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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사수(死囚) 박응서(朴應犀)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무고하였다. 이때 김공 지남(金公止男)이 사헌부 집의로 있었는데, 지평 정호관(丁好寬)이 영창대군을 죽이자는 의논을 가장 먼저 내었다. 이에 공이 그 말을 면전에서 꺾으니, 정호관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영창대군의 일을 인하여 모후(母后)를 폐하고자 하였는데,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그 말을 듣고는 공을 불러서 묻기를 “그런 의론이 있다고 하는데, 어떠합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일의 옳고 그름을 묻는 것입니까, 아니면 일신의 이롭고 해로움을 묻는 것입니까?” 하니, 최유원이 말하기를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옛 역사책을 읽지 않았지만, 그대는 여러 서책을 두루 보았습니다. 옛날에도 역시 아들 때문에 어미를 폐한 경우가 있습니까? 감히 묻습니다.” 하자, 공이 답하기를 “어미를 폐하다니, 이 무슨 말입니까. 옛날에 영고숙(潁考叔)이 정 장공(鄭莊公)을 감동시켜 모자 사이가 처음과 같이 되었는데, 군자가 이에 대해 순효(純孝)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이 일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실려 있는바, 하필 널리 상고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머니를 폐하다니, 이 무슨 말입니까.” 하니, 최유원이 공의 말에 크게 감복하여 죽음으로써 간쟁하기를 약속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장령 정조(鄭造)가 호씨(胡氏 호안국(胡安國))의 무후(武后)에 대한 논의를 가지고 와 모인 자리에서 내보이자, 최유원이 공에게 눈짓하면서 말하기를 “이 논의가 어떻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무후(武后)는 당(唐)이란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임금을 시해하고 어머니를 독살하였습니다. 지금에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결단코 따를 수가 없습니다.” 하니, 동료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이에 정조가 곧바로 달려가 피혐하고서 말하기를 “경솔하게 중론(重論)을 발하였으니, 아, 나는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공과 최유원이 즉시 정조와 뜻이 같지 않음을 진달하였다. 그러자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모두 공이 헤아릴 수 없는 화에 빠져들 것을 염려하였다. 광해군이 비록 혼모하고 포악하기는 하였지만, 역시 올바른 의론을 꺼리어서 죄주지 못하였으며, 이이첨 등이 끝내 그들의 흉계를 펼치지 못하였다. 그러니 모후께서 온전히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공의 덕분이었다.
공은 가정(嘉靖) 기미년(1559, 명종13)에 출생하여 숭정(崇禎) 신미년(1631, 인조9)에 졸하였는바, 향년은 73세였다. 광주(廣州) 매장리(梅莊里)의 고산(孤山)에 있는 건향(乾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바로 선영이 있는 곳이다. 그로부터 2기(紀)가 지난 뒤에 외손 이관하(李觀夏)가 나 두경에게 와서 묘지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적이 생각건대, 계축년(1613, 광해군5) 이래로 모후를 위하여 절개를 세운 자들이 많기는 하였으나, 발론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는바, 윤기(倫紀)를 부식하는 데 큰 공이 있었다. 이 점이 가장 뚜렷이 드러낼 만한 점이다. 광해군이 사직(社稷)의 담장을 무너뜨리고 정전(正殿)을 세우고자 한 일도 공의 말에 힘입어 드디어 정지되었다. 또 팔도에서 서로 앞다투어 백성을 학대하고 토목공사를 도우면서 광해군에게 아첨하였는데, 공은 영남 지방을 안찰하면서 견책을 받으면서도 끝내 명에 응하지 않았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홍(尹宖)이 세력을 믿고는 탐오하고 방종하게 굴자 곧바로 내쫓았다.
상국(相國) 이덕형(李德馨)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원하다가 죄에 걸려 삭직되었는데, 졸하자 복관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양사(兩司)에서 복관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공은 사간(司諫)에 제수되어 이를 따르지 않았다가 도리어 공격을 당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공은 특립군자(特立君子)로서 대절(大節)에 임하여 뜻을 빼앗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공의 자는 자정(子定)이고, 호는 용계(龍溪)이며, 광산인(光山人)이다. 신라의 왕자 김흥광(金興光)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는 광주(光州)의 서쪽에 있는 어떤 골짜기에 은거하였다. 그 뒤 대대로 삼공(三公 평장사(平章事))이 나왔으므로 그 골짜기를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 공은 그분의 후손이다. 증조의 휘는 석(磶)으로, 예조 정랑을 지냈다. 할아버지의 휘는 세우(世愚)로,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표(彪)로, 영동 현감(永同縣監)을 지냈다. 어머니는 감찰 김자위(金自渭)의 딸이다. 공의 재종부(再從父)인 삼가 현감(三嘉縣監) 휘 양(讓)이 아들이 없어 공을 후사로 삼았다.
공은 타고난 재질이 절륜하여 일곱 살 때 시에 능하다고 소문났다. 신묘년(1571, 선조4)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으며, 이해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성균관에 낮추어 차임되었는데, 이는 당파(黨派)가 달랐기 때문이다. 계사년(1593)에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갔다가 승문원(承文院)으로 개차되었다.
일찍이 정언(正言)이 되어 입시하였을 때 상께서 바야흐로 《주역》을 강독하고 있었다. 그때 강관(講官)으로 있던 오윤겸(吳允謙)이 경문의 뜻을 인하여 진달한 바가 있었는데, 상께서 답하지 않은 채 글자의 음과 해석에 대해서만 물었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임금이 경전을 공부하는 본뜻이 경전의 뜻을 파악하는 데 있으니, 글자의 음과 해석은 말단적인 것입니다. 아래에서 그 본을 진달하였는데, 위에서 말단적인 것을 물으시는 것은 결단코 경연을 열어 강론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또 아뢰었으나, 상께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대사헌 황신(黃愼)이 아뢰기를 “이것은 참으로 간관다운 말입니다.” 하니, 상께서 그렇다고 하였다. 일찍이 판결사(判決事)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내수사(內需司)를 두려워하여 투탁(投托)한 자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미루기만 한 채 결송(決訟)하지 못했으나, 공은 부임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판결을 내렸다. 공이 득실(得失)에 대하여 담박하기가 이와 같았다.
공의 관작을 서술해 보면, 내직으로는 승문원 정자, 한림, 지제교, 수찬, 교리, 응교, 정언, 사간, 지평, 장령, 집의, 필선, 보덕, 승지, 예조ㆍ병조ㆍ형조의 참의를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황주 판관(黃州判官), 경기ㆍ평안ㆍ전라ㆍ강원의 도사(都事), 경상 감사, 남양(南陽)ㆍ순천(順天)ㆍ상주(尙州)ㆍ청풍(淸風)의 수령을 지냈다. 일찍이 한원(翰苑)에 있을 적에 해주(海州)에 성을 쌓는 공역이 있어, 상께서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유상 영경(柳相永慶)이 당시에 황해도를 안찰하면서 그 일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헛되이 벌여 놓은 일이 많았다. 공은 사실에 의거하여 상께 아뢰면서 두둔해 주지 않았다. 이에 유영경이 크게 유감을 품어 끝내 해독을 끼쳤다. 그 뒤 이이첨(李爾瞻)이 유영경의 집안을 멸족시킬 때 공이 유씨 집안과 틈이 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공을 찾아와서 함께 도모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그의 당파 사람들을 보내어 공의 뜻을 탐지하였는데, 공은 전혀 모른 척하면서 응하지 않았다. 그 정직하면서 명리를 도외시함이 이와 같았다.
계해년(1623, 인조1)에 반정하고서 혼조(昏朝) 때 외임(外任)에 제수된 자들을 모두 파직하였는데, 특명을 내려 공은 그대로 영남을 안찰하게 하였다. 공이 졸하자 상께서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였다.
부인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감찰 오경민(吳景閔)의 딸이다. 후부인(後夫人)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참봉 김호열(金好說)의 딸이다. 오씨는 1녀를 낳았는데, 목사 이침(李梣)에게 시집갔다. 이침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관하(李觀夏)는 현감이고, 차남은 이태하(李泰夏)이고, 삼남은 이정하(李鼎夏)이며, 딸은 좌랑 윤지미(尹趾美), 서윤(庶尹) 이송령(李松齡), 감사(監司) 홍위(洪葳)에게 시집갔다. 이태하는 3남 2녀를 두었으며, 이정하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김씨는 1녀를 낳았는데, 현감 유시량(柳時亮)에게 시집갔다. 유시량은 3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유송제(柳松齊)ㆍ유계제(柳桂齊)ㆍ유회제(柳檜齊)이며, 딸은 현감 송박(宋搏), 종실(宗室) 능주수(綾州守) 이간(李侃), 사인(士人) 성호열(成虎烈)ㆍ이세억(李世億)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공은 아들이 없어서 형인 판관(判官) 계남(季男)의 아들 전(葏)을 후사로 삼았다. 전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우인(宇仁)으로 교관(敎官)이고, 차남은 우준(宇俊)이며, 큰딸은 사인(士人) 유욱증(兪勖曾)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사인 이백행(李百行)에게 시집갔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모두 여묘살이를 하였다. 형제 다섯 사람이 늘 함께 살면서 시를 지으면 문득 서로 창화(唱和)하였다. 공은 문장이 부박(富博)하고 청건(淸健)하였다. 시문(詩文) 및 소사(小史), 소설(小說), 내학(內學), 좌사(左史), 절요(節要) 등에 관한 글이 세상에 전한다.
공의 집안이 가난하여 비석을 세울 수가 없었는데, 공의 딸인 목사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의 행적을 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비석을 세우는 일을 경영하였으니, 그 효성이 가상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계축년이 되던 해에 하늘에서 재앙 내려 / 歲在癸丑天降割
뭇 소인들 뜻을 얻어 제멋대로 해 끼쳤네 / 群小得志恣妖孼
윤리 기강 공 덕분에 일맥 부지되었거니 / 倫紀賴公扶一脈
범의 꼬리 밟았으나 용케 아니 물리었네 / 虎尾之履幸不咥
경수 물이 위수의 물 탁해지게 못 했거니 / 涇水不能使渭濁
갈아도 안 갈리고 물들여도 안 들었네 / 不磨于磷不淄涅
광릉 땅의 고산에는 무덤 울울하거니와 / 廣陵孤山城鬱鬱
돌에다가 명 새기어 공의 무덤 표시하네 / 刻之于石表公室
[주-D001] 광해군 …… 무고하였다 : 광해군 5년에 대북파(大北派)가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박응서는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자(庶子)로 시문(詩文)에 능하고 학문이 높았으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출세의 길이 막혔다. 이에 불만을 품고 같은 명문의 서출인 서양갑(徐羊甲)ㆍ김경손(金慶孫) 등과 죽림칠우(竹林七友)를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조령(鳥嶺)에서 은상(銀商)을 죽이고 은(銀)을 강탈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일당이 검거되었다. 이때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등이 이들을 꾀자,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은을 강탈했다고 거짓 자백하였다. 이 허위 자백으로 인해 영창대군을 강화(江華)로 유배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기타 소북(小北)을 숙청한 옥사가 일어났다. 박응서는 무고한 대가로 벼슬에 올랐으나, 인조반정 이후 주살되었다.[주-D002] 옛날에 …… 되었는데 : 영고숙(潁考叔)은 춘추 시대 정(鄭)나라 때 영곡(潁谷)에 봉해진 사람이다. 당시에 정 장공(鄭莊公)이 아우 숙단(叔段)의 반란과 관련하여 친어머니인 강씨(姜氏)를 유폐시켰는데, 영고숙이 장공이 내려 준 고기를 어머니를 생각해 먹지 않자, 마침내 장공이 영고숙의 행실에 감동하여 모자 관계를 회복하였다. 《春秋左氏傳 隱公元年》[주-D003] 무후(武后)는 …… 독살하였습니다 : 무후는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를 가리킨다. 측천무후는 미모가 뛰어나 14세 되던 해인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11년(637)에 재인(才人)으로 입궁하였고, 그 후 고종(高宗)의 사랑을 받아 고종의 황후 왕씨(王氏)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뒤에 자신의 큰아들인 홍(弘)을 태자로 세웠으나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짐독(鴆毒)을 마시고 죽게 하였으며, 둘째 아들을 세웠다가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을 세웠는데, 이 사람이 중종(中宗)이다. 나중에 중종을 폐하고 자신이 스스로 즉위하여 제(帝)라 칭한 다음, 나라 이름을 주(周)라고 고치고 자기 이름을 조(曌)라고 고쳤다. 그러고는 온갖 음란과 학정을 자행하다가 16년 뒤에 장간지(張柬之) 등에게 폐위되었다. 여기에서 말한 ‘임금을 시해하고 어머니를 독살하였다.’라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舊唐書 卷6 則天皇后本紀》[주-D004] 내학(內學) : 참위(讖緯)에 관한 학설이나 신선술에 관한 학설을 말한다.[주-D005] 범의 …… 물리었네 :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위험한 처지에 처했으나 요행히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이괘(履卦) 육삼효(六三爻)〉에 이르기를 “범의 꼬리를 밟아 범에게 물리니 흉하다.〔履虎尾 咥人 凶〕”라고 하였다.[주-D006] 경수(涇水) …… 했거니 : 온 세상이 혼탁한 가운데에서도 홀로 깨끗하게 지냈다는 뜻이다. 경수와 위수(渭水)는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두 강의 이름인데, 경수는 물이 탁하고 위수는 맑기 때문에 흔히 옳고 그름과 맑고 탁함에 대한 분별을 엄격히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주-D007] 갈아도 …… 들었네 : 험난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덕(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공자(孔子)가 필힐(佛肹)을 찾아가려고 하자, 필힐이 혹시나 공자를 욕보일까 싶어서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가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가 말하기를 “단단하다고 하지 않던가? 갈아도 없어지지 않으니. 희다고 하지 않던가?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하였다. 《論語 陽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