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기영(耆英)이고 자는 영로(英老)이며 은진 송씨(恩津宋氏)이다. 고려 시대에 휘 대원(大原)이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졌고, 조선초에 휘 유(愉) 호 쌍청당(雙淸堂)이 도학(道學)으로 회덕(懷德)의 유궁(儒宮)에 제향 되었다. 7세를 전하여 황주 목사(黃州牧使) 휘 응형(應泂)에 이르러서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 휘 흥조(興祚)를 낳았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부 휘 석범(錫範)은 예조 참판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지혼(之渾)은 지평 현감(砥平縣監)이었으며, 아버지 휘 후식(厚植)은 통덕랑(通德郞)이었다. 외조부는 양천(陽川) 허욱(許𨪎)이다.
공은 숭정(崇禎) 정해년(1647, 인조25) 9월 초7일에 태어났다. 성품이 중후하고 인자하여 어릴 적에 사람들이 장자(長者)라고 칭하였다. 어버이 섬김에 기뻐하였고 형제간에 우애로웠으며 집안에서는 화기애애하였다. 궁액(窮厄)에 처한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안색에 드러나서 구제하기를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하였다.
평생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또한 벼슬길에는 뜻이 소홀하여 중세(中歲)에 과거공부를 그만두면서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은 하늘이 놓아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조에 들어갈 사람 중에 공의 어짊을 안 이가 있어서 공을 천거하여 등용하게 하려 했지만 공이 힘써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훗날 종인(宗人) 가운데 이조 판서가 된 사람이 있어 누차 공의 뜻을 시험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아서 그의 올곧음에 심복(心服)하였다.
공의 벗은 동애(東崖) 이시만(李蓍晩) 형제ㆍ동계(東溪) 박만정(朴萬鼎)ㆍ검주(黔洲) 이웅징(李熊徵)ㆍ첨추(僉樞) 홍린(洪潾)이다. 때때로 서로 모여서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타며 간간이 술 마시고 시를 읊으면 풍운(風韻)이 소산(蕭散)하여 보는 사람들은 비린(鄙吝)한 마음의 싹이 저절로 사라졌다.
공의 부인 진양 강씨(晉陽姜氏)는 아버지가 현령 수남(壽楠)으로 곧 법도 있는 가문이다. 나이 17세에 시집왔는데 이때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가 살아계셨고 모두 부인들은 돌아가신 뒤였다. 부인은 집안 살림을 맡아 근면하면서도 재간이 있어서 능히 살림을 이루었고, 두 공께는 지극히 순종하고 뜻을 받들었으며 의복을 때맞춰 마련하고 음식은 모두 입맛에 맞게 마련했다. 시할아버지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한 집에 두 홀아비가 어려움을 모르는 것은 모두 우리 며느리가 현명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밖에서 손님과 벗들이 찾아와서 모이면 술상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대접하고 남편의 말에 머뭇거리거나 어김이 없어서 공이 노친 봉양함에 근심이 없었고 붕우에게는 칭송을 받은 것은 부인이 안에서 도와서 그런 것이다.
공은 아들이 여섯인데, 장남 광조(光朝)는 2남 6녀를 두었고, 차남 창조(昌朝)는 2남 2녀, 셋째 아들 명조(鳴朝)는 2남 2녀, 넷째 아들 유조(維朝)는 1남 3녀, 다섯째 아들 희조(喜朝)는 2남 1녀, 여섯째 아들 익조(翊朝)는 3남을 두었다. 좋은 시절 생신에 아들딸이 모두 모여 차례로 장수를 축원하고 여러 손자와 증손들이 앞에서 기쁘게 놀며 다투어 즐겁게 해드리니 공은 안석에 기대어 흐뭇해하였다. 공의 향년은 73세였고, 부인은 83세였는데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교하(交河) 심악산(深岳山) 아래 같은 자리에 묻혔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아들이 많아서 / 有男而祁祁
나를 굶기지 않았고 / 不我飢乎而
벗이 끊임없이 찾아와서 / 有朋而源源
나와 어김이 없었다 / 莫我違乎而
기뻐하며 / 怡怡乎而
즐거운데 / 煕煕乎而
저 벼슬로 매려고 한 자는 누구던가 / 欲縻之以若若乎者其誰
[주-D001] 놓아둔 사람 : 원문의 ‘방인(放人)’은 산이나 들에 은둔하거나 방랑하며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주-D002] 벼슬 : 원문의 ‘약약(若若)’은 인끈이 드리워진 모양으로, 벼슬이라는 뜻이다. 《한서(漢書)》 권93 〈영행전(佞幸傳) 석현(石顯)〉에 “인장은 어찌 그렇게 주렁주렁 매달고, 인끈은 어찌 그렇게 치렁치렁 늘어뜨렸는가.[印何纍纍, 綬若若邪?]”라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