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국 숙부인 박씨 묘지명 병서
증영의정 오공 휘 단은 곧 나의 자형이요 계유 1633년 그 집에 일이 있어서 예를 마치고 내가 형을 모시고 자리에 앉았더니 모든 부인이 파하고 다투어 교자를 타고 나가거늘 한부인이 홀로 교자를 물리치고 멀리 걸어서 나가 타니 형이 가리키고 이르기를 ‘이는 정위의 아내인데 예절을 익힌 무리가 이와 같다.’고 하여 내가 벌써 그 어짐을 알았더니 이에 미처서는 더욱 탄상을 더하였다.
정위는 곧 의정공의 제 3자요 재종부 휘 전의 뒤가 되어 청환을 역임하고 이제 우승지요 처는 곧 함양박씨이니 따라서 숙부인을 봉하였다. 지신공이 이르기를 ‘부평박공 지술은 행의가 있어 반드시 그 집에 예절이 있다.’하고 나가서 며느리를 구하여 신미 1631년에 초례하여서 맞아들이니 모두 16세이며 사람이 ‘하늘이 정한 아름다운 한쌍이다.’고 칭송하였다.
부인은 어려서 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일을 만나면 금방 해결함이 이치에 합당하니 부평공이 기특하게 여기더니 자라는데 미처서는 성품이 유화하고 선미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갑술 1654년에 지신공께서 돌아가시니 시어머님 유부인을 받들어 그 정성스러운 마음의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섬기기를 하루와 같이 하였다. 유부인께서 죽은 따님의 딸을 기름에 생업의 계책을 원하심이 있으면 반드시 뜻을 먼저 하여 도와서 함께 하니 유부인께서 탄상하시기를 ‘비록 어린 아해의 어미가 있더라도 또한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갑오 1674?년에 유부인께서 돌아가시는데 이르러서는 그 아해를 사랑하고 보호하기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으며 상례와 제사를 행함에 예절을 다하고 애훼함이 지나쳐 거의 성명을 잃게 되니 족당이 효도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종손이 약하면 제사를 돕고 친척이 곤궁하면 베풀기를 좋아하고 숙덕하고 아담하며 자기 몸을 신칙하여 편안히 거처함에는 반드시 옷깃을 여미어 외모를 가다듬고 사람으로 더불어 우스운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복어가 두려워하되 회복하니 대개 지극한 행실은 천성으로부터 나왔으며 마음이 깨끗하고 인품이 조촐하며 탐욕이 없는 조행은 더욱 탁연하여 비록 조그마한 물건을 보내더라도 가려서 사양하고 받아 사군자의 풍도가 있었으니 한 고을이 중간을 주장하여 집의 안과 밖에 절여하니 듣는 자가 모두 공경하고 탄복하였다.
의정공의 초상이 경진 1640년에 있었으니 모두 세 번 엄청나게 큰 슬픔을 당하여 수제하는 엄격함은 하나같이 보고 밖의 여막에서 너무 슬퍼하여 쇠악함이 쌓임을 구원하지 않았으니 심하도다. 아들이 없어 백씨 이조참판공 정일의 제 7자를 취하여 강보로부터 업어다 아들을 삼았으니 이제 11세요 이름은 시만이니 사람이 보고 부인이 사랑함으로써 의방을 궐하지 않음을 알았다.
부인의 원조는 고려조의 추밀원사 휘 신청이요 고조는 휘 세영이니 돈령부정 증좌찬성이요 증조는 휘 대립이니 좌찬성 증영의정이요 조는 곧 부평공이니 증이조참판이요 고는 내섬사직장 유공이니 안동권씨 행 대사간 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천계 병진 1616년 8월 27일에 부인을 낳고 정유 1657년 11월 초10일에 죽으니 얻은 나이도 42세이다. 이 해 12월 28일에 선영을 따라 장사지냈으니 이 양주 아차산의 양지짝 유좌 묘향의 들이다.
올바르고 착한 덕으로써 내리고 큰 복으로써 주어서 마땅히 천도가 어겨지지 않은 것 같은데 홀로 그 수에 인색하였음은 문득 무슨 까닭인가?
청송 심광수는 부당의 친척으로써 옛적에는 사랑하고 기뻐하였으며 이제는 슬퍼하고 근심하여 삼가 남긴 공적을 주어서 이와같이 무덤을 쫓아 유당을 가리니 특별히 대강뿐이다. 몸이 민흉에 있어 감히 명을 하지 못하니
아! 슬프도다.
청송 심광수 지음
가선대부 이조참판겸 동지 경연춘추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오정일은 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