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아모스 1장 3절-2장 3절
죄로 말미암아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아모스 선지자는 본래 드고아 지역에서 목자의 일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드고아 지역은 남유다에 속한 곳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북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시대에 활동을 했는데, 성경은 ‘지진 전 이년에’ 아모스를 불러 북이스라엘을 향해 말씀을 전하도록 했다고 기록합니다. 달리 말하면 2년 후에는 지진이 있다는 것이고, 지진이 있다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심판에 앞서 선지자를 보내신다는 것은 그런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는 무엇인가? 지난 시간 2절에서 살펴 본 것처럼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른다는 것입니다. 마른다는 것은 먹고 마실 것이 없어져서 황폐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만큼 한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북이스라엘의 죄를 직접적으로 밝힌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북이스라엘의 죄를 밝힐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2절을 통해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신다고 할 때 참된 예배는 북이스라엘이 아닌 남유다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은 지금 북이스라엘의 예배는 거짓된 예배로만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솔로몬 이후 남과 북이 갈라질 때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이 남유다에 있는 성전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금송아지를 만들어 단과 벧엘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이 아닌 일반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장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그 시작부터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가 없는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여로보암 2세 때까지 그 일이 이어왔던 것입니다. 그 말은 북이스라엘에서는 한번도 참된 예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북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실 때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 즉 이웃 사랑과 관련하여 말씀하시지만 원리상 이웃 사랑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는데, 참된 예배가 아닌 거짓된 예배라는 것은 분명 하나님 사랑과 먼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심판의 경고를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북이스라엘이 아닌 북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 대하여 먼저 말씀하십니다. 1절에서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고 했기 때문에, 또 2절에서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른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내용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로 하여금 북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 대하여 먼저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먼저 오늘 본문 전체는 동일한 구조로 말씀하시는데, 어느 나라 혹은 어느 지역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그 죄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런 구조는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남유다를 향해서도 동일하고, 또 북이스라엘을 향해서도 동일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유는 죄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북이스라엘 주변 나라들로 하여금 확증하시면서 너희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주변 나라들을 보면 처음 세 지역인 다메섹, 가사, 두로는 북이스라엘과는 혈연적인 의미에서 전혀 관계가 없는 나라들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에돔, 암몬, 모압은 북이스라엘과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는 나라들입니다. 에돔은 에서로부터, 암몬과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으로부터 나온 족속들입니다. 북이스라엘과는 형제 나라이긴 한데 약간은 먼 친척쯤 되는 민족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남유다로 이어지는데, 남유다는 먼 친척이 아닌 매우 가까운 형제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로 하여금 멀리서부터 가까운 쪽으로 들어오면서 저들의 죄를 말씀하시고,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예외라고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본성 가운데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둔감한 것이 있습니다. 똑같은 죄인데도 다른 사람이 하면 죽이네 사네 하면서도 내가 하면 똑같이 적용하기보다는 나는 괜찮은 것처럼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부패한 본성으로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는 말씀도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본성을 깨뜨리시기 위해 북이스라엘에 앞서 주변국들을 먼저, 그것도 북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있어 전혀 상관없는 대상으로부터 시작해서 먼 친척, 그리고 형제 나라인 남유다까지 말씀하시고 난 뒤 북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내 주변에 있다고 할 때, 혹 그것이 어떤 죄로 말미암은 것이 드러났다고 할 때 함부로 비판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자면 저 사람의 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일이 있다면 내 눈에 있는 들보 때문에 벌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속히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직접적인 예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떤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을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마치 그들의 과거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잘된 일인 것처럼 하는 마음은 결코 신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역사에 있어 일본이 행한 일은 분명 죄요, 그 죄를 뉘우치지 않는 것은 더욱 더 큰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한국인 입장에서는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혹 하나님께서 그것 때문에 벌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웃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저들을 향해서는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불어 어떤 좋지 않는 일이 있다고 할 때 그 일이 늘 하나님의 형벌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욥의 고난과 같은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른다고 할 때 욥을 찾아왔던 세 친구들은 욥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있다는 것은 그런 고난의 이유로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논리로 있는데, 이런 부분도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조건 비판만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경우 비판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분명한 원인을 말할 수 있기 전에는 함부로 비판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잠언 24장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24:17-20) 로마서 1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특히 잠언 24장 20절, 그리고 로마서 12장 19절은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가 심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명확한 이유도 없이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악인의 형벌에 대해서 우리는 기뻐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땅한 자세는 악인이요, 원수일지라도 그런 형벌이 저들에게 임할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요, 그들을 향하여 선을 베푸는 데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공통된 부분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란 표현이 반복됩니다. 이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돌이키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단지 서너 가지 죄로만 심판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적은 죄로도 심판하시기에 충분하지만, 서너 가지 죄란 대표적인 죄요 그들의 완악함을 보여줄 수 있는 죄를 뜻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죄가 관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공동번역 성경은 ‘서너 가지 죄’를 ‘그 쌓이고 쌓인 죄’로 의역해서 번역하기도 하는데, 단지 세 가지나 네 가지 정도가 아니라 그만큼 죄가 관영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22절에서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고 할 때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일지라도 오래 참으십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 이하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15:13-16) 우리가 잘 아는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다, 정복하여 차지하게 된다는 것인데, 왜 이렇게 하시는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는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오래 참으시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죄가 관영했다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시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이 되었기 때문에 심판하시는데, 이때 모든 죄를 다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대표적인 것만 말해도 심판 받을 만큼 충분하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 저들이 정죄를 받는 이유가 하나님이 아닌 저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만 정죄의 원인은 정죄를 받는 사람에게 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유기하셨기 때문에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죄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고,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한 부분씩 살피겠는데, 먼저 다메섹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3절에서 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다메섹은 히브리어로는 아람이라는 나라, 헬라어로는 수리아(시리아)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한 나라의 수도를 말함으로 단지 그 나라의 수도만이 아니라 그 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말씀하시는데, 다메섹의 죄는 무엇인가? 3절 후반부에 보시면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서너 가지 죄로 말했지만 서너 가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한 가지만을 말하는데, 이런 점에서도 정확하게 서너 가지 죄가 세 가지, 네 가지를 열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대표적인 죄요, 그들의 완악함을 드러내는 죄를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메섹의 죄로 길르앗을 압박했다는 것은 아람 혹은 수리아라는 나라가 북쪽 이스라엘 지역을 계속해서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그렇게 했다는 것은 북이스라엘이 자신의 나라가 아님에도 마치 자기 땅처럼 타작하여 수탈해 갔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 시대로부터 대략 90년 전이지만 이런 다메섹의 죄에 대하여 엘리사로 하여금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8장 12절입니다. “하사엘이 이르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하는지라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그들의 성에 불을 지르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니” 그리고 이 일은 북이스라엘의 열 번째 왕인 예후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열왕기하 10장 32절과 33절입니다. “이 때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서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시매 하사엘이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에서 공격하되 요단 동쪽 길르앗 온 땅 곧 갓 사람과 르우벤 사람과 므낫세 사람의 땅 아르논 골짜기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과 바산까지 하였더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일이 여호와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왕기하 10장에서는 ‘이 때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서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시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아람 왕 하사엘이 북이스라엘을 친 것은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향한 징계의 손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아합에 이어 예후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지만, 예후는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여로보암 1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왕하10:31). 바로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시 아람 왕 하사엘을 사용하여 북이스라엘을 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모스 선지자로 하여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그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처럼 생각하는 그의 교만이요 완악함 때문입니다. 이사야 10장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앗수르에 대한 말씀이지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사10:5-7,1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하여 이방 나라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일 뿐인 그들이 마치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할 때 하나님은 그런 그들의 교만과 완악함도 결국 꺾으신다는 것입니다.
다멕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메섹의 죄에 대하여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4절과 5절이 심판 내용입니다.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벤하닷과 하사엘은 아람의 왕들입니다. 벧하닷에 이어 하사엘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 조금 전에 말한 엘리사 시대의 일인데, 하사엘의 집과 벤하닷의 궁궐이 불로 사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의 빗장을 꺾는다는 것은 다메섹이 아니라 강하게 방비되어 있다 하지라도, 그래서 그 빗장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꺾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땅이 황폐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게 될 것인데, ‘기르’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사에 대한 내용인데, 6절에서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가사 지역은 블레셋 족속 가운데 한 민족으로 블레셋 족속은 가사를 비롯하여 아스돗, 아스글론, 에글론, 가드 민족의 연합을 일컫습니다. 남유다에서 보자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과 남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가드 외에 다른 민족들의 이름이 다 열거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가사의 서너 가지 죄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민족만이 아니라 블레셋 전체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도 서너 가지 죄라고 말하고 있지만 한 가지 죄에 대해서만 언급하는데, 그 죄만으로도 심판 받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그 죄와 다른 죄들이 쌓이고 쌓여서, 다시 말해 죄가 관영해서 저들의 죄에 대하여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가사(블레셋)의 죄는 무엇인가? 6절 후반부에 보시면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가지게 됩니다. 단지 물품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종으로 삼는 일이 있는데, 블레셋은 그런 그들을 되파는 짓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모든 사로잡은 자’를 그렇게 했다고 전합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대표로 해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심판의 내용은 7절과 8절입니다.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가사 성에 불을 보내어 그 궁궐들을 사른다는 것, 또한 블레셋에 속해 있는 아스돗에서는 그 주민들이, 아스글론에서는 규를 잡은 자들이 끊어진다는 것은 철저히 블레셋의 모든 지역을 진멸하겠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블레셋은 다섯 민족의 연합 국가입니다. 그래서 가사가 망하면 그 옆에 있는 성으로 도망하고, 또 그 성이 망하면 그 옆에 있는 성으로 도망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사를 망하게 하시고, 아스돗을 망하게 하시고, 아스글론을 망하게 하시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망하게 하십니다. 가드가 여기서 언급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되는 겁니다.
세 번째로 두로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9절과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두로 역시 지중해 연안을 끼고 있지만 위치는 북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두로의 경우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 남과 북으로 갈라지지 않았던 통일왕국 시대 때는 이스라엘과 나쁜 관계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전 건축에 필요한 백향목을 비롯한 건축 자재와 장인, 그리고 노동자를 지원할 정도였습니다(왕상5장). 열왕기상 5장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고로 히람과 솔로몬이 친목하여 두 사람이 함께 약조를 맺었더라”는 말씀도 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두로를 향한 벌을 돌이키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두로의 죄는 무엇인가? 앞에 있던 가사의 죄와 같습니다. 9절 후반부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라는 부분입니다. 몇몇 견해가 있지만 대부분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그런 관계를 말한다고 봅니다. 특히 솔로몬 때는 조금 전에 본 것처럼 약조까지 맺게 되는데(왕상5:12), 칼빈은 이 견해보다는 다른 견해를 취합니다. 즉 두로가 형제인 줄 알면서도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하여 에돔에게 넘겨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에돔은 에서의 자손들로 야곱과는 형제입니다. 때문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형제 나라가 에돔인데, 두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을 에돔에게 팔아 넘겼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블레셋이나 두로가 남유다를 비롯하여 북이스라엘을 치고 난 뒤 그들의 물품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까지 팔아 넘겼다는 것인데, 아모스 앞에 있는 요엘 3장에 보면 블레셋, 두로만이 아니라 시돈도 그러했다고 말씀합니다.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가 보복하는 것을 내가 신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빼앗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으며 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그들의 영토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욜3:4-6) 이러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심판하시는데, 심판 내용은 10절입니다.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다메섹, 두로, 가사는 앞서도 말했지만 북이스라엘과는 혈통적인 의미에서 거리가 있는 나라입니다. 모든 인류가 아담의 자손이라는 측면에서는 한 혈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바벨탑 사건 이후 언어와 민족이 나뉘게 되면서 하나님은 특별히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이스라엘이라는 특별한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선택된 민족으로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야곱의 형 에서는 결국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에서의 족속이 에돔인데,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은 이런 에돔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에돔의 죄는 무엇인가? 11절 후반부입니다.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그러니까 형제 나라라 할 수 있는 남유다, 북이스라엘에 대하여 적의(敵意)만 품은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이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미워하기 때문에 아예 없애려고 하는 마음으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앞에서 가사와 두로가 남유다, 북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에돔에 넘겼다고 할 때 에돔은 형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는 일에 대하여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긍휼을 버렸다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조금의 긍휼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남유다,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조금의 동정심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적대시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항상 맹렬히 화를 낸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자신에게 잘못할 때만이 아니라 잘못하지 않아도 그 마음은 항상 남유다, 북이스라엘을 향해 화와 분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27장 41절에 보면 에서가 자신에게 올 축복을 야곱이 가로챘다는 것 때문에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물론 형을 피해 야곱이 도망하고 난 뒤 다시금 만날 때 에서는 야곱을 따뜻하게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에돔 나라가 남유다, 북이스라엘을 향한 마음이 이러하다고 할 때 그 마음은 에서의 이 마음과 다른 마음이 아닙니다.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돌이켜 부드럽게 만드셨지만, 에돔 나라는 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 대하여 악을 품고 있었던 겁니다. 이와 같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데, 심판의 내용은 12절입니다.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다섯 번째로 암몬에 대한 말씀입니다. 13절에서 1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에돔과 마찬가지로 암몬 자손과 이어 나오는 모압 자손도 남유다, 북이스라엘과는 먼 친척 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암몬과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으로부터 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그들을 향한 벌을 돌이키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암몬 자손의 죄는 무엇인가? 13절 후반부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다메섹의 죄에 대해서 말씀할 때도 길르앗이라는 지역이 나왔지만, 암몬 지역은 다메섹 아래에 있으면서 이스라엘 나라로 볼 때 요단 강 동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길르앗 지역과 인접해 있는데, 그래서인지 길르앗 지역이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암몬의 죄와 관련해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까지 갈랐다는 것을 말씀하는데, 자신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 잔인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합법적인 수단이 아닌 전쟁을 통해 자신의 영토를 확장했다는 것이고, 그런 과정 속에서 폭력과 약탈 등은 기본이고 그보다 더 잔인한 짓도 많이 행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암몬에 대하여 심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특히 전쟁의 날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데, 자신의 지경을 넓히고자 전쟁을 일으키고 그런 전쟁 속에서 잔인함을 나타냈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전쟁으로 되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의 외침이요, 비명인 것입니다. 또한 회오리바람의 날로도 표현되고 있는데, 그 일이 아주 급하고 강하게 임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왕, 지도자 할 것 없이 다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나라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모압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모스 2장 1절에서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음이라 내가 모압에 불을 보내리니 그리욧 궁궐들을 사르리라 모압이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 내가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며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죽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모압의 죄는 2장 1절 후반부입니다. “...이는 그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음이라” 암몬 자손에 대하여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른 것처럼, 에돔 왕의 뼈를 불살랐다는 것 역시 모압의 잔인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적의 시체를 파내어 그 뼈를 불살라 재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야만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심판하시는데, 2절과 3절입니다. “내가 모압에 불을 보내리니 그리욧 궁궐들을 사르리라 모압이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 내가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며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죽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불을 보낸다는 것, 그래서 궁궐이 사른다는 것은 전쟁이 있다는 것이고, 그런 전쟁으로 인하여 요란함과 외침, 나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압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죽을 것인데, 재판장과 지도자들이 죽는다는 것은 암몬처럼 그 나라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심판하십니까?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서너 가지 죄라고 말하고 있지만 저들의 죄로 지적하는 것은 다 한 가지만을 지적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한 가지 죄만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 죄가 그들의 죄를 대표하는 성격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죄는 어느 부분과 관련이 있는가 하면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은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이웃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 사랑이 아니라 이웃의 것을 빼앗기 위해 압박하는 것, 자신의 유익을 위해 팔아넘기는 것, 또한 형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긍휼이 아닌 화와 분으로만 대하는 것, 더 나아가 잔인하게 대하는 것 등이 죄로 지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죄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일부를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 사랑 자체는 그들 안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 그들은 그런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더러 알게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경외로 나아갔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모든 죄악이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대상, 북이스라엘은 어떠합니까?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들에게는 참된 예배가 없습니다. 참된 예배가 없는데 어떻게 참된 경건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사랑도 왜곡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만 왜곡된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있어서도 정상적으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 없이는 결코 바르게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2장 나머지 부분을 통해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를 지적하기에 앞서 북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은 완악한 우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문제는 완악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시기 위해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을 보기 보다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보면서 비판하는 자세로 일관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A라는 사람, 이 말씀은 B라는 사람에게 적용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든 말씀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특히 죄에 대한 말씀이 우리에게 증거 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의 정죄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죄를 가볍게 보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의 정죄가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죄를 가볍게 생각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한번도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그런 하나님 앞에서 죄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유로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합당한 이해와 자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이해와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악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의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볼 생각을 하지 마시고, 내 눈 속에 티보다 큰 들보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직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무감각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성과 죄와의 싸움은 우리가 평생 싸워야 할 영적 싸움의 첫 번째 대상이요, 유일한 대상입니다. 죽이고 죽여도 좀비처럼 다시금 살아나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이요, 죄입니다. 그런 부패와 죄는 말씀 없이는,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역사 없이는 이길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말씀 앞에서 늘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즉 너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않는다는 말씀, 그리고 그 벌이 불로 사른다는 모든 말씀은 분명 저들과는 달리 우리에게는 영원한 것과 관련해서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나 아닌 저들만을 위한 말씀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위한 말씀으로 알고 자신을 더욱 살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긍휼이 있는 것이고, 그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죄가 아닌 의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혹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일지라도 내가 모를 뿐 내 안에 그런 죄가 있을 수도 있으며, 또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어떠한 말씀이라도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지 마시고, 오히려 모든 말씀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여겨 죄에 대하여는 회개하시고, 또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구하는 자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