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성은 남씨(南氏)이고 휘는 하주(夏疇), 자는 계숙(季叔)이다. 숙종 정묘년(1687, 숙종13) 11월 2일에 태어나 경인년(1710) 3월 19일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광주(廣州) 음촌(陰邨) 선영 아래 오좌(午坐)의 언덕에 있다. 두 아들 계(堦)와 돈(墩)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돈(墩)은 양자로 나갔다. 계(堦)의 아들로 필대(必大)가 있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고(考) 휘 수기(壽箕)는 성균관 생원이고, 조부 휘 중소(重召)는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를 지냈으며, 증조 휘 두상(斗相)은 별좌(別坐)를 지냈고, 고조 휘 이웅(以雄)은 진무 공신(振武功臣)에 녹훈되고 좌의정을 지냈으며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외조부 광주 안씨(廣州安氏) 휘 헌징(獻徵)은 강원 감사를 지냈다.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고 휘 현수(玄綏)는 호조 좌랑을 지냈고, 조부 휘 동규(同揆)는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으며, 증조 휘 성구(聖求)는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고조 휘 수광(睟光)은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의령이 본관인 남씨는 / 南貫宜寧
근원이 대국에서 시작됐다 / 源從大國
당나라의 명을 받고 / 受命唐家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 使日出域
표류하여 우리나라 귀의한 뒤 / 漂泊歸我
자손이 불꽃처럼 번성했다 / 子孫燀赫
충경공께서는 / 有諡忠景
조선 개국을 보좌하고 / 佐啓國光
세상을 떠난 뒤에는 / 攀附登天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 陪食先王
충간공을 거쳐 / 粤若忠簡
자자손손에 이르도록 / 爰及曾玄
벼슬과 명성이 드높아 / 宦達名施
세상의 추앙을 받았다 / 爲世推賢
훌륭하신 춘성공은 / 憲憲春城
공을 세워 군에 봉해지고 / 策功封君
좌상의 지위에 올라 / 位居亞相
업적과 덕행을 높이 쌓았다 / 業重德尊
우뚝한 문장과 행실에다 / 有卓文行
《주역》에서 도를 배워 / 受易就道
확실하게 은둔하니 / 幽遯其確
이분이 바로 공의 선고이다 / 寔公先考
공은 나면서부터 영특하여 / 公生慧悟
젖먹이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 提抱知學
눈에 스치기만 해도 외워서 / 眼閱背誦
가슴속 생각들을 시로 지었고 / 胃腎搯擢
열심히 글을 읽어 / 伊吾克劬
억지로 시킬 필요 없었다 / 匪煩課督
다섯 살에 아비 여의고 / 五歲孤露
형님 아우 의지하며 / 依靠弟兄
내 힘이 비록 없으나 / 曰余不力
어찌 삶을 더럽히랴 하며 / 奈忝所生
경서 주석 모아 엮고 / 薈蕞傳記
제자백가 열람하고는 / 收擥百氏
세상의 표절하는 짓을 / 彼世剽竊
똥 묻을 듯 수치로 여겼다 / 若浼深耻
쌓은 공부 풍부하여 / 旣積乃富
명성이 넘쳐 나고 / 來譽津津
두 눈동자 밝게 빛나 / 雙眸炯澈
기개가 속세를 초월했다 / 聲氣脫塵
옷도 이기지 못할 약골이나 / 弱不勝衣
정신은 분명하여 / 煞見精神
왕왕 입을 열면 / 往往開吻
시어들이 사람을 놀라게 했고 / 韻語驚人
한가할 때 두는 바둑 실력은 / 餘事棊枰
국수들도 뒷걸음칠 정도였다 / 國手逡巡
문장가가 경연에 갔다 / 詞臣講筵
막힌 것을 물어 오자 / 有竆來詰
공이 곧장 대답하니 / 公輒響報
당대 명사들도 혀를 내둘렀다 / 時髦嘖舌
효성은 천성에서 우러나 / 惟孝根性
언제나 뜻을 받들었고 / 養志無方
부드럽고 밝은 모습으로 / 婉容愉色
부모님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 跬步不忘
갑자기 상을 당해 / 卒至創鉅
지나친 슬픔으로 병을 얻으니 / 哀過疾祟
자질은 풍부해도 수명은 짧아 / 賦豐壽嗇
스물네 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二十零四
또한 공의 어진 부인은 / 亦厥賢配
단정하고 현숙하여 / 莊和淑愼
남편의 뜻 어기지 않으니 / 無違君子
시댁 식구들 온순함을 칭찬했다 / 夫族稱順
자식에게 올바른 도리를 가르치고 / 訓子義方
시아주버니 공경으로 모시다가 / 肅事兄公
칠 년 뒤에 세상을 떠나 / 後七年歿
공과 무덤을 함께했다 / 廣輪與同
내가 공에 대해 잘 모르나 / 余不識公
친구 통해 들은 적이 있다 / 余聞余友
내 친구 정군은 / 余友鄭君
예전에 입을 열 때마다 / 昔爲張口
특출하게 뛰어난 사람으론 / 有挺以特
당대에 오직 공뿐이라 하였으니 / 當世惟某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아 둔 지 / 心焉藏之
어언 삼사십 년이나 되었다 / 迄三紀久
공의 아들 계가 있어 / 有子名堦
때마침 나를 만나 / 時從我遘
비석의 명을 부탁하기에 / 請銘于石
위와 같이 짓는 바이다 / 撰次如右
[주-D001] 의령이 …… 번성했다 : 남구만(南九萬)이 쓴 의령 남씨(宜寧南氏) 족보의 서문에는 의령 남씨의 유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 천보(天寶) 14년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玄宗)이 촉(蜀) 지방으로 파천하였는데, 당시 수행하던 김충(金忠)이란 사람이 사신으로 일본에 가다가 표류하여 신라의 예주(禮州), 즉 지금의 영해(寧海)에 정박하였다. 김충이 신라에 그대로 살게 해 주기를 청하자 경덕왕(景德王)이 신라인으로 귀화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는 중국의 여남(汝南) 사람이라 하여 남씨(南氏)의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쳤다. 《藥泉集 卷24 族譜序》[주-D002] 충경공(忠景公) : 충경은 남재(南在, 1351~1419)의 시호이다. 초명은 겸(謙), 자는 경지(敬之), 호는 구정(龜亭)이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개국 공신(開國功臣)에 녹훈되었다. 태종 때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지고 사후에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구정유고(龜亭遺稿)》가 있다.[주-D003] 충간공(忠簡公) : 충간은 남지(南智, ?~1453)의 시호이다. 남재(南在)의 손자로 자는 지숙(智叔)이다.[주-D004] 춘성공(春城公) : 춘성은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봉호이다. 남이웅의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이다. 이괄(李适)의 난 때 황주 수성대장(黃州守城大將)으로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공을 세워 진무 공신(振武功臣) 3등에 춘성군(春城君)으로 봉해졌다. 병자호란 후 심양(瀋陽)에 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호위하였고 돌아와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