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영산기맥 1차(새재봉~장성갈재) 전남 정읍시, 장성군, 순창군. 산 행 일 : 2019. 11. 23.(토) 산행코스 : 대가마을~소둥근재~순창새재 + 새재봉(분기봉) ~ 530봉 ~ 장성새재 ~ 입암산 ~ 갓바위 ~ 시루봉 ~ 노령 ~ 벙커봉 ~ 장성갈재 (11.2km + 4.6km = 15.8km, 8시간 30분 소요) 산행참가 : 18백두
<산행지도>
영산기맥(榮山岐脈)은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이 분기하여 내려오다가, 조약봉에서 다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갈라지고, 호남정맥이 이어오다가 내장산의 순창새재로 내려서기 전의 새재봉(530봉)에서 분기하여 남서쪽으로 이어지며, 좌측으로 영산강과 우측으로 동진강을 가르고 영산강의 서북쪽을 호위하며 목포시 충무동 다순금 마을 앞의 목포만으로 잦아드는 도상거리 약 157.4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백암산 상왕봉(741.7m)에서 발원한 남창골의 물이 장성호를 이루고, 다시 황룡강으로 흘러서 나주를 적시며 영산강으로 유입되어 목포 앞 서해바다로 흘러든다. 이 영산강 물줄기의 북서쪽 울타리를 이루는 영산기맥은 비록 정맥에서 분기하였으나, 그 길이에 있어서나 산세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산줄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명칭이 산경표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많은 산악인들의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에 이미 1대간9정맥을 걸은 백두산우회가 영산기맥을 포함하여 기맥으로 분류된 중요한 산줄기들을 이어서 걸어보기로 하였고, 드디어 오늘 영산기맥의 첫걸음을 시작한다.
지난 주초에 갑자기 밀어닥친 추위와 잦은 비로 토요일 출발 예정인 영산기맥 첫산행에 대한 염려가 깊었으나, 다행이 산행을 하루 앞둔 금요일에 추위는 누그러졌고 날씨도 맑아질 것이라는 예보로, 가벼운 마음으로 내장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신갈에서 승차하겠다는 손총무님 내외분을 태우고는 어둠속을 달리는 버스에서 꿈나라를 들락거리는데, 고속도로를 벗어나 대가마을 방향으로 들어서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선다. 길가에 세워놓은 '차량진입 불가, 등산로 없음'이라 적힌 표지판을 보고 회차가 불가능 할까봐 멈춰선 것이다. 일단 대가저수지 개량공사로 짐작하고 공사장에서는 회차가 가능 할 것으로 추정하여 잠시 더 진행하자, 도로는 공사장으로 막혀있고, 공사장에서의 회차는 가능하다. 칠흙같은 밤중에 상황 파악이 않되는 상태라, 대가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막혀 있는지 여부는 파악할 도리가 없다. 버스를 돌려서 남창계곡으로 가서, 장성새재를 거쳐 영산기맥 분기점인 순창새재로 접속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사람이 사는 대가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를 아예 패쇄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하고, 좀 멀기는 하지만 걸어서 대가마을로 접근하기로 한다.
대가저수지 아래 저수지개량공사 현장에서 렌턴을 밝히고 산행을 시작하는데, 공사장에는 '출입금지', '낭떠러지 주의'등의 무시무시한 경고판이 즐비하다.
대가저수지 제방 옆을 지나니, 다시 옛 도로가 윤곽을 유지한 채 이어져 있다.
우측의 새로이 만들어진 포장도로를 두고 대가마을로 이어진 옛길을 따르다가, Y자 갈림길에서 대가마을로 이어지는 직진의 도로를 따라 신선봉을 다녀오기로 한 B팀과 헤어져, 순창새제로 향하는 A팀은 좌측 소로로 접어들어 잠시 진행하다가,
아래의 구도로가 저수지개량공사로 수몰되는지 위쪽에 새로이 만들어진 도로의 가드레일을 넘어서, 새로 난 도로로 들어서면,
이내 다시 좌측으로 소둥근재 방향 임도가 나온다.
차량 차단시설을 지나 완만하고 상태가 양호한 임도를 따르면,
장흥고씨 가족묘 입구를 지나게 되고,
하늘의 별이 총총하고 서늘한 공기가 청량감이 들게 하는 낙엽 쌓인 임도를 편안히 따른다.
따르던 임도 끝 지점을 가로막아선 허술한 목책을 우회하여 들어서면,
밤이라서 등로인지 계곡인지 조차 분간이 어려운 희미한 등로를 따르면,
좌.우로 순창새재와 까치봉 방향 표시가 있는 소둥근재 이정목이 나온다.
<소둥근재(430m)> 소둥근재는 내장산 신선봉과 까치봉 갈림길에서 호남정맥을 따라 백암산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591봉을 지난 갈림길에서 비탐구간으로 지정된 호남정맥 능선길을 두고 일반등산로로 들어서면 나오는 곳으로, 실재 소둥근재는 호남정맥 능선상에 있다. 소둥근재는 소죽음재, 소죽엄재, 소뒹군재, 소지갱이 등으로 불린다. 명칭의 정확한 유래는 알 길이 없고, 이름에서 대충 추측해 보면 짐을 가득 싣고 고개를 오르던 소가 뒤에 매단 마차의 짐을 이기지 못해 마차와 함께 뒹굴어 죽은 곳 정도로 추정될 뿐이다.
백두들의 기억에 남아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이정목 옆에는 '소둥근재 통노'라는 표석과, '고 주도식 추모' 동판이 나란히 있다. 백두들은 '백대명산 내장산에서 백암산으로(2006.10.28. 10:07)' 산행 때와, 호남정맥 10차(2009.5.9. 08:22) 산행에서 모두 두번 이곳을 지났다.
소둥근재에서 내장산 방향으로 진행하던 몇몇 분을 불러서, 좌측의 순창새재 방향으로 진행한다.
완만한 등로를 따라 순창새재로 진행하니,
꽤나 널찍한 고갯마루인 순창새재에 도착한다.
<순창새재(514m)> 전북 순창군 복흥면에 위치한 고개로, 10년 전 백대명산과 호남정맥 산행길에 지났던 고개로, 한참을 쉬어갔던 고개라 눈에 익어서 반갑기만 하다. 좌측으로는 백암산 상왕봉 가는 길이고, 직진을 하면 불바래기를 거쳐 장성새재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곳에서 영산기맥이 분기하는 새재봉(530봉)으로 가려면 우측의 출입금지 울타리를 넘어서 올라서야 하는데, 국공파들이 원래의 호남정맥길을 계곡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순창새재길'은 동학난을 일으킨 녹두장군 전봉준이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잡혀 우거(牛車)에 실려 한양으로 가던 길이다. 혹자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관군과 왜군에게 전주 전투에서 패하고 입암산성으로 몸을 숨겼다가, 다시 장성새재와 순창새재를 거쳐 순창으로 도피했었는데, 장군의 전(前) 부하의 밀고와 마을 사람들의 몽둥이 세례에 다리가 부러져 잡혔다고도 한다. 이곳 순창새재는 민초들의 나라를 꿈꾸며 혁명을 일으켰지만 끝내 좌절로 끝난 녹두장군 전봉준(1855 1895)의 한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으로, 전봉준의 이루지 못한 한(恨)을 새기면서, 그런 역사의 순간들이 후대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도 생각하며 순창새재에서 한참을 쉰다. 사실은 날이 밝아지기를 기다림.
호남정맥에서 영산기맥이 분기하는 새재봉은 이정표 뒤쪽으로 들어서야 한다.
내장산 신선봉이 잘 있는지 안부를 여쭈러 간 백두들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라, 남은 백두들이 호남정맥 순창새재에서 영산기맥 출발 인증을 남기고는,
순창새재를 뒤로하고 영산기맥 종주길에 나선다.
새재봉으로 이어진 낙엽이 수북한 능선에는 등로의 흔적이 희미하고,
백두 B팀들이 올라 있을 내장산 신선봉 방향에서는 아침 일출이 준비되고 있다.
호남정맥에서 영산기맥이 분기되는 새재봉 도착.
<새재봉(530m)> 전북 정읍시 입암면과 전남 장성군 북하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호남정맥에서 영산강 북서쪽을 막아서며 목포 다순금 마을까지 이어가는 157km의 영산기맥 대장정이 시작되는 의미있는 봉우리다. 하지만 내장산국립공원에서 출입을 금지시켜 놓아, 그 의미가 이직 알려지지 않은 봉우리다. 선답자의 산행기에 보면 "새재봉"이라는 표지가 걸려있었다는데, 지금은 표지기만 몇개 휘날리고 있을 뿐이다. 사실 '새재봉'이란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이름인지 아니면 최근에 영산기맥을 걸은 산꾼이 명명하였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세상에 원래부터 있던 이름은 없었고, 모든 이름이 누군가가 붙여놓은 이름이니, '새재봉'이란 이름도 그렇게 영산기맥 분기봉이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좋은 일이라 본다.
영산기맥 분기봉인 새재봉을 지나는 백두들.
새재봉을 넘어서자 산죽이 빼곡한 능선으로 등로가 이어지며, 앞쪽으로는 좌측으로 우회하여야 하는 커다란 암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가늠된다.
등로는 제법 가파르게 고도를 낮추어,
둥그런 안부를 지나면,
암봉을 향한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진다.
돌아본 새재봉 방향.
암봉 직전까지는 그런대로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지만,
거대한 암봉을 만나서는 암봉을 좌회하여 지나야 하는데, 이곳부터는 등로가 희미하여 진행이 더디게 된다.
거대한 암봉에서 이어지는 암릉이 역암으로 되어 있어서 혹여나 바위가 떨어지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
암봉을 좌회하며 돌아본 내장산 방향으로 이침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우측으로 암봉에서 이어진 바위 절벽을 두고 사면을 따라 진행하는데,
사면에는 선답자의 족적이 희미하고 이리저리로 얽혀 있어서, 길 찾기가 쉽지 않으므로,
대충 우측의 암벽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면을 따라 진행한다.
암봉 남쪽 아래 새재골 골짜기에 오지마을인 불바래기가 있으며, 남쪽 방향으로 넓게 자리한 남창골 지계곡이 주변 산들로 빙 둘러져 있다.
<불바래기> 전북 정읍시 신정동에 행정구역을 둔 곳으로, 황토로 된 집과 비닐하우스가 있다. 장성새재에서 순창새재로 가는 길의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불바래기'는 내장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오지마을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 단 한 가구만 살고 있다. 불바래기란 이름은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 있는데, '옛날 화전을 일궈서 살던 시절 밭을 만들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것과, '가을 단풍 때면 온 산이 불에 타는 듯 붉어 붙여진 것'이라는 유래가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화전을 일궈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짐작한단다.
낙엽으로 덮여버린 족적을 찾아 이리저리로 헤매는데, 선답자가 걸어놓은 표지기가 무척이나 반갑다.
표지기가 있다고 뚜렷한 길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별반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그나마 영산기맥을 걸은 선답자의 흔적이라서, 나의 위치도 기맥에서 그리 벗어나 있지 않음에 안도한다.
좌전방 입암산성이 자리한 능선이 아침햇살에 붉게 물들며 따스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사면의 바위 너덜을 피하여 아래위를 오르내리다가,
다시 주능선에 접속하자, 뚜렷한 등로가 반갑기 그지없다.
길 없는 곳이 힘들지, 험해도 길이 있으면 그다지 곤란하지는 않다.
네이버 지도에 '새재'로 표시된 안부를 지나는데, 좌.우로 희미한 등로의 흔적이 남아있다. 아마도 좌측 불바래기에서 우측 의주암골로 이어질듯 보이는데, 양쪽 모두 경사가 무척 급해 보인다.
우측 정읍시 신정동 의주암골 방향.
다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서면,
우전방으로 능선 분기봉인 530봉에서 삼성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가늠되고,
뒤쪽으로는 잠시 전에 우회한 568암봉 너머에서 밝은 아침해의 솟구침이 느껴진다.
삼성산 갈림봉 전위봉인 540봉에서 바라본 내장산 서쪽 능선의 봉우리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가늠된다. 좌측부터 망해봉, 연지봉, 까치봉, 신선봉으로, 모두 백두들이 이미 가 본 봉우리들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낙엽이 푹신한 등로 한켠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이제 아침식사는 거의 모두가 빵과 떡 등의 간편식이라, 굳이 너른 공터가 필요치 않다.
된장국이 있는 도시락을 고집하던 영식형님 조차도..ㅋ
손이 시리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금 영산기맥길 잇기에 나선다.
530봉에서 직진의 뚜렷한 삼성산 방향 능선길을 두고, 좌틀하여 장성새재를 향한 영산기맥길로 들어선다.
거의 평지 수준의 평탄한 능선이 이어지며 꽤나 큰 규모의 묵묘를 연이어 지나고,
돌축대의 흔적이 있는 535봉쯤을 지나는데,
내장산 위로 떠오른 태양이 한층 따스한 열기를 전해온다.
소나무숲이 널찍한 541봉쯤을 지나는데,
좌측으로 내장산의 봉우리들이 가늠되고,
장성새재를 향한 가파른 내림길이 시작된다.
작은 암릉을 좌회하여 내려서는데,
골짜기 건너편으로 올라야 할 입암산 능선이 조망된다.
무척 가파른 내림길에 낙엽이 수북이 덮여 있어서 여간 미끄럽지가 않고,
작은 너덜 위를 덮은 낙엽으로 발을 헛디딜 위험도 있어 보인다.
등로의 흔적이 묘연한 낙엽 수북한 사면을 내려서면,
널찍한 수레길이 교차하는 장성새재에 도착한다.
<장성새재/월은치(月隱峙, 347m)> 전남 장성군 북하면과 전북 정읍시 임암면을 넘나드는 고개로, 이 길은 옛 선조들이 장을 보러 가거나 한양에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정읍으로 가기 위한 지름길로 이용하던 고개였다. 새재라는 이름은 '새의 목처럼 잘록하게 생겨서', '새도 쉬어 넘기 때문에', '샛길(間路)이라는 뜻'으로 새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길로 통행하는 사람들이 많아 주막도 있었으나, 1960년대 말부터 사람들이 떠나고 군사용 도로로만 이용하다가 지금은 차량 통행을 막고 숲속 탐방로로만 이용되고 있으며, 한국의 걷기 좋은 옛길로 자추 추천되는 장성새재길이 지난다. 예전에는 달도 숨어 안 보일 정도를 깊은 고개란 뜻으로 월은치(月隱峙)라고 불렀으며, 조선시대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와 대동방여전도 같은 고지도에도 표기되어 있다.
장성새재에 도착하는 백두들.
오늘의 난코스 세 곳 중에서 한 곳을 어렵잖게 지났다는 안도감이 묻어나는데, 남은 난코스 두 곳인 입암산성 오름길과 시루봉 내림길 중에서 입암산성 오름길도 거뜬히 걸으려 간다.
장성새재를 뒤로하고 낙엽이 푹신한 남창골 방향 장성새재길을 잠시 따르면,
월은치 안내판과 출입금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곳이 나오는데, 우측 출입금지 표지판 뒤의 울타리를 넘어 입암산성 방향 오름길로 들어선다.
월은치에서 우측 입안산성 방향으로 들어서는 백두들.
솔잎 향기가 눈과 코로 물씬 풍겨오는 완만한 오솔길이 이어지더니,
다소 경사가 급해지며 광산김씨 묘지를 지나는데,
묘지 우상부에 가지치기를 위해 급조한 사다리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도 길이 있지만 고생길인 듯 보이고, 정상 등로는 묘지 좌측 상단부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 능선의 좌측 사면으로 오르게 된다.
커다란 바위와 산죽들이 덮고 있는 가파른 사면길을 오르면,
낙엽이 수북이 쌓인 가파른 비탈길이 이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산죽밭길을 힘겹게 올라서면,
다시 영산기맥 능선에 올라서게 되고, 기맥길은 좌측 오름길로 이어지지만, 우측에 조망이 트이는 전망바위를 들리기로 한다.
대문인 듯 자리한 바위를 지나 들어서면,
내장산과 백암산 방향 조망이 멋진 전망바위가 있다.
내장산은 최고봉인 신선봉(763m)을 비롯한 9개의 봉우리가 말밥굽처럼 울타리를 친 산이며, 백암산(백양산)은 상왕봉(741m)을 비롯한 5개의 봉우리가 백양사를 품고 있는 산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봄 도다리 가을 전어' 또는 '춘 마곡 추 갑사'하면 떠 올리는 것처럼, 내장산과 백암산를 두고도 옛부터 '봄 백양 가을 내장', '산은 내장 고적은 백암', '산은 내장 절은 백암' 등등으로 회자되고 있는 산(山)이다.
이제 해는 백암산 위로 옮겨져 빛나고 있다.
내장산 신선봉 방향의 새재골 방향 조망.
남창골은 몽계폭포에서 내려오는 하곡동골, 불바래기에서 내려오는 새재골, 입암산성 마을을 통해 내려오는 산성골과 갓바위에서 흘러내린 은선골 등의 네 계곡물이 합해져 황룡천을 이룬다. 이 물은 장성호에 잠시 머물고는 황룡강이란 이름으로 흐르다가 나주에서 영산강이 된다. 남창계곡은 정확히는 산성골·은선동계곡·반석동계곡(새재계곡)·하곡동계곡·자하동계곡·내인골 등 6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곳곳에 크고 작은 폭포와 소(沼)가 자리 잡고 있다. 각 계곡마다 폭포와 기암괴석을 거느리고 있어 마치 선계(仙界)에 들어선 착각을 일으킨다. 남창계곡의 남창(南倉)이란 산성의 남쪽에 있는 창고라는 뜻으로, 입암산성에서 사용할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이며, 옛 창고 자리에는 전남대 수련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등산객들은 은선동 계곡을 지나 갓바위로 오르나, 일부 영산기맥꾼들은 기맥의 분기점인 순창새재로 가기위해 장성옛길을 따라 장성새재에서 순창새재로 올라서기도 한다.
백암산 상왕봉 방향.
살짝 당겨본 순창새재 방향의 새재골에 오지마을인 불바래기가 있다.
<불바래기(330m)> '불바래기'는 내장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오지 마을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전북 정읍시 신정동에 행정구역을 둔 곳으로, 황토로 된 집 두채와 가건물로 이루어진 한 가구가 주거하고 있다. '불바래기'란 이름은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 있는데, '옛날 화전을 일궈서 살던 시절 밭을 만들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것과, '가을 단풍 때면 온 산이 불에 타는 듯 붉어지는 곳'이라는 유래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화전을 일궈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란다.
전망바위를 뒤로하고 다시 능선길로 들어서서 잠시 오르면,
정읍과 삼성산 방향으로 조망이 멋진 또 다른 전망바위가 나온다.
정읍 방향.
바위 절벽과 울룩불룩한 산그림이 멋진 삼성산 방향.
내장산 망해봉은 어디에서 보아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다시 오르막 능선길을 잠시 오르니 관리가 안되어 무너진 채 방치된 입암산성 651봉이 나오고, 영산기맥은 무너진 산성으로 올라서서 우측 입암산 정상 방향으로 산성을 따라 이어진다.
<입암산성(笠岩山城)> 전남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에 있는 고려시대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으로, 노령 동쪽 약 4km 지점인 입암산(654.8m)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계곡을 감싸고 있으며, 기암단애가 많고 산세가 험준하여 옛날부터 전략요새로 알려진 곳이다. 총길이 약 15km, 높이 3m의 협축(狹築: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음)으로 쌓아 성벽의 내외가 수직에 가까우며, 이 산성은 형태가 상봉을 둘러싸듯 하였고, 지금도 남문과 북문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이곳 전라도까지 쳐들어오자 1256년(고종 43) 3월에 송군비(宋君斐)가 이 성을 지키면서 큰 전과를 올린 곳이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는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수축한 바 있다. 한편 정유재란 때에 이곳 성의 별장인 윤진(尹珍)이 왜적과 싸우다 순직하기도 하였다. 이후 1653년(효종 4) 장성현감 이유형(李惟馨)이 성의 폭을 넓히고 넓은 곳을 높이 쌓았다. 성의 축성법은 협축으로 성벽 내외가 수직에 가까우며, 넓은 계곡과 산세를 잘 이용하였다. 입암산성의 최초 축성시기는 삼한시대 이전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후백제시대 나주를 왕건에게 점령당한 견훤의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던 곳으로, 고려 고종 43년(1256년) 몽고 6차 침입 때의 격전지였음이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말 몽고에 대항할 때,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을 물리친 성으로도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에 맞서 대항하던 윤진 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4곳의 포루와 2개소의 성문, 3개소의 암문이 있었으며, 9곳의 연못 외에 샘 14곳이 있다.
입암산성 성곽 모습.
입암산성 651봉으로 올라서,
후미들의 두번째 난코스 통과를 기다린다.
모두들 651봉 입암산성에 도착하여 가파른 오름길의 땀방울을 한 조각 과일로 닦아낸다.
651봉을 뒤로하고, 입암산 정상을 향해 북쪽 능선으로 이어진 입암산성을 따르는데,
입암산성은 방치된 채 잡목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산성 위를 걷는데도 쉽지가 않다.
돌아본 내장산과 백암산 방향.
돌아본 입암산성 651봉 방향.
입암산 정상부에 올라서니 우측 내장산 방향으로 시야가 트이며, 새벽에 순창새재에서 출발하여 걸어온 영산기맥 능선이 한눈에 가늠되고,
내장산과 백암산의 최고봉들이 한 방향으로 조망된다.
지나온 입암산성 651봉 방향.
남서쪽 시루봉 방향으로는 산성골이 발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내장산 신선봉을 배경으로.
북서쪽 정읍 방향.
동쪽 내장산의 연봉들과 백암산 상왕봉 조망.
남쪽 651봉과 병풍산 방향.
남서쪽 시루봉 방향.
서쪽 방장산과 입암산 갓바위봉 방향.
입암상 정상부는 잡목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입암산(笠岩山, 654.3m)> 전북 정읍시 입암면과 전남 장성군 북이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입암산성 성곽이 지나는 산 정상에는 잡목만 무성하고 제대로 된 정상석조차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다행히 '입암산'을 알리는 코팅지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어서 입암산 정상임을 알 수 있을 뿐, 입암산 정상은 내장산 국립공원임에도 불구하고 출입금지된 곳이라서 그런지 명성에 비해 초라하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이런 정도의 산성이 아직 제대로 발굴 보존되지 않은 곳은 입암산성뿐일 듯 짐작되어 조속한 발굴과 보존이 이루어져 일반인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장소가 되었으면 할 뿐이다. 입암산은 내장산국립공원의 일부로 국립공원의 서북쪽인 장성군에 있으며, 입암산성(笠岩山城)은 삼한시대에 축성되었으며 몽골의 침입에 저항하던 곳이었고, 정유왜란때 왜구의 침입에 저항하였으며, 조선말 동학농민운동시 녹두장군으로 불리던 정봉준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후 잠시 이곳에 몸을 숨졌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장성 입암산 갓바위와 상봉은 정읍시 입암면과 전남 장성군 북하면의 서부지역으로, 내장산국립공원의 경계에 위치하고 주위에 축성한 백제 때의 입암산성과 더불어 내장 6봉, 백양 3봉과 함께 호남의 손꼽히는 명승지이다. 내장산 11봉과 백암산의 6봉을 비롯해서 이 입암산 지역을 통틀어 내장산국립공원으로 일컫고 있으나, 내장산과 백암산의 명성에 가려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각양각색의 기암괴석과 크고 작은 폭포와 소, 울창한 숲으로 천연의 신비경을 간직하고 있어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그 외에도 내장산에 못지않는 가을 단풍은 찾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입암산 정상에서 올여름 올랐던 불태산을 바라보며!
서쪽 방장산 방향 넓은 화면.
북서쪽 변산 방향.
서쪽 선운산 방향.
남서쪽 시루봉과 방장산 방향.
남남서쪽 산성골 조망.
남쪽 병풍산과 불태산 방향.
입암산 정상에서 본 조망! (10:19 동영상 33")
입암산 정상을 뒤로하고 입암산성 북문을 향하는데,
우측으로 삼성산의 멋진 절벽이 내려다 보이고,
우전방으로는 갓바위가 어서 오라 손짓한다.
북서쪽 방향으로 산성을 따라 진행하다가, 산성의 열린 통로(암문)가 나오며, 영산기맥은 입암산성을 따라 서쪽으로 꺾어서 북문을 향하게 된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한우재를 지나 오봉산으로 이어지는데, 오봉산은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서 그리 불려진다.
영산기맥이 입암산성을 따라 북문이 있는 서쪽으로 휘어지는 지점 좌측 아래로 널찍한 조망바위가 나오며, 가야 할 갓바위봉으로 이어지는 영산기맥 능선이 한눈에 가늠된다.
갓바위가 자리한 영산기맥 능선 너머로 방장산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고, 2006년 빼빼로 날에 올랐던 선운산도 가늠된다. 선운산의 꽃무릇은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ㅉㅉ
선운산과 변산 너머에는 황해가 드넓게 펼쳐져 있을 터!
살짝 당겨본 변산반도 방향.
갓바위를 배경으로!
카멜레온이라도 된 양 바위에 몸을 숨기고 있는 손점장을 찾아서,
멋진 가을날의 한 순간을 추억으로 만든다. "청년 아빠와 흰머리의 아들!"
암문의 흔적으로 보이는 곳을 지나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곽의 흔적을 더듬으며 내려서면,
우측 아래로 만화제 방향 갈림길이 있는 입암산성 북문에 도착한다.
입암산성(笠岩山城) 북문에서 영산기맥은 직진의 갓바위 방향이다.
입암산성 남문이 있는 남창계곡 방향으로는 등로가 잘 나 있다.
내장산국립공원은 전북 정읍의 내장산과 전남 장성의 백암산, 입암산의 3개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백암사무소가 장성의 백암산과 입암산을 관리하고 있다. 내장산국립공원은 20개 국립공원 중 8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이지만, 그중 남창지구의 입암산은 내장산과 백암산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진 곳이다. 특히 입암산은 중부 이북의 등산인들에게는 낯설지만, 호남 등산인들에게는 오래전부터 명성이 자자해 겨울철이면 내장산 못지않게 아름다운 설경으로 인기를 끄는 산이라고 한다. 현재는 산성골과 은선골 그리고 갓바위봉 능선만이 개방되어 있다.
입암산성(笠岩山城) 북문(540m) 이정표.
오늘 영산기맥 순창새재~장성갈재 구간 중에서, 그나마 법으로도 정해진 구간인 입암산성북문~갓바위~등천리갈림길 구간으로 들어서면,
갓바위를 향한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지는데, 확실히 법으로도 정해 놓은 구간의 등로가 걷기에 훨씬 편하기는 하다.
좌전방으로 갓바위가 보이고,
입암산성의 건물지로 보이는 돌담 흔적도 지난다.
뒤쪽으로는 잠시 전에 지나온 입암산 좌측으로 내장산 망해봉도 살짝 보이고,
이제 갓바위가 정면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좌측으로 널찍한 건물지 공터를 지나면,
거북바위로 오르는 데크목 계단이 나타나는데, 거북바위는 거북의 머리와 목에 해당되고, 우측의 봉우리가 거북의 몸통쯤으로 보인다.
적군을 저승으로 인도한다는 거북바위 설명판.
올려다본 거북바위 모습.
내가 보기에는 공룡 머리로 보이는데..ㅉ
거북바위의 뒤통수 모습.
거북바위 뒤쪽 거북 몸통 봉우리에 올라서 바라본 남쪽 병풍산 방향.
남서쪽 시루봉과 방장산 방향.
갓바위봉 모습.
북서쪽 두승산 방향. 두승산 너머에 부안과 김제가 자리하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인다는 김제평야가 펼쳐진다.
입암산 시루봉과 방장산 사이의 안부인 노령은 전남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도로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데, 국도 1호선은 물론, 호남선철도와 KTX호남선, 호남고속도로가 모두 노령 아래 터널로 지나간다.
갓바위봉 모습.
도로 전시장인 노령과 오늘의 목적지인 장성갈재가 보이고,
오늘 영산기맥 첫번째 구간의 최대 난코스인 시루봉 내림길 위험구간의 암봉들이 가늠된다.
일단 이곳 갓바위에서 시루봉 정상으로 이어지는 영산기맥 능선은 그나마 완만해 보인다.
갓바위로 오르는 데크목 계단에는 백두들이 오르고 있다.
갓바위봉 정상 도착.
<갓바위봉(631m)> 전북 정읍시 입암면과 전남 장성군 북이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읍 쪽에서 바라보면 갓(草笠)을 쓴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서 '갓바위'라 부르며, 입암산(笠岩山, 654m)이란 이름은 이 바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옛 지도에는 이곳을 입암산이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한데, 입암산 정상과 갓바위를 잇는 능선 상에는 조선 효종 때 개축한 입암산성이 있다. 전국에서 단풍으로 가장 유명한 내장산과 백암산 능선 바로 서쪽에 위치하여, 내장산과 백암산의 유명세에 덮여 명함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는 산이다. 하지만 갓바위 정상에 오르면 그야말로 일망무제다. 지나온 내장산 구간과, 발아래로는 호남고속도로와 호남선 철도, 그리고 멀리로는 선운산과 변산반도가 아련히 시야에 들어온다. 전망대 아래로는 꽤나 큰 입암저수지(전북 정읍시 입암면 소재)가 내려다 보이고, 국도 1호선과 호남고속도로는 물론 호남선철도와 KTX호남선이 나란히 지나는 모습이 내려다 보이며, 맑은 날에는 저 멀리 변산반도 너머로 새만금 간척지도 가물가물 보인다고 한다. 전라남.북을 잇는 고속도로, 철도, 국도가 모두 산 서쪽 갈재협곡을 지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인 입암산 주위에 축성한 입암산성은 총연장 5,208m의 석성이다. 남쪽을 제외한 3면이 급경사를 이룬 천혜의 요새지로, 고려 때는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을 격퇴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윤진 장군이 왜장 소서행장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역사의 현장이다.
입암산 갓바위 정상에서 본 조망! (11:05 동영상 59")
갓바위 정상에서 선운산을 배경으로.
뒤쪽 멀리로 보이는 선운산의 모습이 13년 전의 추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갓바위 전망대!
시루봉과 방장산 사이로 노령과 장성갈재가 가늠된다.
선운산과 곰소항 방향.
동남쪽 백암산 방향.
남쪽 병풍산과 불태산 방향.
남서쪽 노령과 고창 방향.
서쪽 방장산과 선운산 방향.
서북쪽 곰소항 방향.
북서쪽 변산 방향.
북쪽 두승산과 정읍 방향.
넓게 본 선운산과 변산반도 방향.
북서쪽 변산반도와 두승산 방향.
북쪽 두승산과 정읍 방향.
인생 뭐 있어!
앞쪽으로 내장산과 백암산의 쬐끔씩 보이는 봉우리들을 보면서, 시루봉을 향해 갓바위를 돌아서 내려서서 우측의 주차장 방향으로 들어서는데,
저기 저 봉우리가 시루봉이고, 오늘 최고의 난코스인 우측의 뾰쪽뾰쪽한 3개의 암봉이 만반의 방어태세를 갖추며 기다리고 있다. 그런다고 포기할 백두가 아니지!!!
데크목 계단을 따라 갖바위를 내려서서 좌회하면,
갓바위에서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접속하게 되고, 뒤쪽으로 갓바위가 올려다 보인다.
거대한 바위들이 있는 곳은 위험하니 들어가지 않고,
모처럼 법으로 정해 놓은 등로를 따라 편안히 내려선다.
우측으로 낭떠러지가 있는 바위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고,
방장산 방향으로 조망이 멋진 조망바위도 좌회하여 내려선다.
뒤쪽으로 갓바위가 궁금하여 슬쩍 보았다가,
갓바위를 한껏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다소 완만해진 능선길을 따라 편안히 내려서면,
노령역이 있는 등천리 방향 갈림길이 나온다.
오늘 걸어야 할 운동량은 이미 달성한 상태이고 멋진 조망도 즐긴 백두들은 입암저수지를 향해 등천리 방향 갈림길로 들어서고, 남은 두 명의 백두는 이어야 할 영산기맥을 잇기 위해 직진의 시루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은선골 갈림길 쉼터가 나오고,
<은선골 갈림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주차장 3.8km' 방향은 산성 울타리 바깥쪽의 은선골로 해서 남창주차장으로 가는 등로이다. 현 지도에는 표시가 되어있지않지만 옛지도에는 산성마을 안쪽은 성내리(城內里), 은선골은 음선리(隱仙里)로 표시한 지명이 보인다.
은선골 갈림길에서 정규 등로는 좌측 주차장 방향의 은선골로 이어지고, 영산기맥 능선은 직진 방향의 시루봉을 향해 '등산로 아님'으로 이어진다. 또다시 비법의 길로!
역시 법으로 정하지 않은 등로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래도 앞쪽으로 보이는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완만하고, 그나마 뚜렷한 등로가 이어져 진행에 큰 어려움은 없다.
완만한 능선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동쪽 내장산 방향 조망.
입암산 방향.
백암산 상왕봉 방향.
잠시 더 진행하니, 이번에는 우측 방장산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 전망바위가 나온다.
입암저수지 방향.
제주에 계신 종협 형을 그립게 하는 나무!
완만한 산죽 덮인 능선에 나타나는 작은 절벽(시루봉)을 우측으로 올라서면,
지나온 갓바위와 입암산 방향 조망이 시원하게 트이고,
내장산 신선봉과 백암산 상왕봉이 형제봉 인 듯 보인다.
살짝 당겨본 갓바위봉.
신선봉과 상왕봉.
시루봉 정상부에 도착하니, 남쪽 지능선 방향의 갈림길이 나오는데, 노령 방향의 영산기맥은 우측 시루봉 정상부 쪽으로 이어진다.
어디가 정상인지 전혀 구분이 안 되는 시루봉 정상부의 조릿대 지역이 나오며, 시루봉 정상부의 너럭바위가 보인다.
<시루봉(649m)> 전북 정읍시 입암면과 전남 장성군 북이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멀리서 보면 떡시루처럼 보인다고 해서 시루봉이라고 부르는데, 정상에는 잡목과 산죽으로 뒤덮여 있고, 시루봉의 동쪽과 서쪽 가장자리에 조망이 트이는 전망바위가 있다. 시루봉을 지나 노령 방향 능선에는 뾰족하게 생긴 3개의 암봉이 있는데, 입암면 사람들은 시루봉을 어른봉이라 하고, 3개의 뾰쪽암봉들을 애기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시루봉 정상부 모습.
뭐 이 정도면, 나무에 잎이 달려있는 계절이면 동서남북 조차 분간키 어렵겠다.
그래도 시루봉 서쪽 끝 등로 좌측에는 남쪽 장성 방향으로 조망이 트이는 전망바위가 있다.
남쪽 장성호 건너편에 있는 병풍산 방향.
남서쪽 장성군과 고창군 방향.
<장성군(長城郡)> 전라남도의 가장 북단에 위치한 군으로 동쪽은 순창군과 담양군, 서쪽은 고창군과 영광군, 남쪽은 광주광역시, 북쪽은 전라북도 정읍시와 고창군에 접하고 있다. 군 전체가 대부분 산지를 이루며 영산강 최상류인 황룡강과 장성호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산출기가 뻗어 내려오며, 그 한줄기인 북서쪽의 산줄기는 고창군과 영광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장성갈재(일명 노령(盧嶺)에서 태청산(太淸山)으로 이어지는 북동-남서 산줄기이고, 또 하나는 순창군과 담양군의 경계를 이루며 노령에서 도장봉(459m)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이다. 이는 남서 방향으로 이어져 병풍산(屛風山, 826m), 불태산(佛台山, 636m) 등을 이룬다. 영산강의 상류 지류인 황룡강이 북동~남서 방향의 구조선을 따라 흐르고, 북하천·약수천·개천·동화천 등의 지류들이 산지 사이를 흐르면서 들을 이루고 이곳에 마을이 입지 한다. 노령을 중심으로 각 고속국도 및 철도의 관문이다. 금성산성과 백양사가 유명하며 홍길동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지명은 산세가 깊고 성곽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유래되었으며, 고려 시대부터 지명이 사용되었다. 백제 시대에는 고시이현(古尸伊縣, 현 장성), 구사진혜현(臼斯珍兮縣, 현 진원). 소비혜현(所非兮縣, 현 삼계)으로 이루어진 군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고시이현이 갑성군(岬城郡)으로, 구사진혜현은 진원현으로, 소비혜현은 삼계현으로 개칭되어 무진주 관할이 되었으며, 940년(고려 태조 23)에 갑성군을 장성군으로 고쳐 처음 장성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장성군과 삼계현은 영광군의 속현이 되고, 진원현은 나주목에 속했다. 1413년(태종 3)에 장성은 나주목의 관할이 되고, 진원은 장흥도호부의 관할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본래는 백제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고쳐서 갑성군(岬城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는 지금 이름으로 고쳐 영광군에 붙였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현감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문헌의 「동람도」에는 장성과 진원이 분리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를 보면, 황룡강 물줄기를 중심으로 산출기 남북방향으로 뻗어내려오는 것이 뚜렷할 정도로 산지가 많다. 고시미(古尸伊), 갑성(岬城), 오산(鰲山), 장성(長城)이 모두 '산울타리의 골짜기 고를'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산이 둘러있고 불이 굽이쳐 스스로 하늘이 이루었네"라는 조종생의 시에 산지가 많은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1895년(고종 32)에 군제 실시로 장성군이 되었다.
시루봉에서 홀로 인증을 남긴다.
가야 할 방장산 방향.
백양사 IC 방향으로 뻗은 호남고속도로가 멋지게 조망되고,
남쪽 장성호와 백양사역 방향으로 이어진 호남고속도로와 국도 1호선이 나란히 조망된다.
살짝 당겨본 불태산 방향.(지난여름에 갔었는데..ㅉㅉ)
시루봉 전망바위를 뒤로하고 조릿대가 자라난 급경사 내림길로 들어선다.
워낙 경사가 급하여 내려서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뒤쪽의 인기척에 돌아보니 새벽에 대가마을에서 헤어졌던 서여사님이다. 내장산 신선봉을 다녀왔는데, 예상보다 빨리 따라온 듯 보여, 따라오느라 땀께나 흘렸을 듯하다.
첫번째 암봉 직전 안부에서 등로는 우측 사면으로 급하게 내려서야 하지만, 암봉에서의 조망이 좋다 하여 서여사님과 함께 직진하여 시루봉의 애기봉인 첫번째 암봉으로 오른다.
시루봉의 애기봉인 첫번째 암봉에서 본 가야 할 장성갈재와 방장산 방향으로 두번째 암봉도 보인다.
남쪽 장성 방향 조망.
변산 방향 조망.
방장산을 배경으로.
시루봉 애기암봉에서 본 조망! (12:21 동영상 55")
영산기맥 다음 구간에 가게 될 방장산의 멋진 모습을 한번 더 담고,
다시 암봉 직전의 안부로 돌아 나와, 수직의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희미한 족적을 쫓는다.
첫번째 암봉 직전 안부에서 우측으로 우회를 하는데, 경사도가 최상급 스키코스보다 훨씬 가팔라서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만약 뒷사람이 작은 돌멩이라도 굴리게 되면 바로 앞사람의 머리로 떨어질 듯 보여, 스틱보다는 나무에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드디어 내장산 신선봉으로 나들이 갔던 B팀 백두들이 합류하여 함께 급경사를 내려선다.
뒤따라온 백두들이 얼마나 쉼 없이 달려왔던지, 보자마자 어디에서 목이라도 축이자며 아우성을 친다.
좌측에 암봉과 바위 절벽을 두고 우회하는데, 워낙 급경사에 선답자들의 족적이 이어지지를 않아서 등로를 찾는데 애를 먹는다.
길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아, 대충의 방향을 잡고 단지 감에 의지해서 진행을 해야 하는 곳도 있다.
암봉 절벽에서 너무 많이 내려간다고 느낄 정도로 아래쪽으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다시 우측의 주능선으로 가파르게 올라서고,
그렇게 암봉을 우회한 지점의 주능선에 다시 접속하게 된다.
주능선에 접속하니 빠꼼히 몇 사람이 둘러앉을 수 있는 곳이 있고, 조망도 트이는 곳이라 자리를 잡고 배낭털이를 한다.
방장산 방향 조망.
가야 할 노령과 장성갈재가 발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내장산 신선봉 답사를 갔던 분들은 앞사람들을 따라잡느라 다리에 출현한 쥐를 잡을 겨를도 없이, 심지어는 목도 축이지 못하고 달려오다가, 드디어 나를 만나 엄동설한에 꽃을 본 듯하다며..ㅉㅉ
10여 분간의 꿀 같은 쉼을 하고는, 다시 암릉을 좌회하여 내려서는데,
잠시 전의 우회길 보다는 등로가 뚜렷하여 주의만 한다면 어렵사리 내려설 수 있다.
절벽 옆 좁은 통로를 지날 때면 가슴이 쪼그라들기도 하지만,
이제는 조망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여유도 찾는다.
잡목이 자라난 암릉을 조심스레 내려서고,
다시 급경사의 우회길을 내려서면서도,
가끔씩 선답자들이 매달아 놓은 표지기를 발견하고는,
한결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는다.
엉덩이를 깔고서 미끄러져 내려야 하는 우회길도 지나고,
다시 주능선에 접속하는가 싶으면,
또다시 앞을 막아서는 바위에 막혀 좌회길로 들어선다.
이제 등로는 급경사 사면으로 'Z'자로 이어져 한결 쉽게 느껴지고,
작은 암봉을 좌회하여 내려서면,
축대의 흔적이 보이며 한결 완만해진 능선 등로가 뚜렷이 이어진다.
파묘의 흔적이 있는 묘터를 지나며 돌아본 시루봉 방향.
잡풀이 무성한 또다른 묵묘를 지나며 편안해진 능선 등로를 따르다가,
노령 절개지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우측 입암면 방향 갈재골짜기에는 아직도 단풍이 남아 있고,
노령(이정목에는 '갈재'라 표시되어 있음) 삼남길 이정목 뒤로 장성갈재 방향 들머리가 있다.
<노령(蘆嶺)/갈재(蘆嶺, 271m)>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전북 정읍시 입암면으로 넘나드는 고개로, 옛길 삼남대로의 '갈재'가 이곳이다. 1918년 발행 지도에는 이 길이 장성에서 정읍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길이였다고 한다. 이곳은 옛부터 갈대가 많은 곳이라 '갈재'로 불렸건만, 현 지도에는 노령으로 표기되어 있어, 혹자는 일제가 갈재를 노령('갈대 노(蘆)'로 왜곡했다 하나, 일제시대 이전인 산경표와 대동여지도 모두 노령(蘆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고개 아래로 국도 1호선을 물론 호남고속도로, 호남고속전철과 호남선 철도가 모두 지나고 있다. 노령이란 지명의 유래에 관한 또 다른 설(說)은 갈재 부근에 노아낭자(蘆雅娘子)가 살았다 해서 이를 한자로 '갈대 노(蘆)', '재 령(領)'을 써서 '노령'이라는 지명이 붙어졌다고도 한다. 호남 고속도로 광주방면, 하행선 호남터널을 막 지나, 좌측 산 중턱을 바라보면 커다란 바위가 꼭 아가씨 얼굴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일명 '갈애바위'라고 전해진다.
[전설1]
『전라북도(全羅北道) 정읍시(井邑시) 입암산(笠岩山) 기슭에 십리가 넘는 갈재에 노아(蘆兒)라고 하는 한 낭자가 살고 있었다. 노아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너무 가난하여 나물을 캐 끼니를 넘기고 죽을 쑤어 세월을 보냈다. 이렇게 생활이 가난했지만 노아는 마음씨 착한 아이로 자랐다. 커가면서 부모님의 의사를 거역하는 법이 없는 드문 효성의 소녀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노아는 책을 좋아하고 꽃 심기를 좋아했다. 절에 가는 어머님을 따라 부처님 앞에 이르면 그의 불심(佛心)은 대단하여 그 기도가 그칠 줄 몰랐으니 참으로 맑게 자란 소녀였다. 성년이 되자 학식과 재주가 뛰어났고 그 미모 또한 따를 자 없었으니 근처에서 노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노아는 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끝내는 기생이 되고 말았다. 기생이 된 동기는 확실치 않으나 어떻든 총희(寵姬)로서 풍류남아의 간장을 송두리째 녹여내곤 했다. 비록 화류계에 투신한 노아였지만 끝까지 자기의 절개를 지켜 독신으로 살았다. 한번은 고을의 큰 부호이자 명사(名士)한 분이 찾아와 일생을 같이 하자고 하였으나 노아는 그런 물질의 현혹에 빠지질 않고 단번에 거절하였다. 노아는 효녀였다. 잠시 집을 떠나더라도 한시도 늙은 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바쁜 틈을 타서 항상 부모의 안부를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부모님이 늙어 출입이 불편하고 끝내는 병석에 눕자 화류계를 청산하고 고향의 부모님의 품 안에 돌아왔다. 그의 효성은 대단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을 간호했다. 그리고 부처님께 기도했다. 가난한 가운데 드문 효도는 주민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갔다. 그러나 지극한 효성 속에서도 부모님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자 노아는 혼자 살았다 한다.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책을 읽고 시를 짓고, 꽃을 심어놓고 산새를 불러들여 놀았다. 노아는 소녀 때부터, '나는 죽어서 맑고 깨끗한 산새가 되어 다시 태어나고 싶다' 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한다. 아까운 노아는 결국 산새가 되어 날아갔다.』
[전설2] 『남도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한 도령이 있었다. 도령은 장성과 정읍의 경계선 부근의 고개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주막에 묵게 되었다. 그 주막에는 노화(蘆花, 갈대 노, 꽃 화)라는 딸이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도령은 노화의 아리따움에 빠져 주막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사흘을 머물며 노화와 정분을 쌓았고, 급기야 사흘째 밤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반드시 찾아오겠노라는 약속과 함께 부부의 인연을 맺고 꿈같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른 아침에 길 떠나는 도령을 노화는 밥을 지어 주먹밥을 싸주며 꼭 돌아오기를 당부했고, 도령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양으로 향했다. 도령은 그해 과거에 급제했고, 정읍과는 다른 방향의 수령이 되어 부임했다. 그러면서 도령은 노화와의 인연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 도령은 전라감사가 되어 정읍을 지니게 되었고, 고개에 이르렀을 즈음 그동안 잊고 있었던 노화를 떠올렸다. 주막에서 행장을 멈추게 한 후에 주막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는 주막이었고 퇴락해서 무너져가고 있었다. 인근을 뒤져서 사람들에게 수소문한 끝에 겨우 노화의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도령이 떠나간 후 노화는 한양 간 도령을 기다리다가, 10년이 지난 후부터는 점점 몸이 야위어 가면서 병색이 돌다가 5년쯤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그녀의 묘가 고개 위 산에 있다고 했다. 감사가 그녀의 묘라는 곳에 갔을 때 노화의 묘 위에는 갈대 한 송이가 피어 있었고, 훗날 산 정상에는 갈대만 무성하게 되었다. 그 뒤로 이 고개를 갈재(갈대고개) 혹은 노령(蘆嶺)이라 했다고 한다.』
노령 정상 남쪽 편에는 정자와 삼남길 갈재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노령 정상의 바닥에는 2017. 6. 4. 만식형과 자전거로 삼남길을 이어갈 때, 멜바로 힘겹게 넘으며 쉬었던 바위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노령을 지나는 백두들.
노령에서 잠시 오르니, 주변에 참호가 보이는 벙커봉이라 불리는 작은 봉우리가 나타난다.
영산기맥꾼들 사이에 벙커봉이라 불리는 봉우리에서 바라본 시루봉 방향.
좌측의 봉우리가 갓바위봉인데, 이제 멀어져서 갓바위의 모습이 뚜렷하지 않다.
다음 구간 가게 될 방장산은 커다란 나무에 가려져 있다.
봉우리를 내려서는데, 옛 군부대의 벙커가 있다.
벙커봉을 지나니 폐헬기장이 나오며 방장산도 보이고,
지나온 갓바위봉에서 시루봉으로 이어진 영산기맥 능선이 올려다 보인다.
다시 잠시 오름길을 이어가자, 송전탑 아래를 지나게 되고,
돌아본 시루봉이 듬직하니 지켜보고 있다.
내장산 신선봉까지 다녀오느라 지친 발걸음을 옮기는 분들과 산행의 막바지를 힘겹게 이어가는데,
잡풀이 무성한 헬기장을 지나게 되고,
편백나무 조림지를 내려서니,
출입금지 안내판이 반가운 장성갈재 날머리가 나온다.
통일공원으로 조성된 장성갈재에 도착하여 영산기맥 첫번째 산행을 마무리한다.
<장성갈재> 전남 장성군 북이면과 전북 정읍시 입암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국도 1호선이 지나는 곳이다. 국도 1호선은 일제시대에 착공이 되어 지역별로 순차적으로 개통이 되었다고 한다. 전에는 노령이 장성갈재로 불렸지만, 이 도로가 생기면서 지명을 거기서 따왔다고 하며, 원래의 갈재(노령) 아래로 고속도로와 1번 국도가 새로이 터널로 뚫리면서 이 고개도 옛 영화를 잃어가고 있다. 입암산 시루봉과 방장산 까치봉 사이의 낮은 안부인 노령부터 장성갈재까지가 전라남도에서 북쪽으로 가는 대표적인 고개가 되는데, 국도1호선과 호남선철도, 호남고속도로가 모두 여기를 통과한다. 이 고개 남쪽은 전남 장성군 북이면이고, 북쪽은 전북 정읍시 입암면이다. 전남에는 목란마을이, 전북에는 군령마을이 고개 첫 마을이다. 모두 예전에는 주막거리가 있었던 마을인데, 옛날 과거길 가는 선비들은 물론 소금장수, 소장수, 새우젓장수, 등 수많은 민초들의 발길이 빈번했던 곳이다. 갈재를 한자로 '갈대 노(蘆)'자를 써 노령(蘆嶺)이라 했다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북이면 목란마을에는 '갈애바위'가 있는데 역시 갈재에서 옮겨진 이름이다. 갈재 남쪽 목란마을 아래 원덕리 원덕제(저수지) 북쪽에는 암봉으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있는데, 이 암봉을 바라보면 눈, 코, 입이 확연한 미인의 모습으로, 조선 중엽 이전에는 처용암이라고 불렀으며, 천하일색이었던 갈아 전설이 얽혀있다.
갈재는 전라좌도는 물론 전라우도 등 크고 작은 한양길이 모이는 주요 통로였다. 재를 넘으면 전북 전주로 이어지는 길목인 정읍이 펼쳐지는데, 장성댐 아래 청암역에서 산적들이 우글거리는 이 고개를 넘으려면 고개 아래 원덕리 미륵원에서 쉬거나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 넘어야 했다. 산적의 폐해로 인해 1520년 중종 때에는 군사까지 파견될 정도였다 하며, 이 미륵원 인근 500m쯤에 주막이 7개나 되던 주막촌 '목란'이 있었다. 장사꾼이나 과거 지망생들이 목란에서 투전판이나 술 따르는 여인의 유혹에 걸려 인생을 망친 일이 많았다는 전설이 있다. 목란과 미륵불이 있었던 원덕주막 사이 동쪽 산허리에는 처용암(處容岩)이란 미인 바위가 보이는데, 짙은 두 눈썹 형상이 마치 아리따운 여인과 같다. 이곳 주막에서 태어난 '갈아'란 여인은 뭇 사내들의 신세를 망쳐 어떤 장군의 칼에 찔려 죽었다고도 한다. 이후로 바위는 애꾸눈이 되고, 인근 마을에서는 애꾸눈 미민들이 태어났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과 관련, 정비석씨의 '기생열전'에서는 조선시대 성종 때의 기생 '노화'가 나온다. 미색이 뛰어나 그의 치마폭에서 장성 현감 셋이 파직된다. 파견된 사헌부 관원마저 노화의 유혹에 걸려 팔뚝에 정표를 해준다. 다음날 관헌에게 붙들려 온 노화는 그의 팔뚝을 보여주며 노래한다. “노화의 이 팔뚝에 뉘 이름 새겼는고, 고운 살에 먹이 베어 글자도 선명 코나” 결국 이 기생은 관원의 첩으로 들어앉았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이 서명한 남북정상회담 합의문 표시석이 있는데, 이곳이 통일공원으로 명명된 곳이다.
장성갈재 다음구간 들머리가 있는 장성 방향.
장성갈재 정읍 방향.
통일공원 표석 앞에서 올 가을의 마지막 단풍을 아쉬워하며 !
기다리던 애마에 올라,
등천리로 하산하여 입암저수지 옆에서 기다리던 백두들을 태우고,
갓바위와 시루봉 방향.
정읍에 있는 샘골사우나에서 땀을 닦고,
정읍시내의 비좁은 길을 헤치며 겨우 뒤풀이 장소인 '갈비박스'에 도착하여,
힘들었지만 벅찬 영산기맥 첫번째 산행인 입암산 구간 산행의 기억을 추억으로 돌린다.
갈비매운탕과 갈비!
쌓이는 술병과 함께 뇌리에 챙겨두었던 기억도 날아갔다.
그래도 입암산이 멋진 산(山)이었음은 기억하며 서울로 향한다.
양재에서도 생맥주에 생소주 그림이 어렴풋 하기는 한데, 그 모든 것을 무사히 산행을 마친 것에 대한 감사로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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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B팀은 순창새재서 장성새재까지 직진(알바)해서 그나마 시간을 단축했어요. 그 구간이 꽤나 거칠었나본데 다들 거뜬하시니 백두는 특별합니다. 입암산 갓바위는 정말 최곱니다. 백두 화이팅!!!
산길이 멋지니
언제 땜빵한번 해야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