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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록대부 행 지중추부사 수촌 유공 행장(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秀村柳公行狀) 병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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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발(發)이고 자는 백흥(伯興)이며, 성은 유씨(柳氏)이고 수촌(秀村)은 그의 호인데, 선조는 문화인(文化人)이다. 증조의 휘 형원(馨遠)은 호조 참의 겸 찬선(戶曹參議兼贊善)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하(昰)는 동궁 위수(東宮衛率)를 지냈는데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선고(先考) 휘 응린(應麟)은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니, 공의 관직이 귀하게 된 것으로 인하여 3대의 관직을 추증한 것이다. 유씨는 오래 전부터 세대가 전해져 왔다. 시조 휘 차달(車達)은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보좌했는데 공훈으로 대승(大丞)에 제수되었고 이후로 4백여 년 동안 자손이 잇따라 벼슬을 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관(寬)이란 분은 우의정으로서 우리 영릉(英陵 세종의 능호)을 보좌하여 태평 시대를 이루었는데, 호는 하정(夏亭)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청렴 결백한 덕으로 명성이 드러났다. 문간공이 형조 판서 휘 계문(季聞)을 낳았는데 시호는 안숙(安肅)이고, 또 7대를 지나 휘 흠(𢡮)은 관직이 검열(檢閱)인데 바로 공의 고조이다. 찬선공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질로 뜻을 독실히 하고 학문에 힘썼으나 좋지 못한 시대를 만나 태학(太學)에 있다가 나중에 호남의 해변에 가서 은거하며 저서(著書)하는 일로써 스스로 즐겼는데, 세상 사람이 반계 선생(磻溪先生)이라 칭하였다. 그의 저서 중 《반계수록(磻溪隨錄)》이란 책은 왕정(王政)의 대체를 논한 것으로서 바로 성인(聖人)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구인데, 대행조(大行朝) 경인년(1770, 영조 46)에 영남 감영(監營)에서 간행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당론(黨論)이 유행한 뒤에 태어났는데도 피차의 어느 당 사람들을 막론하고 모두 ‘반계 선생’이라고 일컬었고, 심지어는 부안(扶安)의 동림 서원(東林書院)에 배향하기까지 하였으니, 그분의 훌륭함을 알 수 있다.
공은 우리 명릉(明陵) 계해년(1683, 숙종 9) 7월 3일 오시(午時)에 광주(廣州) 갈산(葛山)의 외가댁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행동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므로 참판공이 기특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장차 우리 가문을 훌륭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선비(先妣) 증 정부인(贈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내시교관(內寺敎官) 증 이조 참판(贈吏曹參判) 해(澥)의 딸인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환히 알았고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서 공을 훈육함에 반드시 올바른 도리로써 가르쳤다. 공은 시례가(詩禮家)에 태어났는데다 또 어머니의 교훈까지 받들어 애써 공부하는 데에 힘을 썼는데, 참판인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가 공이 지은 정문(程文)을 보고 칭찬하며 말하기를,
“반계가 참으로 훌륭한 후손을 두었다.”
하였다.
경진년(1700, 숙종 26)에 모친상을 당했을 적에는 예절의 법도를 넘도록 슬퍼하였고, 무술년(1718, 숙종 44)에 판서공이 부안(扶安)에서 별세하였을 때에는 공이 천리 길을 밤에 달려가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가슴을 치며 슬퍼하였는데, 끝내 과천(果川)에 반장(返葬)하고 이어 그곳에 거처하였다. 복제를 마치고 나서 과거(科擧)를 그만두려고 하였으나 계비(繼妣) 이 부인(李夫人)이 옳지 않다고 말하였으므로 공이 억지로 그 가르침을 따라 드디어 계묘년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공이 유명한 할아버지의 후손으로서 가문의 명성을 이어 지켰으므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공정하게 인재를 기용하는 직책을 맡은 전조의 재신(宰臣)이 여러 번 공을 침랑(寢郞)에 의망(擬望)하였으나, 공은 출사할 생각을 갖지 않았다. 무진년(1748, 영조 24)에 계비의 상을 당했는데, 이 때 공의 나이가 70에 가까웠는데도 곡하며 제전(祭奠) 올리는 일을 3년을 하루와 같이 자신이 직접 행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갑술년(1754, 영조 30)에 온릉 참봉(溫陵參奉)에 제수되었고, 병자년(1756, 영조 32) 6월에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에 승진되었으며, 정축년(1757, 영조 33) 10월에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에 승진되었다. 정성 왕후(貞聖王后 영조(英祖)의 비)의 우주(虞主 우제(虞祭)때 사용한 신주)를 매안(埋安)할 때 공이 그 일을 감독하였는데, 태묘(太廟) 북쪽 뜰의 흙 속에서 반자쯤 되는 옥 조각을 캐내어 손으로 닦고 보니 ‘성역조호천종사극소부전열내(聖亦造乎天縱肆克紹夫前烈乃)’의 13자가 글자의 획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공은 이것이 선조(先朝)의 옥책(玉冊)일 것이라 여기고 열성조(列聖朝)의 시책(諡冊)을 찾아보았더니 과연 인종(仁宗) 세실(世室)의 시책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다른 열성들의 시책은 다시 만들었지만 유독 인종의 시책만은 미쳐 만들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공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며 제조(提調)에게 말하여 상에게 올렸는데, 상이 슬픈 감회를 느껴 속히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다시 만들어 봉안(奉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64세의 임금이 친히 써서 다시 새겼고 75세의 신하가 찾아 내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하고, 공을 6품으로 승진시키도록 하였다. 무인년(1758, 영조 34)에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에 승진되었고, 얼마 지나서 경릉령(敬陵令)에 옮겨 제수되었다. 기묘년(1759, 영조 35)에 상이 능소(陵所)에 거둥할 때 공이 능관(陵官)으로서 전도(前導)하였는데 걸음걸이가 빨랐다. 이에 상이 나이를 묻고 이르기를, “잽싸구나.” 하고, 또 이르기를, “반계(磻溪)의 후손으로서 오래도록 하급 관직에 있는 것이 애석하다.” 하였다. 이 해 겨울에 상이 친정(親政)하였는데, 공을 말망(末望)으로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에 승진시키고 또 말망으로 좌수운 판관(左水運判官)에 제수하였다. 상이 어느 관직의 녹봉이 더 많고 적으며 품계가 더 높고 낮은지를 하문하고 같은 날에 두 번 말망에 낙점(落點)한 것은 특별한 은수(恩數)인 것이다. 신사년(1761, 영조 37)에 임기가 차서 돌아왔다. 임오년(1762, 영조 38)에 나이가 80세라 하여 통정(通政)에 승진되었고, 겨울에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인 계미년(1763, 영조 39) 원조(元朝)에 상이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 즉위한 지 40년이 된 하례를 받고 우로(優老)의 은전(恩典)을 거행하였는데, 공을 가선(嘉善)에 승진시키고 그대로 본직을 지니게 하였다. 공은 직소(直所)에 있을 때 늘 독서(讀書)하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며, 3월 3일에 지은 시구(詩句)에,
분홍색 꽃 푸른색 버들의 삼월 삼일 날인데 / 紅花綠柳三三節
흰 머리 창백한 얼굴의 팔십일 세 노인일세 / 白髮蒼顔九九翁
하였더니, 정원(政院)의 관리들이 전송(傳誦)하였다. 이 때에 상의 전좌(殿座)가 빈번하였으므로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이 모두 게으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공은 장전(帳前)에 우뚝이 서서 조금도 비스듬히 서거나 기대어 서지 않았으니, 상이 늘 돌아보고 칭찬하였다. 갑신년(1764, 영조 40)에 동지중추(同知中樞)에 제수되었고, 병술년(1766, 영조 42)에 가의(嘉義)에 승진되었다.
기축년(1769, 영조 45)에 지금 참의(參議)인 계씨(季氏) 훈(薰)이 대관(臺官)으로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상이 공의 정력이 아직도 건강한지의 여부를 묻고 즉시 입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양전(兩詮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하유하기를,
“이번에 《반계수록》을 간행하니, 의당 그의 후손을 우선으로 녹용(錄用)해야 한다.”
하였는데, 당시 오위장(五衛將) 한 자리만 비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 제수하고 장전(帳前)에서 사은(謝恩)하도록 하였고, 이어 시립(侍立)하여 대궐에 머물도록 하였다. 경인년(1770, 영조 46)에 자헌(資憲)에 승진되었다. 4월에 입시(入侍)하도록 하여 음식과 기거(起居)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하문하고 나서 특교(特敎)로 정헌(正憲)에 승진시키고 즉석에서 지중추(知中樞)에 제수하였다. 그리고 또 하교하기를,
“이 노인의 아들 명위(明渭)가 경인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다시 등용하는 명을 내려야 하는데 나는 오늘 그들 부자의 관직을 동시에 제수하려고 한다.”
하며, 즉시 제릉 참봉(齊陵參奉)에 제수하였다. 이어 음식을 하사하고 액례(掖隷)로 하여금 남은 음식을 공의 아들에게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의 증(曾), 조(祖), 부(父) 3대의 증직(贈職)도 이날 거행하도록 하였으니 은명(恩命)이 아주 보기 드문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쳐다보았다.
임진년(1772, 영조 48) 겨울에 지사(知事) 이제암(李齊嵒), 판서(判書) 심각(沈瑴), 판서 남태제(南泰齊), 판서 심성진(沈星鎭), 판서 이익정(李益炡), 승지 황준(黃晙), 승지 이규응(李奎應), 참의(參議) 홍양보(洪亮輔), 동의금(同義禁) 홍성(洪晟), 좌윤(左尹) 이광익(李光瀷), 승지 김조윤(金朝潤), 사간(司諫) 이수일(李秀逸) 제공(諸公)과 함께 공의 집에서 노인회(老人會)의 잔치를 벌였다. 이 때에 채제공(蔡濟恭) 공이 호조 판서로 있고 계씨(季氏)가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으면서 모두 잔치의 물품을 부조하였다. 관현악을 함께 연주하며 종일토록 한껏 즐기고 나서 파하였는데, 공이 시(詩)를 지어 기쁨을 기념하니 진신(縉紳) 및 사우(士友)들이 서로 뒤질세라 그 시에 화답하였다. 계사년(1773, 영조 49) 봄에 상이 기로사(耆老社)의 신하를 통하여 이 일을 듣고 공을 부르도록 하니, 정원(政院)의 관리가 잇따라 와서 독촉하였다. 이에 공이 집경당(集慶堂)에 입시(入侍)하자 상의 은유(恩諭)가 정중하였으며 또 저술하는 책과 읽는 책에 대해 하문하고, 전일에 송독한 글을 외우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꿇어앉아 《시경(詩經)》 억계장(抑戒章)을 외웠는데 음성이 청아하고 장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이하다. 그의 아들이 필시 따라왔을 것이니 들이도록 하라.”
하고, 이어 어느 관직에 있는가를 하문하였는데 시신(侍臣)이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라고 대답하니 즉시 6품으로 승진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탁지(度支 호조)에 명하여 쌀, 고기, 옷감 등의 물품을 실어 보내도록 하였다. 이해에는 공의 나이가 91세가 되었다 하여 숭정(崇政)에 승진되었다. 4월에 상이 진연(進宴)한 뒤에 또 대궐에서 양로연(養老宴)을 설행하였는데 공이 들어가 참여하고 머리에 잠화(簪花)를 꽂고 돌아왔다. 그리고 상이 어제(御製)에 화답한 시(詩) 3구(句)를 인쇄하여 반사(頒賜)하도록 하여 집에 간직하게 하였다. 6월에 포천 군수(抱川郡守)로 부임하는 아들을 따라갔다. 갑오년(1774, 영조 50)에 숭록(崇祿)에 승진되었다. 을미년(1775, 영조 51) 봄에 포천군(抱川君)의 어린 아들이 동몽(童蒙)으로 《소학(小學)》을 시강(侍講)하였는데 상이 공의 안부를 묻고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인삼(人蔘) 1량(兩)을 올리게 하여 어수(御手)로 직접 내려 주며 이르기를,
“돌아가 너의 할아버지에게 전해 드려서 달여 마시도록 하라.”
하고, 특명으로 아이를 호위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4월에 공의 둘째 손자 회(誨)가 전강(殿講)에 급제하였는데, 상이 승지에게 신래(新來)를 부르도록하고 그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이르기를,
“그 모습으로 돌아가 너의 할아버지에게 뵈어 드려라.”
하고, 또 분부하기를,
“백 세 노인의 손자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또한 특이한 일이다. 그의 할아버지에게 옷감을 하사하여 나의 뜻을 표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또 회에게 5월 정시(庭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우리 국조(國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후의 은총과 영광이 겹쳤으므로 공이 감격하고 황공한 나머지 스스로 읊은 시(詩)에 송축하는 정성이 충만하였다. 계사년(1773, 영조 49) 입춘(立春)에 춘축시(春祝詩) 절구(絶句) 한 수를 직접써서 문 위에 붙였는데 그 시에,
구십일 세의 봄을 새로 맞이하였어라 / 新逢九十一年春
태평 시대의 은총을 흠뻑 받았구려 / 恩波沐浴太平春
우매한 신의 충정 늘 대궐을 향해 / 愚衷每向重辰祝
억만년토록 성수무강하시기를 축원하여라 / 聖壽無疆億萬春
하였다. 다음 해의 입춘에는 단지 일(一) 자만 이(二) 자로 고치고 그 다음 해에는 그것을 삼(三) 자로 고쳐, 잇따라 이 시를 걸어 붙였다. 을미년(1775, 영조 51) 8월에 대수롭지 않은 병을 앓다가 6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였는데 향년이 93세이다. 조정과 시골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로(大老)가 서거(逝去)하였다.”고 하였다. 이 해 10월 29일에 죽산부(竹山府) 용천(湧泉)의 건좌(乾坐)의 자리에 장사 지냈으니 바로 반계 선생의 묘 앞이다.
공은 도량이 넓고 자태가 뛰어났으며 마음가짐과 행동이 본심에서 나왔고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자세가 성실하였으므로,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두가 후덕한 장자(長者)라고 추숭하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효도하였고 장성해서는 부모의 안색과 뜻에 순종하여 이유 없이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선비(先妣)가 오랜 병으로 머리를 빗지 못하여 머리에 이[蝨]가 많았는데, 공이 자신의 머리에 삼씨 기름[麻油]을 발라 옮겨 붙게 하였다. 이에 선비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우리 아들의 이를 옮긴 효성은 왕상(王祥)이 얼음 속에서 잉어를 잡은 일이나 맹종(孟宗)이 눈 속에서 죽순을 캐낸 일에 못지않다.”고 하였다. 그 후 계비(繼妣)를 섬길 때에도 효성이 다르지 않았으므로 계비가 편안하게 여기면서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었다. 그 중에서도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더욱더 신중하였으니, 전후로 거상(居喪)할 적에 슬픔과 절차가 모두 극진하였으며 연로하였다는 이유로 예절을 빠뜨리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제사 지낼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의복을 세탁하여 몸을 깨끗이 씻은 뒤에 갈아입고 새벽녘까지 꿇어앉아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여러 대 선영(先瑩)의 석물(石物)도 모두 힘을 다하여 마련하였고, 가묘(家廟)에 배알하는 예절도 계사년(1773, 영조 49) 원조(元朝)까지 행하였으니, 그의 지극한 천성은 본시 그렇게 타고난 것이었다.
부모가 별세한 뒤에 어리고 연약한 여러 누이와 아우를 무마하여 기르기를 마치 부모가 보살피듯이 하였다. 계씨(季氏)를 격려하고 교훈하는 데에는 정성스러운 마음과 간절한 정이 모두 지극하였다. 계씨가 두 번의 수령직과 한 번의 역승(驛丞) 자리를 맡아 나갔을 때 편지로 문안하면서 물품을 함께 보내왔는데, 그 때마다 공이 반드시 경계하기를,
“나로 인하여 너의 관직에 누를 끼치지 말도록 할 것이며, 하정공(夏亭公)을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종친들에게 매우 화목하게 대하였으니, 촌수가 멀고 미천한 자들도 모두 맞이하여 관대(寬待)하였다. 이러하여 도성 안의 유씨(柳氏)들은 반드시 공의 집을 찾아오게 되었고 모두들 공의 환대를 받았다.
선친이 별세한 이후 생활 형편이 쇠락하였으므로 산소 아래에서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는데, 일을 맡아하는 노복들과 고락을 함께하였으며, 간혹 된장과 쌀이 떨어지는 때가 있더라도 공은 태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늘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면서 각자 직업을 부여했는데, 어떻게 편안히 앉아서 놀고 먹을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태만하지 말라.”
하였다. 평소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은 다음 종일토록 꿇어앉아 있으면서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을 대우할 경우에는 노소를 막론하고 신중하게 접대하였으며, 남의 선을 드러내기 좋아하고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으며, 농담의 말을 동류들에게도 하지 않았고 꾸짖는 말을 노복들에게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여종을 매질하며 매우 노하여 온갖 말을 다하는 경우를 보고 돌아와서 시(詩)를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고, 일찍이 다급한 말과 황급한 기색[疾言遽色]에 대해서 경계하기를, “일에 아무런 이익이 없고 마음에 누가 됨이 크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너그럽고 자애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널리 사랑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공에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관사(官司)에 있을 때에는 하급 관리들을 성심으로 대우하였고 또한 예법으로 인도하였는데, 부모를 섬기고 윗사람을 공경하는 의리에 대해서 더욱더 간곡히 타일렀다. 대체로 근래의 관장(官長)들은 모두 아랫사람에게 형장(刑杖)을 침으로써 위세를 세우는 반면 사람의 도리로써 부리지 않았으므로, 상하간에 서로 신임하지 않는 지 오래 되었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공의 훈계하는 말을 듣고는 모두 감복하였다. 그리고 온릉 참봉(溫陵參奉)으로 있을 때 순찰사(巡察使)가 봉심(奉審)하러 오자 인천(仁川) 관아에서 음식을 마련해 가지고 왔는데, 이 때 날씨가 추운데다 비바람이 몰아쳐 사람들이 모두 한데 서서 비에 젖어 떠니, 산 사람의 기색이 아니었다. 이에 공이 급히 불을 피워 쪼이게 하고 또 집사청(執事廳)에 모여 앉게 한 뒤에 죽을 끓여 먹였다. 인천의 관리가 공의 은덕을 감사하게 여겨서 그 후 한 두름의 고기를 보냈는데, 공은 웃으며 한 마리만 받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전에 선친의 산소 아래에 있을 때 천둥이 치며 비가 쏟아지는 한밤중에 상여를 멘 일행이 마을에 들어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상여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은 세속에서 꺼리는 일이라 하여 매우 놀라 쫓아내려고 하였다. 공은 그들 일행이 모두 비에 흠뻑 젖어 매우 떨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마을 사람들을 말리고 그들을 따스한 방에 있게 함으로써 구제하였는데, 다음날 아침에 그들은 모두 손을 모아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떠나갔다. 그 후 5년이 지나 공이 성안에 비접[避接]할 때 마침 대문을 마주한 집에 사는 사람이 늘 와서 술과 반찬을 선물하고 떨어진 물품을 대주는 것을 보고 공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더니 그 사람은 지난날 장사 지내러 가던 사람이었다. 이상의 일들은 하찮은 일이지만, 평소에 사람을 사랑하고 남을 구제하는 공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년에 벼슬길에 올라 70이 넘은 나이였는데도, 공무를 수행하고 직책을 다스리는 데 대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능침(陵寢)의 참봉으로 있을 때에는 제향(祭享)을 당하면 반드시 재계 목욕하고 술과 담배도 끊었으며, 집사(執事) 및 노복들도 모두 세탁한 옷을 입게 하여 한껏 정결하도록 하였다. 그 능침의 기일(忌日)에는 3일 동안 소찬(素饌)을 먹었는데, 동료가 지나치다고 하였으나 공은 따르지 않았다. 수운 판관(水運判官)으로 있은 지 3년 동안에는 조선(漕船)이 침몰된 재난이 없었고, 일곱 고을의 색리들에 대하여 점검(點檢)에 빠진 경우에 종이를 바치도록 한 규칙을 혁파하였으므로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기까지 하였는데, 수운 판관에게 송덕비를 세운 일은 예전에도 없었던 것이다.
공은 본성이 검소하여 음식은 굶주림을 면하면 그만이고 의복은 몸만 가리는 것을 취하였으므로, 맛난 음식과 화려한 의복을 한 번도 입과 몸에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관복과 말이며 하인들이 보잘것없어 모양을 이루지 못했는데도 걱정하지 않았고, 늘 청렴할 것으로써 자신을 격려하여 녹봉을 여러 일가와 궁핍한 친지들에게 주었다. 젊었을 때에는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경서(經書), 사서(史書) 이외에 백가(百家)의 서적도 모두 통달하였고, 여러 체의 과문(科文)도 붓을 드는 즉시 지어 냈으며 필법(筆法)도 힘차고 근엄하였는데, 늘 겸손한 태도로 재능을 감추었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뜻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늘 사고(私稿)의 전면에 쓰기를 ‘평생의 소원이 따스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 데에 있지 않다.[平生志願不在溫飽]’고 하였는데, 스스로 기약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이 이러하였다. 평소에 늘 송독하던 것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 《중용(中庸)》, 《대학(大學)》, 《소학(小學)》, 경재잠(敬齋箴), 주염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서명(西銘) 등의 글이었는데, 밤마다 윤송(輪誦)하여 늙었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늘 말하기를, “반계(磻溪) 선조의 저술이 매우 많기는 하지만, 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덕행이 인몰되어 전해지지 않게 된다면 그분께 후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유서(遺書)를 정돈하여 자신이 직접 베껴 썼는데, 90세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반계수록(磻溪隨錄)》의 경우는 여러 본(本)이 유포되어 끝내 주상(主上)께 알려져 간행되기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일은 공의 지극한 정성과 순일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배위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창평 이씨(昌平李氏)는 통덕랑(通德郞) 하석(夏錫)의 딸이고 첨정(僉正) 담(墰)의 손녀인데, 부덕(婦德)과 품행을 지녔고 훌륭한 배필로서 해로하였다. 공보다 14년 먼저 별세하였는데 과천(果川)의 선영(先瑩) 아래에 장사 지냈다. 2남을 두었는데, 장남 명위(明渭)는 바로 포천군(抱川君)이고, 차남 광위(光渭)는 계씨(季氏)에게 출계(出系)하여 3남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3남 중 장남 순(詢)은 진사(進士)이고, 둘째 회(誨)는 주서(注書)이고, 셋째 경(警)은 유학(儒學)을 전공하였다. 포천군은 아들이 없어 순을 후사로 삼았다. 순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운상(運祥)이고, 둘째는 어리며, 첫째 딸은 오승해(吳昇解)에게, 둘째 딸은 정한동(鄭漢東)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셋째 딸은 어리다. 회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운홍(運弘)이고 그 아래의 자녀들은 어리다. 경은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이미 덕을 닦고 선을 쌓아 90여 세의 장수를 누렸고 훌륭한 자손이 뜰에 가득하여 과거에 장원이 잇따랐다. 《시경(詩經)》에 “그 덕이 어긋나지 아니하여 장수의 복을 누린다.”고 하였는데, 공의 후손들의 경사가 아마도 한계가 없을 것이다. 나는 공으로부터 가장 많이 알아줌을 받았고, 또한 포천군과 젊었을 때부터 서로 친했다. 포천군이 내가 본시 신중하고 졸렬하여 지나친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부탁하기에 문장을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이상과 같이 행장을 지어 공이 평소에 알아준 의리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