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나도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나문사) 원문보기 글쓴이: 志于學士최동군
魯 襄公 二十二年而 孔子生 |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에 공자가 태어났다. |
魯(노나라 노) 襄(도울 양) 公(공평할 공) 二(두 이) 十(열 십) 二(두 이) 年(해 년) 而(말이을 이) 孔(구멍 공) 子(이들 자) 生(날 생) |
|
生而 首上圩頂 |
태어났을 때 머리위 정수리부분이 움푹 패어 있었다. |
生(날 생) 而(말이을 이) 首(머리 수) 上(위 상) 圩(오목할 우) 頂(정수리 정) |
|
故因 名曰 丘 云 |
그런 연유로 이름을 구(丘)라고 했다고 전한다. |
故(연고 고) 因(인할 인) 名(이름 명) 曰(가로 왈) 丘(언덕 구) 云(전할 운) |
|
字仲尼 姓孔氏 |
자는 중니(仲尼)이고 성은 공씨이다. |
字(글자 자) 仲(버금 중) 尼(여승 니) 姓(성씨 성) 孔(구멍 공) 氏(성씨 씨) |
공자의 탄생연도는 노(魯)나라의 임금인 양공이 즉위한 지 22년째인 BC 551년에 태어났다. 그런데 노나라의 임금을 양왕(襄王)이라고 부르지 않고 양공(襄公)이라고 불렀다. 왜일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중국의 봉건제도를 알아야 한다. 봉건제도는 정치적으로 최고 정점에 있는 왕이 지배계급을 계층화, 서열화시킨 후 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한 영토를 나눠주면서 제후에 봉한 뒤(이를 분봉(分封)이라고 한다.) 그들로부터 주종서약(主從誓約)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때 지배계급의 서열은 5개의 등급(작위)으로 나뉘는데 서열이 높은 순으로 나열하면 공작(公爵), 후작(侯爵), 백작(伯爵), 자작(子爵), 남작(男爵)의 순이다. 이를 정리하면 중국대륙에는 원칙적으로 왕은 하나뿐이어야 하고, 왕이 자신의 일족 및 공신들에게 봉토를 나눠주면서 제후에 봉하는 것이다.
그러나 봉토를 받은 제후도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군주이기 때문에 엄연한 나라이름도 있을 뿐더러 군주의 자리까지도 세습하는 등 독립적인 국가체계를 갖추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전까지 고대 중국에서 왕을 배출하던 나라는 중국의 역사상 전설의 <삼황오제-복희,여와,신농,황제,전욱,제곡,요,순>를 제외하면, 단 세나라 뿐이었는데
(1)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BC 21C~BC 16C)는 우(禹)임금으로부터 시작해서 걸왕(桀王)까지 5세기에 걸쳐 이어졌는데 문헌상으로만 존재할 뿐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지는 않았다.
(2) 하나라의 뒤를 이은 두번째 왕조 상(商)나라(BC 16C ~ BC 11C), 도중에 수도를 은(殷)으로 옮겼기 때문에 은(殷)나라라고도 함) 는 탕왕(湯王)으로부터 시작해서 주왕(紂王)까지 이어졌는데 수도인 은허(殷墟)에서 갑골문이 발견되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최초의 중국왕조이다.
(3) 한편,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세번째 왕조인 주(周)나라는 무왕(武王)이 건국했으며 왕실의 일족과 공신을 요지에 두어 다스리도록 하는 중국의 봉건제도를 사실상 확립시켰다.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는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이 자신을 도와 은나라를 토벌한 공으로 자신의 동생인 단(旦)에게 곡부(曲阜)의 노공(魯公)으로 봉해짐으로써 성립되었는데, 단(旦)은 주나라의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봉지인 노나라로 가지 않고, 대신 아들인 백금(伯禽)에게 주어 통치하게 하고 자신은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鎬京)으로 돌아와서 무왕의 뒤를 이은 조카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주공(周公)이 되었다.
노양공은 이런 노나라의 제24대 임금이다.
결론적으로 주나라의 봉건제도 뿐만 아니라 주나라의 거의 모든 문물제도를 주공이 완성했기 때문에 노나라 사람들은 그런 주공의 봉지인 노나라 출신임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겼고 공자도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모델을 주공(周公)에게서 찾았다. 공자가 오즉했으면 꿈속에서 주공을 만나지 못했음을 한탄까지 했을까? 그리고 꿈(夢)에서나마 주공(周公)을 보고싶어 했던 공자의 마음을 자신의 이름속에 담은 것이 고려말의 충신인 정몽주(夢周)다.
한편, 공자는 이름이 언덕을 뜻하는 구(丘)인데, 이는 머리의 정수리가 산처럼 우뚝솟은 것이 아니라 언덕처럼 푹 꺼진 것을 뜻한다고 되어있다. 우리말로 하면 결국 공자는 <짱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