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정[兪大禎]의 묘지(墓誌) 유하익(兪夏益)
부군(府君)의 휘(諱)는 대정(大禎)이요 자(字)는 경휴(景休)이다. 유씨는 신라 기계현(杞溪縣)에서 계출(系出)하였는데, 신라가 망하자 유씨가 고려에 기꺼이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니, 기계현 호장(戶長)으로 강등시켰다. 그러다가 고종(高宗) 때에 휘 여해(汝諧)가 직간(直諫)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그 언론(言論)이 ≪고려사(高麗史)≫에 나와 있다. 그 후 벼슬이 혁혁하게 이어졌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 여림(汝霖)은 예조 판서로 시호가 경안(景安)이니, 이분이 바로 공의 증조이며, 할아버지 휘 관(綰)은 영의정에 추증된 기계 부원군(杞溪府院君)이다. 아버지 휘 호(灝)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정경 부인(貞敬夫人) 한씨(韓氏)는 청주가 본관으로 현령 한수온(韓守溫)의 딸인데, 가정(嘉靖) 임자년(壬子年, 1552년 명종 7년) 10월 18일에 공을 출생하였다.
공은 만력(萬曆)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소속되었고, 얼마 후 사국(史局)으로 옮겼다가 검열(檢閱)을 거쳐 대교(待敎)로 승진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사화(士禍)가 일어나 선류(善類)가 모조리 화를 입으면서 함경북도 평사(評事)로 척보(斥補)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중도에서 탄핵을 받아 돌아오고 말았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외직으로 이천 현감(伊川縣監)에 서용되고,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형조의 낭관에 제수되었다가 곧 옹진(甕津) 수령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들어와 지평(持平)이 된 뒤부터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까지 4년 동안 언관(言官)으로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사유(師儒)로는 직강(直講)ㆍ사예(司藝), 춘방(春坊)은 필선(弼善)ㆍ보덕(輔德), 중서(中書)는 검상(檢詳)ㆍ사인(舍人), 제서(諸署)는 제용감(濟用監)과 군기시(軍器寺)의 정(正)을 두 번 혹은 세 번씩 역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 직함을 띠고 가끔 춘추관(春秋館) 직책을 겸대하기도 하였다. 한편, 한국(閑局) 산질(散秩)은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집의로 있으면서 임금의 은혜를 믿고 죄를 지은 한 내속(內屬)을 논핵하였는데, 이 때문에 임금의 뜻을 거슬려 더 이상 간직(諫職)에 있지 못하고 항상 의정부 사인으로 춘방의 필선이나 보덕을 겸하였다. 따라서 의정부에 제배된 것이 다섯 번이고, 춘방을 겸한 것이 세 번이었다. 상공(相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평소 공을 중하게 여겼는데,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공을 불러 체부(體府)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왜노(倭奴)가 다시 유린하였는데 명나라 형 군문(邢軍門, 형개(邢玠))이 요동에 있으면서 자문(咨文)을 보내 조선의 변방 일을 묻자 조정의 의논이 공을 천거하였다. 공이 요동에 가서 응대(應對)하고 돌아왔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 권력을 잡은 한 재상이 서애공을 배척하면서 공이 조정에 있는 것을 꺼려 전관(銓官)을 사주(使嗾)하여 먼저 공을 평산부(平山府)로 내보냈다. 이후 10년 동안 연달아 하읍(下邑)으로만 전전하여 양주(楊州)ㆍ봉산(鳳山)ㆍ나주(羅州)의 수령을 지냈다. 나주를 다스린 지 3년이 지난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에 잘 다스린 공으로 통정(通政)에 올랐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호서(湖西)를 안절(按節)하고, 이듬해에는 하지사(賀至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수안(遂安) 수령에 보임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체직되었다.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이천(伊川) 분조(分朝) 때의 일로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동지중추부사로 부총관(副摠管)을 겸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는 외직으로 나가 영흥 부사(永興府使)가 되었는데 곧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에 해서 관찰사(海西觀察使)가 되었는데 적신(賊臣) 백대형(白大珩)이 신천(信川) 수령이 되어 탐학하기 짝이 없자 마침내 고과(考課)에서 하고(下考)에 두었다. 그러자 백대형의 무리들이 유감을 품고 논박하였다. 이때 광해군의 정사가 더욱 혼란해져서 영창 대군(永昌大君)과 국구(國舅)를 죽이고 모후(母后)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켜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은 남김없이 폄축(貶逐)되었는데, 공은 그 혼탁함에 물들지 않으려고 시골로 자취를 감추고는 더 이상 벼슬할 생각이 없었다.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 가을에 서추(西樞) 겸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제수하였다가 곧 병조 참판을 제배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또 분병조 참판(分兵曹參判)을 제배하였는데, 분조란 바로 서궁(西宮)을 숙위(宿衛)하는 직책이었다. 성직(省直)한 지 며칠만에 소회를 친구에게 이야기하고는 인하여 사체(辭遞)하였다.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년) 8월 초3일에 병으로 집에서 졸(卒)하니 향년(享年) 65세였다. 새로 터를 가려서 고양(高陽) 송산면(松山面) 간좌(艮坐) 언덕에 장례하였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정랑 정의신(鄭誼臣)의 딸이요, 부제학 정인인(鄭獜仁)의 증손녀이다. 계축년(癸丑年, 1553년 명종 8년) 4월 16일에 출생하여 공보다 8년 뒤인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9월 15일에 세상을 떠나니,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공은 조정에 선 29년 동안 시종(侍從) 직책을 지내고 만년에는 경(卿)의 지위에 올랐으나 당세(當世)와 불합(不合)하였다. 일찍이 여덟 고을 수령을 지내고 또 두 도(道)를 안찰하였으나 역시 오랫동안 관직에 있지 못하여 끝내 온축(蘊蓄)한 바를 다 펴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각(臺閣)에서 논사(論事)하면서 장주(章奏, 임금께 상주(上奏)하는 글)로 올린 말과 여덟 고을과 두 도에서 시행한 은혜로운 정치, 사신의 보좌로 중국에 갔을 때의 주선하여 처리한 일을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절조(節操)의 실제와 돈목(敦睦)한 정의(情誼)에 이르러서는 더욱 민멸되어 전하지 않는다면 불가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공이 일찍이 묘도 문자(墓道文字)로 덕을 찬양하는 병폐를 자손에게 경계하였기 때문에 감히 그 명을 어기지 못하고 단지 세계(世系)와 연보(年譜)만 서술하고 이어서 자손록(子孫錄)만 적는다.
장남은 유수증(兪守曾)이고, 차남은 유시증(兪是曾)이며, 3남은 유여증(兪與曾)이고, 딸은 채이건(蔡以乾)에게 시집갔다. 유수증은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고, 후에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을 두지 못해 유시증의 둘째 아들 유비(兪秘)를 후사로 삼았다. 유비는 진사로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내고 후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아들 유하익(兪夏益)은 문과에 급제하고 평안도 관찰사이며, 사위는 참봉 오시주(吳始周)와 유사(儒士) 이계만(李啓晩)이다. 유하익의 아들은 직장(直長) 유임중(兪任重)과 진사 유세중(兪世重)이며, 사위는 정중재(鄭重載)ㆍ강역(姜櫟)ㆍ김경복(金慶復)이며, 딸 하나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오시주의 아들 오상문(吳尙文)은 진사이고, 딸은 찰방 김인지(金獜至)에게 시집갔다. 이계만의 아들은 이향원(李享源)ㆍ이익원(李益源)이고, 딸은 정필주(鄭弼周)에게 시집갔다.
차남 유시증은 생원으로 벼슬이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에 이르렀으며 후에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관찰사 박경신(朴慶新)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유극(兪極)은 재주가 있었으나 현달하지 못했고, 차남 유비(兪秘)는 유수증에게 출계하고, 3남 유식(兪植)은 업유(業儒)이다. 딸들은 정랑 정언숙(丁彦璛)과 사인 조인욱(曺寅勖)과 이명(李蓂)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유극의 아들 유하진(兪夏震)은 생원으로 현감이고, 유하겸(兪夏謙)은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헌납이다. 유하진의 아들은 좌랑 유처충(兪處重)과 진사 유재중(兪載重)과 유득중(兪得重)이며, 딸은 김태려(金泰礪)ㆍ이승안(李昇安)ㆍ허인(許璘)에게 시집갔다. 유하겸의 아들은 생원 유도중(兪道重)과 유의중(兪義重)이며, 딸은 정천주(鄭天柱)에게 시집갔다. 유식의 아들은 유하태(兪夏泰)ㆍ유하순(兪夏順)이며, 딸은 김정래(金鼎來)에게 시집갔다. 정언숙의 아들은 정시원(丁時遠)ㆍ정시달(丁時達)ㆍ정시건(丁時健)ㆍ정시려(丁時邁)ㆍ정시운(丁時運)이며, 딸은 김홍렬(金洪烈)ㆍ정수증(鄭洙曾)에게 시집갔다. 조인욱의 사위는 이유제(李有濟)이다. 이명의 아들은 이행의(李行義)ㆍ이창의(李昌義)ㆍ이인의(李仁義)이며, 딸은 권두환(權斗煥)ㆍ안기(安基)ㆍ윤침(尹賝)에게 시집갔다.
3남 유여증은 진사인데 후사가 없다. 채이건의 아들은 채계주(蔡繼周)ㆍ채상주(蔡尙周)ㆍ채종주(蔡宗周)이며, 딸은 봉사(奉事) 왕국빈(王國賓)에게 출가하였다. 채계주의 딸은 직강 이성전(李晟傳)과 윤민정(尹敏政)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채상주의 아들은 채하징(蔡河徵)이다. 왕국빈의 아들은 왕정삼(王鼎三)ㆍ왕명삼(王命三)이며, 딸은 조선기(趙善奇)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난 아들 유민증(兪敏曾)은 딸 셋을 두었다. 장녀는 정기광(鄭基廣)의 첩이 되어 정석교(鄭錫喬)와 정석심(鄭錫諶)을 낳았으며, 딸은 이홍전(李弘傳)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권임중(權任中)의 첩이 되어 권만년(權萬年)과 권백년(權百年)을 낳고, 딸은 이용(李容)과 원세탁(元世鐸)에 시집갔다. 3녀는 이초수(李楚叟)의 처(妻)가 되었다. 유극의 서자(庶子)는 유하복(兪夏復)ㆍ유하승(兪夏升)ㆍ유하정(兪夏鼎)ㆍ유하제(兪夏濟)이며, 딸은 고효량(高效亮)과 이세량(李世樑)에게 각각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내외 자손이 모두 2백여 명이나 되니, 공이 후하게 쌓아 놓고 다 받지 못한 복이 후손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겠는가? 아!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