓눌리는 경험을 하기 쉽다.
그렇다고 막무가내식으로 오로지 교리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진심을 다하고 성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환호나 찬사를 받을 수도 있지만 냉담과 비판, 그리고 거절과 무시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을 예상하지 못한다면 사도나 제자의 본분을 잊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보내실 때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으셨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을 지녀야 한다. 다 갖추어진 상황이 아니기에 기회를 보아야 하며 끈질기게 기다리고 시도를 해야 한다. 그것이 뱀 같은 지혜다. 그리고 우리의 일은 언제나 올바른 동기와 목적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자세이며 사람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전도를 해야 한다. 그 마음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울리는 꽹과리와 같을 뿐이다.
2025년도가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힘든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정치적 불안정 속에 경제에는 계속적으로 한파가 몰아치고 있으며, 각 가정과 개인들의 삶에도 크고 작은 고난의 파도가 밀려온다. 그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방황하기 쉽다. 지치고 낙심할 때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방황(彷徨)은 길을 잃은 것이다. 인생의 길을 잃을 때는 좌표가 흐려졌을 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이 분명하다고 느낄 때는 우리의 삶의 좌표가 명확할 때다. 그때 우리는 삶의 좌표를 어떻게 정했을까? 삶의 좌표란 무엇일까? 그것은 기준점이다. 기준점이 없는 사람은 방황한다. 사실 방황하면서도 자신이 방황하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마치 삼손이 자신의 머리가 밀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줄도 모르고 여전히 기운이 있는 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삶은 부침(浮沈)의 연속이다. 흥할 때가 있고 쇠할 때가 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편 30:5). 이것은 우리의 일상을 표현한다. 유행가에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Dust in the Wind)와 같다고 인생을 노래한 대목도 있다. 그룹 캔자스의 노래가 그것이다. 모든 꿈도 노력도 결국은 바람에 날리는 먼지와 같이 흩어져 없어진다는 말이다. 전도서에 있는 고백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노래나 고백에 익숙하다. 도리어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눈 앞에 있는 것을 좇아 살아가는 삶은 속물(俗物, snob)에 더 가까운 삶일 수 있다.
이것이 인생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삶이 있고 그것을 보람과 의미로 충만하게 채우지 않으면 안 될 사명 같은 것이 있다. 어쩌면 바람 속의 먼지라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좌표를 찾지 못했음을 슬퍼하는 것은 아닐까? 인생이 짧고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인생은 아름답고 어떤 숭고한 의미나 의무가 우리에게 지워져 있다는 느낌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여전히 현대인에게도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다 같이 절망의 노래를 반복하는 우울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삶의 좌표를 선명하게 찍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 좌표는 기준이며 출발점이며 모델이다. 그것에 비추어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서 설교자와 같이 무슨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고 베드로 사도가 권면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베드로전서 4:1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명확해야 하고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사람들을 그저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며 부탁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 확신과 믿음이 없이 말을 하면 도리어 그 말이 그에게 수치가 될 뿐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풀어줄 때는 얼마나 더하겠는가?
이런 점에서 볼 때, 삶의 좌표는 사역의 좌표와 같으며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리로부터 시작한다. 거기에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된다. 시편 16편 8절 말씀은 바로 이런 좌표를 제공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2025년도 설교를 시작할 때 나는 먼저 언제든지 우리의 삶에서 기준이 되는 좌표를 명확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의미하며, 그 경륜에 우리의 삶이 연결되어 연합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우리의 길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불러 일으켜주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도 이번 주 설교에서 우리의 삶이 이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명확한 기준점을 어떻게 정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 그 기준을 따라 살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교우들을 권면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흔들릴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안정감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2025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이다. 이것은 다소 무거운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 그 앞에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라는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그 능력 아래서 고난을 받으라는 의미다. 사실 그것은 어쩌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아래서 광야의 여정을 수행하던 이스라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은 고난은 언제나 파멸로 이어진다. 원망과 불평, 두려움과 낙심이 그 증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행하는 여정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지나는 행렬이다.
그 고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증언한 일과 주님을 위하여 갇힌 상태로서 소개한다. 디모데는 바울이 고난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그를 본받아 기꺼이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권면이다. 이런 권면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는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소개한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보면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한 것을 디모데에게는 어떻게 표현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실을 따라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따라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음을 밝히 보이셨습니다.
디모데후서 1:9~10, 표준새번역성경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말한 후에 바울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그것은 은혜로 된 것이며 오래 전부터 예비하신 일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밝히 드러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망을 폐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음을 밝히 보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며 하나님의 계획 곧 경륜이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구원과 부르심, 그리고 생명과 썩지 않음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일인데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 이유는 그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셔서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리라 하시던 약속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첫 선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비밀의 경륜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셔서 그들을 통하여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지으시고 빚으셔서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하게 하신다는 에베소서 2장 10절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복음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 곧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 뜻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뜻에 동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그 결과 사망은 물러가고 생명과 부활의 역사가 세력을 넓혀갈 것이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도 알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으며, 복음서에서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면 복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복음은 이 세상과 만물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프로젝트다. 그것은 회복 프로젝트이며 생명을 소생하게 하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세상과 인간과 자신을 볼 수 있는 관점이 생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이 없이는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할 필요를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증언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믿음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 그런 확신에 대하여 바울은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나는 이 복음을 전하는,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는 분을 잘 알고 있고,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이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디모데후서 1:11~12
바울에게 있는 그 확신은 그가 자신을 부르신 분을 잘 알았기 때문이고 그 말씀과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 환난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시고 때로는 환상으로 확증해 주시고, 나아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일상을 이끌어 주셨다. 그런 친밀한 교제 속에서 바울은 자신의 소명과 복음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 결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증거하고 각 사람을 권할 수 있었다. 그의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었다. 세상은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다(히브리서 11:38).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앞에서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사도행전 27:25
바로 이것이다! 그 동안 내가 잃어버리고 있던 보물, 그것이 바로 이런 확신이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 하나님의 경륜은 비밀이었다. 그것이 왜 비밀이었던가? 그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어느 시대나 비밀인 것 같다.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뜻을 자기 기준에 맞게 바꾸어 버림으로써 그 본질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볼 수 없게 된다. 그 결과는 혼돈이며 타락이며 헛된 소동과 다툼, 그리고 수치와 파멸이다. 성경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를 충분히 보여준다.
나는 앞에서 좌표에 대하여 언급했다. 좌표는 기준점이다. 그런데 그 기준점이 흔들리면 좌표도 흔들리게 된다. 모든 것이 바뀌며 일시적이며 시류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기준점을 잡아야 한다. 그것은 세상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좌표가 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좌표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인격과 경륜이 우리의 삶을 고정해야 할 기준점이라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분명하게 잡아야 한다. 그것을 붙들고 그것에 연결되지 않은 인생은 모두다 부평초(浮萍草)라고 할 수 있다. 바람에 날려 떠다니는 나뭇잎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송 중에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이 그것이며,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라는 가사가 그것이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라는 곡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모두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우리의 유한한 삶을 묶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손을 붙잡고 가는 것이며,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는 삶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우리의 유한한 삶을 묶어서 영원한 삶을 상속하기 위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의 좌표를 발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이며, 그것을 점검하는 과정이 신앙생활의 여정이며, 그것을 소망하면서 삶을 마치는 것이 신앙생활의 완성이다. 그 영원의 좌표를 어떤 사람은 천국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영생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삶의 이유이며 동시에 삶의 목적이며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창조를 성경이야기의 처음에 나오는 주제로 생각할 수 있다. 창조신앙은 신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현실과 세상의 기원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심판주에 대한 믿음은 역사와 미래에 대한 탐구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기원과 종말에 대한 질문과 탐구를 하면서 영원의 좌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발견하고 경배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의 삶이 영원의 좌표에 자리매김을 하고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궤적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신앙생활 또는 구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사실 인생에 대한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나온다. 그런 질문을 하지 않고도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을 회피하고 살아가면 필경 삶은 예고도 없이 무너질 수 있다. 이것은 허무주의나 염세주의 또는 쾌락주의 등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성경은 사망이나 썩어짐의 종노릇이라고 부른다. 복음은 이런 데서 벗어나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생명과 썩지 않는 삶을 누릴 수 있게 안내한다. 그것은 이 세상과 자신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며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이해와 기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영원이며 그 영원을 측량하게 하는 기준점이 바로 영원의 좌표라고 할 수 있다. 이 좌표가 명확해지면 나머지 모든 시공간과 만물은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본문으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무엇을 전할 것인가? 나는 교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성경을 중심으로 문제를 제시하고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우선 본문에서 말하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냐하면 지금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감옥에 갇힌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므로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2. 그리고 비겁한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신다. 이것은 선한 뜻을 펼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길잡이이며 동력이다.
3.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신 것은 우리의 어떤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구원과 소명이 은총이라고 명시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골로새서 1장 13절에 있는 바와 같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어 자기가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 하나님의 경륜에 맞추어 살아가는 삶,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면서 그 소명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4.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으로 보여주신 생명과 썩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몰아내시고 장차 썩지 않은 몸과 세상을 주셔서 우리로 그 세상을 물려받게 하실 것을 확증한다. 이것이 복음이며 기쁜 소식이다.
5.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을 이루실 것을 굳게 확신한다. 그리고 자신이 증거하는 복음이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경륜이며 비밀의 경륜이다. 그것은 에베소서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이방인에게까지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풍성함은 결핍과 사망과 썩어짐의 해소이며 아담적 저주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적 축복을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이 찬란한 언약과 약속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 복음이 가져올 능력을 증언하는 것이다.
6.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될 것이며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마태복음 22:14). 그러나 그 복음을 믿고 확신하고 누리고 증거하는 것은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특권이며 사명이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하여 자신이 선포자(keryx)와 사도(apostolos)와 교사(didaskalos)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한다(딤후 1:11절).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자긍심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도 그런 것 아닐까? 이 위대한 복음을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pistos)이다(고전 4:2). 여기서 말하는 충성이란 복음 그 자체에 대한 믿음이며 복음을 맡기신 분에 대한 신뢰이며 그것을 들을 사람들에 대한 성실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7. 그런데 그런 자긍심을 가지려면, 또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해야 한다. 복음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깨달은 사람인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 복음을 맡은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를 자주 고백한다. 그만큼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이 큰 소식이며 놀랍도록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글에서 그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배웠다. 나도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말과 내용으로 그것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하나님의 복음이 가지는 영광의 광채를 잊어버리고 그 껍데기만을 붙들고 있었던 것 아닌가 반성해 본다. 복음은 언제나 신나고 놀랍고 감사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8. 여기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소경인 줄을 알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권세자들이 믿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영광의 주님을 볼 수 없게 한다고 탄식했다. 물론 그 영광을 맛본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놀라운 소식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언제나 다시 새롭게 만나야 할 것이 이 복음의 능력이며 복음의 진실이다.
9. 그러므로 이번 설교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좋다:
① 옥중 서신 - 인생의 좌표를 설정하라.
②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③ 복음이 무엇이기에?
④ 복음을 맡은 자가 왜 영광인가?
⑤ 우리의 다짐 –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설교 목표
새해를 맞이하여 금년의 표어를 제시한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옥중에서 권면한 것으로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권면이다. 이 권면대로 나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능력이며 소망인지를 분명하게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세움을 입은 교회와 부름을 받은 우리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일깨워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것이다. 이 메시지는 우리를 다시 한번 잠에서 깨어나게 할 것이다. 오 주여,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설교를 준비하는 지금, 그리고 이 설교를 선포하는 시간, 그리고 이 설교가 삶 속에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
***
1. 옥중 서신 - 인생의 좌표를 설정하라.
할렐루야! 새해가 밝았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의 금년도 표어를 소개하는 설교를 하겠습니다. 이 표어는 금년에 우리가 나아갈 지표이며 늘 기억해야 할 등불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본래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저는 인생의 좌표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좌표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위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서울은 지구상의 어디에 있을까요? 지구는 둥글기에 서울의 위치를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알리려면 좌표를 알려주면 됩니다. 지구에서 좌표는 북극과 남극을 중심으로 적도까지 나누는 위도가 있고 동쪽과 서쪽을 360도로 나눈 경도가 있습니다. 서울의 위치는 약 북위 37도 동경 130도 정도 됩니다.
이것은 지리학적으로 우리의 위치를 정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으로 세계 어디든지 그 위치를 표시할 수도 있고 적절한 운송수단만 있다면 지구의 어디든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을 여정이라고 할 때 인생에도 좌표가 있을까요? 우리의 인생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런 것을 표시할 수 있는 장치가 있을까요? 우리의 인생에 좌표를 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더 명확하게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좌표는 지구의 좌표와 같이 기준점이 필요합니다. 지구에서 기준점은 북극과 남극이며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입니다. 북극과 남극은 나침반으로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는 동서를 가르는 기준점이 됩니다. 이처럼 둥근 지구에 기준점이 세워지면 지구 전역에 새로운 좌표가 생기고 모든 곳의 위치가 정해지는 것처럼 인생에도 기준점이 세워진다면 인생의 좌표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목표를 향해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비록 감옥에 있지만 분명한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살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성경의 인물들은 삶의 좌표를 명확하게 포착하고 살았음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선배들은 인생의 좌표를 어떻게 정할 수 있었을까요?
신앙의 선배들이 인생의 좌표를 정하게 된 계기는 한결같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이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목적을 향해 달음질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노년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3~14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한 푯대가 생겼습니다. 그 이전에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허공을 치는 사람처럼 살았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9:26, 표준새번역성경
사도 바울은 승리자에게 주는 관을 얻고자 달음질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었습니다. 부름의 상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명령을 완수하는 자에게 주는 상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좌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준점은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기준점이 되신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부르신 그 소명을 이해하고 그것을 붙들고 자신을 거기에 온전히 바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2.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전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감옥에서 다시 한번 편지를 통해서 그 안수기도 때 디모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이 일어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편지를 읽는다면 디모데가 다시 열정을 가지고 사역에 임할 것이라는 기대를 사도 바울은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이 삶의 좌표를 명확하게 포착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들으며 그 영광스러운 소명에 동참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떨쳐버리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사도 바울은 일깨워줍니다(딤후 1:7).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사랑의 열정을 주시고 모든 것을 절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선한 뜻을 펼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서 일하신다는 말은 바로 이런 마음을 부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받아서 다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의 권면을 더 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우리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일은 디모데에게는 기운이 빠지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후견인이 사라진 것과 같고 아버지 같은 분을 잃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과 함께 전도를 하러 갈 때 디모데는 매우 든든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담대함과 언변과 은사를 보면서 큰 힘을 얻고 용기를 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지도자를 잃고 오롯이 자신이 공동체를 책임져야 하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교회 안팎으로 도전과 과제가 다가올 때 디모데는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교회에 대한 평판이 나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 교회는 젊은 세대에게 복음을 전수하지 못하고 젊은이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우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다가 교회가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합니다. 전도는 쉽지 않고 교인들은 고령화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암울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이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믿고 기대합시다.
그리고 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힘써야 할 것을 일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고난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 아래서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기도와 섬김과 사역에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일하라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생기도록 우리는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표준새번역성경은 이 대목을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참여하십시요’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복음은 고난에 동참하는 이유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이유도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리 저리 다니고 애쓰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복음은 여기서 사도 바울과 디모데에게 새로운 기준점이 됩니다. 바로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고난에 참여하는 것일까요?
3. 복음이 무엇이기에?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글을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많은 방식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에게 쓴 글에서는 복음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디모데후서 1:9~10
이것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설명하고 요약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과 거룩한 소명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를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을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 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골로새서 1:13, 공동번역 개정판
사도 바울은 구원을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출애굽을 생각나게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그것은 마치 흑암의 권세 아래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신전을 건축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꿈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건져 내셔서 하나님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은 흑암의 권세 아래서 희망없이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빛나는 나라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어받아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는 인생입니다. 이스라엘이 천하만민에게 나눠주는 복은 복음을 전해줌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그 복음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빛나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 바로 그 복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살던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는데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흑암의 권세에 눌려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삭개오이며 수많은 환자들이며 남녀노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삶의 이유와 목적을 되찾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예배하는 참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흑암의 권세아래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아 새로운 소명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더욱 깊이 연구한 끝에 그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놓여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경주자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이전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하면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났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를 부르신다는 것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과 그 이후의 삶은 다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할 인생의 좌표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과 소명이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로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질 수 있다는 말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선한 뜻을 펼치며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과 썩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이 일은 죽음을 이기신 일이며 부패하고 썩을 인생을 썩지 않음을 입을 수 있게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로운 세상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기대와 소망으로 현실의 썩어짐과 부패함을 넘어서는 용기와 기백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능력이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사는 삶은 그런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처럼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의 새로운 삶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삶은 동시에 하나님이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신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4. 복음을 맡은 자가 왜 영광인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귀한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1:11~12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선포자라고 합니다. 그것은 전령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신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보기에 온 천하 만민은 지금 흑암의 권세에 눌려 있어서 참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 때문에 사람들의 눈이 감기고 귀는 닫혔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청중의 일부에게 감화와 감동을 일으켰고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언변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사도 바울은 경험하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그렇게 노력했던 것입니다.
오늘 저는 신년을 맞이하여 우리 인생의 좌표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이며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하여 사도들과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권면하는 말을 보면서 사도 바울에게 인생의 좌표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통해서 생겼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이루는 일에 부름을 받았음을 깨달았다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좌표는 예수님을 만나서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그 부르심을 받을 때 생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좌표가 되어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좌표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과 진리의 말씀을 새롭게 깨달을 때마다 더 분명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삶의 좌표가 희미해질 때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드물어지거나 멀어질 때,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마음에 세상의 염려와 욕심이 들어찰 때입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말씀과 소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인도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보람을 회복할 것이며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과 목적이 선명해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깨달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이 정진할 때마다 우리에게는 삶에 좋은 열매가 하나둘씩 맺힐 것입니다. 올해에 이런 좋은 일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