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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갈라디아서 1장 3-5절
은혜, 평강, 영광
갈라디아서는 1장 6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한 내용입니다. 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잘 닦아 두었습니다(고전3:10). 그 터는 그리스도입니다(고전3:11). 터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근간에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고 난 뒤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 바른 복음에서 이탈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되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게 만듦으로 인해 더욱 바른 복음에서 쉽게 이탈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소식이 바울에게 들렸고, 그래서 바울은 교회가 다른 복음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히려 바른 복음을 다시금 가르침으로 인해 올바르게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써 보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발신자로서 바울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 그리고 수신자에 대하여 살펴보았지만, 이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모든 교회에게 들려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교회들도 바울이 6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바른 복음에서 이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 역사만 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 시대 이후 속사도 시대, 교부 시대, 중세 시대를 보면 늘 거짓 교리들이 참된 교리와 맞서 싸우는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쟁들, 기독론에 대한 논쟁들, 구원론에 대한 논쟁들 등 교회 역사는 자주 거짓 교리와 싸웠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논쟁들이 오늘날에는 사라졌는가?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지금도 역사하기 때문입니다(요8:44).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를 통해 당시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를 다른 복음에서 바른 복음으로 돌아오도록 만들려고 했다면 우리 역시 갈라디아서를 통해 바른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요, 때문에 점과 흠이 없을 수는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는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신다고 할 때 그분에게 영광이 되는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갈라디아서를 통해, 나아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66권 성경 전체를 통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발신자인 바울과, 바울과 함께 있는 모든 형제가 수신자인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에게 인사하는 부분입니다. 다른 서신서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는데, 3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분명 바울의 다른 모든 서신서들에서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서신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말하고, 유다서에서는 긍휼과 평강과 사랑을 말함으로 표현만 약간 다를 뿐 같은 뜻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어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러나 표현상으로는 바울의 다른 서신서들과 비교할 때 전혀 다르지 않은 기원을 하고 있지만, 갈라디아 지역에 대한 바울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더욱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를 거절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좋은 결과를 볼 수 없을뿐더러, 그렇게 된다면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함으로 참된 평강의 자리에서도 이탈한 상태에 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다시금 갈라디아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기록했지만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교회 역시 이 갈리디아서를 통해 바른 복음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른 복음은 결코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말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그래서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4)라고 말했던 것이고,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복음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깨달아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이상 다른 복음에서 바른 복음으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바른 복음으로 돌이키지 않으면 거기에는 참된 평강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은혜와 평강은 신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야 될 부분은 사실 거짓 선생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말한다는 데 있습니다.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말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가톨릭의 구원 교리가 믿음과 함께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있는데,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말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지라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은혜를 말하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은혜라는 말에는 인간의 모든 공로를 제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가톨릭에서는 은혜라는 말을 바르고 거룩하게 살기 위한 성령의 도움으로 이해하여 그런 도움에 인간의 의지를 더하고 있지만, 바울은 은혜라는 말에서 ‘내가 한 것이 아니요’라는 이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말씀 사역자로서의 자신과 동료의 사역을 말할 때도 분명하게 드러내는데, 고린도전서 3장 6절과 7절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분명 사도 바울은 자신이 심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사역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고린도전서 3장 10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라는 말은 거기에 인간의 노력이 있고, 인간의 사역이 있고, 그래서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공로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인간의 노력도 없고, 인간의 사역도 없고, 당연히 인간의 공로도 없기 때문입니다. 혹 노력하는 바가 있고, 사역하는 바가 있고, 공로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노력하는 바도 헛되고, 사역하는 바도 헛되고, 공로라고 말하는 것도 헛된 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에게 공로로 돌릴 수 있는 적은 분량조차 없다고 말하는, 다시 말해 철저히 하나님께만 100%를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은혜에 대하여 선물로서의 믿음만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더하여 은혜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성경과 일치되는 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가 신적이라는 것은 100%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절하는 인간의 공로를 말한다면 아무리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지라도 그것은 신적인 것으로 포장만 할 뿐 사실은 인간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평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평강을 주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에 앞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있는가 하면, 세상이 주는 평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뒤 잡히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제자들은 이런 평강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무서워서 도망했습니다. 세상이 무서워서 주를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그들은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행5:41). 이것이 참된 평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평강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주님의 증인이 되어질 때(행1:8) 나타납니다. 거기에 내 힘과 능력이 있는가?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가 붙들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공로를 말하는 자리에 어떻게 하나님의 평강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인간의 공로를 말하는 거기에는 참된 평강이 없습니다. 그 평강 역시 인간적인 것이 마치 신적인 것인 양 포장되어 말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은혜와 평강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인 양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평강을 말한다고 해서 같은 은혜, 같은 평강이 아닙니다. 바른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쫓고 있는데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겠습니까? 포장된 은혜와 평강일 뿐, 참된 은혜와 평강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예레미야 시대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세워 남유다를 향해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남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했지만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는데, 예레미야 선지자의 비판이 무엇이었는가? 예레미야 6장 13절과 14절에 보면 이렇게 전합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동일한 말씀을 예레미야 8장 10절과 11절에서도 하는데,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따라 평강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주신 참된 평강이 아니라 거짓 평강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평강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탐욕이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참이 아닌 거짓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거짓 선지자들의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외적인 부, 세상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든든함을 하나님의 평강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모스 선지서를 살펴본 적이 있지만, 북이스라엘의 외적인 복과 평강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는데,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는가?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이 아니냐?
오늘날 교회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은혜와 평강을 말하기 때문에 은혜와 평강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다른 은혜와 평강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공로를 말하면서 은혜를 말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은혜라고 합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의 공로를 말합니다. 거기에 공로에 따른 상급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평강이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은혜와 평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오늘날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 세상적으로 부유해지는 것, 세상적으로 꿀리지 않는 것을 마치 평강인 것처럼 말하는 기복주의 신앙도 있는데,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은 결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참된 평강으로 인도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서는 은혜와 평강이 없습니다. 참된 복음을 떠나서는 은혜와 평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사도 바울은 바른 복음에서 이탈하여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이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회복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본문 3절에 대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루터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데(1535년판 갈라디아서, 복 있는 사람), 그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두 단어 속에 기독교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은혜는 죄를 면제시키고 평강은 양심을 평안하게 합니다. 왜 이것이 필요한가? 우리를 괴롭히는 두 장본인이 죄와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현세와 내세에서 이 두 괴물을 소멸시켰고 발로 짓밟으셨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알지 못하므로 죄와 양심, 사망을 극복하는 법을 확실히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이에 대한 가르침을 갖고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죄와 절망, 영원한 사망을 물리치고 승리를 얻기 위해 이 가르침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가르침도 아니고, 인간의 지혜나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닌, 오직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은혜는 죄 사함, 양심의 평안과 기쁨을 포함합니다. 먼저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면 결코 양심의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율법은 죄를 보여주고, 양심을 고소하고 두렵게 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하고,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끕니다. 요컨대 행위로는 결단코 죄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죄를 제거하는가? 죄를 제거하는 수단은 은혜 외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들의 모든 인사말에서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을 죄와 악한 양심과 대립시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말 자체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두 단어이지만 시험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주시는 죄 사함과 평강이 우리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자원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우리는 강할 뿐만 아니라, 역경에서는 좌절하지 않고, 번성에도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의 확신을 가지고서 우리는 왕의 대로를 따라 걸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루터의 이런 해석은 이어지는 4절과 5절 내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대부분의 서신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말함으로 인사말을 끝맺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4절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일단 3절에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타내시는데, 그런 점에서 이어지는 4절은 ‘그리스도께서’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라고 할 때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때 하나님의 뜻은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성자의 아버지이심과 동시에 성자로 말미암아 양자 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라고 할 때 오직 성부의 뜻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 다시 말해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으로 한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라고 해서 삼위 가운데 성자를 구별하고 있기 때문에 그 구별성으로 말미암아 성부의 뜻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요 기름 부음 받기 위해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뜻을 따라’, 동시에 ‘성부와 분리할 수 없는 성자 자신의 뜻을 따라’,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분리할 수 없는 성령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라고 할 때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도, 성령도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도할 때 주기도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라고 부르면서 기도하게 되는데, 이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단지 성부만이 아니라 성부와 분리할 수 없는 성자와 성령, 다시 말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역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라고 할 때 성부만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1절 내용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라고 할 때 위격 상호 간의 관계로 보자면 성자와 성부로 해석해야 하지만, 방금 설명 드린 점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은혜는 단지 성부만이 아니라 바울이 3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단지 성부와 성자의 의미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인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4절의 시작은 ‘그리스도께서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은 것이지, 거기에 인간의 어떤 것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요, 또 우리 편에서 그의 긍휼의 원인이 될만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그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로마서 9장에서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내는데, 야곱과 에서의 비교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9:11)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행위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지도 않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전지하시기 때문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리 아십니다. 그러나 미리 아시고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이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무엇을 하셨는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사실은 우리 모두가 본래 ‘이 악한 세대’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계속해서 표현되고 있지만 ‘이 악한 세대’에 속해 있던 자들의 모습은 ‘우리 죄’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2-3)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한 세대’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이 곧 악을 따르는 것이요, 그것은 곧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냐? 지금까지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는 영, 마귀요 사탄입니다. 성경은 마귀 사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b) 그런데 그런 자가 이 악한 세대에 속해 있는 자들의 아비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a) 그래서 악한 세대에 속한 자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냅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로 있습니다.
루터는 ‘이 악한 세대’라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마귀의 종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마귀를 섬기고 모든 것을 마귀의 뜻에 따라 행한다...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나라가 아니라 이 악한 세대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살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확실히 이 악한 세대 곧 사탄의 나라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나라에 속해 있는 한,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모든 은사는 단지 마귀를 섬기는 천박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상관없다. 여러분의 지혜와 의, 거룩함, 능변, 힘, 아름다움, 재산과 같은 것이 그렇게 전락한다. 여러분은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마귀를 섬기며 마귀의 나라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의 시작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 속하여 죄 외에 내놓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 무엇인가? 성자이신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할 재물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죄 사함에 대하여 말하거나 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방법만이 유일하다고 말씀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이 방법으로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전가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의 행위, 열심, 노력 등을 덧붙일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신 일을 상기하도록 하는가? 은혜라는 말은 너희가 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누구도 예외 없이 죄인으로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죄인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로마서 3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는 말씀 가운데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깨닫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물론 영적으로는 죽었으나 육신은 살아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행하지만, 그렇게 행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거기에 선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제대로만 본다면 죄를 보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죄인이 어떻게 죄 사함, 의와 관련해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는 게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역사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신인협력을 말하는 자들은 그나마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와 함께 자신의 의지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하지만, 방금도 살핀 것처럼 성경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말합니다. 또한 전적인 무능력까지 말합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시작은 악한 세대에 속한 자로 시작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죄 외에 내놓을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선하다고 할지라도 루터가 말하는 것처럼 그 선으로 마귀를 섬기는 천박한 도구로 전락할 뿐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는 못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이때 건지다는 말은 빼낸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소유자가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본래는 악한 세대에 속해 있었지만 거기서 건지시고 빼내시기 위해 누구를 보내 주셨는가? 본래는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을 사람의 몸을 취하게 하심으로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의 몸을 취하게 하셨는가? 우리 죄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으로 있는데(창2:17), 하나님으로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몸을 취하셔서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자리가 있는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하기까지 한 인간이 무엇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더한다면 죄 외에 더하는 것이 없습니다. 죄를 더하기에 더더욱 하나님의 진노만을 더할 뿐입니다. 이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대속적 죽음으로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의 공로, 그리고 믿음이라는 세 가지 원인으로 구원과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데,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1559 라틴어 직역, 제3권 14장 17). “성경은 모든 곳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효과인이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그가 우리를 향하여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분명히 질료인은 자기의 순종으로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신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형상인 혹은 도구인이 있는바, 이는 믿음 외에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이것 외 목적인도 있는데, 오늘 본문 5절이 그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진술 속에서 “우리가 보듯이, 우리 구원을 이루는 모든 부분이 이와 같이 우리 바깥에 존재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행위를 신뢰하고 자랑하는가?”라고 덧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5절은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만이 영광을 받으실만한 모든 것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질료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순종, 그리고 그런 순종을 뜻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 한 마디로 우리의 구원, 우리의 죄 사함, 우리의 의와 관련해 하나님 외에 영광을 받으실 만한 대상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믿음을 우리 쪽으로 가지고 오려고 하지만,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우리가, 그래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엡2:8). 그런 믿음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에게 주십니다(행13:48).
결국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고 할 때 그런 은혜와 평강의 결과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란 측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가식적인 선을 행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곧 자기 백성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 된 자들은 그분에게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고, 자신이 받아야 할 영광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늘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했지만, 그때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돌릴 수 있는 것이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거기에 비로서 우리의 진정한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나의 나 됨이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은 바로 이 사실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흐리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자리는 마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개혁주의의 내용을 존중한다고 할 때 우리는 철저히 이런 내용을 거절해야 합니다. 오히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 영광, 내 공로, 그런 공로에 따른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이 영광 받으실만한 내용이 무엇인지 성경을 따라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이 영광을 받으실만한 내용에 따라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은혜 없이 할 수 없음을 알고 철저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올려드려야 합니다. 바로 그 자리가 나의 나 됨이 있는 자리입니다. 내가 사라지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로 있게 하시는 그대로를 보존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자리만을 고수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하고,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우리에게 평안함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참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