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최(最), 자는 낙원(樂元)이다. 창원황씨(昌原黃氏)는 고려조의 시중 충준(忠俊)이 그 원조(遠祖)이다. 본조에 들어와 의원군(議原君) 거정(居正)이 있고 벼슬이 계속 이어져 7대에 숙(璹)이 호조 참판에 이르고, 또 2대에 홍천 현감 휘 집(潗)에 이르러 문학과 기개가 사람들이 공경하여 본받는 바가 되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여구(汝耉)로 병자호란에 강화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모친 심씨(沈氏)를 받들고서 온 집이 순절하여 정려를 받았고, 사헌부 지평에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의인데 호란 후에 은거하여, 앉음에 청 나라 서울을 향하지 않았고 호를 후촌일인(後村逸人)이라고 하였다. 부친의 휘는 우성(遇聖)으로 가정의 가르침을 따라 형제 다섯 사람이 모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모친은 함평이씨(咸平李氏)인데 직장 정화(廷華)의 따님이다.
공은 명릉(明陵) 경신년(1680, 숙종 6) 윤8월 23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준수하고 뛰어나 기국과 도량이 있었으니, 선배가 모두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장성해서는 스스로 학문에 힘써 과문의 각체를 모두 붓을 잡자마자 곧바로 이루었으니 과장의 선비들이 모두 추중하였다. 누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다가 영조 을사년(1725)에 비로소 진사에 올랐으나 마침내 크게 떨치지는 못했으니, 군자가 명의 소치라고 하였다.
경오년(1750, 영조 26) 9월 23일에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였다. 양천현(陽川縣) 남산리(南山里)에 안장했다가 뒤에 부평부(富平府) 계양산(桂陽山) 동쪽 맥현(陌峴) 정좌(丁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워 어버이를 섬김에 어김이 없었다. 겨우 약관의 나이에 모친이 등창을 앓아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 공이 이를 빨아내기를 3년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슬픔으로 예제에 지나칠 정도로 몸을 훼상했다. 무술년(1718, 숙종 42) 여름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계모 정 부인(鄭夫人)의 성품이 엄하여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으나, 공이 받들어 섬기기에 지극히 정성스럽게 하여 사랑과 공경을 극진하게 갖추었다. 한 아우와 세 누이는 모두 계모 소생이었으나 어루만져 사랑하고 가르쳐 인도하여 모두 성립시켰고, 집에서 정 부인의 모친 이씨를 봉양하는 것도 마치 정 부인을 섬기듯이 하였으며 상장의 의식과 물품의 구비에 있어서도 정 부인의 뜻에 서운함이 없게 하였으니, 정 부인이 이에 감동하고 기뻐하였다. 경향의 사림이 공의 행의(行誼)를 나열하여 적어서 위로 조정에 알릴 계획을 도모했는데, 공이 듣고는 “이는 나의 불효를 무겁게 하는 것이다.” 하고, 곧 힘써 그치게 하여 중지되었다.
공은 평소에 빈객을 좋아하여 문 밖에는 찾아온 사람들의 신이 날마다 가득했는데, 흉회가 평탄하여 담소하고 수작할 때에 친소와 경중이 모두 법도에 들어맞았다. 교제에 있어서는 은혜와 의리가 모두 지극해서 오래 지나도록 변화가 없이 한결같았다. 친구 가운데 부모가 돌아가시어 의지할 곳이 없는 이가 있으면 그 집을 도와주었고, 먼 지방의 선비들이 서울에 와서 부칠 곳이 없는 이는 관사에 맞이하고, 혹 객지에서 죽어 귀장하지 못한 이는 주선하여 도와주었다. 만년에는 후진을 가르침에 이끄는 방법이 다양하여 마침내 성취한 이가 많았다. 원근에서 붙좇아 배우는 이들이 모두 모여들었는데, 반드시 지행(志行)을 우선으로 하고 문예(文藝)를 여사로 하였다.
공은 본디 포부가 있었으나 늦도록 성취한 바가 없었다. 비록 부침을 거듭하는 말세에 처했으나 뜻을 세움이 확고하여 만부(萬夫)의 힘으로도 빼앗기 어려운 지조가 있었다. 당의(黨議)가 횡류하여 선비의 추향이 바름을 잃은 때를 당하여 방정함을 꺾고 원만하기만을 좇아서 그 행실을 안팎으로 달리하는 이가 세상에 만연했는데, 공은 이를 보고는 마치 자신이 더럽혀질 듯이 하여 번번이 침을 뱉고 꾸짖었다. 요직에 있는 한 재상이 산림(山林)의 이름을 무릅쓰고 지위를 사임하여 총애를 구하려 한 일이 있었는데, 선비들 가운데 출세를 구하는 무리들이 장차 소를 지어 올려 임금에게 그 재상을 후하게 부르기를 청하면서, 그 소장 가운데 공의 아들을 함부로 기록해 넣었다. 공은 엄한 말로 배척하여 빨리 그 이름을 지우게 하니, 의논이 드디어 저지되고 말았다. 이어서 대신(臺臣)이 그 재상의 사주를 받아 글을 올려 그 문제를 말했는데, 대신은 공이 평소에 익히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에게 편지를 보내서 ‘인간 세상에 염치라는 글자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처사’라고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혹 질시했으나 공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부지런히 각고 면려하여 경서의 본문을 모두 천 번씩 읽었고 더욱 《서경》에 힘을 쏟으며 말하기를,
“성현의 글은 근량이 무겁고 의미가 깊으니 잠깐 보고 읽어서 알 수가 없다.”
하고, 읽을 때는 반드시 그 의미를 관통한 뒤에 그쳤다. 제자들이 경전의 뜻을 질문하면 깊은 뜻을 드러내 밝히고 소주(小註)로써 방증(旁證)함에 모씨의 풀이가 몇 번째 줄에 있다고 하곤 했는데 책을 펴지 않고도 한 글자의 착오도 없었다. 백가(百家)의 책에 이르러서도 두루 통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음씨(陰氏)의 운부(韻府)와 같이 미쇄한 유서(類書)까지도 술술 다 외웠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문장에 있어서 재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근면으로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시에 글을 읽을 때는 노끈을 태워서 글자를 비추었고 글씨를 익힐 때는 버들을 꺾어 붓을 만들었는데, 그 붓과 노끈이 만년까지 남아 있었다. 공의 서법은 촉체(蜀體)에 능했는데 과장에 들어가 반드시 친히 시권(試卷)을 쓰니 사람들이 시속의 모양과 합하지 않는다고 허물하자, 공은 “나의 기량을 다할 뿐이니 대필(代筆)로써 요행을 바라는 것을 나는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집에서 지내는 데는 검소함을 숭상하고, 향장(鄕庄)에 있어서는 두옥(斗屋) 토상(土床)과 거친 밥 나물국에 편안하게 여기기를 마치 천성인 듯이 하였다. 일용의 그릇들은 대부분 소박하게 흙으로 빚은 것을 사용했고, 화려하고 고운 것은 눈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은 인시(寅時)에 났으니, 범사의 창시는 인시에 있다. 반드시 날이 샐 무렵에 일어나 그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임종하기에 이르러서는 원근의 식자들이 차탄하고 애도하면서 말하기를,
“이로부터 사림의 정론이 그치게 되었다.”
하였다. 공의 저술로 《독성재집(獨醒齋集)》 약간 권, 《맹자》 부동심장(不動心章) 부설(附說), 설창잡지(雪窓雜識) 등이 있는데 모두 평일에 수용(受用)한 것이다.
부인은 유인(孺人) 광주안씨(廣州安氏)이고, 부친은 진사 휘 서채(瑞采)인데 나에게 종조부가 된다. 유인은 유순하고 아름다우며 고요하고 신중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드러내지 않았다. 시부모를 섬기는 데는 그 정성을 다하고 남편을 섬기는 데는 그 공경을 다하니 집안이 정제 엄숙했으며, 종일토록 일을 해도 소리가 밖으로 들리지 않았으니, 내외의 종족들이 어질다고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다. 경오년(1750, 영종 26)의 상변(喪變) 이후로 가계가 쇠락하여 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나 공의 계씨가 밭을 얻고자 함에 유인이 문서를 만들어 주기에 조금도 아끼지 않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공보다 1세가 적고 공의 사후 7년인 병자년(1756, 영종 32)에 임종하였는데 공과 합장했다.
슬하에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의 유명(幼名)은 노랑(老郞)이니 재예가 있었으나 15세가 되기 전에 요절하였다. 종제 욱(昱)의 아들 이곤(以坤)을 취하여 후사를 삼았는데 문학을 갈고 닦아 장차 성취할 기대가 있었으나 불행하게 공보다 먼저 죽었고, 두 아들 덕일(德壹)과 덕길(德吉)이 있다. 딸은 심해보(沈海普)에게 출가했는데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연한(連漢)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나 요절했고, 차남은 통한(通漢)이고, 삼남 달한(達漢)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정언이다. 딸은 조수간(趙守簡)에게 출가했다.
공이 일찍이 나의 조부의 행장을 지으면서 “공을 아는 사람으로 나만한 이가 없다.”고 하면서 원우(元祐)의 완인(完人)에 비기기까지 했고, 나의 선인도 또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모씨를 아는 사람으로 나만한 이가 없다. 엄동 설한에 우뚝 홀로 빼어난 사람은 모씨가 그러하다.”고 하였고, 나 또한 공의 장려와 기대를 입은 것이 결코 적지 않았다. 공이 우리 집안 3대에 걸쳐 세의(世誼)가 특별히 두터웠으므로, 공의 손자 덕일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기에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상과 같이 차례로 찬술했다. 그러나 늙고 병들어 혼미한 탓에 능히 그윽하게 잠긴 덕의 만분의 일이나마 비슷하게 그려내지 못하였다. 오늘과 옛적을 두루 돌이켜 생각해 보노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삼가 다음과 같이 명을 붙인다.
아, 아름답도다 황공이여 / 於休黃公
타고난 바탕 우뚝 빼어났네 / 禀質挺特
효우의 천성 지극하고 / 孝友天至
시서의 학업 돈독했네 / 詩書業篤
세상에 모범된 행실이었고 / 範世其行
시국을 구제할 학문이었네 / 濟時其學
천재일우의 기회 어긋나고 / 期舛千一
백륙(百六)의 운에 당하고 말았네 / 運丁百六
당쟁의 폐습이 시속을 그르치니 / 黨習敗俗
갈림길에 착란이 많았네 / 岐路多錯
언어가 장중하고 안색이 바르니 / 莊言正色
간사한 선비들 눈을 흘겼네 / 壬士側目
확연히 지킴이 있어서 / 確然有守
자신을 감추어 스스로 즐겼네 / 卷懷自樂
파릉의 구장에 깃들고 / 巴陵舊庄
만현의 가숙에 지내며 / 萬峴家塾
밭갈고 김매거나 / 乃耕乃耘
가르치고 인도했네 / 乃訓乃迪
한가로이 노닐며 세월을 마침에 / 優遊卒歲
능히 아름다운 덕을 온전히 했네 / 克全令德
현숙한 배필이 있어 / 爰有賢配
온혜하고 정숙하니 / 溫惠貞淑
종당이 보고 본받으며 / 宗黨視效
규문의 위의가 정제 엄숙했네 / 閨儀整肅
빛나는 이 언덕이여 / 有赫斯丘
실로 공의 유택이니 / 實惟玄宅
백대에 징험할 것은 / 百世有徵
이 묘지명을 볼지어다 / 視此幽刻
[주-D001] 운부(韻府) : 《운부군옥(韻府群玉)》을 말함. 모두 20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송 나라 말년에 음시부(陰時夫)가 편집(編輯)하고 그의 형 음중부(陰中夫)가 편주(編註)하였음. 이 책은 고사와 문장을 채록하여 각 운(韻)의 아래에 붙인 유서(類書)임.[주-D002] 촉체(蜀體) : 서체의 한 종류로 원(元) 나라 호주(湖州) 사람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를 말함. 조맹부의 자는 자앙(子昻),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임.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민(文敏)임. 조맹부의 서체를 촉체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영정조 때의 서예가인 도천(道川) 황운조(黃運祚)가 “조맹부의 글씨가 소동파에게서 유래하는데, 소동파가 촉 지방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컫는다.”고 한 말이 있음. 《一夢稿 書家錄》[주-D003] 백륙(百六) : 액운을 말함. 4,500년이 일원(一元)인데, 일원 가운데 다섯 번의 양액(陽厄)과 네 번의 음액(陰厄)이 있으니 양액은 한발이 되고 음액은 수재가 된다고 함. 106년에 양액이 있기 때문에 ‘백륙회(百六會)’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