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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응선(應善), 자는 이길(而吉), 관향은 무안(務安)이다. 박씨(朴氏)는 처음에 신라 시조에서 나왔는데 중간에 10여 곳이 넘게 관향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니, 무안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 현종 때 좌복야 섬(暹)이 공훈과 벌열로 드러났고, 7대를 내려와 조선에 들어와서는 형조 판서 의룡(義龍)이 있었고, 또 4대를 내려와 온양 군수 진경(晉卿)이 있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되는데, 고려조로부터 이 때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다. 사의 휘 언(堰), 현령 증 참판 휘 인호(仁豪), 개성 도사 증 이조 판서 남촌(南村) 휘 인(璘)은 곧 공의 증조, 조부, 부친이다. 모친은 증 정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니 우참찬 현(鉉)의 따님인데, 만력 을해년(1575, 선조 8) 12월 6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빼어나고 지조가 있었으며 평소에 독서를 좋아했다. 제법 자라서는 지퇴당(知退堂) 이공 정형(李公廷馨)에게 수업하여 개연히 도를 구할 뜻이 있어 학업을 닦기에 힘을 다하였다. 조금 있다가 임진란을 만나게 되었는데, 부친 남촌공이 임금을 호종하여 서쪽으로 가자 공은 백모 이부인(李夫人)과 계모 심부인(沈夫人)을 모시고 춘천으로 병화를 피했는데 피난 중에 처해 있으면서도 학문에 힘써 해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훌륭한 명성이 날로 빛나게 되자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나이가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귀었다.
선조조에서 광해군조로 바뀌는 즈음에 임금은 혼미하고 정사는 혼란하자, 드디어 과거를 폐하고 자호를 정옹(淨翁)이라고 했으니, 대개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윽고 원주(原州)의 섬강(蟾江)에 살 곳을 정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인조가 반정(反正)하여 현량(賢良)한 선비를 선발할 때 공이 복천(復泉) 강학년(姜鶴年), 용주(龍洲) 조경(趙絅)과 함께 천거를 받아 곧바로 은진 현감에 임명되었다. 공은 부임하여 학교를 흥기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향교의 유생들에게 초하루와 보름에 강송(講誦)하도록 과제를 주어 규정이 매우 엄하니 사람들이 자못 괴롭게 여겼다. 그러나 병인년(1626, 인조 4)에 호패법(戶牌法)이 시행되었을 때 유생들 가운데 강(講)에 떨어진 사람을 첨정(簽丁)에서 면제시켜주는 은혜를 베푸니, 이에 사람들이 모두 고맙다고 칭송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 5)에 노동창(奴東創)을 세웠는데, 공이 병사들의 양식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자 아전들이 농간을 부릴 수 없게 되니, 공을 무고하여 행조(行朝)에 투서했으나 주상이 이를 불사르라고 명하였다. 난이 조금 진정되어 공이 돌아왔다.
기사년(1629, 인조 7)에 호조 좌랑에 임명되고 이어서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당시에 대각(臺閣)에서 계청하기를, 음직으로 나온 사람 가운데 사마시에 합격하지 않고 삼조(三曹)의 낭관이 된 이를 해직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공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공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드디어 사직소를 올렸는데, 이어서 순창 현감에 임명되었다가 1년이 되지 않아 호조 좌랑으로 있을 때의 일이 빌미가 되어 파직되었으니 공의 죄가 아니었다.
임신년(1632, 인조 10)에 형조 정랑에 임명되고, 이윽고 외직으로 나가 삭녕 군수가 되었다가 갑술년(1634, 인조 12)에 어떤 일로 파직되었다. 을해년(1635, 인조 13)에는 군자감 판관에 임명되고 단양 군수로 옮겼다가 겨울에 병으로 그만두고 돌아왔다.
병자년(1636, 인조 14) 3월 16일에 서울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62세였다. 모월 모일에 양성(陽城) 서쪽 조곡(棗谷) 묘좌(卯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뒤에 증손 징(澄)이 귀하게 됨으로써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공은 5세에 모친이 돌아가셔서 백부모가 거두어 길렀는데 뒤에 모두 3년의 복을 입어 그 은혜에 보답하였다. 갑오년(1654, 효종 5)에 백모가 돌아가시고, 을미년(1655, 효종 6)에 남촌공이 해직되어 개성에서 돌아가시고, 이듬해 계모가 돌아가셨다. 3년 사이에 거듭 거창한 일을 당함에 비록 창황한 난리중이었으나 복을 입음이 더욱 정성스러웠고 슬픔으로 몸을 훼상함이 예제에서 지나쳐, 결국 종신토록 파리하게 여윈 질병을 갖게 되고 말았다.
두 여동생과 한 남동생이 있었는데 어루만지고 사랑함이 매우 돈독하였다. 아우가 아들 수(𥞼)와 나이도 같고 배우기도 같이 했는데, 아우가 일찍 죽자 비통한 마음에 차마 아들 수를 가르치지 못한 것이 거의 반 년이었다.
제례는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준수하고 깨끗하게 재계하여 정성과 공경을 다하기에 힘썼다. 관직에 있으면서 외신(外神)을 섬길 때에도 일찍이 남을 시켜서 대신 행하게 하지 않았다.
종족을 만나면 은혜로 대하여 반드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즐겁게 하였다. 서종조모가 연로하여 자식이 없어 공에게 의탁했는데 재산이 자못 넉넉하였다. 돌아가시기에 이르러서는 기물을 갖추어 염장(斂葬)을 치렀으며 묘소를 지키는 종을 마련해 두고 자신은 한 물건도 취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여러 자제들을 가르칠 때는 권면하기를 돈독하게 하고 책려하기를 엄하게 하니, 다섯 아들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후진을 가르치고 인도하여 성취한 이가 많았으니, 감사(監司) 이명웅(李命雄), 참의(參議) 홍진(洪瑱)이 그 가운데 두드러진 사람이다.
관직에 있으면서 규정대로 따르기에 힘쓰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아전을 단속함이 엄하고 사물의 본말을 밝힘이 분명했으니, 투서의 변고와 순창에서의 파직은 모두 고을의 아전들이 서로 공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공은 집이 본디 빈한했으나 맑은 고절(苦節)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아, 여러 차례 고을을 맡아 다스렸으나 전원이 조금도 증가함이 없었다. 성품이 또한 검소하여 어려서부터 일찍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지 않았다. 감사(監司) 홍득일(洪得一)은 소싯적의 벗이었는데, 일찍이 어사가 되어 관동 지방을 순행하다가 객사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자게 되었다. 그런데 홍 감사는 자신의 침구를 치우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모와 함께 자게 되었는데 나의 비단 이불이 화려하게 아름다운 것이 부끄러워 감히 내놓을 수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벗들 사이에 추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함께 사귄 벗들이 모두 당대의 명류였으며, 여럿이 함께 있어도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엄숙하였고 입으로 농담을 말하지 않았다. 문에는 잡객이 없었고 연회와 음악을 일삼는 장소에는 나아가기를 즐기지 않았다.
만년에 초가 몇 칸을 짓고는 이어서 호를 초정(草亭)이라 했는데 사방의 담장이 고요하였고, 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날마다 반드시 일찍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어서 한밤중까지 묵묵히 경전(經傳)을 완미하고 정미(精微)한 뜻을 분석하여 확연히 깨닫고 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일찍이 손수 자경문(自警文) 4조를 써서 벽에 붙여 두고 보면서 반성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음을 세움은 충신ㆍ관후하게 하여 남을 속이거나 각박하게 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라 / 立心忠信寬厚切戒欺詐刻薄
몸가짐은 엄중ㆍ염결하게 하여 경솔하고 구차하게 됨을 철저히 경계하라 / 持身嚴重廉潔切戒率爾苟且
일을 처리함은 심밀ㆍ견고하게 하여 사전의 계획이 드러나거나 꺾여서 변개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라 / 處事深密堅固切戒淺露撓改
사물을 접함은 장경ㆍ온화하게 하여 가볍고 더디거나 거칠고 사납게 함을 철저히 경계하라 / 接物莊敬溫和切戒輕慢粗暴
더욱 예설(禮說)에 정밀하여 《의례(儀禮)》, 《가례(家禮)》, 《대명률(大明律)》, 본조의 《대전(大典)》 등의 책을 고찰하여 사정횡간(四井橫看)을 만들고 그 사이에 자신의 의견을 붙였다. 또 천자ㆍ제후의 정통복과 임금이 신하를 위한 복, 신하가 임금을 위한 복, 경ㆍ대부ㆍ사ㆍ서인의 복, 사우(師友)의 복, 조문하는 복 등의 예설을 기록하여 한 권의 책자를 만들어 이에 대해 밝히기를 도모했으나 탈고하지는 못하였다. 평생의 저술이 병화에 많이 산일되었다고 한다.
부인은 숙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니 판서 파곡(坡谷) 성중(誠中)의 따님인데 공보다 두 살 더 많다. 규문의 법도가 이미 가정에서 이루어졌는데 18세에 공에게 시집와서 부도를 행함이 정성스러웠고 한결같이 공의 뜻을 따랐다. 공을 따라 관아에 있을 때는 뇌물이 행하지 않으니, 공이 깊이 공경하고 중시하였다. 기사년(1629, 인조 7) 4월 12일에 돌아가셨는데,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현감 수(𥞼), 다음은 참봉 유(𥠷), 다음은 좌랑 규(䅅), 다음은 진사 미(𥠦), 다음은 치(穉)이다. 딸은 현감 조흡(趙嶖), 목사 이정(李晸)에게 출가했다. 측실에는 두 딸이 있었는데 이민(李𤇜)과 홍우징(洪又徵)에게 출가했다. 수는 아들이 없어서 창도(昌道)를 양자로 들였다. 유의 한 아들은 천용(天用)이고 네 딸은 신담(申曇), 참봉 이강(李鋼), 김정징(金正徵), 진사 허은(許檼)에게 출가 했다. 규는 여섯 아들을 두었으니 증 이조 참판 창하(昌夏), 양자로 나간 창도(昌道), 창은(昌殷), 창주(昌周), 승지 창한(昌漢), 창동(昌東)이고 한 딸은 생원 이양래(李陽來)에게 출가했다. 미의 두 아들은 창좌(昌佐)와 창만(昌萬)이고 두 딸은 안정수(安廷燧)와 이우(李瑀)에게 출가했다. 치의 두 아들은 창징(昌徵)과 창휘(昌徽)이다. 조흡의 두 아들은 현감 성건(性乾), 유건(惟乾)이고 세 딸은 참봉 소형우(蘇亨宇), 참봉 정태정(鄭泰廷), 정수인(鄭洙仁)에게 출가했다. 이정은 문석(文碩)을 양자로 삼았다. 내외의 증손이 70여 명이고, 지금은 7, 8대에 이르러 거의 천 명에 이른다. 농와장(聾窩丈) 사정(思正)은 곧 공의 이손(耳孫 8대손)으로 참판공의 아들 우윤 휘 징(澄)의 손자이고 장령 고심재(古心齋) 휘 이문(履文)의 아들인데, 공의 언행을 수습하여 행장을 지어서 나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선조께서 돌아가신 지 지금 140년이 넘었는데 묘소에 묘지(墓誌)가 없고 묘도에 묘갈(墓碣)이 없으니 무엇으로써 나의 어리고 몽매한 자손에게 고하겠는가. 선조의 자취를 불후하게 할 부탁은 비록 거장(巨匠)에게 해야 하나 또한 그만한 사람을 만나기 어렵고, 일을 기록하는 것은 오직 실상대로 하면 되는 것이니, 그대는 이를 도모하기 바란다.”
하였다. 내가 굳게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절하고 받아 삼가 차례로 서술하기를 이상과 같이 하고, 다음에 명을 붙인다.
세상에서 덕문을 일컬음은 / 世稱德門
면성을 말한다네 / 曰惟綿城
옛적 고려조에 있어서 / 奧在勝國
복야공이 공신의 반열에 올랐네 / 僕射圖形
우리 성조에 이르러 / 爰及聖朝
관직이 높은 형조 판서가 있었네 / 官隆判刑
유파가 멀리 드날려 / 流派遠揚
대대로 벼슬이 줄지었네 / 代列簪纓
정기를 품고 빼어남을 길러 / 孕精毓秀
공이 곧 우뚝하게 태어났네 / 公乃挺生
유곡의 난향이 절로 퍼져 / 谷蘭播芬
이름이 조정에 드날렸네 / 名揚王庭
누차 군현을 맡아 다스리니 / 累佩銅章
아전이 움추리고 백성이 편안했네 / 吏貳民平
배운 바를 미루어 나가 / 推其所學
마땅히 그 기량을 크게 베풀만 했건만 / 宜大厥施
어찌타 시운에 굴하여 / 奈屈于時
마침내 행하지 못했던가 / 竟未有爲
네 조목의 자경문은 / 四條自警
행하기에 궤기하지 않았고 / 行不詭奇
예서를 편집한 것은 / 禮書有編
공사간에 징험할 만했네 / 可徵公私
보존함이 깊고 쌓음이 두터워 / 存深積厚
후손에게 넉넉히 끼치는 바탕이 되니 / 裕後爲基
우윤공이 자취를 드러내고 / 京尹發跡
고심재가 법도를 계승했네 / 心齋襲規
아름다운 언행을 수습한 이로서 / 收芳拾馨
농와가 바로 여기 있으니 / 聾窩在而
엮어서 명을 지음에 / 掇輯爲銘
어찌 감히 실상에 넘치리 / 豈敢溢辭
[주-D001] 호패법(戶牌法) : 호패를 차도록 하는 법제. 조선 태종 때 처음 시행되었다가 잠시 폐지되고, 세조 4년에 다시 시행되어 거의 조선조 말까지 시행됨. 호패는 16세 이상 되는 남자가 차는 길쭉한 패찰로서 전면에는 성명, 나이, 생년의 간지를 새기고 후면에는 해당 관아의 낙인(烙印)이 찍혔으며 신분에 따라 구별이 있었음.[주-D002] 첨정(簽丁) : 군역에 종사할 장정을 군적(軍籍)에 올려 기록함. 또는 그 장정.[주-D003] 삼조(三曹) : 조선조의 호조, 형조, 공조를 말함.[주-D004] 사정횡간(四井橫看) : 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