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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가 《소학(小學)》 한 부를 지어 천고(千古)의 지극한 성품과 빼어난 행실을 모두 모아 함께 실어 놓으니, 이것이 이른바 사람을 만드는 표준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지닌 지극한 성품과 빼어난 행실이 반드시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소학》이 편집된 뒤에 태어나서 이름이 자취도 없이 모두 없어져 일컬어지지 않는다면 어찌 한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사람은 하늘이 부여한 아름다운 자질을 갖고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였을 뿐이니, 남들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이름이 전해지거나 말거나, 자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다만 그를 애모(愛慕)하는 것으로 말해 보면, 그의 지극한 성품과 빼어난 행실이 사람을 만드는 표준이 되기에 충분한 줄 분명히 알지만, 그가 주자(朱子)의 시대에 태어나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로 하여금 후세에 매몰되어 버리고 말게 한다면 또한 어찌 떳떳한 본성을 지키고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겠는가. 나는 구사당 김공의 행장에 대해 나도 몰래 재삼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의 휘는 낙행(樂行)이고, 자는 퇴보(退甫)이며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니, 고려조 태자첨사(太子詹事) 용비(龍庇)의 후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진(璡)이 있으니, 호가 청계(靑溪)이고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퇴도(退陶) 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이어서 부자(父子)가 사빈서원(泗濱書院) 경덕사(景德祠)에 배향되었다. 고조의 휘는 시온(是榲)이니 호가 표은(瓢隱)이고 숭정(崇禎) 병자년(1636, 인조14) 이후에 산림에 은거하였으며, 능참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스스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일컬었고, 영조가 특명으로 사헌부 집의에 증직하였다. 증조의 휘는 방렬(邦烈)이니 국자 생원(國子生員)이다. 조부의 휘는 태중(泰重)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성탁(聖鐸)이고 호는 제산(霽山)이며, 영조께서 학행(學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여러 번 명을 내려서 불렀고, 얼마 있다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다. 선비(先妣) 무안 박씨(務安朴氏)는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의 후손인 박진상(朴震相)의 따님이다. 숙종 무자년(1708, 숙종34)에 안동 고향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이 한창 어릴 적에 이웃 아이를 따라 잡스러운 놀이를 배웠는데, 어머니가 말씀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공자(孔子)를 배워야 하거늘, 잡스러운 놀이를 어찌 하느냐.”
하자, 놀란 듯한 안색으로 대답하기를,
“이와 같다면 공자를 배울 것입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다시는 놀이를 하지 않았다. 스승에게 나아간 뒤에는 기쁜 마음으로 옛사람을 사모하고 그들과 같아지고자 하였다. 아버지의 명으로 밀암(密菴) 이공(李公)에게 집지(執贄)하고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의 책을 익히니, 여러 장로(長老)가 모두 강보(彊輔)로 대우하여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함께 상의하였다.
정사년(1737, 영조13) 제산공(霽山公)이 홍문관에 있을 때, 충청도와 영남 유생 중에 처신을 바꾸어 당로자에게 아첨하는 자가 소를 올려 제산공을 무고하였는데, 모욕이 스승에게 미치자 제산공은 의리상 묵묵히 있을 수 없어서 소장을 올려 사실을 대략 드러내 밝혔다. 당로자가 두 글자를 들추어내어 성상의 귀를 매우 놀라게 하였다. 이에 제기(緹騎)를 보내 조옥(詔獄)에 잡아들여 고문을 여러 번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공은 밤낮으로 잠시도 그치지 않고 금오의 문 밖에 엎드려 울부짖고 두 손으로 땅을 긁어 열 손가락에 모두 피가 났다. 이처럼 하기를 모두 다섯 달이었는데, 어떤 때는 기가 소진되어 혼절하니 종로 거리의 시정아치들이 모두 달려와 구해 주었다. 어떤 이는 술을 가져와 입에 부어 주고 어떤 이는 거적자리로 햇볕을 가려 주었다. 옥졸도 모두 말하기를 “우리도 사람일 따름인데, 어찌 차마 효자에게 마음을 쓰지 않겠는가.” 하며, 감옥 안의 소식을 매우 자세히 전해 주었다. 당시 사람 중에 원수처럼 보던 자일지라도 지나갈 때 또한 가여워하며 효자라고 여겼다. 풍원군(豐原君) 조공 현명(趙公顯命)이 직언으로 상소하여 그의 죄가 아니라고 한 것을 계기로, 상이 탐라(耽羅)의 정의(旌義)에 유배할 것을 명하였다. 제산공이 옥을 나오자, 시정아치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제부터 김 효자가 맨땅에서 자지 않을 것이니, 우리도 자리에 편히 누워야겠다.” 하였다.
공은 제주도로 가는 길에도 밤에는 반드시 부친의 호흡에 귀를 기울였으며, 앉아 있다가 아침이 오면 꿇어앉아 약을 드리고 울면서 미음을 권하였다. 푸른 바다 만 리 길을 마치 신명이 돕는 듯이 건넜다. 배소(配所)에 도착한 뒤에도 밥을 할 때는 직접 간을 하였으니 자신이 여종을 대신한 것이고, 밥 지을 준비를 할 때는 몸소 땔나무를 했으니 자신이 노비를 대신한 것이다.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읽고 강론하고 질정하여 부친의 마음을 풀어 드리려 하였다. 섬 주민이 비록 어리석으나 보고 들은 자는 모두 감탄하였으며 맛난 음식을 한 가지라도 얻으면 그때마다 가져와서 드렸다.
다음 해에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광양은 영남 땅과 접해 있다. 교리공(校理公)은 모친이 아직 살아 계시기 때문에 공에게 귀성(歸省)할 것을 명하였다. 공은 비록 부친의 뜻에 따라 돌아왔으나, ‘부모님이 천 리에 각각 떨어져 계신데 자식으로서 어찌 차마 부부가 한집에서 같이 사는 즐거움을 누리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까닭에 내당(內堂)에 한 걸음도 들여놓지 않은 기간이 전후로 7년이 되었다.
정묘년(1747)에 교리공이 광양에서 세상을 떠나자 공은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염(斂)을 하고 나서 널을 받들어 뱃길로 안동 옛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낙동강 중류에 이르러 풍파가 크게 일어서 배의 침몰이 경각에 달렸는데, 공이 더욱 가슴을 치고 울며 하늘에 빌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멎어 순조롭게 건넜으니 마치 도와주는 분이 있는 듯하였다.
임오년(1762)에 모친상을 당하여 부친상 때와 똑같이 상례(喪禮)를 행하였다. 묘소 아래에서 천연두를 피한 적이 있는데, 당시는 기근이 심하여 하루에 볶은 콩 백 개를 먹고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올라가 곡하여 슬픔을 다하고 돌아와서 바로 글을 읽었는데 주리거나 피곤한 기색이 없으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전후로 피눈물을 흘려 몸이 병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상복을 벗고 2년 뒤 병술년(1766)에 병이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소변을 보러 갈 때마다 반드시 사람을 시켜 부축해 일으키게 해서 방 밖으로 나가니, 자제들이 추위가 극심하므로 나가지 말 것을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사우(祠宇)가 가까운 곳에 있다. 병이 비록 심하더라도 어찌 감히 이곳에서 더럽고 지저분한 짓을 하겠는가.” 하였다. 결국 11월 16일에 생을 마치니 향년 59세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선비들이 모두 자리를 설치하고 곡하였다.
정해년(1767) 8월에 망천(輞川) 오좌(午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일찍이 “학문을 하려면 정주(程朱)를 배워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평소 공부하는 바는 본(本)이 있고 말(末)이 있었으니 집안에서 닦아 천하에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긴요하게 착수한 것은 도리어 지극히 친근하고 지극히 절실한 곳에 있었으니, 하나의 조그만 행실이라도 무심코 넘긴 적이 없고 하나의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더 자세히 살폈다. 이런 까닭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선조를 받들며 동기를 사랑하고 종족을 대접하는 것에서부터 분수를 다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배우는 이를 마주할 때는 성명(性命)의 설을 가볍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묻는 자가 있으면 또한 반드시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었다. 공이 늘 말하기를,
“욕심을 막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내가 평소 술을 좋아하지만 나라에서 금하였기 때문에 입에 가까이하지 않은 지 10년인데, 혹 근심과 걱정이 일면 언뜻 마시고 싶은 생각이 났다. 젊었을 때 일 때문에 서울 여관에 오래 머문 적이 있었는데, 주인 여자의 아름다운 딸과 서로 친근하게 지냈다. 그런데 갑자기 주 선생(朱先生)의 ‘몇 사람이나 이에 이르러 평생을 그르쳤는가.’라는 구절을 생각하고 비록 결연히 물리쳤지만 그 아리땁고 고운 모습이 때때로 마음에 생각났으니, 어찌 한칼에 그 뿌리를 베어 버리지 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들은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하였다.
그리고 부친의 원통함이 신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은 보통 사람처럼 자처하지 않아서, 발걸음은 성시(城市)에 이르지 않고 입으로는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으며, 유림(儒林)의 공적인 모임이나 친구들의 즐기는 잔치에 모두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오직 조공(趙公)의 은혜를 골수에 새기고 술 한 병을 차고 어포 두세 마리를 가지고 천 리 길을 걸어 조령을 넘고 기전(畿甸)으로 들어가 조 상국(趙相國)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 술을 붓고 제문을 읽으며 반나절을 곡하고 수없이 절을 하고 떠났다. 제문은 자신이 지은 것으로 그 글이 처량하고 비통하여 사람들이 지금까지 외워 전한다.
매번 강좌(江左) 권공 만(權公萬)과 편지를 통하여 문장과 도학(道學)을 논변하였다. 더욱이 대산(大山) 이공 상정(李公象靖)과는 맺은 정분이 몹시 깊어서 때때로 생각이 일어나면 번번이 말을 타고 찾아가서 도를 논하고 글을 강론하였다. 심지어 집을 옮겨 서로 왕래하려고도 하였다.
그 자신을 다스릴 때는 겸양을 우선으로 삼아 자신에게 조그만 잘못이라도 있으면 감히 스스로 용서하지 않았고 남에게 과오가 있으면 그것으로 자신을 경계하였다. 함양한 것이 이미 오래되자 덕성(德性)이 날로 더욱 완전하고 두터워지며 조예가 날로 더욱 높고 깊어져, 말은 꼭 가리지 않더라도 미더우며 마음은 잡아 지키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보존되어, 표리(表裏)와 정추(精粗)가 순수하게 한결같이 바른 데서 나왔다.
바야흐로 망천에 공을 장사 지낼 때, 대산공(大山公)이 장지(葬地)를 보기 위해 와서, 모인 조문객들에게 말하기를,
“이 노인의 덕성은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너그럽고 부드러운 사람이라 말하면 매우 강하고 굳셈을 깨닫게 되고, 강하고 굳센 사람이라 말하면 매우 너그럽고 부드러움을 깨닫게 되며, 성기고 어설픈 듯하나 도리어 세밀하고, 매우 평이하나 도리어 미치기 어렵습니다. 갑(甲)이 공을 보면 이와 같고 을(乙)이 공을 보면 저와 같습니다. 비유컨대 천 이랑의 물을 뜨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도 황숙도(黃叔度)의 무리로서 학문의 힘으로 보충한 자일 듯합니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이들은 공의 덕성을 잘 형용했다고 하였다.
공이 평생 저술한 것은 《계몽질의(啓蒙質疑)》, 《시법질의(蓍法質疑)》, 《상복경전주소통고(喪服經傳注疏通考)》, 《강록간보고의(講錄刊補考疑)》와 유문(遺文) 약간 권이 있으니, 그 문장과 의론은 넓고 정밀하여 모두 백세토록 전할 만하다고 한다.
공의 배위(配位)인 영가 권씨(永嘉權氏)는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후손인 처사(處士) 권설(權薛)의 따님이다. 정숙한 덕과 아름다운 품행으로 군자의 배필이 되어, 공보다 9년 뒤에 세상을 떠났고 묘소는 망천 동쪽 기슭에 있다.
딸은 4명을 두었으나 아들이 없어 아우 제행(霽行)의 아들 시전(始全)을 아들로 삼았다. 사위 4명은 장수학(張壽鶴), 이우필(李宇弼), 박한장(朴漢章), 유윤문(柳允文)이다.
시전은 4남을 두었으니, 익운(翼運), 인운(鱗運)이고 나머지는 아직 장가들지 않았다. 장수학의 아들은 장윤정(張胤禎)이다. 이우필의 아들은 이광주(李光周)이고 사위는 김구수(金九壽)이다. 박한장의 아들은 박삼녕(朴三寧), 박유령(朴維寧)이고 사위는 권재건(權載健)이다. 유윤문은 자녀가 모두 어리다.
금상(今上) 을묘년(1795, 정조19)에 상이 교리공의 억울한 정상을 특별히 생각하였는데, 말씀과 분부가 측은하였다. 천신(賤臣)이 마침 어전에 엎드려 있었는데, 일어나 아뢰기를 “그 아들 김낙행은 지극한 성품과 빼어난 품행이 있어, 《소학》에 기록된 여러 어진 이에게 부끄러움이 없음은 유독 신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사림 중에 그것을 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아들을 둔 것이 이와 같으니, 의방(義方)의 가르침을 평소에 확대하여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윤음을 내려 교리공에게 직첩을 특별히 지급하고, 이어서 공을 미처 등용하지 못한 것을 세도(世道)를 위해 한스럽게 여겼다. 공과 같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성품을 가진 이가 어찌 구천에서 결초보은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미 공을 아는 데다 지금 시전이 어버이를 위해 명(銘)을 요청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을 원망할 수 있는가 / 天可怨乎
하늘을 원망할 수 없다네 / 天不可怨
하늘을 원망할 수 없으나 / 天旣不可怨
내 장차 하늘에 물어보리라 / 吾且爲之天問
지극한 성품과 빼어난 품행 주고 / 賦以至性絶行
험난함과 어려움 겪게 하였네 / 餉以險阻艱難
지극한 억울함 안고 땅으로 돌아갔는데 / 抱至冤而歸之地
하늘은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 / 天曷故焉
[주-D001] 사람을 만드는 표준 : 《대학혹문(大學或問)》의 주석에 “주자가 말하기를 ‘《소학》은 사람을 만드는 표준이다.’ 하였다.”라는 말이 있고, 《주자어류(朱子語類)》 권7에도 “후생 가운데 초학자들은 우선 《소학》부터 읽어야 하니, 이것은 사람을 만드는 표준이다.”라고 하였다.[주-D002] 다섯 아들 :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이다.[주-D003] 사빈서원(泗濱書院) : 김진과 그의 아들 5형제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685년(숙종11)에 사림과 자손들의 공의로 세워진 서원이다. 묘호는 경덕사라 하였다. 1709년 사수(泗水) 가로 이건하여 사빈서원이라 하였다가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1882년(고종19) 사림과 후손들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현재는 임하댐 건설로 인해 경북 안동시 임하면(臨河面) 사의리(四宜里)에서 천전(川前) 2리로 이건하고 복원하였다.[주-D004] 시온(是榲) : 김시온(金是榲, 1598~1669)으로, 본관은 의성, 자는 이승(以承), 호는 도연(陶淵)ㆍ표은ㆍ숭정처사이다. 어려서부터 학문만을 좋아하고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경서(經書)의 연구에 심취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안동(安東)의 와룡산(臥龍山) 아래 와룡초당을 짓고 40여 년 동안 절의(節義)를 지키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주-D005] 방렬(邦烈) : 김방렬(金邦烈, 1616~1692)로, 본관은 의성, 자는 사현(士顯)이다.[주-D006] 태중(泰重) : 김태중(金泰重, 1661~1725)으로, 본관은 의성, 자는 여앙(汝昂), 호는 적암(適庵)이다.[주-D007] 성탁(聖鐸) : 김성탁(金聖鐸, 1684~1747)으로, 본관은 의성,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이다.[주-D008] 박의장(朴毅長) : 1555~1615.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사강(士剛), 시호는 무의(武毅)이다.[주-D009] 강보(彊輔) : 강력한 도움이 되는 좋은 벗을 말한다.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의 〈칠간(七諫)〉에 “말이 어눌함이여, 또 강보도 없구나.[言語訥譅兮又無彊輔]” 하였다.[주-D010] 두 글자를 들추어내어 : ‘선천(先天)’이란 두 글자를 들추어낸다는 말이다. 영조는 1729년 8월 18일 초저녁에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렸는데, 선천이란 ‘이전 세상의 일’이라는 뜻으로 이 처분이 있기 전을 가리킨다. 영조는 선천과 후천(後天)으로 구분하여 선천은 잊어야 한다는 뜻으로 선천에 부친다는 말을 사용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5年 9月 5日, 9年 1月 5日》[주-D011] 제기(緹騎) : 한(漢)나라 때 집금오(執金吾)에 소속된 병사를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죄인을 호송하는 의금부의 병사를 이른다.[주-D012] 학문을 …… 한다 : 《구사당집(九思堂集)》 권2 〈여이눌옹(與李訥翁)〉에 “사사로이 생각하기를 ‘학문을 하려면 정주를 배우고 문학을 하려면 한당(漢唐)을 배우는 것이 좋다.’라고 여겼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주는 송나라의 정자(程子)와 주희를 가리킨다.[주-D013] 몇 …… 그르쳤는가 : 남송(南宋)의 충신 호전(胡銓)이 직언을 하여 귀양 갔다가 10년 만에 풀려나 돌아올 때, 매계(梅溪)의 여관에서 자며 여관 여인과 정을 통하였는데, 이튿날 주인이 추잡하다 하여 밥을 주지 않고 소 먹이는 여물을 주었다. 그 뒤에 주희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일을 빗대어 “10년 동안 호해에선 한 몸이 가벼웠는데, 돌아오다 보조개 보니 욕정 일도다. 세상길 인욕처럼 험한 것 없는데, 몇 사람이나 이에 이르러 평생을 그르쳤는가.[十年湖海一身輕, 歸對黎渦却有情. 世路無如人欲險, 幾人到此誤平生.]”라는 시를 지었다. 《晦庵集 卷5 宿梅溪胡氏客館觀壁間題詩自警二絶》[주-D014] 조공(趙公)의 은혜 : 조공은 조현명(趙顯命)을 가리킨다. 김성탁이 1737년 이현일(李玄逸)을 위해 신원소(伸冤疏)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극형에 처하게 되었는데, 조현명이 상소하여 구명한 덕분에 김성탁은 정의(旌義)에 유배되었다가 그 뒤에 광양으로 이배되었다. 《歸鹿集 卷7 敍命後乞退論金聖鐸疏》[주-D015] 조 상국(趙相國)의 묘소 : 조현명의 묘소는 충남 보령 성주면에 있다.[주-D016] 권공 만(權公萬) : 권만(1688~1749)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일보(一甫), 호는 강좌이다.[주-D017] 이공 상정(李公象靖) : 이상정(1711~1781)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주-D018] 표리(表裏)와 정추(精粗) : 겉과 속, 정밀함과 거칢이다. 이는 《대학장구》 전 5장에서 주희가 보충한 내용에 “대학(大學)에서 처음 가르칠 때 반드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서 이미 알고 있는 이치로 인하여 더욱 궁구해서 그 극(極)에 이름을 구하지 않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힘쓰기를 오래해서 하루아침에 활연(豁然)히 관통함에 이르면 모든 사물의 표리와 정추가 이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내 마음의 전체와 대용(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을 ‘물격(物格)’이라 이르며, 이것을 ‘지지지(知之至)’라 이른다.”라고 한 데서 보인다.[주-D019] 황숙도(黃叔度) : 숙도는 후한(後漢) 때 황헌(黃憲)의 자이다. 학행으로 한 시대의 추중을 받았으며, 안회에게 비유되기도 하였다. 곽태(郭泰)가 평가하기를 “숙도는 너무나 드넓어 마치 천 이랑의 물결과 같은 사람이라, 맑게 하려 해도 맑아지지 않고 흐리게 하려 해도 흐려지지 않으니, 참으로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後漢書 黃憲列傳》[주-D020] 권벌(權橃) : 1478~1548.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ㆍ훤정(萱亭)ㆍ송정(松亭), 시호는 충정이다.[주-D021] 금상(今上) …… 측은하였다 : 김시전이 1790년에 상언(上言)하여 “저의 조부 김성탁은 무신년(1728, 영조4) 역변을 당하여 많은 선비를 거느리고 충의를 떨쳤습니다.……저의 조부가 당시에 올린 상소는 별것 아닌 몇 마디의 말뿐이었는데 혼자서 그지없는 죄를 입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죄안에서 제거하고 이어서 관작의 회복을 명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正祖實錄 14年 10月 3日》 그 뒤 하교에 “시골로 돌아갔던 고(故) 교리 김성탁의 죄명을 분간(分揀)해 줄 것이라는 뜻을 그에게 분부하도록 하라. 그의 조부가 올바른 행실로 선조의 은혜를 두텁게 입었다마는 그의 부친 역시 행실이 이에 못지않게 일컬어졌는데 생전에 미처 임용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흠이 되는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뜻도 아울러 그에게 효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正祖實錄 19年 10月 12日》[주-D022] 의방(義方)의 가르침 : 일을 의롭게 처리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바르게 하니, 경과 의가 확립되어 덕이 외롭지 않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라고 하였다. 안은 마음이고, 밖은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