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010 시즌 챔피언스리그 최고의 빅 매치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와 AC밀란의 16강 1차전 산시로 피치에서 경기는 맨유의 3대 2 승리로 끝났다. 밀란과의 원정경기에서 그동안 맨유가 3패에 무득점 굴욕을 당한 터였기 때문에 맨유 입장에서 이번 승리는 실로 값진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년 전 챔피언스리그 4강전 밀란 원정경기에서 맨유가 3대 0으로 완패를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맨유의 승리는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구호를 외칠만했다. 그런데 맨유는 도대체 원정경기의 절대열세를 딛고 어떻게 완승을 거둔 것일까?
많은 축구팬들이 밀란의 노쇠화와 카카의 공백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백전노장 인자기, 가투소, 피를로, 시도로프, 네스타, 그리고 디다가 여전히 밀란의 선수로 뛰고 있으니 그럴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카카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으로 밀란은 앞니 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듯하다. 최근 호나우지뉴가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다시 살려내고 있긴 하지만, 앵커맨 카카의 존재는 밀란 팬들에게는 그리울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퍼거슨이 카카 없는 밀란에 승리를 호언장담 했을까?
그러나 이번 맨유의 완승은 밀란 플레이어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비결은 퍼거슨의 변칙적인 전형과 전술 때문이었다. 퍼거슨이 보기에 이번 경기의 키워드는 중앙의 키 플레이어 피를로의 봉쇄였다. 이를 위해 퍼거슨은 루니를 원톱으로 하는 4-5-1, 혹은 4-5-1에 가까운 4-3-3 전술을 들고 나왔고, 그동안 중앙에서 활동했던 플레처를 왼쪽 미들필더로 돌리고 중앙 미들필더에 박지성을 기용했다. 당초 수비가 좋은 박지성이 4-3-3 전술의 왼쪽 포워드로 출전이 예상되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박지성은 중앙에서 피를로의 봉쇄 임무를 맡았다(상대적으로 호나유지뉴가 왼쪽 포워드로 맹활약을 한 것을 보면 나니와 하파엘의 블로킹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밀란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피를로가 박지성의 ‘노골적인’ 대인방어에 고립되면서 밀란 특유의 템포 축구가 빛을 잃고 말았다.
우리는 이번 경기를 통해서 축구의 포메이션은 전형과 전술의 조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말하자면 축구의 전형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팀의 역사적 전통과 동시대 플레이어들의 보유 상태에 따라 정해진다. 즉 포메이션으로서 전형은 플레이어에게 부여되는 전술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전형 없는 전술은 선수들의 개인적인 장점을 조직적으로 살릴 수 없다. 전형이 구조라면, 전술은 주체의 실행이다. 예컨대 전형은 자기 선수들의 공격을 극대화하고, 상대 선수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배치’의 미학이다. 반대로 전술은 그러한 배치가 실제 경기에서 목적에 부합하게 효과적으로 살아날 수 있도록 개인에게 부여된 일종의 미션이다. 이번 경기에서 박지성의 미션은 4-5-1 전형 하에서 중앙 미들필더 피를로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맨유는 전통적으로 윙어들의 돌파와 크로스를 선호하고 스트라이커의 결정력을 높이는 4-4-2 전형을 사용했다. 1998-1999년 시즌 맨유의 트레블의 전형은 ‘죄긱스’, ‘우베컴’에 ‘엔디 콜’-‘드와이트 요크’의 투톱, 중앙에 공격형 MF 스콜스, 수미형 MF 로비 킨, 그리고 어윈-스탐-욘슨-네빌의 포백라인으로 구성된 4-4-2였다. 맨유의 4-4-2 전술의 핵심은 윙 플레이어들의 공격적인 활동에 있기 때문에, 긱스의 드리블과 베컴의 크로스가 전제되지 않은 4-4-2 전형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정확하게는 베컴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과 긱스의 노쇠화와, 신성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입단으로 전통적이었던 맨유의 4-4-2 전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측면 공격수 호날두의 공격본능이 살아나면서 맨유는 굳이 2톱을 쓰는 4-4-2가 필요 없게 되었다. 호날두는 전성기의 긱스나 베컴처럼 측면에서 측면으로 이동하는 전형적인 윙 플레이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 니스텔루이의 레알마드리드 이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맨유는 최근 2-3년 전부터 리그 강팀이나 챔피언스리그 주요 경기에는 중앙을 강화하는 4-3-3 전술을 들고 나온 반면, 약팀과의 경기에는 예외 없이 2톱을 쓰는 4-4-2로 나왔다. 맨유가 4-4-2, 4-3-3, 혹은 4-5-1의 변형 전형을 경기마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그 전형을 소화할 수 있는 사전에 훈련된 선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지성에게 많은 팬들이 4-4-2전형에 맞는 선수로 착가하고 있는 것은 맨유 같은 강팀에서 윙 플레이어를 2명을 두면 그만큼 출전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퍼거슨은 박지성을 기용할 때, 대게 4-3-3이나 4-5-1 전형을 들고 나왔다. 박지성의 활동량과 공간 활용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모든 축구의 전형은 주체 없는 하나의 구조가 아니라 주체들의 능동적인 배치를 전제로 한 구조이다. 물론 축구의 전형은 감독이 원하는 방식에 따라 선수들을 맞추어 운영될 수 있다. 일례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대표에게는 생소했던 스리백을 사용한 것은 전적으로 히딩크의 전형에 전술을 맞춘 경우이다. 히딩크는 월드클래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한국 선수들의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수비를 강화하는 스리백을 선택했다. 겉으로 보면 스리백은 포백보다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좌우 윙백들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3명을 센터백으로 쓰는 극단적인 수비 전형이다. 홍명보-최진철-김태형으로 이어지는 스리백은 한국의 취약점인 중앙 수비를 보안하기 위함이고 간혹 홍명보가 필드중앙으로 올라 갈 때, 4-3-3 전형으로 바꿀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한국의 경우에는 히딩크의 장기간 훈련으로 선수들이 감독의 전형에 맞게 배치된 경우이다.
맨유의 산시로에서의 첫 승은 월드컵을 준비하는 한국 축구의 전형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허정무 감독은 예선 3경기마다 맞춤형 전형을 사용할 것이라고 언론에 말한바 있다. 강팀에게는 수비전형을 쓸 것이고 약팀에게는 좀 더 공격적인 전형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의도적 전형 전술에서 핵심은 현재 대표팀의 선수들로 최적의 전형을 만드는 것이다. 박주영과 함께 뛸 마땅한 포워드가 없고, 취약한 MF를 보강할 필요가 있다면, 한국에서 가장 적합한 전형은 4-2-3-1이다. 현재 한국의 수비수들이 스리백을 쓸 수 있는 준비는 안 되어 있다. 스리백은 욍백들과의 유기적인 호흡이 없으면 공간을 허무하게 내줄 수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현 수비수들이 스리백을 소속팀에서도 훈련한 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사실상 본선 경기에서 스리백 사용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문제는 흔들리는 포백을 보완하고 최전방 공격수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4-2-3-1 전형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영표-이정수-조용형-오범석(차두리) 포백에 김정우, 구자철(조원희, 김남일) 수비형 MF에 박지성-기성용-이청용 공격형 MF에 박주영을 원톱으로 놓는 전형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까 한다. 문제는 김정우와 함께 호흡할 확실한 수비형 MF 자원이 마땅하지 않다는 점이다.
4-2-3-1 전형은 현재 첼시의 감독으로 있는 엔젤로티가 AC 밀란 시절에 즐겨 쓰던 방식이었다. 4-2-3-1 전형은 일명 다이아몬드 전술이라고도 한다. 이 전형의 핵심에 바로 카카와 피를로가 있었다. 그러나 카카가 이적하면서 밀란의 다이아몬드 전술은 사실상 폐기되었고, 안젤로티는 첼시로 부임해서 이 전형을 사용하려 했지만, 그 역을 맡아야 할 램파드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한국 대표팀이 이번 월드컵에서 4-2-3-1로 전형을 만들려면 무엇보다도 기성용과 같인 키플레어의 역할이 크다. 문제는 기성용이 피를로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카카의 역할을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박지성을 카카의 역할로 맡기기에는 전술 연습이 너무 부족하다. 어쨌든 이러한 선수들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취약한 포백을 보완하고 박주영의 파트너를 찾지 못할 경우 허정무 감독은 4-4-2나 4-3-3 전술보다는 4-2-3-1 전형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 전략이 전형과 전술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이다. 전형은 피치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전형에 전술을 사람을 쓰는 일이다. 따라서 전형 없는 전술, 전술 없는 전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허정무 감독이 4-4-2, 4-3-3, 혹은 3-5-2 전형 중 어떤 것을 사용할지 고민하는 것도 전형에 딱 맞은 선수들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스쿼드가 충분치 않다면 전형과 전술을 결합하는 최적의 상태를 결정할 시간이 왔다. 현대축구는 상대팀에 맞는 유연한 전형을 사용하기 때문에 상대팀마다 전형-전술을 달릴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 팀을 대표하는 전형에 대한 안정된 배치는 중요하다. 코앞으로 다가온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전형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