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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지금 뛰어들자>의 줄거리:
십자가를 생각하지 마세요. 십자가를 이해하고 해석하며 십자가에 대한 의견을 가지려 하지 마세요. 십자가는 지금 일어나는 사건으로만 만나집니다. 십자가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입니다. 십자가를 기억하여 의식했으면 충분합니다. 이제 그 십자가 사건 현장 안으로 실제로 지금 뛰어 들어가세요. 일단 점프하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지금 뛰어들자
(고린도전서 1:17b~21)
17.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지금 뛰어들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지금 뛰어들자”
오늘 말씀도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의해서 분파가 형성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17절 하반절을 보면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의 지혜”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18절을 보면 이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십자가의 도”가 언급됩니다. 여기서 “말”과 “도”는 모두 동일하게 말이라는 뜻의 로고스(λόγος)입니다. 십자가는 말로 전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말로 전해도 “십자가에 관한 말”과 “십자가에 관한 말의 지혜”는 다릅니다. 이것을 비교하면서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말의 지혜”와 “십자가의 도”의 차이로부터 교회에서 분쟁이 생긴 이유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게 됩니다.
먼저 “말의 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7절 하반절의 말씀을 요약해 보면 십자가를 말의 지혜로 전하면 헛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로마서나 고린도전서를 대하면서 강하게 느끼는 깨달음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종교가 되어버린 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영적인 폐단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미 이러한 영적인 폐단들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고는 2000년 교회 역사에서 무시되어 왔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우려하고 염려한 폐단들이 실제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앞서 본 로마서 16장 18절을 보면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저 자신을 생각해보아도 목회할 때에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나의 배를 섬겼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경고로 주신 말씀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의 지혜”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헬라문화권의 특징과 연관이 있습니다. 헬라문화권에서는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말을 하는 수사학과 변론술이 각광받았습니다. 쉽게 말해 설득력 있고 공감되는 말을 아름답게 여겼던 것입니다. “말의 지혜”란 나의 의견이나 주장이나 이해를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내려는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헬라철학과 문화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명석함과 설득력 있는 언변이 크고 높게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전할 때에 이러한 “말의 지혜”로 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나의 의견과 주장과 이해를 타인에게 설득력 있게 말하는 능력으로 십자가를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말의 지혜”를 통해 전하는 십자가는 헛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헛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케노데(κενωθῇ)는 비워진다는 뜻입니다. “말의 지혜”로 십자가를 전할 경우에 십자가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내용은 없어져버리고 껍데기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의 지혜”는 얼핏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지혜롭게 말하여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십자가를 “말의 지혜”로 전한다는 것은 말을 잘한 덕분에 십자가가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되고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언어 구사 능력에 따라 전달여부가 많이 좌우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마음으로 전하는 십자가가 헛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이왕이면 설득력 있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전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십자가의 내용이 사라진다고 하니 다소 의아합니다. 십자가라는 말의 껍데기만 남지 그 내용이 없어져버린다는 것입니다.
“말의 지혜”는 신학자들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지구 위에 산적해 있습니다. 이 “말의 지혜”의 문제는 십자가에 대해 말하는 사람의 의견이 전달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대해서 갖고 있는 말하는 사람의 의견과 해석과 이해가 전달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말의 지혜”로는 십자가의 말 속에 담겨있는 실제 내용은 전달될 수 없다고 봅니다. 그 말대로 지혜롭게 말한다고 해서 십자가가 잘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육십이 훌쩍 넘은 나이가 되어서 깨달은 것에 대해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유아세례를 받은 소위 모태신앙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깨닫는 것은 그렇게 배워온 신학적 지식 속에서 “십자가의 도”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걸출한 신학자들의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키프리안이나 어거스틴 같은 교부들로부터 시작하여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완성시킨 토마스 아퀴나스나 오캄 같은 인물도 있으며, 루터, 캘빈, 츠빙글리, 존 낙스,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드, 아브라함 카이퍼, 바빙크, 칼 바르트, 불트만, 에밀 브루너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박형중 박사, 김재준 박사, 박윤선 박사, 한상동 박사, 이종석 박사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중에는 제가 깊이 들여다보고 공부한 사람도 있고 대충 본 사람도 있고 전혀 안 본 사람도 있습니다. 이분들 중에 십자가를 말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분들의 십자가에 대한 언급은 설득력이 있고 훌륭합니다. 타당성이 있고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정말 탁월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캘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제 평생과 여생을 걸고 붙잡는 십자가와 연관 지어서 확고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분들이 말하는 십자가에 관한 신학 속에서 십자가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설득력과 공감 능력으로 십자가에 대한 신학을 펼쳐냈지만 정작 “십자가의 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도”는 “말”과 동일한 로고스(λόγος)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에 대한 자기의 의견이나 해석이 아닌 십자가 사건을 옮겨놓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자기의 해석과 이해와 의견을 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상번제는 십자가 사건의 예표였습니다. 어린양을 번제로 바치는 이유는 내가 어린양과 함께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죄로 가득한 나를 죽이는 것이 번제의 의미였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이미 구약에서 이야기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구약을 통해서 정해진 것이기에 그 외의 다른 의미를 찾아서 이해하려 하고 해석하려 하고 의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말할 때는 십자가 사건의 재현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못 박혀 달려 죽으신 십자가 사건을 그대로 말로써 옮겨놓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가 말로 옮겨지는 그 시간과 그 장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재현되는 것이 진짜 십자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반면 십자가 사건에 대한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이나 이해를 드러내는 것은 “말의 지혜”일 뿐입니다. 이것은 나의 생각을 설득력 있고 공감력 있게 말하고 싶은 의도에서 십자가를 해석하고 의견을 갖게 됩니다. 이럴 경우에는 십자가의 내용은 비워지게 됩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대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설득력 있는 십자가에 대한 말 속에서 십자가를 비워버린다면 “말의 지혜”일 뿐입니다. 이러한 “말의 지혜”로써의 십자가 신학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 속으로 들어갈 기회를 박탈당하고 맙니다. 결국 십자가에 대해서 루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의견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의견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루터의 의견이 주된 알맹이가 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학자가 십자가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가 되어버립니다. 이렇듯 “말의 지혜”로 십자가를 전할 때에는 관심의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상황이 빚어지게 됩니다.
“말의 지혜”는 십자가를 해석하고 이해한 것을 타인이 공유할 수 있도록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는 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사건을 지금 듣는 사람들 앞에서 재현시키고자 “십자가의 도”를 전했을 뿐입니다. 말로써 십자가 사건을 옮겨와 제시하고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들어갈 것을 촉구하고 전하였던 것입니다.
상번제로 바쳐진 어린양은 번제를 드리는 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나의 죽음을 대신하셨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렇게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기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복음과 관련된 이론이 어느 지점에서 생기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말을 통하여 십자가는 지금의 사건으로 재현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면 생기는 일이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에 뛰어들지 않고 십자가 바깥에서 보이는 것만을 백날천날 묘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한 이해나 의견으로는 구원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서는 생각을 멈춰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상 속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함으로써 십자가 사건 안으로 뛰어들면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그 다음 과정이 펼쳐지게 됩니다. 반대로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 수 없다면 십자가 사건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구원과 은혜는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해 기가 막히는 의견과 해석을 가지고 설득력 있고 공감을 일으킬 정도의 말을 하더라도 십자가 바깥에 있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를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말의 지혜”와 “십자가의 도”라는 기준을 가지고 제가 지금까지 공부했던 신학자들을 대입해보자면 무섭고 겁이 납니다. 이분들이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고 신학자로 갖고 있던 의견과 해석과 생각을 “말의 지혜”로 주장했을 뿐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다른 신학자들이나 후배들이나 교인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설득시키려고 한 일이라면 그들의 “말의 지혜” 속에 나오는 십자가는 내용이 비워진 상태입니다. 평생 십자가를 말하고 십자가 현장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본 적이 없다면 십자가 바깥에서 십자가를 묘사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죄 사함이 되었든 루터가 말한 것처럼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드러나신다는 이야기가 되었든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있는 구원과 은혜가 정말로 경험될 수 있었을까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은 삶의 현장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을 통하여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은 실제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놀랍게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삽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 채움 거리를 전혀 찾지 못한 채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유일한 마음 채움 거리로 소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 몸도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 들어갈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생과 인생의 삶을 기반으로 이론이 나타납니다.
십자가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백날천날 십자가를 묘사하더라도 십자가의 내용은 비워진 상태입니다. 십자가를 헛되게 만들면서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십자가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깨닫고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합니다.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유지되면 마음은 하늘에서 영생을 살고 몸은 이 땅에서 아버지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게 됩니다. 이렇게 영생과 인생이 실제로 이루어지면 그것을 기반으로 생각과 말과 이론의 체계가 만들어집니다.
정리해봅니다. “십자가의 도”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 속에 준비된 구원과 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과 은혜 안에서 살게 되는 영생과 인생을 기반으로 이론이 만들어집니다. 그 대표적인 예들이 사도 바울의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를 비롯한 서신들입니다.
오늘 본문으로부터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점은 십자가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과 판단과 의견을 지혜라 부르며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려고 하고 공감시키려고 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자기관철의 의지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끄러운 세상에 대해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전부 조용히 해라!”라고 말씀하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닫고, 입을 닫고, 조용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 현장에 뛰어들어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 세상에 대한 나의 죽음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지 못하면 나의 생각은 “말의 지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주권은 부인됩니다. 그곳에는 반드시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18절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멸망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의 원문을 보면 현재분사형입니다. 멸망중에 있고 최종적으로 멸망을 향하여 가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해를 갖고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총명함과 지혜로움에 비추어 볼 때, 십자가를 미련하게 여기는 이유는 십자가는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생각과 판단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죽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자기 의견 갖기를 좋아하고 이해하기를 좋아하며 무엇인가를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처럼 미련한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생각하는 사람에게 생각을 죽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견해를 가지는 사람에게 견해를 죽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사건 바깥에서 십자가를 생각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말고 오직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를 요구합니다.
한편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부활 승천 우편에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은 하나의 진리의 길이고 통로입니다. 이 통로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의식과 마음이 천국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입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살아있는 동안에 의식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말을 통해서 이 시간에 지금의 사건으로 재현되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뛰어들면 그 십자가가 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십자가라는 문으로 들어가고 나면 부활 승천 우편까지 이르는 길을 통해서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 소망하는 영생의 삶이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잇는 통로의 입구입니다. 이 입구를 다 지나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대해 말을 하는 사람조차도 입구를 지나칩니다. 십자가 바깥에서 십자가를 묘사하느라고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학자들이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었는가 아닌가는 좀 더 면밀히 검토를 해봐야 할 것입니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신학자들이 다 그렇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백날 들어도 바깥에서 십자가를 묘사하는 것으로 듣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십자가에 대한 개인의 의견이나 이해나 혹은 해석으로만 들으시고 공감하며 박수를 치며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것은 구원과 은혜에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 듣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십자가 사건을 현장이 되게 해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통하여 지금의 사건이 되는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말은 일상생활의 현장 속에서 기억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십자가 사건 현장 속에서 머물러 있어야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을 향하여 살게 되며 영생과 인생이 가능해집니다.
“말의 지혜”와 “십자가의 도”는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차이를 통해서 분쟁의 근본 원인을 우리 앞에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 사건을 삶의 현장에서 재현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통해서 재현되는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 수 없다면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십자가 속으로 뛰어들 수 있으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지혜와 총명은 죽고 하나님의 주권은 살아나게 됩니다. 뛰어들지 않았기에 십자가를 묘사하고 있는 중에도 우리의 주체성이 살아서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전하는 말과 기억을 통하여 지금 사건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서 십자가에 달린 주님과 나를 겹치고, 주님과 떨어지지 않는 의식을 유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십자가 사건 속에 준비된 진짜 구원과 은혜가 일상 속에서 내 것이 되어 나타나고 열매가 보일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말의 지혜”로는 십자가를 받지도 말고 전하지도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십자가의 도”로 전해지는 말을 통해 재현되는 십자가 사건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서 머문 채로 우리의 일상이 진행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