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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시오스는 모순되어 보이는 이 두 이야기를 한 책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배치했습니다. 왜였을까요? 고대 역사가들은 신화와 역사를 참과 거짓의 이분법으로 잘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역사적 개연성(Fact)과 민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숭고한 가치와 정신(Ethos)을 조화시키기 위해 세련된 수사학적 장치들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M. 데이비드 리트와(M. David Litwa) 같은 현대 성서학자들이 이 사례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 역시 완전히 무(無)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당대 지중해 세계가 공유하던 이러한 역사 서술의 수사학적 전통 속에서 예수라는 인물의 보편적 진리를 렌더링했기 때문입니다.
2. 네 복음서: 1세기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빚어낸 거울
성경 안에 왜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이라는 네 개의 복음서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도 여기서 찾아집니다. 예수라는 역사적 원형에 다양한 관점이 배어있었다기보다, 복음서가 기록된 각 공동체의 ‘시공간과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 마르코 복음서 : 기원전 70년경 로마의 잔혹한 탄압 속, “고난받는 비밀스러운 종”의 예수가 절실했던 공동체
• 마태오 복음서 : 유대교 회당과의 갈등 속, “모세를 넘어 율법을 완성한 참 메시아”가 필요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
• 루카 복음서 : 헬라·로마 세계의 지식인들을 향해 “보편적·역사적 구원”을 선포하려 했던 절제된 산문
• 요한 복음서 : 영적 탐구자들을 향해 “우주의 근본인 로고스(Logos)”로서의 예수를 증언한 상징적 서사
초대 교회는 이 네 개의 목소리를 하나로 짜깁기하여 통일시키지 않고, ‘네 겹의 복음(Fourfold Gospel)’이라는 다원성 그대로 품어두었습니다. 단 하나의 고정된 교리로 예수라는 거대한 진리를 담아낼 수 없음을 고대인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3. 학자들의 지도와 21세기 독자의 지평
오늘날 톰 라이트(N.T. Wright), 존 도미닉 크로산(J.D. Crossan), 혹은 개혁신학자들이 저마다 복음서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보며 혼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학자들의 주장은 복음서라는 ‘실제 지형(Terrain)’을 저마다의 목적에 맞게 그려낸 ‘토포그래피 지도(Map)’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지도들을 입체적으로 감상하며, 마침내 21세기라는 우리가 발 디딘 시공간의 눈으로 텍스트를 직접 마주해야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H.G. Gadamer)가 말했듯, 독서란 ‘과거 텍스트의 지평’과 ‘오늘 읽는 이의 지평’이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는 ‘지평의 융합(Fusion of Horizons)’이기 때문입니다.
4. 우리가 품어야 할 시대정신: ‘지구적·생태적 보편성’과 ‘다원주의’
그렇다면 2020년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성경과 고전을 읽으며 끌어내야 할 우리 시대의 에토스(Ethos)는 무엇일까요?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의 세계시민주의가 관념적 이성에 머물렀다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보편성은 “지구라는 단 하나뿐인 터전이 파괴되면 모두가 함께 스러진다”는 절박한 지구적·생태적 운명공동체의 의식입니다. 기후 위기와 문명적 대전환의 길목에서 배타적 단일 교리나 도그마는 더 이상 인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흩어져 있던 단단한 나무토막들(clubs)이 하나의 묶음(club)을 이루듯, 그리고 네 복음서가 각자의 처지에서 예수를 다채롭게 고백했듯,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을 품어내는 ‘다원주의적 개방성’과 ‘지구적 생태 연대’입니다.
“텍스트의 역사적 뿌리를 알고, 2천 년의 해석사를 아우르며, 마침내 오늘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운명을 품어내는 눈으로 성경을 읽어내는 것.”
어느 하나의 해석에 마음이 꽁꽁 포박당하는 마비(Fascination)를 넘어, 보편적 생명과 진리가 이끄는 건강한 끌림(Attraction)으로 텍스트를 읽어낼 때, 성경과 고전은 비로소 오늘 우리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불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