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위난을 급하게 여기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은 충성에서 격발된 것이고, 죽음으로 지켜 달아나지 않은 것은 의리에서 결단한 것이고, 기묘한 계책을 내어 적을 물리침은 용기에서 분발된 것이다. 이 세 가지에 능하여 드높은 공렬을 세워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는 분은 고 목사 김후(김시민)이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25) 여름 4월, 왜놈들이 국력을 기울여 침범하여 삼도(三都)를 곧바로 공격해 팔도의 길로 가득 몰려와서 임금의 수레는 서리와 눈을 맞고 종묘사직은 풍진에 휩싸였다. 이때 여러 고을은 소문만 듣고 달아나 무너져 머리 내민 쥐처럼 머뭇거리며 후사를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유독 김후만은 진주의 통판(通判)으로서 나라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여 눈물을 뿌리며 민중들에게 맹세하였다. 사천(泗川)과 고성(固城)의 적들을 공격하여 쫓아냈으며, 진해(鎭海)에 웅거하고 있는 왜장을 잡아 행재소로 보냈으며, 병사들을 거느리고 김산(金山)으로 달려가 적진을 쳐부수어 위명을 크게 떨쳐 개령(開寧)과 금산(錦山)의 적들로 하여금 소문만 듣고도 물러가게 하였다. 이것이 충성에서 격발된 것이 아니겠는가.
관군이 출전하여 돌아오기 전에 왜적들이 빈틈을 타 곧장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두 배로 빨리 달려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전단(田單)이 즉묵성(卽墨城)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싸운 것처럼 분발하고,장순(張廵)이 수양성(睢陽城)을 지킨 의지처럼 군사들을 독려하여 살기를 구차하게 취하지 않고 죽음으로 반드시 인을 이루었다. 이것이 의리에서 결단한 것이 아니겠는가.
달무리 지듯 왜적이 성을 포위하여 바야흐로 긴급한데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밤낮으로 성을 순시하며 쇠고기와 술을 군사들에게 먹이고, 술자리를 화목하게 하여 피리 불고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절로 굳건하여 공을 믿고서 두려움이 없었다. 기회를 엿보아 호응하여 모이고, 민첩하게 신묘하고 기이한 계책을 냈다. 자신이 사졸보다 앞장서서 피눈물을 삼키며 전투를 독려하니,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시체가 쌓인 것이 삼대와 같았다. 고립된 성루의 적은 병사가 실로 채 천 명도 되지 않지만, 능히 수십만의 많은 왜적을 물리쳤다. 용기를 분발한 자가 아니라면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공은 충성이 이와 같고, 의리가 이와 같고, 용기가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천둥이 치고 큰비가 내려 사방이 깜깜해지자, 왜적의 무리들이 놀라고 당혹하여 넋을 잃고 밤에 도망한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다. 성이 6일 밤낮으로 포위되어도 백성들이 배반할 뜻이 없고, 공과 함께 왜적을 원수로 삼은 것은 백성들이 공을 사랑한 것이다. 하늘이 돕고 백성들이 사랑했지만, 괴이하게도 조물주의 장난이 심해 적이 물러가는 날에 마침 공은 유탄에 맞았다. 군영에 별이 떨어지니, 장성(長城)이 갑자기 무너지는 듯하였다. 아, 애통하다! 아, 애통하다!
조정에서는 김후의 공을 아름답게 여겨 이미 목사로 승진시켜 품계를 높이고 이어서 총병(摠兵)으로 발탁 제수하였으며, 돌아가시자 대사마(大司馬)로 증직하였으니, 포숭(褒崇)하는 나라의 은전이 또한 지극하였다. 고을 백성들이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의논하여 비석을 세워 큰 공을 기록하고자 하였다. 이에 상국 남이흥(南以興)이 이곳에 부임하여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말하기를 “김 목사(金牧使)가 성을 온전하게 한 공은 실로 우리나라에 변란이 있은 이래로 없었던 일입니다. 그 공적을 없애 전해지지 않게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금석에 새겨서 영구히 전할 것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고서, 이에 나에게 글을 짓도록 하였다.
내가 삼가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아! 우리 김후의 충성과 의리와 용기는 비록 옛 사람들에게서 구해도 쉽게 얻지 못할 것입니다. 김후가 만약 살아 계셨다면 반드시 계사년(1593, 선조26)의 왜적이 진양성을 원수처럼 여겨 끝내 세 장수가 원숭이나 학이 되게 하고 많은 군졸이 모래나 벌레가 되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운일까요? 운명일까요? 하늘의 뜻은 믿기 어렵습니다. 김후의 휘는 시민(時敏), 자는 면오(勉吾)이며, 본관은 안동입니다. 대대로 한양에 살았고, 대대로 벼슬을 하였습니다. 선조 때에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되었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기상은 예리하면서도 강했고 / 氣銳而剛
자질은 굳세면서도 온화했네 / 質毅而溫
의리로써 줄기를 삼고 / 義以爲幹
충성으로써 뿌리를 삼았네 / 忠以爲根
성을 온전히 하고 적을 물리침은 / 全城卻敵
그 공적과 같고 / 如其功
나라 일에 죽음은 / 死於王事
그 충성과 같네 / 如其忠
진주의 산이 높고 높으며 / 晉山峩峩
진주의 물이 넘실거리니 / 晉水洋洋
비석 하나 천추에 전해져 / 一石千秋
산처럼 높고 물처럼 장구하리 / 山高水長
[주-D001] 삼도(三都) : 한양, 평양, 개성을 가리킨다.[주-D002] 김산(金山) :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金泉)이다.[주-D003] 전단(田單)이 …… 분발하고 : 전단은 연나라 장군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공격할 때 즉묵(卽墨)에서 맞서 싸운 제나라 장군이다. 성 안의 소 천여 마리를 모아 뿔에 칼을 장식하고, 몸에는 용의 그림을 그리고, 꼬리에는 기름을 묻히고, 결사대 오천 명을 뒤따르게 했다. 소의 꼬리에 불을 붙이자 소는 미친 듯이 적진을 향해 달려갔고, 결사대가 뒤를 따르면서 연나라 군대를 궤멸시켰다. 《史記 卷82 田單列傳》[주-D004] 장순(張巡)이 …… 의지 : 장순은 당(唐)나라 때 충신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 군사를 이끌고 수양(睢陽)에 이르러 태수(太守) 허원(許遠)과 합세하였다. 이때 적장 윤자기(尹子琦)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는데, 장순은 군사들을 격려하며 성이 함락될 때까지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新唐書 卷192 張巡傳》[주-D005] 남이흥(南以興) : 1576~1627.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602년(선조35)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병마절도사, 안주 목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주-D006] 세 …… 되게 : 세 장수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전라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이다. 원숭이나 학이 되고 모래나 벌레가 되었다는 것은 전장에 나가 죽은 장병(將兵)을 가리킨다. 《포박자(抱朴子) 〈석체(釋滯)〉에 “주(周)나라의 목왕(穆王)이 남쪽으로 정벌할 때 일군이 모두 죽으니, 군자는 원숭이나 학이 되고, 소인은 모래나 벌레가 되었다.〔周穆王南征,一軍盡化,君子爲猿爲鶴,小人爲蟲爲沙.〕”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